2012년 이종룡씨의 일과표 항상 알바. 하루에 수면시간은 3시간정도
식사도 거른적이 많다. 시간은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알바왕
일요신문] 하루 20시간 일하고 400㎞를 이동하며 3억 5000만 원의 빚을 갚은 ‘알바왕’ 이종룡 씨가 사망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최근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씨가 대장암으로 별세했다는 미확인 이야기가 떠돌면서 그의 사망 여부가 큰 관심을 모았다. 지난 2009년 이 씨의 경험을 담은 책 <3억 5000만 원의 전쟁>을 펴낸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 7일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인세 때문에 이종룡 씨와 연락을 취하다 그의 아들로부터 사망소식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우리도 충격이었다”라고 말했다. 하루 2시간여의 쪽잠을 자면서 수억 원의 빚을 모두 갚아 사회에 귀감이 되었던 이 씨의 갑작스런 죽음의 뒤안길을 따라가 봤다.
이종룡 씨의 사연은 지난 2008년 MBC <시사매거진 2580>을 통해 소개가 됐고 그 이후 2010년 OBS <전설의 시대>, 2011년 SBS <궁금한 이야기 Y>, 2012년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에 잇따라 출연하며 그 사연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2012년 5월 KBS1 <강연 100℃>에 출연한 이후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다. 자연스레 이 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으나 최근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하던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 씨가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진위 여부를 놓고 네티즌들은 갑론을박을 벌여왔고, <일요신문>에 의해 그 소문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요신문>은 이 씨가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아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신분공개를 꺼린 아들은 출판사 관계자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만 전했을 뿐 정확한 사망시기와 경위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고 한다. 또한 취재진은 과거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러 곳들도 수소문했으나 2012년 이후 그를 본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 씨를 학원차량 운전사로 고용했던 한 태권도장 관계자는 “사망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2012년 그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씨는 1960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전주시 효자동에 위치한 시계도매점의 사장이었다. 잘나갈 땐 월 매출이 3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활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하나둘씩 끊겼고 곧이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게다가 막연한 기대감에 빨리 사업을 접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빚은 결국 3억 5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결국 이 씨는 부도를 내고 말았고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를 택했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주소지가 불투명한 상태라 기소중지가 되기도 했고 군산검문소에 걸려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끝내 구속위기에 처한 이 씨는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마지막으로 작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0만 원을 겨우 받아 합의를 보고 위기를 넘겼다.
이후 이 씨는 돈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떡 배달, 학원차량 운전, 목욕탕 청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 씨는 2009년 대우자동차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이 씨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좋은 생각> 같은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휴지를 줍는 부지런함도 보였다. 이렇게 그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총 20시간으로 이동하는 거리만도 약 400㎞에 달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도 생겼다. 한 달을 기준으로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만~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80만 원, 떡 배달 150만~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450만 원 정도 생겼고 350만 원을 뚝 떼어내 10년 동안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거의 모든 돈을 쏟아 부은 셈인데 2008년 10월 마침내 그는 빚을 모두 청산했다. 하지만 이 씨는 빚을 갚고도 돈을 쉽게 생각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고 2009년 이러한 사연을 담아 <3억 5000만 원의 전쟁>을 출판하고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씨에게도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었던 것.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자가 제대로 된 직업 갖기는 어려웠다. 그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할 뿐이었다.
그는 새벽에 신문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 벌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그의 나쁜 버릇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바로 음주와 도박이었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들어간 그는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했다.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간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깨달은 그는 펜치를 가져와 송곳니 두 개를 뽑으며 열심히 살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달 용돈도 2만 원 남짓이었다. 하루로 계산하면 약 700원꼴이다. 이렇게 이 씨는 잡생각 없이 혹독하게 일만 했다. 그렇게 ‘알바왕’ 이종룡 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되찾은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빚을 다 갚던 날 이 씨는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전셋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지만 고된 아르바이트의 후유증으로 그 작은 소망마저 이루지 못한 채 결국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강기준 인턴기자
1960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전주시 효자동에 위치한 시계도매점의 사장이었다. 잘나갈 땐 월 매출이 3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활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하나둘씩 끊겼고 곧이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게다가 막연한 기대감에 빨리 사업을 접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빚은 결국 3억 5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결국 이 씨는
부도를 내고 말았고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를 택했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주소지가 불투명한 상태라 기소중지가 되기도 했고 군산검문소에 걸려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끝내 구속위기에 처한 이 씨는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마지막으로 작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0만 원을 겨우 받아 합의를 보고 위기를 넘겼다.
그 후 실의에 빠져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심기일전, 마음을 다잡고 7개의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찜질방 청소, 떡 배달, 신문 배달, 학원차량 운영, 폐지 줍기 등 근면과 성실, 시간 엄수를 무기 삼아 하루 24시간 중 2시간을 잠 자고 22시간 노동을 했다.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만 ~ 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 ~ 80만 원, 떡 배달 150만 ~ 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450만 원 정도 생겼고, 그 중 350만 원을 뚝 떼어내 10년 동안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결국 2008년 10월 29일 마침내 10년에 걸쳐 빚 3억 5천만 원을 모두 갚았다. 그후에도 "내 몸이 편안하면 다시 옛날에 방탕했던 모습이 나올까봐 일을 포기를 못하겠어요"라면서 7개의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며 연 50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2009년에는
3억 5천만원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그러던 2014년 2월 대장암으로 별세하셨다.
그에게 항상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알바왕.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었지만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자가 제대로 된 직업 갖기는 어려웠고, 그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으며,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했다고 했다.
그는 새벽에 신문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 벌었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다시 음주와 도박이에 빠졌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가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하고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깨닫고 펜치를 가져와 송곳니 두 개를 뽑으며 열심히 살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알바왕 이종룡 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첫댓글 노오오오오오력의 최후냐?
와 어떻게 2시간만 자고 살수잇냐..저런 정신력은 진짜 인정해줘야되는데
저렇게 살앗는데 암걸리지않는게 이상하지.. 그나저나 몇억씩 빚지거 갚으려면 저렇게 해야되는군.. 연예인들이야 빚 몇억있어도 좀노력하면 금방갚는데 일반인들은 저아재처럼 목숨과바꿔서 일해야 갚거나 저렇게 못하면 자살밖에 답없지
훌리들은 이종용모드로 공부하도록
저렇게 일해서 암걸린걸까?
미핑이 설명해놧네
아들 저 아재 생각할때마다 진짜 가슴 찢어지겠네..
선진국에서는 저런 사람을 자기 몸도 안챙기고 가정에도 소홀히 하는 addicted worker or crazy man이라고 부르겠지
헬조센에서는 노오오오력의 영웅이라며 칭송하고 꼰대들이 저런 마음가짐을 따라하라고 지랄함
벤치로 본인어금니를 빼버렸대잖냐
열심히 산게아니라
정신병 수준이다 저건
개인회생 없었냐 저시절은..
개인회생이나 파산 이런거 잘아냐 ? 개인회생이나 파산 법원에서 받아주면 빚 몇억이 잇어도 안갚아도되는거 ??
@꾸리꾸리동동 대충이런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