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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전각가 박문환
가을이 저물 무렵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정신 번쩍들게 닭살이 돋을 정도의 신선한 차가움으로 약간은 섬뜩한 날 오후, 신문속에 펼쳐진 세상도 그렇고, 내 주위의 여러 가지 일들도 뭔가 정리없이 질질 끌고 있어서인지 답답하던 차에 찾아온 추위가 얼얼하니 그런대로 기분좋다는 생각을 하며 경일고등학교를 찾아가고 있었다. 교정에는 은행나무들이 연신 노란잎을 떨구어내며 서둘러 자신들의 모습을 그렇게 정리해가고 있었다. 마치 남은 달력이 달랑 한 장뿐이라는 걸 아는듯이.
*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찾아가는 이는 서예 전각가 박문환 씨(55). 개인전 도록에서 본 꾹다문 입술, 표정없는 얼굴에 딱딱함이 느껴지는 그의 첫인상에서 특유의 ROTC다움이 엿보였다고나 할까, (그는 ROTC 4기다) 도록에 적혀있는 몇가지 정보를 가지고 그를 만났다. 녹색 테이블천 위에 번진 먹물이며 벽에 걸어놓은 작품들… 서예실에 자리를 잡자 대뜸 그는 "내가 뭐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저것 쑤시고 다니니 잡술인이지요."하며 안동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의 한사람으로 찾아왔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는지 첫마디를 겸연쩍은 듯 그렇게 던져 놓는다. "뭐 그리 많이 하셨습니까?"하고 되물어 본 것으로 중,고등학교 때는 당구를 비롯해 주로 노는 분야에 빠져 있었고, 남한의 높은 산은 안 가본데가 없을 정도로 등산을 좋아하고, 바둑두는 것을 좋아해 스물 여섯 일곱해 되던 해에 기원을 차렸던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바둑 실력은 '아마 4단'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상당한 수준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그는 경북 영천이 고향으로, 함양 박씨 집안의 7남매의 장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조부 곁에서 글을 배웠던 적이 있었다. "듣기로는 할아버님께서 제가 서너살 되면서부터 천자문을 가르쳤다고 해요. 그런데 잡혀서 하니까 잘 되지도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수업시간에 조금 써 본 것 빼고는 아예 안했지요." 어렸을 때에 잠시 조부 옆에서 글씨를 배웠고, 그랬던 만큼 진로를 결정할 때쯤에는 그에게 거는 집안의 기대가 상당히 컸었던 모양이다.
"원래는 혼자 생각하고 글쓰는 걸 좋아해 국문학과 쪽으로 가고 싶기도 했었는데 집안에서는 장남인데다 장손이니 판검사나, 장관 같이 큰사람 되야 한다고 밀어부치니까 어쩔 수가 없었지요." 결국 그는 영남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 한때 정치를 한번 해볼까도 생각했었다는 그는 요즘 정치판을 보면 안하길 잘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웃음으로 대신한다. 이렇게 한번씩 웃어 보일때는 딱딱한 군인에서 영락없는 민간인(?)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이라면 더 적합할까?
비록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학교 선생님에 머물렀지만 돌아보면, 안동에서의 교사생활이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서예라는 분야를 시작하고 파고들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앞에서 얘기했던 등산이나 바둑은 물론이고, 주역연구와 음양지리학회, 박약회, 성균관 유도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안동교도소에 일주일에 한번씩 교화위원으로 10년째 다니면서 서예를 가르치기도 하고, 강의도 하면서 보낸다. 그래서 교육부와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서예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수원에서 기원을 하다가 그즈음에 아래층에 양장점 아가씨에게 연애를 걸어 70년도에 부인 이영(50)씨를 아내로 맞았다. 사업을 하는 것과는 별 인연이 없었는지, 고향 영천으로 내려와 집안 농사를 몇 년 거들기도 했다. 그러다 76년 교련과목 교사자격증을 따서 경일고등학교로 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안동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두해 쯤 지나면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선비의 고장인 안동에 와서 이거 바둑만 두고 놀 수는 없겠다 싶어서 시작하게 된 거지요. 열심히 했으면 좀 됐을낀데 기질이 등산하고, 바둑두고, 뭐 이러니, 놀고 난 다음에 하는 글씨가 되니까 제대로 되지를 않했지요. 순전히 취미활동으로 한 거지요." 그러다 석계 김태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수업을 했다. 그가 석계선생을 찾았을 때는 현재 안동의 내노라하는 젊은 서예가 장종규, 서명중, 배성준 등이 미리 와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시작이 좀 늦었던 셈이다.
이렇게 5년 정도 글씨를 썼을 즈음인 83년 처음으로 출품한 경상북도 미술대전에서 입상을 하고 84년 경상북도 교직원 서예실기대회에서 2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1등인 금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3회 입선을 하였으며 여러번의 전시회에 초대되었고, 경상북도 서예대전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너무 일찍 상을 받으니까 자만심이 생기드라고요. 내가 일등인거 보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너무 일찍 받은 게 그게 문제였지요. 그 이후론 별로 발전이 없는 것 같더군요."
* 천자문 전각에 들인 열정
이런 때 그에게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전각(篆刻)이다. 그는 첫개인전을 지난달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시민회관 전시실에서 가졌다. 한문, 한글 서체 등 병풍 2점까지 모두 33점을 선보이면서 20년 그의 서예인생을 나름대로 중간정리를 한 셈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천자문 전각 8폭 병풍'이 돋보였다. 2백년 전 8백66자의 적벽부 전각이 있은 이후, 천자를 전각한 경우는 천자문이 생긴 이래로 유래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 천자문 전각을 작업하는데만 2년이란 시간을 돌과 씨름하며 보냈다. 학교 근무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학교 서예실이나 집에서 주로 작업을 하는데 매달렸다. 그의 천자문 전각은 4자씩 새긴 것과 8자씩 새긴 것을 합해 2백40과이다. 모두 25체를 포함시켰고 종, 닭, 물고기, 부채 등 사물을 본 뜬 것을 20여개 포함시켰다. 돌 하나하나마다 4자씩, 혹은 8자씩, 들어앉아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글자들과 그림들. 하나하나의 획들마다 그의 손이 갔을 것을 생각하면 그가 천자나 되는 전각을 완성하는데 들인 정성이 수월치 않았음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의 개인전을 다녀온 서예가 장종규는 그의 천자문 전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천자문 전각 240과를 새길려면 웬만히 힘든 것이 아니었을텐데 우선은 그것에 놀랐습니다. 각만 하는 분도 아니고 그거 하실려면 참 고생하셨겠구나 했지요. 각을 하는데 있어서도 과두문이나 사물의 모양을 본 딴 여러 가지 다양한 각을 볼 수 있었지요."
집에 보관해 두었다는 이 천자문 전각 병풍을 보기 위해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안막현대아파트로 갔다. 부인 이영 씨는 류마티스로 20여년을 앓고 있는 터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고생이 많아 보였다. 남편이 하는 일에 제대로 내조를 못한다고 미안해하자, 남편 박문환 씨는 오히려 전시 준비 때문에 몸이 아픈데도 집안 일도 하나 거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부부의 두터운 정을 보여주었다.
* 붓 가는 듯, 칼 가는 듯
앞서 그를 서예 전각가라고 소개한 것은 그의 요구도 있었지만 전각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과 애착 때문이다. 그는 《안동문화》4집에 <篆刻의 理解>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도장을 새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서예활동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붓으로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것처럼 칼을 가지고 돌이나 나무에 조각하는 전각은 전체(篆體)를 구사하여 새기는 것으로 예술적 감상의 대상물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서예는 물론 전서(篆書)에 능숙한 대가들이 전각을 주로 한다.
전각은 우선 쓰고자 하는 전서의 자형을 자전에서 찾는 자법(字法), 적절히 잘 배치시키는 장법(章法)과 활법(刀法)이라하여 칼로 새기는, 크게 말하면 이 3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가진 힘이 있는 완각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이 새기고 정정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전각은 손과 마음과 칼이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칼 쓰는 것을 붓쓰는 것처럼, 칼이 가는지 붓이 가는지 모르는 상태의 기분으로 이어져야만 좋은 각이 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새겼다가 다시 정정하고 다시 갈고 하는 작업을 수없이 계속해야 합니다."
학교 서예실에서 본 작업을 하다 도중에 그만둔 반쪽 전각이 언뜻 떠올랐다. 그는 작업중에 몸살이 나서 도저히 계속할 수 없어 그만둔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힘드는 작업이며, 교사라는 직업으로 돌 구입하는 것까지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그는 전각의 매력에 흠뻑 취해있다. "진짜 예술중의 예술이지요. 방촌(方寸)의 공간이라고 해서 하늘과 땅 우주를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모든 것을 축소해서 담는 것이지요. 그것도 거꾸로 담아야 바로 나오니 아주 재밌지요."
* 아직은 외로운 작업
그가 전각을 하게 된지는 10년 전 쯤이다. 사방 한치안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능력을 최대한 쏟아부어야한다는 전각. "처음에는 책보고 혼자 독학하다가 이래가지고는 안된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구 예술대학의 백영일 교수를 무작정 찾아가서 배웠지요."
그가 전각을 하는데는 사곡 이숭호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1900년대 오창석의 전각을 좋아한다. 구애됨이 없이 얌전하면서도 글자 한자가 천근쯤 되는 무게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각을 그대로 연습하는 모각(模刻)을 많이 하기도 한다. 전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모각은 눈을 치밀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글씨야 솜씨고, 표구는 치장이고, 그리고 전각은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얼굴을 얼마나 생명력 있게 예술성 있게 만드는 가는 중요하지요. 함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2년 전에 한국전각학회 회원이 되었다. 1백여명 정도 회원으로 있는 한국전각학회는 심사가 까다롭다. 우선은 서력이나 경력, 그리고 전각의 상황, 이사들의 추천 등이 필요하다.
안동에서 전각을 작품화 하여 내놓은 건 그가 처음이다. 또 전각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전각에 대해 배우고 작품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쉽다고 한다. 배운다는 사람이 있으면 흔쾌해 가르쳐 줄 생각도 갖고 있었다. "전각은 인장과는 다른 것이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지요. 서예의 일부분으로 1과 1과마다 무궁무진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뭘 배우러 오면 가르쳐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전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천자문 전각을 해놓은 전각 1과를 들어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렇게 거꾸로 모여있다가도 인주를 묻혀 하얀 화선지 위에 찍어내면 바로된 세상이 나타난다. 언제나 거꾸로 세상을 만들어 가지만 언제나 머릿속에 바로된 세상을 그려야하는 작업이 바로 전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거꾸로 된 세상만들기에 여념이 없지만 돌에 한획 한획 새겨넣을 때마다 바로된 세상 하나하나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칼끝으로 보여주는 전각은 강건하다.
그는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금강경' 5천 175자를 전각하고 싶은 것이다. 천자문 전각과는 또 비교할 수 없는 더 오랜 세월, 더 오랜 인고의 과정이 필요한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일텐데 10여년쯤 걸리지 않겠느냐며 금강경 전각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보인다. 힘든 인고의 과정이 지나고, 완성된 전각을 하얀 화선지위에 찍어 낼 때의 예술가로서의 성취감이 그를 잡고 있는 한, 10년 뒤 그만큼의 세월의 무게가 보태어진 5 ,175자 금강경 전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임 종 교(편집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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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 감사 합니다.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정말 노력과 열정이 필요한거 같아요
아이구 서너살때부터 ....
떨지그리 하나! 조선시대 세월 잘 타고 났으면 장원급제 감이다..... 6.25와 4.19, 5.16,통에 공부 못했다 와...
백연재 선생님 대단하세요~ 안동에 가면 곡 한번 뵙고 싶어요 전각도 보고싶구요^^ 그리 할 수 있을런지요~선생님을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저는 손가락에 힘이 없으니 해 보는 건 안되겠지요~~~
전각작품 31. 32번에서 감상 하실 수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