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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別 對談]
낙동강문학 제9호 ‘사랑문학’ 특집기념 초청대담
二吾 이현주 목사님: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본명은 이현주, 아호는 二吾, 觀玉이다. 목사, 동화 작가, 번역 문학가이기도 한 선생님은 동서양의 정신문화를 아우르는 글들을 집필하는 한편, 대학과 교회 등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날개 달린 아저씨> <조아조아 할아버지> <살구꽃 이야기> 등의 동화집과, <대학 중용 읽기> <길에서 주운 생각들>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이아무개 목사의 로마서 읽기> <이아무개의 마음공부> <예수의 죽음> <그러므로, 저는 당신입니다> 등의 책을 썼으며,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노자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데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일시: 2010년 8월 10일
장소: 충청북도 충주시 소재 카페 ‘오후의 산책’
대담자 : 김연창, 정을숙, 양은영, 양복이
대담록 정리: 양복이 낙동강문학 편집위원
이현주 목사님
살인적인 삼복의 수은주가 연일 삼 십도를 훨씬 웃도는 폭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강과 바다로 무더위의 기승에 압도된 피서객들이 남하 하고 있던 휴가철 행렬과는 역주행 하듯, 충주로 이현주 목사님과의 만남을 위해 길을 나선 일행은 차안의 에어컨에 의지하며, 창밖의 펼쳐진 풍경화가 일품인 국도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로 약속장소인 충주터미널까지 사십 여분이 걸린다는 엄정면에서 일행보다 일찍 도착한 이현주 목사님과의 첫 대면은 예전부터 많이 뵈어왔었던 그 이웃집 할아버지의 정겹도록 환한 미소, 바로 그 미소로 시작되었다
충주의 이름난 추어탕집이라며 이열치열의 참 맛을 느끼게 해 주신 목사님의 융숭한 식사대접을 받고 조용한 찻집을 향해 일행은 다시 이동을 하였다
유란불이무인식기향 (幽蘭不以無人息其香)-그윽한 곳에 피는 난초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그 향기를 멈추지 않는다. 라는 공자님 어록 중에 있는 말씀을 손수 쓰신 글로 책갈피를 만들어 ‘바가바드기타’ 라는 근래에 출판하신 책과 함께 선물로 받고서 흐뭇함을 안은 채 대담을 시작되었다.
낙동강문학 9호 사랑문학특집 편 발간을 기념하여 동서양문화 전반에
관하여 석학으로 추앙받으시는 이현주 목사님을 모시고 여러가지 말씀을 청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현주 목사님의 간단한 약력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이현주 목사님께서는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셨고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서로 “지금도 쓸쓸하냐, 대학 중용 읽기,
길에서 주운 생각들, 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이 아무개 목사의 로마서 읽기, 이 아무개의 마음공부, 예수의 죽음, 그러므로 저는 당신입니다“ 이 외에 다수가 있으며 동화집으로“날개 달린 아저씨, 조아 조아 할아버지, 살구꽃 이야기”등이 출간되어
국내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위치를 꾸준히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이 목사님께서는 저술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며, 많은 대학과
교회에서 강의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평소에 온유한 성정과 더불어
기독교는 물론 불교, 유교 등 동서철학과 사상에 깊은 조예가 있으신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부싯돌 쳐서 불을 내는데
한 번 번쩍하면 그만이요
푸른 못 깊이를 알 수 없지만
파란 하늘 곧장 드러내도다.」
「일천 자 낚시 줄을 곧게 드리워
물결하나 일어나니 만 물결이 따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매
텅 빈 배에 밝은 달 싣고 돌아오누나.」
(이 아무개목사의 금강경 읽기 中)
낙동강문학: 금강경에 있는 이 시가 참 좋습니다.
이 시에 대해 이현주 목사님께 시 해설을 부탁드려봅니다
이현주: 이것은 제가 쓴 게 아니고 금강경, 선시의 한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낙동강문학: 네, 맞습니다. 이 시를 굳이 해석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현주: 아! 그것 참. 대게 이런 내용의 선시는 이거다, 라고 깨닫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한다는 것 그 자체가 안 되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 한 것인데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은 더 어렵죠.
낙동강문학 :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은 결론을 내고 보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봤을 때 위의 ‘부싯돌 쳐서 불을 내는데 한 번 번쩍하면 그만이요’ 는 진리는 하나다, 변치 않는다, 라고 해석을 해 보았고 밑의 구절 같은 경우에는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라고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현주: 네 좋습니다. 그래서 선시가 좋은 거죠, 이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한 다는 그 자체가 잘못 된 것 같고, 읽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낙동강문학: 이 책을 읽으면서 진리는 하나며 모든 것이 평등하다. 평등의 의미, 즉 생명의 존귀를 이어주며 살아있는 것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라고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현주: 네 좋습니다.
낙동강문학: 이현주 목사님의 삶에 있어 롤 모델이나 정신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친 감명 깊은 책이 있다면 무슨 책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낙동강문학: 목사님이시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당연하게 받아 드리셨을 것이니 그 외의 부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이현주: 그 분을 빼 놓고 얘기한다면 최근에 만나 뵈었던, 아무래도 지금 생각난 분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분을 마음으로 존경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존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의 호가 ‘무이당’ 이거든요. ‘무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귀’, 즉 마음을 먼저 내서 그 마음을 실천하라, 그 말씀은 그분 생애에서 사회활동이나 정치생활 등 파란만장한 삶의 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많은 자격들을 세우고 실천을 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보통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슬슬 닳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을 내새워서 관찰하지 않았나 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래서 저도 닮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이 늘 말씀하시기를 ‘선안 무이도’ 라고 하는 사고방침이다 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대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다 ‘무이도’ 하고 선하죠. 그 분이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고 말년에 보여주신 것도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사실은 다하는, 그런 삶을 사셨는데 그런 것을 닮고 싶었습니다.
낙동강문학: 성경 말고 다른 책이 있다면 어느 것입니까?
이현주: 성경 말고 얘기를 한다면 노자의 ‘도덕경’입니다
낙동강문학: 원래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인으로 살아 오셨습니까?
이현주: 네. 세 살 때부터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낙동강문학: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크리스찬으로 살아오셨는데 저서나 강연하신내용을 보면 불교나 유교의 이념을 상당부분 접목하신 걸 보았습니다. 종교의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포괄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현주: 그건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저를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 중에서 그런 세계도 있다, 라고 하셔서 읽어보니까 재미가 있고 이해도 가고 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과 충돌이 아닌 보안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었던 것이죠.
낙동강문학 : ‘즉문즉설’을 내신 법륜스님께서 ‘이 아무개의 금강읽기’머리말을 적어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토회를 담당하시는 스님으로 알고 있는데 상당한 교감이 있으신 분인가요?
이현주: 네, 개인적으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어 그때 부탁을 드렸더니 적어 주셨습니다.
낙동강문학 : 무교인 사람은 기독교와 불교의 소통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현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같은 기독교사계 안에 있다하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 말씀을 잘 못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낙동강문학: 저희들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굉장히 종교적인 선을 많이 긋는데 오늘 목사님을 뵙기 위해 사실은 저서나 강연내용을 많이 보고 왔습니다. 거기서 색다른 면을 많이 발견했고 목사님의 저서인 ‘지금도 쓸쓸하냐’ 라는 그 책을 정말 그렇게 쓸 수 있었던 분이었구나, 라고 하는 새로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낙동강문학: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에 대해 이현주 목사님의 해설을 듣고 싶습니다.
이현주: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같은 말씀이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님의 나를 통할 때의 ‘나’ 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는 내용이 같다고 봅니다.
낙동강문학: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나를 통하지 않고, 즉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현주: 그것은 제가 볼 때는 ‘나’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으로 해석 하지 못하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나를 二吾, 즉, 둘의 나, 내가 둘이라는 것이죠.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존재가 그래요. 그래서 眞나, 假나 라 하는데 내가 둘이죠, 진짜 나는 보이질 않습니다. 내가 중학생일 때도 나이고 지금도 나, 죽을 때도 나입니다 그런 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는 것은 한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둘의 나입니다. 안 보이는 나, 시작이 없어요.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없고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 할 때도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 다 무시 하는 것처럼 얘기들 하는데 그건 정말 소아(小,我), 눈에 보이는, 만져지는, 이를테면 나라고 착각 할 때, 영어로 ‘에고’라고 하죠? 부처님은 자기 밖에 없다고 한다, 라고 실제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 믿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라고 얘기들 하죠, 제가 볼 때는 오해고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라고 할 때도 다 ‘나’예요, ‘나’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런 걸 얘기 하신 겁니다. 예수님도 ‘나’를 통하라 할 때의 ‘나’, 성경에서도 그래요, ‘내가 아브라함’일 때가 있다. 그럼 ‘나’ 있어요. 예수가 한 말 이예요 유명한 말입니다. 그건 무엇을 얘기 하겠어요.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거예요, 유대인이니까.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낙동강문학: 이현주 목사님의 아호인 二吾, 즉 두 개의 나는 서로 사랑합니까?
이현주: 당연히 서로 사랑합니다.
낙동강문학: 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는 ‘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현주: 그러지 않고는 존재 할 수가 없죠.
낙동강문학: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거죠?
이현주; 그렇죠. 나에게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죠.
낙동강문학: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남에 대한 존중, 즉 자기 자신을 아끼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 가는 것, 이렇게 해석이 가능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개의 뇌가 있다면 유아기 때에는 뇌 세포가 각각 있는데, 철이 들고 사물을 인지하면서 뇌 세포사이에 촉수가 연결이 되고 발달하듯이 인간사회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한 개의 뇌가 뭐랄까! 뇌세포 하나가 우주인데, 그 우주가 연결되는 것,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현주: 그래서 소위 마음공부하고 수련하며 도 닦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우주와 세상과 분리 됐다고 착각했다가 아! 내가 우주와 통하는 구나, 내가 우주로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마음공부인 거죠.
낙동강문학: 그런 주장이나 사랑, 결국은 사랑인데 모든 관계의 의미는 사랑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현주: 네, 그 단어를 쓸 수 있죠
낙동강문학: 그 다음에는 약간 우스운 질문인데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먹고 쫓겨 난 것에 대해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 하십니까?
이현주: 그것은 고마운 일이죠.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 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낙원을 쫓겨났다는 것이 아니겠죠. 그렇다면 저는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쉽게 얘기 하자면 이래요, 병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이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치과의사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머리는 알 수 있을지 모르나 몸은 몰라요. 아주 많이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 심정을 알아줍니다. 그런 걸 경험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걸 이해 못 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경험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아있는 소중함을 모릅니다. 실낙원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낙원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세상 경험의 바탕이 바로 뇌로 전달이 된다는 것이죠!
낙동강문학: 조금 진전된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신과의 대화’를 읽어보면 히틀러가 자기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빛만 있는데 누구하나 어둠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림자도 만들고 해야 하며 이 사회도 선, 즉 빛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현주: 재미없죠, 재미없는 게 아니라 뭔지를 모르니까 그것이 안타깝죠.
낙동강문학: 아담과 이브를 저도 그런 식으로 한 번 연결을 해 보았습니다
이현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먹지마라 먹으면 죽는다 했는데 아담이 그걸 거역하고 먹었거든요? 이것은 어찌 보면 거역한 거예요. 죽어도 좋으니 먹겠다하고...그럼으로 인해 죽음이라는 것을 정하게 됐다 이거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사랑한다면 먹으려할 때 못 먹게 하던지. 아예 그런 걸 만들지 말던지 그런데 그런 게 아니고 걸어야 할 과정을 만든 게 아닌가! 전 그렇게 설명을 하고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직역은 아니고 힘들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고 인간의 성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라고 봅니다.
낙동강문학: 모양과 색깔만 다르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선악과가 많이 있다고 봅니다.
이현주: 그렇죠, 매일 먹죠.
낙동강문학 : 그런데 그 걸 알면서도 분별한다는 게 보통 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죠
이현주: 그러니까 수련을 하고 종교생활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저절로 되면 뭐 하러 종교를 수행하고 그러겠습니까,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낙동강문학: 이 아무개라는 호는 누구 작명을 해주셨는지요.
이현주: 관옥이라는 호는 장 선생님이 지어 주신 것이고, 이 아무개라는 것은 그때 무슨 소작을 하나 번역했는데 역자 이름을 쓰면서 꼭 넣어야 되나 싶어 장난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낙동강문학: 알려지기에는 장일순 선생님께서 지어 주신 걸로 돼 있던데요.
이현주: 이 아무개가 제 필명처럼 돼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이름이죠.
낙동강문학: 그래도 인터넷에 보면 대명사가 돼 있습니다. 성함 보다는 오히려 그게 더 인지도가 높은 것 같습니다
이현주: 그래서 요즈음은 그렇게 안 쓰고 있습니다.
낙동강문학: 요즈음은 이아무개라는 필명을 안 쓰십니까?
이현주: 어떤 사람은 전화를 해서 자기가 최 아무개라고 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그걸 왜 나에게 묻느냐 했어요. 당신이 쓰고 싶으면 쓰면 되는 거지. 그랬더니 아무개라는 이름을 선생님이 먼저 쓰셔서 묻는 거라 하더군요. 그것이 잘 못 돼 있고 그렇게 오해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안 씁니다.
낙동강문학: 여기서 잠시 이현주 목사님의 시를 한 수를 감상하겠습니다.
묵향
시: 이현주
낭송: 양은영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간다
방안 가득
채우는 은은한
묵향이여
닳아지는 그대의
몸이 상쾌한
아픔이여
낙동강문학: 짧으면서도 의미가 있는 시여서 시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좀 전의 금강경의 시를 읽는 기분입니다. 앞에 말씀 하셨듯이 착한 일을 하더라도 자기가 착한 일을 한다는 마음을 가지지 마라, 그게 달마대사의 ‘무위공덕’과 같은 말이지요?
이현주 : 맞습니다.
낙동강문학; 같은 말인데 표현 방식이 다른 것이지요?
이현주: 그렇죠, 사람이 다 다르듯이 어떻게 다 똑 같은 말을 하겠습니까.
좌측 뒤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연창 시인, 정을숙 시인, 양은영 시인, 양수정 소설가, 이현주 목사, 성군경 시인
낙동강문학: 우리나라에 들어 온 종교인 불교, 기독교, 유교는 우리민족의 기원인 우랄알타이어산맥에서 시작된 토착종교, 샤머니즘과 다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아인슈타인이 40세 이전에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나서 40세 이후 양자학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머지 인생을 허송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셨다 하는데, 다시 말해 통일장이론을 완성을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양자물리학이 상당히 발달해 불교에서 내 놓은 예언들이 과학적으로 많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이 지구상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지 우주 밖에 나오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각변의 피타고라스정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많이 종교를 섭렵하시 걸로 알고 있는데 불교와 양자물리학과의 연관성을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현주: 잘 모릅니다. 물리학 책을 약 십년 전에 본 것 같은데 보면서 참 재미있다,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불교의 부처님 가르침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런 유명한 구절들이 ‘물질이 바로 에너지다’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인데 모든 경지에서 다 봤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일반 대중들은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것을 천년세월이 흐르며 지식이 계속 발달하여 양자물리학이 나오면서 이것이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불교의 높은 가르침이 과학시간을 통해 골치 아픈 명상 같은 것을 안 해도 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낙동강문학: ‘14무기설’에 대해 부처님 견해는 화살 맞은 부위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조금 진전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현주: 모르겠습니다. 저도 부처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낙동강문학: 지금이나 그때나 대답은 같습니까? 우주가 유한하나 무한하나 시간이 유한하나 무한하나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보십니까?
이현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니다보면 부처님의 열반세계, 기독교의 구원세계가 같은 것이니까 뭐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제 대답은 모릅니다 입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이런 게 알고 싶습니다.
낙동강문학: 부처님이 활동하던 시대와 지금의 정신세계의 측면을 따진다면 어떻습니까?
이현주: 그것은 제가 부처님시대를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낙동강문학: 지금은 우리인류의 정신문화가 발달했다고 봅니까?
이현주: 문화면에서 보면 상당히 많이 의식이 진화됐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보면 인간과 인간사이의 많은 장벽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의 남녀차별, 계급차별 또는 노예제도, 인종차별 등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는 것 하나만 봐도 평등하다라는 그 쪽으로 가고 있는 거죠. 그러기에 그 걸 진화라고 봐야죠.
낙동강문학: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민의 정신문화정체성에 관해서 여쭈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한민족 정신문화는 배달국의 홍익인간정신에서 근원되어 시대적 부침에 따라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이 그 당대를 점유해왔습니다. 그 때마다 문화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창조적으로 진화해 왔는데 세계사에 있어 우리 한민족정신문화의 문화적인 고찰, 정의,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현주: 그런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낙동강문학: 역사의 처음을 보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생기기 전에 천부경을 보면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 시작은 있으되 시작은 없고 끝은 있으되 끝은 없고, 하는 팔십 한 자로 돼 있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시원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실증사학에서 인정을 못 받는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그러다 우리나라에 고구려의 소수림왕 때 불교가 들어왔는데 삼국시대에 유일하게 백제가 도교를 받아들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전라도에 있는 백제가 아닌 중국상해 쪽에 서백제가 있었고, 일본 동쪽방향에 동백제가 이었다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는 중간백제라는 것이죠. 그 이유는 신라와 백제는 소백산맥이 있어 산 넘기가 바다 넘기보다 힘이 들어 교류가 힘이 들었고 그 당시에 이용하던 해상을 통해서 삼각주를 연결해 백제가 컸답니다. 그게 서백제로서 불교도 흡수했지만 도교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는데 노자사상이죠. 도교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게 백제고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불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신앙, 우랄알타이어 산맥사이에 있는 샤머니즘과 접합을 했다고 합니다. 불교문화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초기에 거쳐 길어지다 보니 부패해 퇴척당하고 유교가 들어오게 되죠.
조선 초기에 유교학자들의 불교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끊기게 됩니다. 반대로 일본은 불교가 늦게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고승들이 굉장히 많이 연결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잘 아시다시피 평소에는 샤머니즘인 신교를 믿다가 장례식 때는 불교형식으로 합니다. 유교의 요소에다 불교를 가미한 것이 성리학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봤을 때에는 유교든 불교든 우리 한국적인 해석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고, 기독교 역시 이백년 역사를 이루며 들어왔는데 여러 가지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수메르지역의 이집트, 이라크지역의 점토판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로 종파가 갈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점토판을 인정하게 되면 앞선 수메르문명을 인정해야하는데 그걸 수용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교리가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요셉이 수메르지역, 지금의 이라크지역에 살다 이주했다는 말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같은 경우에는 교세가 가장 세고 여러 가지 토착문화의 흡수력이 높지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이 전쟁에 이긴 후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이 인도의 조그만 왕국에서 같은 설화가 있습니다. 여기서 여쭈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정신문화가 불교와 유교의 치우침을 거쳐 기독교의 이백년 역사동안 엄청난 교회와 성당 등이 들어와 있습니다. 한민족의 정신문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정리를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현주: 제가 기독교나 노자에 관한 것 등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접근을 했다면 잘 안됐을 것입니다. 사람 얘기다 보니 어디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숨 쉬는 것만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숨을 다 쉬잖아요. 숨은 국적도 없고 문화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이 숨을 쉰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싶어요. 시대에 따르고 사람들의 의식이 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과학의 발달로 인해 지구가 한 집안이 돼 버려 원하든 원하지 않던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섞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은 다르니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에 많은 종교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됐던 것이죠. 사람들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들 하죠? 지금 그렇지 않다고 하면 매를 맞게 되겠지만 저는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낙동강문학: 그럼 누구의 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현주: 사람의 땅입니다. 일본의 것도 아닌 사람의 어떤 것도 아닌, 사람의 땅입니다. 땅은 사람이 신세지고 사는 것이지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다, 착각이다 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낙동강문학: 중광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현주: 종교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누구나 그렇게 얘기 할 겁니다. 어떻게 사람이 땅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낙동강문학: 중국연변에 가면 한시문협 지부가 있는데 제가 그 곳에 가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들 국적은 중국으로 돼 있지만 국적은 중요하지 않고 한 문자와 한 언어를 쓰므로 만나야하고, 문화의 동질성을 지니고 시나 문학으로 교통을 해야한다 라고 합니다. 이번에 그래서 두만강과 백두산에서 시화전을 했습니다. 한민족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에 속하지만 그 문화를 보존해 주는 게 세계문화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 중국지역에서 최초로 시화전을 시도해 작년에 연변인민공원에서 개최를 했습니다.
이현주: 그렇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언어가 그래요, 그것이 사람을 서로 소통하게 하고 또 다르게 보면 언어가 장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낙동강문학: 언어의 다양성을 얘기하자면 바벨탑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현주: 그렇죠, 뭘 하나로 통한다는 게 근사하게 보이지만 안 그래요. 우리 몸 하나만 보더라도 전부 달라야 합니다. 다른 것들을 인정하지 않은 게 비극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의식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기와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어울려 산다는 것이라 봅니다.
낙동강문학: 좋은 말씀 많이 듣습니다. 이것은 다른 분야인데 한국문화 하고 서양문화 다시 말해 독일 프랑스 영국이 서양문학을 대표로 하는데 그 쪽 문화와 우리문화를 비교해 보신다면 어떻게 보십니까?
이현주: 제가 뭔가를 비교를 한다면 다 경험을 해 봐야한다는 것인데 저는 비교하는 것에는 약합니다. 막연하게 이렇게는 생각합니다. 논리적인 근거는 아니고 우리나라는 참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소유하고 있다 라고 봅니다. 같은 예술을 하더라도 상당히 머리가 많이 작용하는 것보다는 감성이 더 많이 좌우한다고 봅니다. 토론은 안 됩니다. 그러나 토론을 마치고 결론이 나오면 적극적인 협조는 하죠. 제가 볼 때는 서양은 토론이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감성으로 해결이 됩니다.
낙동강문학: 양자물리학으로 서양의 물질주의, 동양의 인본주의와 정신주의와 교통을 가능케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시간여행도 원자 안에 있는 쿼크의 방향을 조절하면 시간여행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시간도 굳이 따지자면 도서관에 있는 책과 같은데 몇 번째 책을 빼면 몇 세기, 그 시기가 된다는 것으로 원래는 그 시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정해져 있다라는 가설이 발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현주: 앞으로 오래 살면 재미있는 세상이 올 것 같습니다.
낙동강문학: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 천년 전의 현인들을 추앙하며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은 왜 그런 분들이 그 나오지 않으며 그 시기에서만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바빌로니아문명에서 수학적인 공식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리스에 피타고라스가 정리해서 발표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당시의 찬란한 문화와 선도자가 되셨는데 원래부터 어떤 배움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수준 높은 의식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이라는 거죠. 그 시기에는 지금보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이현주: 그 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다 못했기 때문이고 그 분들을 능가할 분들이 없음입니다. 이천년의 세월이 우리가 생각하기엔 까마득하게 생각하지만 고고학계에서 볼 때는 동시대로 봐요. 그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그분들의 수준에 도달을 못했어요. 사학년 정도의 의식수준인데 육학년 수준의 스승을 원한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제 그 분들 수준으로 가는 것이 인류가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가가는 시기가 오리라 봅니다. 그 것에 가장 가까운 공과 부를 촉진 시키는 것의 하나가 양자물리학과 컴퓨터로, 인간의 의식이 대중적인 모습으로 진전되리라 봅니다.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과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 갈 것이라 봅니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저는 그렇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낙동강문학: 예수님이나 석가모니께서는 같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원래부터 그렇게 의식이 올라갔는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태어났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이현주: 바가바드기타에 보면 그 분들이 왜 오는지에 대해 힌두교에서 설명한 게 있습니다. 때가 돼서 나타났고 또 때가 되면 나타난다고 얘기 하고 있습니다.
낙동강문학: 힌두교는 다신교이지 않습니까? 인도의 선시인 베다를 인정하는 종교가 힌두교라 알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열 몇 살 때 유대인 교회 앞에서 목판을 뒤집고 사라지시다 스물여덟쯤에 나타나셨다 하는데 그 중간에는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습니다.
이현주: 그것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에 의한 것 밖에 없습니다. 사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자취를 기재 놓은 것 외에는 자료가 없기에 저는 다른 것은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고,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내가 받아들여서 살아가기 위해 볼 내용을 가지고 있느냐 가 중요합니다.
낙동강문학: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종교를 접하다보니까 시대별로 보면, 우리나라 국민성이 쏠림이 강해 불교에 몰입하다가 지금은 기독교로 몰리고 있는 추세인데 그 원심은 진리는 하나다 라는 것이라 봅니다. 결국 진리대로 사는 형식이라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초가집에서 살다 지금은 양식의 집에서 살고 있으나 ‘착하게 사는 것은 똑 같다’ 이렇게 해석이 가능 할까요?
이현주: 네, 똑 같습니다
낙동강문학: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후 이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목사님께서는 그 시대와 지금을 동시대로 본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인간시대로 봐서는 굉장히 길다 라고 보는데 과연 맞는 것인지요? 그리고 지금 사대강을 살린다며 장로님인 분이 시행을 강요하고 있는데 그 가르침도 성경에 있는 지요?
이현주: 옛날에는 공해라는 것이 없었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 가르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이 잘 못 인식을 해서 저지른 과오입니다.
낙동강문학: 21세기 세계문학의 방향이 어떻게 갔으면 하고 생각하시는지요?
이현주: 저는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분을 존경도 하고 그러는데 저는 관심이 없고, 제가 관심을 두는 분야는 내가 세상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세상에 태어났고 죽는 날까지 살아가야 하기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남을 해치지 않고, 나도 해치지 않으며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느냐 그런 분야입니다. 노자, 공자, 바가바드기타, 이런 책을 읽는 이유도 그런 것에 대한 답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낙동강문학: 결국 이렇게 많은 저서를 남기셨는데 결국은 문학적인 관심보다는 전하고 싶은 진리 등을 말하는 방법으로 택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이현주: 네 그렇습니다. 저는 어쩌다 동화도 쓰고 해서 문학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작가라는 의식이나 라벨을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붙이라하면 저는 앞에 아무 수식어가 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굳이 붙이라고 강요한다면 목사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낙동강문학: 문학이나 예술을 하는 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이현주: 문학이나 예술, 정치든 다 같다고 보는데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수신을 본으로 삼아라 하셨습니다. 본이라 하는 것은 거기서 나와 거기로 간다는 것으로 수신에서 출발해 종점은 평천하가 아니라 수신입니다. 그러기에 뭘 하든지 수신에서부터 하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 되기이죠.
낙동강문학: 그것이 낙동강문학의 지침으로 청백리문학입니다. 항상 근본에 충실 하는 사람이 되자 입니다.
이현주: 누가 나에게 너 시를 왜 쓰느냐하면 사람 구실 좀 하려고 한다 합니다. 유명해 지려거나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가 볼 때는 진정한 예술을 하는 방법은 사람 구실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 노인 누구 라 할 것 없이 사람이라 하면 모두가 다 포함이 됩니다.
낙동강문학: 이목사님 저서에 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금도 쓸쓸하냐를 감명 깊게 읽어서 남은 부분이 많은데 거기에 보면 쓸쓸함이 찾아오거든 손님처럼 정중하게 대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보통사람은 그게 쉬우면서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지금도 쓸쓸하냐 라고 하신 것이 지금 쓸쓸하냐 라는 것도 아니기에 인간은 원래 태어 날 때부터 쓸쓸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정하셨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도라는 조사 하나가 많은 뜻이 숨겨져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현주: 한 때 제가 쓸쓸하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쓸쓸함이 지금도 남아있느냐라는 것인데 저것은 누군가와의 대화 하는 식인데 二吾로 하나는 짧은 세월을 사는 ‘나’고 또 하나는 시월을 알 수 없는 ‘나’의 대화로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생각은 어려서부터 누가 넣어준 생각이 구십 프로 이상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선생님이 어떻게 살라라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낙동강문학; 음악하시는 김도향 씨가 이 책을 바이블로 여기고 있다라고 한 책입니다. 오늘 시간을 잠깐 정리하자면 二吾를 알았다는 것이 큰 득이라 봅니다. 二吾는 결국 사랑자체입니다. 이번 낙동강문학9호는 사랑문학특집인데 포괄적인 본질을 지닌 二吾가 좋은 깨달음의 방식이 되겠습니다. 二吾적인 생각이나 사상 이념이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낙동강문학: 오늘 귀한 시간 고맙습니다. 내려주신 좋은 말씀 길이 간직하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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