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농 만든 효자산업 한과(漢菓) <멋있는 인생> 갈골마을 또순이 전숙자(67)씨 예부터 설날아침이면 우리 선조들은 차례(茶禮)상을 차려놓고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다. 차례는 마을과 고장에 따라 조금씩 특색이 있지만 우리 겨레는 오래전부터 조상숭배사상이 체질화 되 있어,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정성을 들여 상을 차렸고 그중에서 빠지면 안 되는 것이 과일인데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제수로 쓰기위해 곡물과 꿀로 조과(造菓)를 만들고 여기에 과수를 꽂아 썼다’라고 삼국유사 가락국기 수로왕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한과의 기원이다. 삼국시대 들어와서 불교가 융성해져 살생(殺生)을 금지 시 하면서 불교의식과 각종제단에 곡물을 이용한 한과가 제수로 올려졌고 고려조엔 중국으로부터 차(茶)문화가 전해오면서 차와 함께 간식과 후식용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개발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한과는 역시 찹쌀을 삭히고 치고 말려서 기름에 부풀린 다음 조청을 발라 곡물을 입히는 유과(과줄, 강정)이다. 강릉 ‘옛날한과’ 대표 전숙자(67)씨는 21살에 사천면 갈골마을로 시집을 왔다. 사천(沙川)면은 모래땅과 갈대숲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경작지가 별로 없는데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은 가난뿐이어서 먹고사는 일이 막연했다. 멀지 않은 친정에서는 그나마 길쌈으로 연명을 했는데 갈골마을은 잔치용으로 쓰이는 한과(과줄)를 만드는 집이 몇 집 있었다. 그중 마을에서 솜씨가 제일 좋다는 이원섭 할머니댁을 드나들면서 어깨너머 조금씩 배운 솜씨로 한과를 만들어 강릉시장(유과점)에 팔았는데 맛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며 계속 만들어오라고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갈골한과를 직접 만들어 밖으로 내다판 첫 번째 시도였다. 찰벼를 매화꽃처럼 튀겨서 얼개미로 털어놓고, 찹쌀을 삭혀서 떡메로 치고 말리고 모래로 볶아서 일궈놓고, 햇밥을 지어 조청을 고아놓고, 색을 넣어 모래에 틔우고, 조청을 바른 뒤 튀밥을 입혀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에도 정성을 드렸다. 그래서 힘든 만큼 이문(利文)도 괜찮았고 멀리 5일장마다 ?아 다니며 팔아 거래처와 물량이 늘어나면서 가까운 이웃 아주머니들이 동참해서 만들고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한집 두 집 자립을 하면서 마을에 한과집이 모두23곳으로 늘었다. 아들은 특허를 내자고 했지만 동내 인심만 사나워 진다며 극구 만류해서 지금은 동내(洞內)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과마을로 탈바꿈했다. 특히 강릉한과가 유명한 것은 강원도 강냉이로 만든 조청에 있다. 너무 달지도 않으면서 점성이 좋다. 또 경기도 여주 [驪州]정미소에서 좋은 재료만 섬별하고, 반대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반죽에 농도와 찹쌀과 콩가루의 황금비율이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으면서 입에서 스르르 녹는 기분이 소비자의 입맛을 매료시켰다. 호구지책으로 어렵게 시작해서 60~70년대는 설 대목에 벌어 여름나고, 추석대목에 벌어 겨울을 지내던 소규모 가내수공업이 80년대부터 국민경재도 살아나고 5일장 ?아 다니며 팔로를 개척해서 한과 공장의 모양새를 갖추었고 2000년대 들어와서 인터넷(정보화마을)판매와 TV등 매스컴의 영향으로 기업체의 선물용으로 전국 떡집의 폐백용으로 해외에서도 주문이 몰려 년 매출 억대를 올리는 사업가가 됐다. FTA로 농민의 한숨이 깊어지는 이때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농민들이 직접 만드는 한과야 말로 농촌을 살리는 효자산업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영양가 좋은 곡물로 무공해 자연의 맛과 저장성까지 우수한 우리 한과를 더욱 개발해서 전 세계인의 입맛을 녹이는 글로벌 산업으로 발전 해야겠다. 金 鎔 汶 |
출처: 노복위 원문보기 글쓴이: 노복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