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씨의 연원
구보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변씨는 중국고대의 황제헌원씨로부터 하. 은. 주. 송의
왕계를 거친 송공 비중의 후예로 본래의 성은 子성이었다.
송평공의 아들 비융의 자는 자변이었으므로 송평공의 증손인 송대사종앙가 처음으로
변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니 변앙 가 득성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 자손이 주로 중국 감연성 룽서에 세거하다가 고려 인종16년(1138년)에 공주사종
배신으로 고려에 건너와 중문지후로 연성부원군이 된 휘 유녕이 우리나라 입국시조임과 동시에 장연변씨 시조로 되고 있으며 그의 고손으로 항몽전에 크게 군공을 세워
상장군 태천백이 된 휘 여가 황주변씨 시조이며 여의 십칠대손인 고려 원주부원군
대은공이 우리 원주변씨 시조이므로 원주, 황주, 장연의 삼본으로 되고 있지만 상술한
바와같이 동원분적의 동일 씨족인 것이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신석호박사는 그의 편서 대은실기에서 송나라말엽의 변씨 도래설을 부인하고 변씨는 신라시대부터 황주지방에 기거한 토호족이라고 강조하면서 비단
변씨 족보뿐만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족보거의모두가 유교적 사대사상에 기인하여 세계를 중국의 대성에 연결시켜 가문의 근원을 빛내려고 중세에와서 인위적으로 조작된것이라고 단정하고 신라시대부터 고려초기의 변씨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변씨로서 우리나라 정사에 처음으로 실려있는 사람은 삼국사기에 있는 변품과 변산이다. 변품은 통일기인 신라 진평왕 40년(618년) 북한산군주(진골인 주장관)로 신라통일전인 대백제전쟁에 무공을 세운 용장이었으며 변산은 통일후인 문무왕 12년 9월에 당나라와의 외교로 활약한 외교관이었으며 신라말엽 황주 둔대엽촌에 거주했던 변희성은
그 지방의 토호였으며 그의 아들 변균여는 신라 경명왕7년(923년) 에 출생하여 고려
광종24년(973년)에 입적한 고승으로 고려태조때 화암종의 좌수로 화암교학을 중흥시킨 귀법사주 원통양중대사인바 현 국제불교학회에서도 균여대사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고있다. 균여전에 실려있는 그가 저술한 보현 십종원왕가 11수는 신라향가로 전해지는
총25수중에 포함된 것으로써 우리 국문학상 거성적이라고 할수있는 귀중한 자료로 지보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균여는 불교서적 10여부 65권을 서술했는데 그중 중요한것을 열거해보면 석화암교분기원통초, 지귀장원통초, 삼보장원통초, 십구장원통초등
4장인데 이는 모두 해인사 장경각부장속에 보장되고 있다.
또한 불경을 향가식 표기방법으로 알기쉽게 해석하여 일반대중에게 보급함으로써 불교의 포교에 미친 그의 공적은 지대한 것이다. 그외에도 불법으로 많은 이적을 남겼는데
광종비 대목왕후의 병을 치료해주고 화암경으로 천재를 물리치니 광종대왕이 균여에게
9배의 예를 올리고 대덕에 봉한후 가족십여인에게 각각 전25경과 노비 5인씩을 하사하고 세거하던 둔대엽촌에서 황주성내로 이거케함과 동시에 대사탄생지를 길이 기념하기위하여 황주판관으로 하여금 구지를 중수하여 경천사를 세웠다.
신라시대에 성을 칭한 것은 중앙귀족이거나 지방의 토호족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변품, 변산, 변균여는 귀족 또는 토호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촌락성일변" 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황주가 변씨의 근원지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송에서 이주해온것이 아니라 신라이래의 토호세이며 고승인 균여대사의 가문이란점에서 보다 자부심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신석호박사는 거듭 강조하였다.
필자는 구보소재의 송말도래설이 옳은것인지 황주토호족의 손이 옳은것인지 가릴길이
없으므로 이를 앞으로의 탐구과제로 남겨둘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첫댓글 상기 기록 중 3 본이라고 기술하였는데 나는 4본으로알고있읍니다 다른 본은 전주 변씨이면서 변사닫(邊四達)로알고있음 顯宗10年 平安道科. 丙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