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자유공원
- 보호시설(8동) : 법정, 영창, 헌병본부, 중대내무실등
- 전시물 : 5 ·18전개과정, 진실규명 추진상황자료등
세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숨마저 던져야 했던 젊은 넋들과 그들이 떠난 빈 자리를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가족들의 피눈물과 한숨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데,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꼭 가보아야 할 곳이 있다.
상무신도심에 자리한 5·18자유공원이 그 곳이다.
5.18자유공원하면 시민군으로 보이는 조형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부상을 입은 한사람을 부축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연출한 조형물.
당시의 광주 모습을 떠 오르게 한다. 조용히 눈을 감아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그 날 군인 하나가 곤봉으로 그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두 번 내리쳤다. 시간이 흘러갔다. 거리에는 다시 평화가 흐른다.]
[가족들의 설움은 채 가시지 않았거늘/남들은 벌써 노래를 부르네/죽은이가 무슨 말을 하랴/언덕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도연명의 만가]
들불열사비 소개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이 조형물은 2002년 5월19일에 세워진 들불열사 추모비라고 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7분의 얼굴이 북두칠성 모양을 하고 왼쪽부터 돌아가신 순서로 새겨져 있습니다.
“북두칠성”은 북쪽 하늘에 있는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이등급 이상의 밝은 별 7개를 일컫습니다. 이 7개의 별은 북두칠성 외에도 짐마차, 쟁기, 큰 국자 등의 모양에 따른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인도에서는 “7명의 현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북두칠성”은 밝고 뚜렷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북반구에서는 사계절 어느때나 볼 수 있고 가까이 있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에 항해할때나 여행할 때 방향을 잡고 시간을 측정하는데 요긴하게 쓰입니다. 들불 7인 열사님들의 모습을 “북두칠성”자리에 모시고 “북극성”을 상징한 참배 자리를 마련한 까닭은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가끔은 이곳을 찾아와 삶의 방향과 좌표를 되찾고 확인 해 보자는 뜻 때문이었습니다. 들불 열사님들 앞에서 나약해진 자신, 지향없이 헤매고 있는 자신, 때묻고 흐트러진 자신을 반성하고 추스른 후 새로운 각오와 자세를 가지고 가정과 일터로 돌아가자는 뜻 때문이었습니다. 가민히 찾아와 북극성 위에 서서 언제나 자신(북극성)의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7인 열사님들을 생각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 가겠다고 속으로 다짐도 하고 별들을 세며 그리움도 달래고 자녀들 교육도 시키고..... 이 분들은 들불야학을 세워서 그 당시 배우지 못한 노동자나 시민들을 가르치는 등 민중을 위해 봉사하였고, 또한 5.18항쟁 기간에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항쟁에 참여하기도 하셨습니다.
1. 박기순
전여고 졸업.전남대 사범대학입학(76)
작은 오빠와 그의 선후배들을 통해서 사회 비판적 인식 가짐.
사회개혁과 사회정의, 민중운동에 관심 갖게 됨.
윤상원과 함께 독서회 활동 참여.
들불야학 창설(78)- 노동자 교육중심.
영원한 노동자 누이라 불림(최초의 위장 취업자)
78.12.26 연탄가스로 사망.
“님을 위한 행진곡”
2. 윤상원
전대 정외과 졸업.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 6개월만에 그만 두고 광주에서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노동자가 됨. 들불야학 활동하며 지역주민 운동 전개.
전 항쟁기간동안 항쟁을 이끌었다.(박관현-민중항쟁의 불을 당김)
27일 도청 앞 최후 항쟁의 현장에서 사망.
1982년 2월 20일 박기순 열사와 영혼 결혼식.
3. 박용준
영아원과 고아원에서 자람.
YWCA 신협에서 근무.
투사회보 글쓰기 담당.
27일 새벽 YWCA를 방어하다 사망.
4. 박관현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 회장 당선.
5월 14일, 15일, 16일 3일간의 민족민주화 성회가 5.18 민중항쟁의 토대, 주도적 역활.
82년 4월에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
50여 일간에 단식투쟁 끝에 82년 10월 12일 사망.
5. 신영일
77년 전대 국사교육과 입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창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전개.
사회운동, 학문활동, 학생 운동 주도.
82년 10월,박관현 열사와 함께 교도소내 단식투쟁.
88년 5월 9일 기독 병원에서 작고.
6. 김영철
77년 광천동으로 이사 후 들불야학 윤상원씨를 만나게 됨.
80년 5월 당시 들불야학 팀과 투사호보를 제작.
5월 27일 도청에서 연행되어 상무대로......
고문 때문에 영창 화장실에서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이마를 세 번 부딪쳐
정신 이상 증세 보임.
16년 동안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98년 사망.
7.박효선
73년 전대 국문과 입학.
79년 대학 졸업 후 들불야학에 참여하고 극단 “광대”를 창립.
80년 5월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
석방 후 극단 “토박이”창단, 노동자를 소재로 한 연극을 연출.
토박이를 통해 문화 활동 전개.
과로로 인해 99년 사망
자유관 강당
5.18 기념재단에서는 매년 5.18에 관련된 내용의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공모해서 작품 선정을 합니다.상을 받은 작품들 중에서 단체 관람객들이나 또한 영상물 관람을 원하시게 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2003년,2004년에 공모된 작품 중 “5월의 노래”라는 작품으로 장려상을 받은 작품으로 처음 보실 작품입니다.
5.18 전개 과정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전개 과정에 대한 자막과 5.18 당시의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시면 5.18이 어떤 식으로 전개 되었는지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작가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5.18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지금 그때보다는 더 민주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나타내고자 했던 의미를 생각하면서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보실 작품은 “민주의 씨앗”이라는 작품으로 2004년에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이 작품에서 작가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5.18 민중항쟁은 죄 없는 주위 일반시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부당한 일을 시민들 스스로가 막아내겠다는 시민들의 민주정신이 엮은 업적이자 비극이었으며, 민주화하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기에 우리는 5.18 민주항쟁을 더욱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보실 작품은 “나의 오월이야기”라는 작품으로 2004년에 우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작가가 직접 겪은 5월의 이ㅇ기를 표현한 것으로 어린 시절릐 기억들과 자라면서 5월 광주가 작가에게 끼친 영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5.18”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2003년에 우수상을 수상했고 5.18당시의 사진을 통해서 그날의 진실을 사심 없이 바라봐 주길,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민주주의를 위헤 거리에 섰던 수많은 분들의 바람이 조금이나마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군대가 시민에게 했던 만행을 보여주는 “다시 오월”,그 당시 광주 시민의 정신을(공동체)말하는 “아버지의 외출”이 있습니다.
자유관 전시실
(입구) 양쪽 벽을 보시면 5.18 당시에 사용되었던 포고문들과 발생배경 및 전개과정이 있습니다.
(발생배경)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부하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를 당하여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전두환 노태우등이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쿠데타를 통해 군사권력을 장악하고 정부권력을 빼앗으려고 시도합니다. 이들이 바로 신군부세력입니다. 이에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터져 나왔습니다.
(전개과정) 5.17 내란이 일어나면서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되고 전남대 정문 앞에서 처음으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5.18민중항쟁 당시 전남매일신문과 한국일보의 언론보도 내용이 맞은편에 보이고 그리고 그 옆에는 외국 언론사의 보도도 있습니다. 신군부 세력이 광주시민에게 얼마나 잔혹하게 대했는지를 말해주는 내용,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의해 희생된 사상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계엄군의 퇴각과 양민학살,“무장시민군의 등장”은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사상자가 넘쳐나자 시민들이 이에 맞서 경찰성와 예비군의 무기고에서 획득한 무기로 무장을 시작합니다.저항정신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공수부대가 광주를 차단하여 물자가 공급되지 않았지만 그 때 광주 시민들은 자기 집에 있는 음식을 가지고 나와서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강도나 절도등의 범죄가 한 건도 없었을 정도로 시민들의 높은 도덕성을 발휘합니다. 5.18정신은 놀라울 정도의 공동체(대동정신)를 보여줍니다. 공수부대는 시위에 참여했던 참여하지 않았던 간에 청년들이면 다 연행을 했고 시민군들은 다리와 팔이 철사로 묶인 채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5.18이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됩니다.
5.18은 현재진행형
5.18은 군부독재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원죄이다.
대한민국 민주운동의 정신적 토대.
한국 민주화의 근원이자 영혼.
5.18이 없었다면 아직도 군부독재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
5월 광주는 아직도 진행형.
mbc스폐셜 [5월은 끝났는가]라는 프로그램에서 흘러 나온 멘트들이다.
작가가 써낸 나레이션 멘트가 아닌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5월 광주는 아직도 진행형이란 말처럼 이 프로그램은 80년 5월을 과거가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찾고 있었다.
5.18이 주는 의미......
5.18당시에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광주는 미완의 혁명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뤄낸 것이 없었기에 혁명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 80년대의 민주열사들 그리고 최근의 촛불 집회까지도 모두 80년 5월 정신이 바탕이 되어 있다. 민주화뿐아니라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항쟁해야 했던 5월 광주는 한국을 넘어서 아시아 전역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민주주의를 외칠수 있는 것도 유린 받는 인권 앞에서 분노를 느끼며 목소리를 높힐 수 있는 것도 모두 광주의 열사들이 피로써 눈물로써 수 놓은 5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5.18.............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될 우리의 후손의 지표이자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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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 안내
5 ·18자유공원은 5.18광주민중항쟁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정치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항쟁에 참여한 시민을 연행, 구금·재판하고 수감하였던 군사법정과 영창을 원형으로 복원·재현한 곳이다.
그 영창에 들어가 본다. 여섯 개의 넓지 않은 방이 반원형으로 배치 되어 있다. 한 방에 백오십명까지 칠팔백명을 수감했다니 한여름의 더위나 배고픔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 지만 정작 그들에겐 폭력 앞에 굴종을 강요받으며 폭도라는 누명을 견뎌야 하는 것이 더 혹독한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독거실은 0.8평, 한 평이 채 안 되는 공간이다.하루 열여섯 시간의 정좌자세라는 엄격한 규칙에 가혹한 구타와 감시를 견뎌내야 했던 그들에게 저 책보 만 한 창, 저 창살에 내리던 햇살은 정녕 ‘내 목에 와 감기면 누이가 짜준 따스한 목도리’만큼의 위안이 돼 주었을까.어느 봄날 들판에 노역나왔다가 잠시 누워 바라본 하늘이 창틀에 잘려 각지지 않은 마냥 넓은 하늘이어서 그래서 마음껏 바라본 오늘은 행복했노라고 일기를 쓴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것 같다.
면회실 철창은 차마 들여다 보고 있을 수 없다. 얼마나 애절한 사연들이 저 철창을 오갔을지... 잠시 들여다보고 지나가기엔 그 자리를 지나간 사람들의 참담한 눈빛이, 손짓이 선연하다.
영창 옆에는 사진자료를 모아놓은 전시실이 있다. 횃불시위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의 장면들앞에 선 마음은 숙연하다. 쓰레기차에 던져진 주검과 빈 책상에 놓인 꽃을 본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는 살았더라면 그 애는 지금 몇 살’이라고 언제까지나 그 ‘아이’의 나이를 헤아릴 것이다.
흑백 사진 속의 금남로에는 매운 최루탄이 뒤범벅돼 있고 피흘리는 젊은이가 있고 오열과 분노와 침묵과 한숨이 흐른다. 그런 금남로를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 했다. 헌혈을 위해 모인 수많은 시민들의 행렬, 김밥과 주먹밥을 나누어 주던 아주머니, 투사회보를 제작해 배포하던 학생들, 계엄군에게 빵을 사주던 시민. 이들이 광주를 아름답게 했다. 그해 5월 광주에서는 사람이 꽃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던 오월이었다.
천지에 초록이 가득한 계절.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많은 꽃들이 피었다가 지고 있다. 오월에 떠난 사람들과 그 오월을 지켜내기 위해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자리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할 일을 묻던 그 날’을 돌아본다.
날마다 구타에 강도 높은 군대식 기합,인간이하의 학대를 받으며 좁은 감옥 안에서 몇백명이 24시간 무릎을 꿇고 6개월이상 지냈다는 사실.적국의 포로도 아닌데 자국의 국민을 좁은 영창에다 가두고 학대하는 만행. 그 당시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만행이었는지 상무대 영창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수 있다.우리가 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하는지 분명 이것은 광주의 오월정신에서 찾을수 있다.오월정신의 하나는 인권존중이다. 여기서 고문받고 고문했던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미래를 참혹하게 빼앗겨 버렸다. 여기서 일어났던 만행은 한 세 대의 단절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가정생활을 파탄내고 때로는 이곳에서 고문했던 사람들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내가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는가
전남대학교를 들려 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이 어떻게 시작되었지를...그리고 전남도청 주변을 답사하고 광주외곽 지역에서 학살이 자행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인 주남마을, 목포로 빠져나가는 광목간 양민학살지.다시 5.18국립묘지를 보는 것으로 그날의 광주를 만나게 될것이다.
인근 지역의 문화재와 아름다운 광주
++만귀정(만귀(晩歸) 장창우가 후학들을 가르치던 옛터에 후손들이 세웠다.)
가을 바람 때문에 서성이는 오후가 있다. 그런 날은 들판으로 나가자.광주에도 그런
들이 있다. 공항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세하동 가는 길로 들어서면 만귀정 가는 길.
'만귀정’이라는 표지석은 버드나무 아래 숨어 있다. 한길 옆으로 몇 발짝만 떼면 잘
못 왔나 하고 더듬는 눈길이 확 트인다. 다른 세상이다. 비현실적으로 붉은 꽃무더기
가 가득하다. 꽃무릇이다.잎과 꽃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상사화처럼 잎이 다 지고 나면
꽃이 핀다. 저렇게 공들여 치장한 고운 자태를 보여주지 못하는 붉은 빛깔이 조금은
서럽다.큰 나뭇가지 하나가 저편으로 건려는 듯 기울어 있는 다리를 또 하나 건너면
“묵암정사”가 있다.
++병천사(고려초 충신 지용기와 공신 정금남 지계유 지녀혜등을 배향.-현충의 정신을 세인과
후세에 심어주기 위하여 붕난 지웅현선생이 1942년 건립한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강당인 존심당으로 고려시대것으로 추정.. )상무초등학교와 금호호반아파트
빌딩들 아래 그렇게 단정하게 고즈넉한 자태로 자리하고 있는 한옥의 지붕들이며 돌담
과 마주했을 때 멈칫,여염집 아녀자처럼 몸가짐이 절로 조붓해진다.
++봉산사(고광선 제향)
엄이재(掩耳齋)’라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耳)’싶었다고 한다. 귀앞에 커다란 벽을 두고 스스로를 침묵의 세상에
가둔 사람. 사노라면 그렇듯 유배되고 싶을 때가 있다.그런 날 엄이재에 살던 그 사람
의 마음을 헤아려 보러 간다.고광선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비운을
강개하여 귀를 막고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엄이재를짓고 봉황산 기슭에 들
어 앉았다. 세상을 절연하고 어쩌면 한 마리 봉황을 기다렸을 그 자신이야말로 그 간
결하고 매운 의지가 봉황의 높은 뜻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봉황산에 오른다.먼 옛날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상수리나무 마른잎 밟는 소리를 듣는다.
++운천사(운천저수지-새들이 사는 저수지를 걷는 도시인들의 여유가 부럽다.)
++서창향토문화마을(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세동마을)-전통 한식건축물,야은당,장승
및 연자방아,흙담장,농기구 전시장(문방사우,여성장신구,등화기구,악기,농기구등)
-국내외 관광객에 민박장소제공(2~3가구)
-청소년 예절 교육 및 다도 교육장소로 활용
◦ 설치배경 : 도시화 · 산업화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농촌 풍습을 보존,정비하여 청소년들의 전통문화 및 농촌생활 체험학습장 활용 및 볼거리 제공
◦ 설치기간 : 1998년 - 2002년 (1~3단계로 구분실시)
◦ 활용방안
◦ - 향토문화상품 전시·판매 :문화관광 기념품, 전통공예품, 예술품, 전통식품등
◦ - 무형문화 정착 : 남도창, 춤, 굿거리, 먹거리 등 소개 및 공연
◦ - 야외 약혼 및 전통 혼례식장 및 제공
저산이 거기 있어 온 것처럼 사라져서는 안될것들이 있다.
향토문화마을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잊고 살았던 것들이다. 이제는 고향마을에 가도 쉬이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도란도란한 웃음 같은 것이 스며든 오래된 물건들에서 떠오르는 그리움 위에 내가 사는 오늘이 문득 소중하게 다가온다.
++양동시장(1940년 일제때 신사주변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자리로 옮김.호남지역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특히 농수산물을 주로 취급.서민의 정취가 살아 숨쉬는 전통재래시장으로 물품구입 및 사람과 사람의 교류의 장이다)
++운천저수지 ++풍암저수지 ++전평제 등등
5.18자유공원을 찾아 오시는 길
광주역에서 17번 18번 117번 종점까지 오는 버스를 타시고, 택시요금이 4000원~5000원
송정리역에서 택시요금은 2000원~3000원
버스터미널에서도 17번 18번 117번 종점까지 오시고,택시요금은 2300원선...
금남로에서,일곡쪽에서는 666번 버스를 타시고 종점까지 오세요.택시요금은 7500원선.
남도의 음식 소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구요^^*
송정떡갈비를 드실려면 광산구청부근에 갈비집이 많아요..
한정식을 드실려면
광주추선회관건너편[조선한정식],
무등산자락에 위치한 지산유원지오르는 무등산관광호텔을 다다르기전 [명선헌]
일곡지구 국제고(어린신부와 가을동화에 문근영이 다니는 그등학교)전남여상 아랫자락에
위치한 [조선시대]등등..
담양 [유진정]은 청둥오리 전문점이구요.
증심사에 가시면 [보리밥]집이 많은데 직접 텃밭에서 기른 무우잎쌈에 조선된장
또한 입맛 돋우는 젓갈이 일품입니다..가격도 저렴하구요..
무안에 가시면 8월에 절정인 연꽃에 연잎쌈 연잎차 등등특유의 음식을 맛볼수 있어 좋답니다.
자유를 찾아 다니듯
자식의 입에 들어 갈 저 그득한 밥 한 그릇의 삶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동동거리며 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광주는 끊임없이 다가왔다가 사라져가는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로
풀 한 포기, 바람 한 줌, 햇볕 한 줄기의 존재함으로
포개지듯 이 땅 어디에 자유공원으로 스며들었다..
[삶에 고통이 따르는 이유
생선이/소금에 절임을 당하고/얼음에 냉장을 당하는/고통이 없었다면/썩는 길 밖에
없다 -故 정채봉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