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 [그림 ①] 에가미 나미오(1906~2002) |
일본 고대사는 죠몽 문화 (수렵과 채집) ― 야요이 문화(미작문화) ― 고분전기(야요이의 변형 발전) ― 고분 후기
등으로 발전해 갑니다. 죠몽문화(繩文文化)는 벼농사 생활을 기반으로 한 야요이문화(彌生文化)로 급변하는데
그것은 비한족계열(非漢族系列)의 벼농사 민족이 산동(山東)과 양쯔강 일대로부터 서일본(西日本)으로 이주하여
농경 생활을 하다가 급속히 동일본(東日本) 일대로 나아가서는 먼 동북(東北) 지방의 남부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벼농사 문화는 죠몽문화와 융합하여 야요이 문화가 성립되는데, 이 문화의 성격은 벼농사에 의존한 소박한
농민문화로서 평화적이고 비군사적(非軍事的)이며 주술적(呪術的)인 특성을 지니는 제사문화(祭祀文化)로
이 문화는 동남아시아 제민족 특히 현재 중국의 중남부 지역의 원주민의 문화와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
니다. 그런데 이 야요이 시대를 이은 시대를 고분시대(古墳時代)라고 하는데 이 시대가 이전의 야요이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가미 선생에 따르면, 고분 시대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지는데 그 가운데 고분문화 전기를 주도한 세력은
야요이 문화와 동일 계통으로 보이고 그 문화 담당자는 대부분 야요이문화의 내적 발전의 결과로 보이고
이 전기고분 문화를 가진 이들이 바로 왜인(倭人)이라고 합니다.5) 이 부분은 상당한 문제가 있죠.
이상의 에가미 선생의 견해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왜는 중국에서 오래 전에 일본으로 밀려들어온 중국 계통의 사람이라는 말이고,
둘째 현재의 일본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마치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향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토착화된 왜인이 다시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가야와 같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식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임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죠). 달리 말하면 가야인 = 일본인(왜인) 이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먼저 왜인(倭人) 개념을 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왜인은 동이족의 비칭(卑稱)일 뿐만 아니라 산동, 요동, 만주지역의 연안 등에 광범위 흩어져
살고 있는 쥬신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에가미 선생은 왜인은 쥬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양쯔강 일대의 사람이
일본으로 와서 왜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본에 토착화한 한족(漢族)이라는 것이죠. 에가미 선생 역시 '새끼 중국인' 근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도 고대의 시기에 양쯔강 일대의 사람들을 왜인으로 부른 예는 신뢰할만한 사서
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인이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로 『한서(漢書)』이후이면서 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다음은 항로의 문제입니다. 지도를 펴 놓고 동지나해를 살펴봅시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양쯔강에서 일본으로 바로 갈 수 있었을까요? 이런 믿을 수 없는 긴 항로로 대규모 인구
이동을 했다고 주장은 증명할 방법도 없지요.
▲ [그림 ②] 양쯔강에서 서일본(규슈)으로(?) |
설령 양쯔강에서 일본으로 직행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극히 일부이지 다수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통상적으로 일본에 전래된 벼농사는 화남 경로, 화중 경로, 화북 경로 등으로 보고 있는데 그 가운데 화중 경로나
화북경로는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군요.
"야요이 초기의 유적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고도로 발달된 논과 함께 고인돌을 들 수 있습니다.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널리 볼 수 있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남방식의 고인돌이 야요이 초기, 즉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에 규슈 서북부에서 왕성하게 만들어졌
습니다.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도래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은 벼농사의 전파 경로가 직접 한반도를 경유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6)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일본에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는 산동반도에서 북상해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
북부로 전해져 계속 남하했다는 주장과 한반도 남부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주장 등 두가지 견해로 나뉩니다.7)
어느 경우라도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전래된 경우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요시노마코토 교수는 "일본 열도의 벼농사 문화가 한국의 무늬없는 토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반도에서 벼농사 기술과 고인돌, 청동기 등을 포함해 고도로 발전한 문화가 유입됐
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볼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8)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계속해서 에가미 선생의 견해를 봅시다.
에가미 선생에 따르면, 고분 후기에 들어서면 이전과는 달리 금·은으로 만든 관(冠) 귀걸이·검·대금구(帶金具)·
허리띠 등 실로 금으로 찬란하게 장식한 대륙 왕후의 복식품(服飾品)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
에서나 볼 수 있는 기마전(騎馬戰)에 적합한 대륙제의 괘갑(挂甲)이나 기마전용 철제화살촉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이 고분 문화는 선비나 흉노, 부여, 고구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반도부여로부터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또 지금까지 본대로 수많은 사료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고분시대 후기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왕조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가미 나미오 선생은 "고분문화의 전기와 후기 사이에 단절(斷切)과 비약(飛躍)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9)
에가미 나미오 선생은 부여 또는 고구려계로 추정되는 기마민족 계열이 신예무기와 말을 가지고 한반도를 경유
하여 북규슈(北九州) 나 혼슈(本州) 서단에서 침입하여 AD 4세기 경에는 기내(畿內 : 기나이) 즉 야마토 지역에
진출하여 그 곳을 정복하고 강력한 야마토(大和) 왕조를 수립하여 일본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림 ③] 일본 고대사 관련지도 |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야마토 왕조의 실체를 부여 또는 고구려라고 보고 있지만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고구려는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남하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의 전쟁 후유증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국왕이 전사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혼란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 세력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열도로 옮겨 올만한 세력은 반도부여가 유일했던 것입
니다. 종합적인 연구결과 부여계의 남하가 가장 타당합니다. 이 부분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일본의 신화에서는 국신(國神)과 천신(天神)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가미 선생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국신은 열도의 선주민 특히 왜인(倭人)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고
천신(天神)은 요동 만주 지역의 기마씨족으로 천손족(天孫系) 또는 천황계(天皇系)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
니다.
물론 저는 이와 같이 왜인과 부여계를 완전히 구분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열상으로 본다면, 왜(倭)라는 개념과 부여계가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의 선후는 있겠지요.
그리고 에가미 선생과 연구자들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세력과 연합하여 현재의 규슈의 후쿠오카로 침입하여
한반도의 가야지역과 규슈의 쓰쿠시(築紫 :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 지역에 왜·한 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이
성립되었으며 왜왕(倭王)은 우선 쓰쿠시에 수도를 두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AD 4세기 초의 일로 보이는데 이 왕국이 점점 융성하여 4세기 중엽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견줄
만한 대 세력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10)
여기서 말하는 이 왜·한 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에 대해서는 저는 분명히 범부여연합국가(USB)라고 명시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왜·한 연합왕국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구한 부여계의 역사는 수많은 사서에 기록되어있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계통성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는데 반하여 왜·한 연합왕국은 실체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에가미 선생은 이 범부여 연합국가의 모습을 일본을 중심으로 파악하여 왜·한 연합왕국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가미 선생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오우진 천황 시대에는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의 제국과 고구려
에 대한 각종 국제적인 갈등의 주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야마토 조정은 대고구려 연합전선의 주도와 더불어
기나이(畿內) 지역의 정복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안으로는 나라 배후를 튼튼히 하고 일본을 건국하여 수도를
동쪽으로 이전하였고, 이를 토대로 밖으로는 대고구려에 대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려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에가미 선생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을 '한반도 작전'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1)
마치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이 있었던 것처럼 '신화의 현실화'를 하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태평양 전쟁 당시와 같이 야마토 지역에는 대본영(大本營)이 있고 이 대본영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
적으로 수행한 듯이 보이는 군요. 마치 노회(老獪)한 정치가의 발언같기도 합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 한반도 남부 제국에서 열도 쥬신(일본)을 대고구려 작전의 주도자로 보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습니다. 이 시기까지 대고구려 작전을 주도한 세력은 반도부여(흔히 말하는 백제) 세력로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 또한 이제까지 충분히 검토했다고 봅니다.
에가미 선생이 말하는 '한반도 작전'의 주체는 야마토 조정일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 야마토 조정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었고, 이후 주도자들은 개로왕·곤지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고대일본의 국가 건국은 한반도의 쥬신 세력(부여계)이 직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들은
요동과 만주 지역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는 동일한 혈통을 지녔으며 이들 기마민족이 열도(일본)를 정복하여
일본 최초의 왕국인 야마토국(大和國)을 세웠고 이 야마토 왕가의 혈통이 오늘날 일본 천황가로 그 맥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12)
이런 까닭에 현대 일본인들은 일본문화와 일본의 정체성의 시작을 야마토 왕조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무사도(武士道) 정신도 대부분의 내용은 일본정신 즉 야마토 다마시[日本魂 또는 大和魂]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즉 일본의 시작은 야마토 시대라는 것입니다.13)
그러면 여기서 이 야마토(大和)라는 말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자 주
(1)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태를
계기로 양국 정상 간 합의에 따라 2002년 출범, 2005년 5월까지 제1기 활동을 전개한데 이어 2007년 6월부터
제2기 활동을 시작하여 2009년 12월까지 활동할 예정이다.(『연합뉴스』2008년 11월 30일)
(2)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31쪽.
(3)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501쪽, 491쪽.
(4) 김현구 교수의 지론은 백제는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일본은 군사적 지원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왕실의 혈연적인
교류가 있었고, 이 같은 왕실의 혈연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김현구 교수에 따르면, 초기에는 많은 왕녀들의 이동이 있었고 후반에는 왕자들의 이동이 많았다 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참고.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이 같은 인식은 부여계 전체적인
역사의식이 결여된 분석이다.
(5) 江上波夫「韓日古代史 - 騎馬氏族を 中心として」제4차 삼한 학술발표회(1995. 10.23 서울 롯데호텔) : 삼한
역사문화연구회 『삼한의 역사와 문화』(자유지성사 : 1997) 221-223쪽. 이 자료는 국내에서 보이는 자료 가운데
생전의 에가미 선생의 생각을 가장 잘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 추정된다.
(6)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천년사』(책과함께 : 2005) 25쪽.
(7) "어느 주장이든 송국리 유적의 돌칼이나 돌도끼, 동검 그리고 벼의 종류는 야요이 문화 초기에 해당하는
가라쓰시(唐津市)의 나바타케(菜畑) 유적 등과 비슷하다."요시노마코토(吉野誠), 앞의 책, 26~27쪽.
(8) 그 하나의 예가 한반도 남단의 김해시 예안리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은 일본 야마구치현의 도이가하마 유적에서
나온 인골과 매우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요시노마코토(吉野誠), 앞의 책,
(9) 江上波夫, 앞의 논문.
(10) "니니기노미고도 천손강림(天孫降臨)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남하한 북방계 기마민족에 속하는 임나왕(任那王)
이 남한의 가라(加羅)를 작전기지로 그곳의 왜인과 협력하여 쓰쿠시(築紫)에 침입한 것의 신화적 표현으로 실제
임나의 왕은 '하쓰구니시라스스메라 미고도' 즉 슈진천황(崇神天皇)이었다. 임나(任那)의 어근(語根)은 '미마'이며
'나'는 토지를 가리키는 것에 대해 슈진천황의 이름인 '미마기이리히꼬'의 미마는 임나(任那)의 '미마'를, '기'는
성(城)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미마기이리히꼬'가 바로 '임나(任那)의 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건국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공하여 우선 임나(任那)와 쓰쿠시(築紫 :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로 왜한연합왕국
(倭韓連合王國)이 성립하고 왜왕(倭王)은 우선 쓰쿠시에 수도를 두었다. 이것은 4세기 초엽의 일로 보이는데 이
왕국이 점점 융성하여 4세기 중엽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견줄만한 대세력이 되었다." 江上波夫, 앞의 논문.
(11) 江上波夫, 앞의 논문.
(12) 에가미 선생은 생전에 한국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일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
니다. 위로부터 따지고 보면 결과론적으로 일본 천황은 백제계입니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천황이 제사 지낼 때
밥그릇, 수저 그리고 마늘이 올라갑니다.
또한 입고 있는 복장이 백제식 복장입니다. 천황 다시말해서 일본민족은 백제의 후예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은 본디 한 뿌리입니다. 그러니 한국사람인 여러분은 일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국
강연회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의 이론은 여러 가지 모순된 논리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지만, 야마토의 건설자
들은 부여계임을 인정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13)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야마토 왕국이 수립된 직후에, 한반도에서 사람들(백제인 : 반도부여인)이
야마토 지역(나라 현에 속하는 야마토 분지로 추정됨)으로 대량 이주해 온 사실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고 이 때문에 한국인형의 체격이 세토나이카이 해안과 혼슈우와 킨끼 지방의 일본인들 사이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도 한다.
(2) 일본의 시작, 야마토의 실체
열도쥬신들은 대화(大和) 또는 대왜(大倭)라고 쓰고 똑같이 야마토(やまと : [yamato])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글씨를 왜 이 같은 형식으로 읽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은 드물지요.
『후한서』에서는 "왜국은 한의 동남의 큰 바다 가운데 있습니다. 산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고 대개 1백
여국이 된다. … 그 가운데 세력이 큰 왜왕은 야마태국(邪馬臺國)에 거주하였다(其大倭王居邪馬臺國)."고 하는데
그 주석에 "이제는 '야마'로 이름을 짓고 그것을 '와(訛)'로 읽는다."라고 합니다.14)
이 말은 일반적인 열도 쥬신을 가리키는 와(倭[wa])라는 말이죠.
『후한서』에 나타나는 야마태(邪馬臺)는 고대 쥬신들이 사용하던 말을 차용하여 소리나는 대로 적은 글자일
것입니다. 이 말에서 '야마토(日本)'라는 말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어는 기본적으로 고대 한국인들이
즐겨 사용한 이두식 표현이 언어로 정착되고 문법적으로 정비된 말이기 때문에 현재에도 열도 쥬신들은 일본
(日本)으로 쓰고 야마토(Yamato)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다음의 관계가 성립하는군요.
대화(大和) = 대왜(大倭) = 일본 = 야마토(やまと : [yamato])
일본의 연구자들은 야마태(邪馬臺)가 고대 일본어의 '야마토(ヤマと)'라는 음을 옮겨 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야마태(邪馬台) 즉 '야마토(ヤマと)'는 원래 기나이(畿內)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난
지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와(大倭)' '대와(大和)'등의 글자는 후세에 생겨난 것이지만
'야마토'라는 지명은 AD 3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하여, 그것이 한족(漢族)의 사가들에 의해 '야마태(邪馬臺)'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7, 8세기에는 음표 문자인 만엽음(萬葉音) 가나(がな)에 '야마퇴[ヤマと : yamatö]'로 표기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마토는 지형을 나타내는 '산(山)'에 접미어' 토(と)'를 붙인 합성어라는 것입니다.15)
그리고 그 의미로는 산의 입구 또는 산기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서 '골' '홀(忽)'이 산의 골짜기나
마을을 의미하다가 나라로 발전한 것과 다르지 않는 말입니다. 즉 고대에는 주로 방어 등을 목적으로 산의 입구
지역에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를 토대로 나라가 만들어지죠.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태(야마퇴[yamatö])와 야마토[yamato]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야마오 유키하사(山尾幸久) 교수는 야마태(邪馬台)는 곧 산적(山跡)·산처(山處)의 땅(地)의 음역이지 산 입구(山門
·山戶)의 땅(地)의 음역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16)
그러나 큰 범주에서 보면 이 말에 대한 차이는 없습니다. 야마오 교수는 그 증거로 『후한서』 왜전, 『수서』의
왜국전, 『통전』등을 들고 있습니다.17)
그러나 '야마태'이든 '야마토'이든 이 명칭에 대한 이 같은 견해들은 중요한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야마토라는 말이 일본열도에서 자생했다는 견해인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본대로 열도로 이주해간 사람들은 열도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요동과 만주에서
옮겨간 사람들인데 그들의 주체가 열도의 선주민이 사용한 말을 그대로 사용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야마라는 말을 현대 일본어에서 산(mountain)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야마(ヤマ)라는 말과 그대로 동일시
하는 것인데 이것도 잘못입니다.
하나의 민족의 가장 고귀한 이름을 만드는데 성산(聖山 : holy mountain)도 아닌 일반적인 산(山)으로 부른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입니다.
셋째, 고대어는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매우 복합적인 의미로 나타나는데, 야마라는 말을 산(山)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원의 변화 방향을 거꾸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말이 A → B → C → D 등으로 바뀌어 갔다고 할 때, 이 방향이 D → C → B → A 로 바뀌어갔다는 분석이
타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야마토라는 말은 요동이나 만주 지역의 말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것을
도외시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후한서』에는 "왜는 한반도의 동남 대해 가운데 있으며 산섬(山島) 에 의지하고 살았다.18)
… 나라들은 모두 왕을 칭하였고 대대로 계속 이어졌다. 그 가운데 큰 나라는 왜왕이 살았고 야마태국으로 불렀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 주석에 "야마태는 와(訛)라고 읽는다."라고 되어있습니다.19)
다시 말하면 야마토 또는 야마태는 와[wa(倭)]라고 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만주쥬신을 의미하는 와지[물길(勿吉)] 또는 모허[말갈(靺鞨)]의 어원 가운데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waji]'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 와지의 '와[wa]'라는
말과 긴 세월 동안 일본을 비칭(卑稱)하던 '와(倭)'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는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와지'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을 중국인들이
한자로 받아 적을 때 같은 발음으로 '기분 나쁜 놈(勿吉[와지])'이라는 욕설로 쓴 것입니다.
'와지'라는 말은 삼림이라는 의미 외에도 동쪽 즉 '해뜨는 곳(日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곧 동쪽 오랑캐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보듯이 와(倭)를 동이(東夷)와 동일시하는 기록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정리한다면, 일본(日本) = 야마토(야마태 : 邪馬臺) = 와(訛) = 와(倭) 등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즉 열도쥬신을 부를 때, 일본이나 야마토, 와(倭) 등의 말 가운데 아무것으로나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본대로 왜(倭 [wa]) = 물길(勿吉 [waji]) = 옥저(沃沮 [ojü] ) 등의 관계가 성립되고, 물길(勿吉) =
말갈(靺鞨) 인데다 이 말들은 만주지역 언어이므로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와지(窩集 : 숲, 동쪽, 해뜨는 곳) = 와(倭 [wa]) = 오쥐[옥저(沃沮 [ojü] )]
= 물길(勿吉 [waji]) = 말갈(靺鞨) = 와(訛) = 야마토(야마태 : 邪馬臺)
= 일본(日本) = 대화(大和)
여기서 숙신(肅愼) = 물길(勿吉[Waji(와지)]) = 말갈(靺鞨[Mohe(모허)]) = 여진(女眞)이라는 관계에서 제가
말씀드린대로 말갈[Mohe]은 예맥(濊貊[허모/쉬모 : Hemo /Huìmò])을 거꾸로 표현한 말인 맥예(濊貊[Mohe
(모허/모쉬)])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므로, 만주 ― 한국 ― 일본은 겹겹이 동질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삼국사기』백제에는 말갈이 자주 나타나고 신라는 왜(와)의 침략을 자주 받는 기록들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같은 쥬신 가운데 국체가 다르거나 국체의 유무에 따라서 왜도 되고 말갈도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마토라는 말은 쥬신의 이동 경로로 봐서 요동과 만주 또는 한반도에서 사용된 언어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특히 열도쥬신이 실질적으로 관계했던 고대 가야지역이나 반도 쥬신 지역의 언어
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제 와(倭)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먼저 '야마'라는 말은 반도 쥬신(한국) 고대어로 '하늘', '산', 또는 '신성한 마을'을 의미하고 '토'는 터 또는 밑이
라는 말로 추정되는데 결국 '야마토'라는 말은 '해뜨는 하늘 밑 마을'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20)
현재 한반도 남부의 고령 지역의 우가야(右伽倻)의 다른 이름이 미오야마(彌烏邪馬)인데 이것은 신성한 하늘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해뜨는 터'를 의미하는 일본(日本)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일본은 한자식으로 읽은 것이고 '야마토'는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 됩니다. 즉 '天'을 '하늘 천'이라고
읽듯이 '日本'의 경우는 '야마토(해뜨는 터) 일본'이라는 식이 될 것입니다.
▲ [그림 ④] 고령 대가야 유적 주요 고분군과 박물관(고령군청 자료 재구성) |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해서, 아사달이나 조선이나 쥬신 등의 말들이 산(山)을 의미하지만 이 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아침해가 떠오르는 산(태양을 품은 산으로 쥬신의 성산 : 알타이산, 장백산[기린산/백두산])을 의미
한다는 점을 누차 지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야마토도 역시 단순한 산(山)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태양과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일본이라는 말과
아사달 또는 조선 또는 아사다계(朝山)와도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품고 있는 곳, 그래서 태양이 아침마다 떠오르는 곳에 사는 사람이 바로 태양족인 쥬신의 실체입니다.
이렇게 분석해 보면 야마토라는 말이 쥬신의 큰 흐름에서 전혀 벗어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야마토는
결국 알타이산, 붉은 산(해뜨는 산), 아사달, 조선(朝鮮)이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야마토의 어원을 찾아가다 보면 결국 현재의 한국과 일본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필자 주
(14) "今名邪摩(惟)[堆], 音之訛也."(『後漢書』卷85 東夷列傳 第75)
(15) 坂本太郞,「魏志倭人傳雜考」『日本古代史の基礎的硏究』494~495쪽.
(16) 山尾幸久「魏志倭人傳の史料批判」『古代の日本と朝鮮』(上田正昭·井上秀雄 編, 學生社, 1974)
(17) 야마오 유키하사 교수는 ①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후한서』 왜전에 주를 달아 "按
今名邪摩堆 音之訛也" 라고 한 것, ② 당나라 위징(魏徵)이 지은 『수서』왜국전에서도 "邪靡(摩인듯)堆 則魏
志所謂邪馬臺者也"라고 한 것, ③ 『통전(通典)』의 주에도 '邪摩堆'라고 적고 있는 것 등을 들고 있다.
山尾幸久의 앞의 논문.
(18) 여기서 말하는 섬은 육지가 침강하여 생긴 섬 주로 다도해로 추정된다.
(19)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為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一]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
與朱崖、儋耳相近, 故其法俗多同."의 주석에 "[一]案:今名邪摩(惟)[堆], 音之訛也."으로 되어있다(『後漢書』
卷 85 東夷列傳 第75 倭)
(20) 부지영『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7) 105~110쪽.
성왕, 두 얼굴의 대왕
제 18 장. 백제 성왕이 킨메이 천황?
들어가는 글
1985년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당시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백제인입
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일본의 간다히테카즈(神田秀一) 교수라고 합니다.1)
▲ [그림 ①] 쇼와 천황(히로히토 천황) |
2001년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나 자신으로 말하면 칸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으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씌어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2)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발언은 일본의 천황이 한국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발언이 상당한 파문을 낳아서 한국에서는 여러 공중파에서 이것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부산을 떨었습니다.
▲ [그림 ②] 칸무 천황상(桓武天皇像 : 延暦寺蔵) |
그런데 희한하게도 일본에서는 이 내용이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서만 언급을 했을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특성과 한국의 특성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도 볼 수 있었던 대목입니다.
일본 천황의 발언은 무언가 의도성이 있는 듯한 반면, 한국은 "백제가 일본을 만들었어"라는 식으로 떠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은 한족(漢族)처럼 냉정한 반면, 한국은 흉노계 유목민의 특성이 많은 듯합니다.
이른 바 '냄비근성'입니다.
일본 천황이 한국과 일본과의 황실에 있어서 혈연적 고리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후 2004년 여름,
아키히토 천황의 당숙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 당시 62세) 왕자가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을 참배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져온 술과 과자, 향 등을 놓고 참배하였는데, 당시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향로와 향을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기증한 향은 1300여년 묵은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최고급품이었습니다.
이 일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것이지만 아사카노 왕자가 아키히토 천황의 윤허를 받고 온 것이며 그는 천황에게
상세히 보고하겠다고 밝혔습니다.3)
(1) 성왕, 두 얼굴의 대왕
반도부여 즉 백제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성왕(聖王 : ?~554)이 있습니다.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으로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쳐서 백제가 부여의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만주를 주름잡던
부여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려고 온힘을 기울인 임금입니다.
성왕은 무령왕의 둘째 부인의 소생으로 그 어머님은 황족이 아니라 호족의 따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왕의 모후는 '황후(또는 왕후)'로 불린 것이 아니라 '대부인'으로 불리었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죽음을 '수종(壽終)'이라하여 기록상으로는 황제나 황후의 죽음을 의미하는 붕(崩), 왕과 왕비의 죽음을
의미하는 훙(薨), 대신이나 고위 관직자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졸(卒), 일반인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 22대 세이네이(淸寧) 천황의 경우 그 어머니도 황태부인으로 불렸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 드린대로 곤지왕 즉 유라쿠 천황에게는 왕이 된 세 분의 아드님들이 있는데 동성왕, 무령왕, 게이
타이 천황 등입니다. 그런데 성왕이 무령왕의 아드님이고 킨메이 천황은 게이타이 천황의 아드님이므로
이 두 분은 서로 사촌지간이 됩니다.
성왕은 지방통치조직 및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입니다.
그런데 성왕은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명왕이라는 말은 마치 동명성왕
(東明聖王)을 본 딴 묘호(廟號)로도 들립니다. 묘호에도 개국시조에게서나 사용될만한 성스러울 '성(聖)'을 쓰고
있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성명왕을 천지의 이치에 통달한 영명한 군주로 보고 있습니다.
성왕의 휘(諱)는 명농(明襛)이며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입니다. 성왕은 아버지인 무령왕과 함께 부여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도에서는 성왕을 그리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왕은 523년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고, 그 다음해에 양(梁)
나라 고조(高祖)로 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529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공동대처를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고 5
38년 협소한 웅진(熊津 : 현재 충남 공주)으로부터 넓은 사비성(泗沘城 : 현재 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습니다. 아마 이때 지방통치조직들을 정비한 듯합니다. 그리고 성왕은 일본에 불경을
전하여 일본이 세계적인 불교의 나라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것은 성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551년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漢江)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합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죠. 한강 유역은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553년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자 이에 왕자 여창(餘昌 : 제27대 위덕왕)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지만 대패하고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의 복병(伏兵)에 의하여 전사하고 맙니다(554).
▲ [그림 ③] 옥천(관산성)의 전경과 지도(옥천군청 자료 및 대동여지도) |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왕에 대한 행적입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성왕의 행적에 대해서 별 다른 의심이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는 자신의 저서『두 얼굴의 대왕(二つの顔の大王)』에서 킨메이 천황이
바로 백제의 성왕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바야시 교수는 황실의 자료 등을 열람할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제국에 전해지는 자료들을 두루
두루 검토해 본 결과, 『일본 서기』나 『고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일본 열도의 역사가 실은 동아시아 역사의
일환이며, 정권 담당자 즉 천황이 한반도 제국의 왕을 겸임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경우, 백제 성왕은 540년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다가 패한 후 곧장 왜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그때부터 가나사시노미야궁(金刺宮)에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왜국왕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센카 천황(宣化天皇)이 사망한 연대는 공교롭게도 540년으로 백제의 성왕의 우산성 공격시기와 일치합니다.4)
그러니까 성왕은 553년 관산성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일본으로 가서 킨메이천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미 왜 5왕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왜국왕 = 백제왕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울 일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서는 펄쩍 뛸 일들입니다. 물론 일본왕이 백제왕을 겸하여 지배했다고 하면 일본
학자들은 환영할 일이고, 반대로 백제왕이 일본왕을 겸했다고 하면 한국에서 반길 일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반도부여와 열도부여는 그저 범부여 연합국가입니다.
다만 고바야시야스코 교수의 견해에 대하여 일본의 사학계는 매우 냉담합니다.
고바야시 교수의 다른 저서에 대해서도 일본의 사학계는 주목하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고바야시 교수의 견해는 대체로 작위적이고 비약적이며 지나친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비판자들은 그녀의 견해를
'말장난'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야스코 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한일고대사에서 비켜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성왕 - 킨메이 천황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들을 분석해봅시다.
먼저 『일본서기』를 봅시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 15년 12월조에 백제의 성명왕(성왕)이 하부한솔(下部
扞率) 문사간로(汶斯干奴 : Munsa Ganno)를 일본에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킨메이 천황의 재위연도는 대체로 539년~571년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킨메이 15년이라면 이 해는 기록상으로
성왕이 전사한 해입니다.5)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이 554년 7월에 전사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같은
해 12월에 사신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상한 것은 백제가 표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는 긴급히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성왕의
서거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왕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 동안 일본 천황가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홍윤기 교수는 킨메이 천황이 바로 성왕이라는 점을 누누이 지적해왔
습니다. 홍윤기 교수는 『대초자(袋草子 : 1158)』의 기록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일본역사학연구회(日本歷史學硏
究會)가 편찬한 『일본사연표(日本史年表 : 1968)』에 의거하여 이 같은 논의를 전개합니다.
구체적으로 홍윤기 교수의 견해를 한번 봅시다.
첫째 킨메이천황의 즉위년이 532년이고 불교가 일본에 전해진 538년인데 이 때가 반도에서는 성왕의 치세라는 점,
둘째 『신찬성씨록』에 킨메이 천황의 아들인 비다츠 천황이 백제왕족이라는 근거를 들어 그의 아버지인 킨메이
천황 역시 백제왕족이라는 점,
셋째 『신찬성씨록』에 비다츠 천황의 성(姓)이 '진인(眞人)'인데, 이 성은 텐무 천황 13년(686)에 제정된 팔색(八色)
의 성 가운데 제1위의 성씨로 황족에게만 주어진 성(姓)라는 점(결국 백제왕족=일본황족),
넷째 야마토 시대 당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동북의 아이누(에조 또는 에미시)의 저항을 진압한 명장들이 대부분
백제왕족이었다는 점,
다섯째 비다츠 천황의 손자인 조메이(舒明) 천황이 백제 대정궁(大井宮) 백제 대사(大寺)를 건립하는 등 유난히
백제관련 토목사업을 많이 했고 백제궁에서 서거한 후 백제대빈(百濟大殯 : 백제의 3년상 장례의식)으로 안장했
다는 점,
여섯째 성왕의 존칭인 성명왕(聖明王)과 킨메이(欽明) 천황의 호칭에서 '明'자를 공유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서
홍윤기 교수는 킨메이 천황 = 성명왕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나아가 홍윤기 교수는 『일본서기』에 "비다츠 천황(敏達 天皇)은 킨메이 천황의 둘째 아들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 첫째 아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기사가 없는 점에 주목하여, 바로 이 점이 킨메이 천황 = 성왕이라는
하나의 증거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즉 킨메이 천황의 첫째 아들이 역사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왕의 첫째 아들인 여창(餘昌)이 백제의 위덕왕
으로 등극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의 문헌에서는 킨메이 천황의 첫째 아들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6)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상한 기록도 있습니다.
킨메이 15년(554) 성왕이 서거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백제왕 여창(후일 위덕왕)은 556년 왜국으로 동생인
혜왕자(惠王子)를 파견하고 성왕 서거 후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왕위에 등극합니다(557). 위덕왕은 4년간 등극
을 미루어 놓았고 그 동안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에는 왕이 없었던 것이죠.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홍윤기 교수는 "556년 1월 혜왕자가 백제로 귀국을 하는데 아매신(阿倍臣) 등 조신(朝臣)들이 거느리는 1천여명
의 군사가 호위하여 백제로 돌아가게 했다."는 『일본서기』의 대목도 성왕이 킨메이 천황인 증거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실제로 고대의 역사에서 호위병 1천여 명은 예사로운 규모가 아닙니다.
단순히 동맹국이라도 이런 예우는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보세요. 해외에 군대를 파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사람이 여행하듯이 가면 될 일이 아니지요.
엄청나게 긴 보급로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수백 명을 외국에 파견하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성왕이 아들을 보내면서 많은 군대를 보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입니다.
이 혜왕자는 후일 혜왕(惠王 : 598~599)으로 등극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하는 내용들로 성왕과 킨메이 천황을 같은 인물로 보기에는 증거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의문스러운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제부터는 좀 더 다른 증거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 홍윤기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한누리미디어 : 2008) 446쪽.
(2) 『朝日新聞』(2001.12.23)
(3) 『中央日報』(2004.8.5)
(4) 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5) 『日本書紀』에는 킨메이 천황 15년에 백제 성왕이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왕의 전사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554년이므로 킨메이 천황은 사실상 539년에 즉위한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6) 홍윤기 「日本古代史 問題點의 새로운 규명 - 平野神의 文獻的 考察을 중심으로 -」『日本學』第24輯
(2) 성왕, 성명왕, 킨메이 천황
지금까지 우리는 킨메이 천황이 백제의 성왕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고바야시 교수와 홍윤기 교수의 견해를 중심
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고바야시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일본 사학계가 수용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
습니다. 즉 전체적인 정황은 납득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의 수수께끼를 이어줄 수 있는 증거들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가 일부 타당한 만큼 충분히 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먼저 성왕이 킨메이 천황이라는 이유들을 시각을 바꿔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첫째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킨메이 천황기는 킨메이 천황 자체의 기록보다는 성왕의 기록이나 백제 관련 기록
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기의 기록은 백제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자료도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제본기(百濟本記)』라는 책입니다. 무려 14회나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본기』는 게이타이(곤지왕의 아드님) 천황기부터 나타나고
킨메이 천황기 이후에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게이타이 천황기에는 『백제본기』의 인용이 5회에 걸쳐있습니다
(게이타이 3년, 7년, 8년, 9년, 25년).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기는 『백제본기』를 기반으로 쓰여졌으며 그 내용도
대부분이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열도인(일본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즉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에 보면 일본측 사료에
의한 것은 없고 『백제본기』라는 점, 킨메이 천황이 임라의 부흥에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점,
임나일본부가 천황이 파견한 기관이라면서도 직접 일본 정부가 천황의 칙령을 전하지 않고 성왕을 통해 간접지배
하는 하는 점 등은 열도인들도 불가사의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킨메이 천황기에는 일본부가 스스로 군사력을 행사하거나 행정적인 권력을 행사한 기록도 없지요.
사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말도 이시대에는 없었던 말이지요. 일본은 반도부여(백제)의 멸망기에 나타난
용어입니다(이 부분은 다시 상세히 해설합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에는 성왕 즉 성명왕은 11회나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 성왕의 연설문을 매우 길게 인용한
것은 4회에 걸쳐 나타나는데 킨메이 천황이 행한 연설은 없습니다. 킨메이 천황의 조서만 나올 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물론 성왕의 기록에는 성왕이 천황의 뜻을 받들어 말을 하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킨메이
천황의 실체가 불분명합니다.
당시 천황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를 감안한다면 성왕이 천황의 뜻을 받들 이유도 없는 것이고 부여계의 서열
상으로 봐도 성왕이 킨메이 천황보다 높을 가능성 크므로 킨메이 천황은 성왕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구체적으로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를 보면 천황이 생생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불교가 전래되는 시기에
국한됩니다. 나머지 시기는 마치 '그림자 천황'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 '얼굴없는 천황'입니다.
그러면서도 엉뚱하게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고 있습니다. 열도(일본)가 왜 고구려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지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나 성왕과 그의 아드님인 위덕왕에 대해서는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기는 마치 성왕과 위덕왕의 생생한 전기를 보는 듯합니다. 희한한 말이지만 위덕왕이 출가
하여 승려가 되려한 것도 『삼국사기』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킨메이 천황의 즉위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즉 즉위년도도 문제이지만 킨메이 천황 이전의 천황들의 즉위
및 재위 그리고 그들의 죽음도 의문 투성이입니다. 무엇보다도 게이타이 천황과 그의 직계 자제들이 몰살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만약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가 몰살되었다면 가장 유력한 천황의 후보는 사촌인 성왕이 될
수가 있죠.
킨메이 이전의 천황은 안칸(安閑)·센카(宣化) 천황인데 이들은 『일본서기』에서는 정상적으로 등극한 듯이 묘사
를하고 있지만 이들의 죽음들은 전사나 암살로 보는 것이 대세입니다. 안칸 천황은 즉위 후 2년이 채 못되어 죽고
센카 천황도 4년만에 죽는데 이들의 죽음은 다른 천황과는 달리 유언도 없으며 죽음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이
짧게 "천황이 서거했다[天皇 崩]"라고만 되어있습니다.
핵심이 되는 기록은 바로 『일본서기』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모두 인용해보겠습니다.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태세(太歲) 3월 군사가 안라(安羅)에 가서 걸모성(乞毛城)에 주둔하였다.
이달에 고려(고구려)가 그 왕을 시해하였다. 또 들으니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들이 모두 다 죽었다고 하였다."7)
여기서 고구려왕은 안장왕(519~531)인 듯 합니다. 문제는 게이타이 일족이 모두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위 계승 서열로 친다면 자연스럽게 성왕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안칸(安閑)·센카
(宣化) 천황은 게이타이 천황과 함께 사망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다시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이들을 죽인
사람이 누군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킨메이와 게이타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킨메이 천황은 배다른 형인 센카 천황이 죽은 후 즉위 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일본서기』의 기년에는 몇 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대해 열도에서는 많은 견해들과 극심한 논란이
있습니다.
히라코 다쿠레이(平子鐸嶺)는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연도를 『고사기(古事記)』의 527년(丁未年 4월 9일)으로
하여 그로부터 각각 2년씩을 안칸(安閑) 천황과 센카(宣化) 천황이 천황에 등극하였고 531년에 킨메이 천황이
즉위 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게이타이 천황이 527년에 서거했다는 말이죠. 이에 대하여 기타사다키치(喜田貞吉)는 킨메이 천황이 531년에
즉위한 것은 맞지만 킨메이 천황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534년에 안칸(安閑)와 센카(宣化)를 옹립 하는 등
킨메이 천황의 조정과 안칸・센카 천황의 조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른 바 병립왕조 시대(두 개의 왕조가 동시에
존재)가 있었지만 센카가 죽음으로써 킨메이 천황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야시야 진사부로(林屋辰三郎)는 키타(喜田)의 견해에 동의 하지만, 게이타이는 암살되었다고 주장했고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게이타이 천황이 527년에 죽었지만 센카(宣化)는 가공의 인물일 뿐이고 안카(安閑)가 8
년간을 재위하여 535년에 킨메이 천황이 즉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라사키쇼우이치로우
(白崎昭一郎)는 안카(安閑)의 재위는 4년이고 그 다음은 4년 동안은 센카(宣化)・킨메이(欽明) 두 조정이 병립
했다고 보았습니다. 참고로 유명 역사 소설가인 구로이와쥬코(黒岩重吾 : 1924∼2003)는 『일본서기』게이타이
천황조의 기록을 토대로 천황 및 태자, 황태자가 동시에 죽었고 안카나 센카는 즉위도 못하고 연금·암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서기』의 연대를 판별하는 것은 일단 분명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들의 사서에 나타나는 연대와
비교하는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킨메이 천황의 등극도 킨메이조에 나타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선별하고 이것을 다른
사서와 비교한다는 말입니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 15년에 백제 성왕이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리입니다.
성왕의 전사는 다른 사서 즉 『삼국사기』에서는 554년이므로 킨메이 천황은 사실상 539년에 즉위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도(일본)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이 서거한 이후 거의 10여년을 정치적 혼란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가족들이 모두 전멸한 것이고요.
다음으로 게이타이 황족들을 몰살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간단하게 한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결과만으로 본다면 킨메이 천황이 정권을 장악했으니 황족들을 시해한 자들은 킨메이 천황 계열의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킨메이(欽明)라는 시호(諡號)를 보면 킨메이 천황이 이들을 몰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도
합니다. 즉 킨메이(欽明)라는 말 자체가 '매사에 공경하고 도리를 밝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킨메이 천황이 게이타이 계열을 몰살했다면 이런 시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상한 것은 안칸 천황
에서 안칸(安閑)의 의미도 '편안하고 안정되었다'는 의미이고 센카(宣化)도 '덕이 있는 정치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인데 3년도 못 채우고 몰살당한 왕들에게 올리는 시호로는 적합한 것이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이 안칸천황
이나 센카 천황은 가공(架空)의 천황으로 이름만 나오는 천황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서거한 때부터 대략 10여년 간은 극심한 정치적인 혼란기였거나 후사(後嗣)가 없어서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통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 [그림 ④] 킨메이 천황릉(奈良県高市郡明日香村大字平田 소재) |
이 많은 주장들에 대하여 아직도 속 시원하게 밝혀줄만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자손들이 거의 전멸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만약 안칸이나 센카 천황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게이타이 천황은 후사 없이 서거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개로왕 - 곤지왕(유라쿠 천황)의 직계 혈손들은 무령왕 - 성왕 계열 밖에는 없는 것이죠.
당시 생존하고 있는 부여계의 가장 큰 어른은 바로 성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부여계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성왕이었고 성왕이 양국의 제왕이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점입니다.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왕과 깊은 관계를 가진 친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째는 성왕 당시 일본출신 관료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왕 때는 무려 13여 년간 백제에 있던 일본출신 관료들을
관례적으로 일본에 파견해왔는데 성왕의 서거 시점을 기점으로 중단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본에 일본 출신의
관료들을 보내는 것이 관례라면 성왕의 서거 후에도 이 일은 지속될 터인데, 그것이 성왕 서거의 기점에서 즉각
중단 되는 것도 이상합니다.
카사이 와진(笠井倭人)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성왕 때에는 일본계 백제관료들이 대거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는 킨메이 2년 7월(성왕 19년)에 시작하여 킨메이 15년 554년에
끝이 납니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모두 20여 건의 외교단을 파견하는데 그 가운데 11건은 일계 백제관료 또는
일본 출신 사람들이 포함된 것으로 전체의 60%에 가깝습니다.8)
이 부분도 의심스럽죠? 즉 아무리 성왕이 서거했다고 해도 13여년 간 지속되어온 일이 갑자기 중단될까요?
만약 관례적으로 많은 일본계 백제관료들이 일본으로 갔다고 하면 성왕의 서거로 인하여 중단될 사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해봅시다. 고바야시야스코(小林惠子) 교수의 지적과 같이 성왕이 서거하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면 더 이상 일본계 백제관료가 올 이유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바야시야스코 교수의 견해가
옳다면, 성왕은 일본의 안정을 위해 심복(성왕 직속 친위세력)들을 지속적으로 파견했을 것이고 본인이 직접
일본을 가게 되었을 경우 더 이상 일본계 백제관료를 파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째, 야마토와 고구려의 대외 교섭 상황입니다. 고구려와 부여계는 오랜 숙적 관계였는데 라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고 한강유역을 다시 신라에게 상실함으로써 야마토 정부는 고구려와의 교습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고구려와 왜왕권의 공적인 교섭이 시작된 것은 570년경입니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천황
31년(欽明紀 31년 : 570), 비다츠 천황 2년(敏達紀 2년 : 573), 동 3년(574)에는 3차에 걸친 고구려사신의 왜국
파견 기록들이 나타납니다.9)
이전 시기에도 일부 고구려인들의 열도 방문 기록이 없지는 않지만 570년 경의 일본 열도에는 왜 - 고구려의 공적
교류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국내외적인 큰 정치 불안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고구려 안강왕(安原王 : 531~545)의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대란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작은 왕후 측에서
무려 2천명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이어 즉위한 양원왕(陽原王) 13년(557)에는 모반 사건이 일어납니다.10)
그런데 문제는 일본 열도와 고구려가 공식적인 교섭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킨메이 천황의 서거를 전후로 한 때라는
것이죠. 만약 야마토 왕조가 성왕과 무관하다면 고구려와의 교섭은 훨씬 이전에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서 고구려와 교섭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해가 안되지요. 그러나 만약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동일인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즉 성왕은 부여세력의 중흥을 위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이 당시 성왕은 고구려에 대해 매우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위기에 처한 일도 많았습니다.
만약 성왕이 신라병에 의해 554년 서거했다고 하면, 야마토 왕조가 고구려와의 교섭을 미룰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70년경에 고구려와 대외적인 협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은 성왕이 가진 특별한
이유 때문일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쉽게 됩니다.
즉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으로 신라와 연합하여 원래의 부여지역을 회복했으나 신라의 공격으로 또 한 번 큰 상처
를 입은 상태에서 신라와의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와의 협력도 불가능한 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심리적 공황상태라고 해야겠죠?
이제는 역으로 일본 측에서 킨메이 천황으로부여 성왕과의 연관성을 추적해봅시다.
첫째, 킨메이 천황이 부여계(백제계)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즉 킨메이 천황의 아드님인 비다츠 천황이
부여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아버지도 부여계가 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보면, 비다츠 천황에
대해서 『신찬성씨록』은 분명히 백제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킨메이 천황은 반도부여계(백제계)인
것이죠. 이 점은 홍윤기 교수도 충분히 지적한 부분입니다.
둘째, 킨메이 천황이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이 고구려를 정벌합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의 대장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킨메이 천황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본이 고구려를 공격합니까?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23년 8월 초에 천황이 대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칩니다.
이 때 고구려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고 야마토의 대장군은 고구려 궁중을 점령해 왕의 침실 장막 7개, 철옥(鐵屋·
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1개, 미녀 원(媛)과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빼앗아 와서 킨메이 천황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도의 군대가 고구려의 왕도를 점령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죠?
열도의 야마토 정부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병력을 바다 건너 이동 시키고 가야와 신라를 지나고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는 등 열도가 고구려를
침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구려의 국력을 감안해본다면, 일본이 국력을 총동원해야할 정도의 병력과
장비를 운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고구려 정벌이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거나 그 만큼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징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공격 주체가
사실상 백제(반도부여 : 남부여)의 왕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야마토의 대장군도 백제장군이
아니면 납득하기 어렵죠. 그러나 킨메이 천황이 반도부여왕을 겸임하거나 성왕과 동일인이면 아무런 논리적 모순은
없어집니다.
문제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킨메이 23년 즉 562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에는 어떠한 왜군의 공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백제의 공격도 없었습니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를 그대로 인용해 봅시다.
① 「고구려 본기」의 경우 "평원왕 2년(560)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였다. 3년(561) 4월 이상하게 생긴 새가 궁정에 날아들었고 6월에는 큰물이 있었다. 4년(562) 2월 진(陳)
나라의 문제가 왕에게 영동장군의 벼슬을 주었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양원왕)
②「신라 본기」의 경우 진흥왕 19년(558)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부호들을 국원에 이주하게 하였다.
23년(562) 백제가 신라 국경의 민호를 침략하므로 왕이 이를 막아 1천여명을 잡아죽였다."
(『삼국사기』「신라 본기」진흥왕)
③「백제 본기」의 경우 "위덕왕 6년(559) 일식이 있었다. 8년(561)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신라병이 출격하여 패하니 죽은 자가 1천여명을 헤아렸다."(『삼국사기』「백제 본기」위덕왕)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왜병이 고구려를 침공한 사실이 없군요, 더구나 백제군이 신라나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공격
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킨메이 23년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죠? 만약 사실이라면 562년의 사건이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의 사건
이었겠죠.
만약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위의 사건과 비교적 비슷한 사건을 꼽으라면 성왕 28년의 기록입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백제가 고구려를 압박하는 기간은 성왕 26년(548)에서 성왕 28년(550) 동안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킨메이
천황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유사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습
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의 기록을 이 시기로 소급해 보면 이 비밀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쉽게 해소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 고구려 공격의 주체는 반도부여(남부여 : 백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성왕 26년~28년)는 고구려의 양원왕(545~559)에 해당하는데 양원왕 대에서는 고구려가 백제에 상당히
밀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죠. 즉 『삼국사기』에는 양원왕 4년(548) 봄 정월,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
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6년(550)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으며,
10년(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킨메이 23년조의 기록은 아마도 550년 백제의 성왕이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한 것을 과장한 것이 아니
었나 생각됩니다.
▲ [표 ①] 킨메이 천황 시기 일본 천황들의 시호 |
여기서 사족(蛇足)을 하나 달면서 『일본서기』의 편집과정을 짐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하게도 만약 우리가 『고사기』의 기록에 따라 킨메이 천황이 528년(또는 527년) 즉위했다고 가정하면,
킨메이 23년이 바로 양원왕 6년경에 해당하므로 『일본서기』의 기록과 『삼국사기』가 일치하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킨메이 천황의 재위 기간은 32년인데 성왕의 재위 기간도 정확히 32년입니다.
마치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정치적 압력 속에서도'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려고 한 듯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사건들을 일관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짜집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서기』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적당하게 편집한 것인데 그런 편집의 과정에서도 그 흔적들은 남기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 의도로 역사를 자의적으로 편집·변조하는 것은 열도쥬신[日本]이 매우 위험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할 행태입니다).
따라서 킨메이 천황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사실이 아니지만 만약 이 사건이 분명히 실재했던 사건이라면
그 주체는 백제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양원왕 6년 사건(551)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지요.
결국 이 사건은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라면 상당한 일관성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 여러분들은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킨메이 천황과 백제의 성왕이 동일인물인가 하는 점을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고바야시 교수에 의해 제기된 것이지만,
홍윤기 교수의 견해뿐만 아니라 제가 분석한 견해만으로도 아직은 증거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좀 더 다른 각도에서 킨메이 천황과 백제 성왕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필자 주
(7) "取百濟本記爲文。其文云。大歲辛亥三月。師進至于安羅營乞。是月。高麗弑其王安。又聞。日本天皇及太子
皇子俱崩薨。由此而。辛亥之歲當廿五年矣。後勘校者知之也。(『日本書紀』繼體天皇 25年)"
(8) 笠井倭人「欽明朝百濟の對倭外交 日系百濟官僚をとして」『古代の日本と朝鮮』(上田正昭·井上秀雄 編,
學生社 : 1974)
(9) 李弘稙,「日本書紀所載 高句麗關係 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71), 山尾幸久,
「大化前代の東アジアの情勢と日本の政局」(『日本歷史』229, 1967), 栗原朋信,「上代の對外關係」
(『對外關係史』, 山川出版社, 1978), 李成市,「高句麗と日隋外交」(『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歷史』, 岩波書店, 1998)
(10) 『日本書紀』欽明紀6年, 7年條와 그 分註의 「百濟本記」참조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