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본당 소학골
천안 성거산 일대에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 많다. 천원군의 남쪽과 동쪽 지역인 목천면,
북면, 풍세면, 광덕면 일대가 바로 그 곳이다. 성거산 일대의 공소를 설립순으로 보면 서
덕골(목천면 송출리)은 1884년에 두세 신부가, 먹방이(먹뱅이 : 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소학동(쇠악골 : 북면 납안리) 공소 역시 1884년과 1888년에 설립하였다.
사리목(북면 납안리) 공소는 1901년 드비즈 신부가, 매일골(목천면 송출리) 공소는 1895
년 귀를리에 신부가 설립하였으며 석천리(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도촌(북면 납안리) 공소
는 1913년, 1920년 이후에는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가 설립하였다.
소학동 사리목은 목천 북면 소재지를 거쳐 남안리(도촌)까지 약 23km 정도 들어가는 깊
은 산골이며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은신하여 살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지금은 공군 ○○부대가 주둔해 있지만 증언자 최병기씨의 말에 의하면 박해시 교우들이
망을 보다가 포졸들이 나타나면 깃발을 갖고 신호하며 망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워낙 깊
고 나무가 울창하여 소학동 계곡에 숨어 있으면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도 능
선 계곡을 따라가 보면 증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소학골은 1866년 병인박해시 깔래 강 신부, 페롱 신부, 뮈델 주교, 두세 신부, 베르모렐 신
부가 숨어 지내며 암암리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1월 초순경 전프란치스코 사베리오(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건학 공소 회장)
와 이요한(경북 문경군 문경읍 증평리여우목 공소 회장, 성 이 윤일의 아들)은 부럭이(충
북 제원군 덕산면 월악리)에서 예천 포졸에게 잡혀 예천 현감 경유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
어 공주 감영에서 음력 1865년 12월 10일, 양력 1866년 1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
였다. 이들이 순교한 몇 주 후 강 신부는 건학 공소에 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 무렵 2월 23일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가 서울에서 체포된데 이어 불란서 신부들
이체포되었다. 이 때 강 신부는 속속 날아드는 비보를 듣고 3월 초순부터 사목활동을 일
체 중단하고 5월 말에는 이 곳 소학골 교우촌(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으로 피신하여
머물렀다.
강 신부는 자신도 곧 붙잡혀 순교하리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제 6 신 서한(1866년 6월 8일)을 썼고 역시 제 7 신 서한(1866월 6월 10일)도 소학골
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올렸다.
이 서한은 조선의 12명 선교사 중 3명만 살아 남아 있다는 소식과 높은 고산 준령의 교우
촌으로 피신하며 겪게 되는 고충과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생존한
선교사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를 본국에 알리고자 조선 교우와 함께 출범해 산동반도에 도
착하여 강 신부의 서한을 발송했다.
리델 신부가 탈출한 다음 페롱 신부는 강 신부를 찾아와 함께 소학골에서 칩거하였다. 그들
은 10월 11일 조선 배로 출범하여 이틀 동안 조선 연안을 항해하다가 다행히 청국 밀수꾼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탈출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출국한 후 얼마 안되어 목천의 포졸들이 소학동(또는 소학골) 교우촌을
덮쳐 소학골 교우 5명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음력 1868년 11월 8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5명은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고의진(요셉),
채서방 며느리이다. 치명일기 509 - 513호에 나온다.
현재 이 곳에는 제 1, 제 2의 묘역이 있는데 제 1 묘역에 38기, 제 2 묘역에 30기의 순교
자및 신앙 선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 유해들은 1959년 성거산 정상에 있는 미군
통신기지 건설을 위해 도로를 만들 때 발굴된 유해들로써 그중 인부들이 제 1 묘역에 38
기의 유해를 이장했고 제 2 묘역에 30기의 유해를 이장했었다.
그후 1998년 3월 21일 제 2 묘역 뒤쪽에서 이 성지를 총지휘하고 있던 천안 성황동 천주
교회 김동억 신부의 지시로 묘분으로여겨지는 일곱 봉분을 발굴한 결과 다섯 무덤에서 유
해가 발견되었고 한 무덤에서 가로 3cm 세로 6cm의 청동 십자고상이 발견되었다.(대전
가톨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이 5구의 유해를 제2묘역에 안치함으로써 총 73기의 유해
가 이 곳에 안장되었다.
이 유해들은 공주 감영에서 1866년 11월 8일자로 순교한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
로), 최종여(라자로)와 고요셉 그리고 채서방 며느리 등 5명의 순교자들을 비롯, 무명 순
교자들과 이 곳을 중심으로 한 신앙 선조의 유해들이다.
원래 이 곳에는 200여기의 신자들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박해중에 급히 묘지를
만들었고 또 후손들이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미군 기지 군사
도로를 개설할 때 그 도로 구간에 있던 유해들과 5구의 유해, 총 73구만 모시게 되었다.
대전교구장 경 주교님은 1998년 7월 22일자 교구장 공문(제 98-7호)을 통해 천안
성거산 교우촌 유적지 소학동과 순교자 묘소를 교구의 성지로 공식 인준하셨다.
첫째, 성거산 유적지를 성거산 순교자 성지라 칭하고 교구 성지로 승인한다. 둘째, 성거산
순교자 성지 보존과 관리는 천안 성황동 본당에서 계속 책임을 지고, 성지의 지속적인 개
발은 천안지역 본당의 도움을 받아 성황동 본당 주임신부 책임 하에 실시한다."라고 하셨
다.
현재 제1, 제2 묘역에 십자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십자가의 길 15처상, 제대 두 곳
등을 건립하고 나무와 꽃잔디로 조경을 이루고 있으며 휴식 공간도 마련해 놓고 있다.
이 곳은 해발 500m 고지에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 청정한 공기 등이 있어 야외 수련
장소, 피정 장소로도 아주 빼어난 곳이다.
출처 - ocatholic.com
첫댓글 그새 성거산 성지를 다녀오셨군요...그저...나의 눈에는 아드리아나 님의 해맑은 웃음이 젤로 먼저 눈에 띄는군요.^ ^ 사비나 할머님과 함께 연로하신 분들까지 모시고 다녀오셨다니..정말 대단하십니다...성거산 성지에 계시는 신부님께서는 야생화를 좋아하신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만나 보셨나요...예전에 카페에 가입하고 계시다며..쪽지도 보내주셨다는 그 신부님 말입니다...^&^ 궁금한 마음으로...두루 돌아보고 있습니다..몇일 많이 앓았구요...또 합창단에 가입하여 몇일 바뻤답니다..평화를 가득히 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