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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상징의 주술사
198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젊은층의 지적 허영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도구였듯 1970년대 중반엔 ‘청년문화’라는 용어가 풍미했다. 이 시절 이상남(李相男·55)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 무렵 한국의 청년문화는 미국 등 서구에서 일던 청년문화와는 궤를 달리했다. 반전, 평화운동 등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청년문화가 기존 문화에 대한 일탈, 저항의 성격을 띤 것이라면 한국의 그것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일군의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주류문화와는 다른 양태의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는 요즘 사람들에게 그냥 ‘청년문화’라는 단어를 던져주면 대부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렇듯 언어 자체의 상징인 글자, 즉 기표(記標)와 그 글자가 의미하는 기의(記意) 사이에는 상상 이상의 편차가 있다. 언어 또는 상징은 하나의 의미 또는 기호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인 주변들이 작용하면서 각각 다르게 전이된다.
역마살의 특권
아무튼 뽕짝조의 대중가요가 포크 계열로 변화한 것이 한국 청년문화의 주류이던 시절, 지금은 화단의 중추로 자리매김한 이상남, 이일(재미), 고영훈, 김장섭 등 홍익대 미대 72학번 동기 4인이 패기 있게 모여 신문회관화랑에서 ‘종횡전(縱橫展)’을 열었다. 개학을 앞둔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대중가요의 변화만으로 청년문화를 설명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싶던 청년문화론자들은 이들의 행보를 주시했다. 이들의 전시 브로슈어 제작 경비를 ‘청년문화’라는 단행본을 낸 출판사가 지원했을 만큼 이들은 미술계 청년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화단이 이들을 주목한 것은 단순히 청년문화의 기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핵심은 조형과 회화의 파격이었다. 당시는 회화의 전면성과 물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벽지처럼 은은한 색 일색의 회화나 화면의 질감에 천착하는 우윳빛 그림이 ‘집단개성’이라는 언어로 설명되던 시대였다. 반면 그들이 내건 그림들은 확연히 달랐다.
그런 시절에 고영훈의 덩그러니 그려진 현무암 덩어리, 기계부속들이 뒤엉켜 전혀 작동할 수 없는 엔진 같은 이일의 그림, 3분의 1쯤 열린 창문을 희미하게 찍은 이상남의 사진은 파격이었다. 김장섭의 마티에르로 뒤덮인 평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반항은 청년문화의 특징인 일탈과 저항 그 자체였다. 그러나 미술계 주류가 우려와 함께 이들을 용인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들의 새로운 활동에 다른 젊은 작가들이 동조하는 걸 차단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감수성과 환경에서 자라난 그들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상남은 발군의 역량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당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이라 할 ‘에꼴 드 서울’전에 최연소 일원이 된다. 또 일본에 거주하던 미국 미술비평가 조지프 러브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등 일본 비평가들과의 만남은 한국이라는 한정된 세계를 벗어나 세계로 향하려는 그의 운명적 역마살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조지프 러브는 3분의 1쯤 열린 창문 사진 작품을 통해 여백과 공간, 그리고 물성과 심연의 차이를 사진이라는 평면을 통해 보여주는 이상남의 한없는 깊이와 공간감에 매료돼 있었다. 더욱이 이상남은 그때 막 약관을 넘긴 나이였다. 이런 연유로 1977년 도쿄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 전에 참가하게 됐고, 타이베이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 전에도 대학시절 은사들과 함께 참여한다. 이어 1979년 일본 고마이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것을 비롯, 마키갤러리 등 여러 일본 화랑이 기획한 각종 그룹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열망은 다 채워지지 않았다. 못 말리는 역마살을 달랠 기회는 또다시 왔다.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선정된 것이다. 그는 지구 반대편의 상파울루를 거쳐 파리에 닿게 된다.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원천 봉쇄되다시피 했던 시절 김환기나 김병기 등 선배작가들처럼 그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해외로 나가는 통로로 삼은 것이다.
파리는 이미 뜨거운 미술의 현장을 넘어 하나의 역사가 돼 있었다. 그는 파리 정착이 미술가로서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1년 만에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미국행을 노린다. 그러던 1980년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무대미술상을 수상한다.
‘청년문화’라는 다소 치기 어린 사건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한겨울이나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여권을 소지하고 외국여행을 간다는 것은 특권층이나 누릴 호사이던 때 일본이나 브라질에 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청년기는 아름답고 소담스러웠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취한 꽃들은 이내 땅바닥에 떨어져 추하게 뒹구는 법. 그는 화려했던 봄날을 접고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죽기 아니면 살아남기
1981년 뉴욕에 도착했다. 그에게 뉴욕은 희망의 도시인 동시에 절망의 땅이었다. 물 설고 낯선 그곳에서 인간과 작가로서의 삶을 동시에 이어가야 했다. 뉴욕에 왔을 때 그를 뼈저리게 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한국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배운 현대미술이란 것이 단지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안젤름 키퍼 등 독일 신표현주의가 이미 소호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줄리앙 슈나벨, 데이비드 살르, 에릭 피슬, 로버트 롱고 같은 미국 작가들의 새로운 구상이 각광받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주로 회화나 조각 등 전통적인 형식을 사용하는 절충적인 작품으로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고향을 잃어버린 듯, 조상을 잃어버린 듯했다”고 회고한다. 어떤 것도 그리거나 만들 수 없는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그려보기로 마음먹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3~4년간 화실에 틀어박혀 자신을 버리자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머리로, 입으로 그리던 그림을 손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화가로서의 뛰어난 기질이었다. 그는 신주류로 등장한 이탈리아, 독일, 미국의 새로운 구상회화류 작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려낼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이상남식’ 그림을 실험했지만 그게 어느 날 문득 득음(得音)하듯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쉬운 길을 골라 뉴욕이라는 미술인들의 정글에서 잠깐 반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만의 회화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잡아간 가닥은 교조적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삶과 분리하지 않았다. 노동과 번민이라는 심적 육체적 고통을 자신이라는 개체에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의 내외부가 일체를 이룬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기초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미술과 자신이 유리되지 않은, 대중과 자신의 작품이 일체화할 수 있는 장치들을 연구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의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회화의 전통 중 수공예적인 기법에 주목했다. 그리고 언어가 갖는 문학적 다의성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기호, 상징으로서의 회화를 화두로 잡았다. 그 화두를 자신의 내외부와 싸우는 도구로 삼아 삶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자고 다짐했다.
그린버그류의 자기만족적인 모더니즘은 사람들과 동떨어진 산꼭대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미술을 원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신구상회화다. 이들은 전통적 화법을 사용해 자유로운 주제를 구사하는 새로운 흐름으로 1980년대 세계 미술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이런 흐름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이상남이지만, 쉽게 구상적인 소재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입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서양 사람들도 알고 있는 보편적인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것 또한 한계였다.
기호 뒤에 은닉된 자아
오랜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게 오늘날 이상남 회화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그림’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인 그림’이다. 그는 보편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와 상징이라는 체제 속에서 자신만의 대체 상징을 고안해 냈다.
기호와 상징이라는 보편적인 약속이 개인적인 감성과 사고의 편차로 인해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며 때로는 오독되는지 알고 있었다. 소통의 허구성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어긋남에 주목했다. 그래서 매우 단순한 기호,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사용해서 화면을 구성했다. 아니 구성한다기보다는 ‘슬그머니 던져둔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언어에는 수많은 세계가 있으며 지구상의 인간만큼이나 그 의미도 변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라는 단어는 사랑하는 연인을 부를 때와 누군가를 위협하기 위해 쓸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하나의 언어가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라고 불렀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고민해온 문제를 작품으로 다루는 데는 그의 사변적인 기질, 대상을 형상화하는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오랜 시간 뉴욕에서 살면서 문화와 관습의 차이로 인해 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불편함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나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뉴요커를 자처하는 토박이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연스럽게 비트겐슈타인에 빠져들었다.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의 차이는 그 언어를 이해하고 뜻을 한정시키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언어의 보편적인 의미는 일상적이지만 그 일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진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선택한 이방인의 삶에서 체득한 언어의 문제, 소통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는 소통을 위한 언어의 일종으로서 기호 또는 상징의 보편성을 역으로 추상화함으로써 구체성을 제거하면 진정한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최대한의 단순화, 의미 없음을 통해 언어와 이미지를 무장해제시키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화면의 물질화에서 출발한다. 캔버스건 패널이건 수십번의 작업을 거치면서 화면은 물성화한다. 또한 기하학적인 그림이라 할지라도 화면을 부수고 나오든지 아니면 파고들어가는 ‘부피의 눈속임’이 필요하지만, 그는 이런 행위를 일절 거부하고 이미지 또는 기호 그 자체에 매달린다. 그의 기호는 디지털을 가장한 아날로그형이라는 점도 흥미로울 뿐 아니라 작업 자체도 반(反)디지털적이고, 작업과정도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작품의 외형적 단순함과는 배치된다.
껍데기들은 가라
언어로서 또 시각매체로서 이미지는 오늘날 대단한 힘을 가져 현대문화비평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가 됐다. 언어학의 소쉬르와 촘스키, 도상해석학의 파노프스키와 곰브리치로부터 출발해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가 언어와 이미지를 통합해서 오역과 오독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언어와 이미지는 현실 그대로를 오성(悟性)에 표상하는 완벽하고 투명한 매개체가 아니다. 이미지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인 언어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W.J.T. 미첼의 지적처럼 “세계를 향한 투명한 창이기보다는 불투명하고 왜곡되고 자의적인 표상기구를 감추는 기만적인 자연성과 투명함의 외관을 지닌 기호의 일종으로, 이데올로기의 신비화 과정”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징으로서의 이미지는 이상남에게로 와서 언어처럼 보편적 기호의 의미를 버리고 이미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기호이자 보편적인 이미지다. 즉 지금까지의 언어적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존재하면서 한 점의 그림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남 회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눈여겨보면 그의 회화의 본령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연이나 대상을 묘사하고 담아낸 전통적인 회화를 보고 그 대상들의 의미를 통해 그림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관객의 보편적 감상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작가가 어떤 것을 담아냈든 보는 이가 자신의 의지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 또는 언어 대체재로서의 이미지는 수사와 장식으로 치장되면서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또 다른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한자가 자연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문자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어려운 문자가 됐듯이.
따라서 그는 이미지 또는 기호로부터 장식을 배제하고 기호 또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 회화가 되는 방식을 택한다. 이런 그의 초기 작품에선 종래의 관념적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구석이 보인다. 크게 원이나 사각의 면을 그리고, 그 안에 기하학적인 도형이 자리하는 형태로 여전히 관념의 앙금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환영의 개입
그러나 이후 새롭게 완성한 작품들에서는 이를 거뜬히 극복했다. 이즈음의 작품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해서 어떤 상상력이나 개념도 개입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언어나 기호가 이미지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순수한 본질이 된다. 그래서 화면에 당당하게 자리한다.
이런 그의 회화에 대해 많은 사람은 종래의 ‘그림읽기’ 방식으로 접근하곤 이내 단념하고 만다. 그의 회화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다양하게 적용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품의 밀도, 완성도를 위한 그의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노력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조차 언어의 개념을 위장(camouflage)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언어나 이미지는 또 다른 언어나 이미지로 번역되고 설명되면서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상남의 기호와 회화 앞에서는 이런 번역이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 자체가 완벽한 이미지이자 언어인 때문이다.
이런 의미 없는, 아니 무의미하기 때문에 관객에겐 유의미한 그의 작품들은 조금씩 친절함을 보이기 시작한다. 도형들은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고 진화하면서 그 과정을 은근히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기초단위로 치환되던 기호가 새로운 운동감과 변화를 화면에 던져준다.
이렇게 그의 화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유의 과정처럼 기호들이 흐른다. 그 흐름은 순차적인 고정을 보여주지만 원형은 하나다. 그 원형은 요즘 그가 즐겨 사용하는 옻칠기법을 통해서 원형임을 암시한다. 그 원형에서 파생된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도형은 기호이자 이미지이고 작품을 구성하는 조형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리드미컬하게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하나다.
그리고 그 언어는 보편적인 언어로 서술하기보다는 관객 스스로 각자의 생각대로 이야기를 떠올려볼 기회를 제공하는 실마리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환영(幻影)을 제거함으로써 관객의 환영이 개입할 여지를 던져준다. 뒤샹이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줬지만 막상 열고 들어간 관객은 아직도 미로에서 헤매고 있다. 하지만 이상남은 현대미술의 아이디어나 복선의 가지를 쳐내면서 출구에 촛불을 하나 켜놓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관객이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언어의 주변을 감싼 철학적 장치와 장식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구원처럼 보였지만, 언어라는 보편을 가장한 틀 속에 갇혀 되레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사실을.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Ronco di Mar - B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