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너구리가 물러갔나보다. 새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새들은 또 제 각각 목소리 내며 즐겁다. 아침부터 예취기 돌리고 잔디 깎기 기계 돌리는 남자, 부지런하면 복 받는다는데. 그 복이 다 어디로 스몄을까. 덕분에 텃밭을 한 바퀴 돌았더니 아침 식탁이 푸짐하다. 깻잎도 살짝 쪄서 양념장에 쌈 싸 먹고, 풋고추 된장 찍어 먹고, 가지와 양파 쪄서 무치고 국물김치 냈더니 배꼽이 톡 튀어나온다. 중노동하는 남자 영양가 있는 육 고기라도 싸 먹여야 하는데.
아랫집 형님이 목침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남자는 나무를 다루고 있으면 더위도 잊는단다. 비 오는 날 투닥투닥 드르륵 드르륵 하더니 목에 대는 것은 가벼운 오동나무로, 머리에 대는 것은 향나무로 만들었다. 예쁘다. 목침 세 개를 가지고 형님 집에 갔더니 품삯을 많이 줘야겠단다. 돈 벌었네. 헤벌쭉 웃었다.
형님은 몸보신 하라고 홍삼 다린 것을 준다. 쭉 마셨다. 몸에 좋은 것이라니 주는 대로 먹어야지. 형님은 물김치를 한 다래기 담가 놨다. 며느리 셋에 딸이 하나니 넉 집 퍼주고 자기네도 먹으려면 그 정도는 담가야 한단다. 덕분에 나도 한 통 얻어 왔다. 시댁 물김치가 바닥 나 가는데. 참 잘 됐다. 시댁에 가지고 갈 생각을 하다가 혼자 웃는다. 우리 집 식탁은 빈약해도 시댁 식탁은 풍성해야 하니 이것도 병이다.
남자가 부엌살이 못 면하는 아내가 안쓰러운지 바람 쐬러 가잔다. 그것도 근교에 사는 큰 언니 집에. 감자와 양파를 가져다 먹으라고 했기에 겸사겸사 들릴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딸 이사 가는데 가야 한단다. 또한 양파고 감자고 다 나누어 주고 별로 없단다. 딸과 사돈댁에 한 두 박스 씩, 아들과 사돈댁에 퍼 주고 나니 잔챙이만 남았단다.
그렇구나. 정 나눔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이다. 자식이 줄이 된 사돈댁부터 챙기는 것이 사람의 정이다. 친정식구나 시댁식구, 자매나 형제보다 자식과 며느리, 딸과 사위의 사돈댁이 우선이다. 알고 보면 내 아들, 내 딸 잘 봐 달라는 뇌물성이 농후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정 나눔의 흐름 아닐까.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일수록 정 나눔은 물 위에 뜬 부포처럼 눈에 보인다.
언니 집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불 빨래만 잔뜩 한다. 눅눅했던 이불이 까슬까슬 말라가는 것처럼 내 마음의 눅눅한 때도 벗겨져 말갛게 말랐으면 좋겠다. 남편은 고사리 밭에 풀 매러 갔다. 아랫집 감산 아저씨는 예취기로 감산의 풀을 베기 시작했다. 예취기 도는 소리 골을 쩡쩡 울려도 듣기 좋다. 농부는 나이 들면서 고단한 중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하는데. 칠십 밑줄에 앉아도 중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아프다. 농사짓는 일이 갈수록 버겁기는 우리 집도 마찬가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