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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 목숨을 바처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1,828년 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발을 들여놓은지 어연 1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에 많은 선교사들이 태국에 와서 일생을 바첬으며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땅에 와서 젊음을 불태웠고 때로는 야수들의 밥으로 혹은 아직은 미개한 산족들의 희생물로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하였고 아직은 복음을 모르던 왕조들에 의해 본보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하였다. 선교 180주년을 맞이하는 태국교회, 아직은 전국민중의 몇 %가 기독교인인지 잘 통계가 안나오고 어떤이는 1% 어떤이는 많게는 1.5% 적게는 0.5%를 이야기하는 태국교회 성도들, 이땅을 지섬기는 늦게 부르심을 입ㅇ른 선교사의 한사람으로 태국교회가 다시한번 주님이 주시는 부흥을 경험하며 이땅에 복음의 계절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며 그 동안 이 땅에 와서 젊음을 바첬던 몇몇 존경하는 선배들의 족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다니엘 맥길버리(1828, 16th May - 22nd Aug, 1911) - He was the pioneer and founder of Nothern Thailand.
다니엘 멕길버리 선교사는 1828년 5월 16일 미국의 노스 케롤라이나에 있는 무어 카운티에서 태어났고 1911년 8월 22일 83세로 태국 치앙마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다니엘 멕길버리 선교사는 태국 북부와 라오스 지역 선교의 개척자였고 선교의 초대를 구축한 분이시다. 그는 그의 생애중 53년간을 태국에서 보냈으며 그중 44년간을 태국 북부의 중심지인 치앙마이에서 보냈다.
멕길버리 선교사는 인종적으로는 스코트랜드인중의 스코틀랜드인이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말콤 멕길버리는 1789년에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스코틀랜드의 동료들이 먼저와 정착해있던 노쓰케롤라이나의 스코틀랜드인들의 정착촌에 합류하게 된다. 멕길버리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살이 되어서야 그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계의 어머니와 재혼한 새어머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일곱 남매중의 막내로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금요일에 예배를 시작하여 월요일에 예배를 마친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런 환경에 둘러쌓여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멕길버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는데 당시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려면 값비싼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당나귀같았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윌리암 빙함 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도록 주선하여 21세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후 피츠보로에 있는 학교에서 4년동안 가르치는 일에 전염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새로 조직되어진 장로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되었고 1,856년 말에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세미나리(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가 프린스톤 세미나리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복음전도에 관심을 갖게되었고 텍사스에서 그의 직업중의 하나로 생각하였으나 그 지역에 너무 많은 교회가 있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추구하는 한가지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이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는데 1855년 어느 날 학교에서 대학원 수업을 하는 중에 태국에서 선교하시는 사무엘 하우스 목사님께서 오셔서 설교를 하셨다. 이때 젊은 멕길버리는 갑자기 커다란 빛을 보았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새로운 나라! 추수를 기다리는 땅, 흔들리는 회화나무의 낙엽, 전리품이 아닌 영혼들!! 그는 깊은 감동을 받고 곧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다니던 신학교의 과정을 끝내고 일정한 기간은 교회에서 섬겨야 했다. 드디어 1858년 6월 18일 그의 학교 친구였던 윌슨(J.H. Wilson)과 함께 1837년에 방콕으로 파송되어 지금은 태국 선교부의 대표가 되어있는 단 비치 브레들리(Rev. Dan Beach Bradley, M.D.) 목사님과 협력하기 위해 태국에 도착하였다.
멕길버리는 1860년 12월에 당시 방콕에서 사역하고 계셨던 브레들리 목사님의 딸인 소피아 로이스와 결혼을 하고 왓 챙이라는 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치앙마이의 봉건영주였던 차오 까윌라롯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당시 방콕의 봉건 영주인 몽쿳왕을 배를 타고 와서 정기적으로 알현하였다. 실질적으로 치앙마이의 절대적이며 독립적인 통치자였던 차오(그시대의 대표를 그렇게 부름)라고 할지라도 태국 왕에 의해서 임명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더 많은 추수할 지역을 찾고 있던 멕길버리는 그 차오와 치앙마이에서의 선교사역의 가능성에 대하여 의논하게 되었으나 차오는 공식적으로 멕길버리에게 약속하지 않아 그 문제는 잠시 보류되었다.
멕길버리는 당시에 선교부의 정책에 의해 새로운 선교지를 개발하도록 태국의 남쪽지역인 페차부리에 파송되었으나 그곳에서 그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남북 전쟁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멕길버리는 미국의 남부를 열렬히 지원하는 입장이었으나 반면 그의 동료선교사였던 맥팔랜드는 미국 북부를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당시 그들이 보낸 월간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오는 편지와 신문을 읽기 위해서 각자의 집에서 쉬며 이따금씩 저녁에 만날 때에 느끼는 유황같은 침묵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멕길버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묻기도 하였다. “맥팔랜드, 너는 영국 정부가 미국에 부과한 거대한 국가 채무를 신문에서 보지 않았냐 ?”고 물었는데 이것은 가장 유머스럽지 않은 역사적인 코멘트였다. “이것은 안전한 주제야. 외국 선교사들의 생활과 사역에 대한 연례보고서에서 확실히 기독교인들의 관용에 대한 터무니없이 큰 본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빛이 있었다. 멕길버리는 페차부리 근처에서 태국 북부의 타이족 죄수들이 오래 전에 이주하여 정착한 집단 공동체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의 기록을 보고 멕길버리는 무척 감동을 받았고 북부지역 탐사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와 윌슨은 1863년 11월말에 방콕을 떠나 1864년 1월 30일에 돌아왔다. 당시에 치앙마이에는 단 열흘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멕길버리는 “하루 동안에 내가 치앙마이에 정착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치앙마이와 그 인근지역이다.
그 이후 거의 3년간은 계획이 지연이 되었는데 이는 치앙마이 지역의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하기 위해 APM(미장로교선교부) 선교부와 태국 정부로부터 필요한 허가를 받기위해 협상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몽쿳왕으로부터는 태국 북부 사람들에게 강제로 복음의 문을 열도록 하지 않겠다고 하는 서약을 받기도 하였으나 1866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당시 북부 지역의 통치자인 차오 까윌라롯을 방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미 영사를 참여하도록 제안하였던 선교부와 만남을 허락받았다. 그 결과 차오 까윌라롯은 그들에게 치앙마이에서 선교를 하여도 좋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이 약속은 그가 아무리 후회를 하여도 소용이 없지만 영사가 있는 앞에서 한 단지 허울뿐인 형식상의 외교적인 공약(?)이었다.
주저할 새도 없이 멕길버리는 1867년 1월 3일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방콕을 영원히 떠났다. 3개월 후인 1867년 4월 3일 그는 약속의 땅인 치앙마이에 모세처럼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치앙마이에서 그들은 평범(겸손)한 생활을 시작을 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거의 1년 동안은 길가의 오픈된 요양소 같은 집에서 허구한 날 처음으로 들어온 이방 백인을 보고 의아해하여 집요하게 찾아오는 군중들에 의해서 “바보”라고 때로는 백인 “꼴라스”(외국인을 나타내는 미얀마어로 문자적으로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라고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멕길버리는 “치앙마이에서의 선교사역의 첫해보다 더 빨리, 더 재미있게 지나간 해는 없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1868년 후반기에 윌슨이 그들과 함께 선교사역에 함께하기로 하고 조인하였을 때에 그들은 참으로 선교의 토대를 구축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르첬고, 전도했으며, 끊임없이 배웠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는 거의 없었지만 그들이 선교에 헌신하는 모습은 차오 까윌라롯을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는 친절하였으나 그는 그때 이미 나이가 들었고 때로는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의 타락한 모습의 전형들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편집증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그것을 확실히 느낀 것은 1866년 방콕에서의 외교적인 모임에서 부도수표를 공약을 한 것이다. 그 모임에는 당시 방콕을 지배하던 몽쿳왕의 비서가 참여하여 모든 과정을 기록하였다. 선교부가 잘 관리하여 그들을 화나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우정을 유지했다. 약속한 기간인 1868년에 그들은 선교부에게 땅을 기증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의 선교 센타가 되었다.(사실 차오 까윌라롯이 기증한 것은 자신의 땅이 아니라 힘없는 소유자의 것이어서 선교부는 소유주에게 개별적으로 보상을 하였다.)
선교부가 구입한 땅은 메삥강 동쪽 제방부근의 나대지로 친다 병원에서부터 남쪽의 끝 지역에 교회가 위치한 나와랏 다리 바로 부근까지였다. 이곳은 이미 오래전에 개발이 이우러져서 1869년 당시에 이곳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창녀촌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869년은 위기의 해였다. 당시 치앙마이를 다스리던 차오 까윌라롯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왕실의 몇몇 가족들은 선교부를 의심하게 되었고 더욱 부채질을 하였고 극에 달하였다. 당시에는 단지 4명의 회심자가 있었다. 정부는 선교부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비밀조직”이며 “그들에게는 스파이”라고 방콕에 보고하였다. 이런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차오는 그들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해 9월 선교부는 그의 친구들이 이상하게도 자신들을 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몇 고용인들은 켐프를 떠났다. 당시 두명의 회심자는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구도 그들의 행방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멕길버리는 몸소 정글이나 집 등을 다 찾아본 결과 그들이 차오의 명령으로 그들의 집에 감금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핑계는 그들이 왕실에서 시킨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죄를 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 두사람을 살해하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멕길버리는 방콕에 보고하기 위해 메신저를 보냈다.(당시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인편으로 걸어가야했다.) 수주일의 염려 끝에 메신저는 방콕에 도착하였으며 동년 11월 27일에 방콕으로부터 두명의 선교사와 태국 왕실의 행정관이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차오는 즉각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그리고 분노하여 말하기를 그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두명을 죽였으며 자신이 한 짓은 모두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태국왕실의 행정관과 방콕에서 온 두명의 선교사들은 멕길버리에게 그 문제는 자신들에게 맞기고 선교부의 문을 닿고 즉시 방콕으로 가족들과 함께 완전히 철수하라고 강하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멕길버리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거짓 승리로부터의 퇴각은 치명적이며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멕길버리는 치오 까윌라롯을 찾아가 진심으로 항의하였다. 까윌라롯은 자제력을 잃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고 자신이 살해를 하였다고 인정하였다. 까윌라롯은 “그래. 그들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죽였다. 앞으로 기독교인들을 발견할 때마다 모두 다 죽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종교는 그들에게 있어서 반역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일 선교사들이 남아있다면 그들은 단지 환자를 치료하는 것 뿐 이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전도하여 기독교인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차오 까윌라롯과의 만남도 끝났고 회의도 파티도 파장이었다. 아울러 위기도 끝났다.
방콕에서 온 왕실 행정관이 선교부의 문을 닫고 방콕으로 철수를 종용하였지만 멕길버리는 그 제안을 거부하며 가족들과 함께 치앙마이에 머물렀다. 다음해인 1870년 6월에 차오 까윌라롯은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돌아오다가 죽고 말았다. 멕길버리와 APM 선교부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다시 선교의 토대를 놓을 수 있었다. 차오 까윌라롯을 이어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위인 차오 인타논이 통치자의 자리를 승계하였다.
멕길버리는 그의 적들과 축음을 각오한 싸움을 싸워야 했다. 그가 친구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었던 한사람의 믿음을 위해, 그리고 그가 좌지우지하던 정부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그는 순교자들의 첫 자리에 와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가 ? 1855년 당시 영국의 회사들은 미얀마의 중심부에 진출하였다. 태국의 북부지역은 더 이상 침공하는 미얀마의 군인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남부의 완충장치로서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방콕에서 차오의 권력이 시들어진 북부를 떠 맡아야할 시간이 되었으며 북부 지역의 황금(티크 나무의 숲들)을 가져다 누릴 수 있는 시기였다. 잦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서두르거나 직접 지시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이 북부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이 되었는데 그 선발대로서 선교사들은 티크나무 회사의 회사원으로 고용되었다. 그들은 바다의 굴(oyster) 속에 들어간 모래(장차 다이아몬드가 될 것임)와 같은 선동요원으로 차오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그가 너무 극단적으로 가지 않도록 조정하며 방콕과의 평화로운 중재자역을 자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효과를 발휘하였다. 줄라롱껀 대왕이 1877년까지 치앙마이에 거주하는 태국 왕실 행정관을 임명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마침내 차오 까윌라롯은 북부태국의 권력을 송두리째 방콕에 넘겨줘야 했다.
새왕조의 초기에 멕길버리의 임무는 선교센타를 건축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당시에 티크회사에서 목재를 공급하여 목재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목수는 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만일 현지인들이 자신을 도와주면 차오에 의해 잡힐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이 목수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렵사리 목수를 구해 선교센타가 지어진 것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였다. 다음의 선교적 필요는 전국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약을 위하여 의사 선교사를 발굴하는 일이었으나 1872년 1월에 의사인 위루만(Dr. Vrooman)이 도착하여 이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그가 오자마자 그와 함께 라오스의 루앙 프라방까지 동행하며 진찰을 하여주셨다.
멕길버리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들이 태국에서 15년을 사역한 후 그들의 첫 번째 안식년중의 2년간을 미국에서 보냈다. 멕길버리는 남북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야기되어진 노스 케롤라이나의 황폐해진 상황을 보고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저주받은 땅 같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선교사의 이질적인 삶에 만족하였으며 미국에 머무는 동안 스스로 자신을 회복하였으며 여러 가지 변화된 환경의 특혜에 자신을 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1875년 2월 그들은 온전히 회복된 거인으로 태국에 돌아왔다. 그들은 미국에서 선교사로 리쿠르트한 의사인 첵(Dr.Cheek)을 데리고 태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의 동생과 결혼하게 되어 처남과 매제의 관계가 되었다. 멕길버리가 돌아온 후 그들은 새 집을 마련하였으며 1867년 이후 처음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집과 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선교부는 이제 자신들의 터전위에 센타를 구축하였으나 이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위협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새로 등극한 통치자인 차오 인타논과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선교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하였다. 하지만 1878년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대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 두명의 회심자가 결혼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부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결혼시에 지불하여야 하는 지참금(결혼시에 신부의 부모에게 주어야 하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결혼을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교회에 직접적인 위협(도전)이 되었다. 그래서 멕길버리는 새로 부임한 왕실 행정관과 차오 루왕에게 이 문제에 대해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모두 지방 관습법에 대해 참견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나 행정관은 이 사실을 방콕에 보고하였으며 선교부가 모든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당시 태국의 통치자인 줄라롱꼰 대왕에게 청원을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멕길버리는 방콕에 있는 미 영사관을 통하여 이러한 청원을 하였다.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1878년 10월에 왕의 칙령이 북부지역에도 하달되었다. 이것은 선교부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후로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법률적이며 사회적인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역의 한계와 성공적인 노력(몸부림)을 나타내준다. 마치 오르간이나 도서관에서 조그만 하얀 개미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멕길버리를 통해 이루어진 나머지의 선교사역 이야기는 현대 선교의 모든 영역에 있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태국 북부 선교사역의 영역들이 멕길버리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북부 선교사역의 개척자요, 설립자라고 할 수 있다.
1. 의료 부문
멕길버리는 공식적으로 의학을 공부한 적이 없으나 의학 서적이나 의료잡지를 통해 개인적으로 습득을 하였다. 태국에서의 필요는 많아서 치앙마이에서의 건강은 시시각각으로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유행성 천연두, 콜레라, 발진티푸스와 치명적인 말라리아, 당시 그 유아 사망율은 80%로 다섯명중의 한명만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1872년에 마침내 의료 선교사를 리쿠르트하여 조그만 병원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아주 원시적이고 미미하였으나 발전하여 오늘날의 맥코믹 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1889년에는 의사 선교사인 멕케인(Dr. J.W. McKean)이 도착하여 그이 생애를 이곳에서 드렸으며 나환자 국제 선교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시내에서 남쪽으로 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지금은 육지로 변하였다)에 자신의 이름을 따 나환자 병원인 멬켄 병원(지금은 멬켄 재활센타)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환자들은 치료도 받고 가족과 함께 거주하며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2. 교육 부문
멕길버리 부부는 개인적으로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많지는 않았다. 멕길버리 부인은 학생들을 셀 그룹을 만들어 가르쳤는데 이것은 후에 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1879년에는 두명의 처녀교사가 발굴되어 미국에서 왔다. 그 이후로 학교는 계속 성장하였고 후에 이 학교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인 다라 아카데미가 되었다. 남자들을 위한 학교는 1887년에야 설립이 되었는데 콜린스(Rev.D.G. Collins) 목사가 하교 설립을 위해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현재의 프린스 로얄 학교로(The Prince Royal's Collage) 1906년에 6대왕인 라마 6세, HRH 바지라벧 왕자에 의해 교명이 하사되었다. 멕길버리의 사위인 윌리암 헤리스 목사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서 1899년부터 1940년까지 가장 오랫동안 섬겼다. 마지막으로 1883년 멕길버리는 젊은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멕길버리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교육기관이었다.
3. 전도
선교부가 견고히 서가면서 많은 조력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멕길버리는 여가의 시간을 이용하여 사역지를 찾기 위하여 많은 여행을 하여야 했다. 그는 여행시에 애완용인 “뿌쌔다오”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코끼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점심시간에는 코끼리도 스케줄에 따라 점심을 먹어야 했다. 이 쌔다오는 상아가 없이 태어난 수컷으로 괴팍스러운 일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드물지는 않지만 자연은 종종 그에게 특별한 아름다운과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그는 북부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1898년에는 다시 라오스 지역의 루앙프라방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는 “문명화된 서구의 세력”에 의해 추방을 당하는 좌절을 경험하였다. 그는 미얀마 지역의 샨주로 여행하였으며 더 나아가 중국의 운난성(곤명)과 태국인들의 영역이라 불리우는 십송반야까지 여행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곳에서는 그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1917년 치앙룽에서 실제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한 선교단체가 발견되어졌다.
그의 남은 생애를 통한 선교사역은 점차 모든 태국 북부지역으로 확장되었는데 1885년에는 람빵, 1893년에는 프래, 1894년에는 난, 1897년에는 치앙라이, 1899년 그의 나이 70세였을 때에는 핏사눌록까지 그 지경을 넓혔다. 그의 생애의 사역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의 선교 사역지의 방문은 그를 즐겁게 하였다. 그는 종종 정글을 지날때면 냇가의 그늘에 앉아 자연과 그의 사역의 아름다움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묵상하곤 하였다. 우리는 이런 행복한 상태속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그는 치앙마이에 남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세상을 하직하기 3주전에도 그가 그토록 참석하고 싶어하던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20마일을 코끼리를 타고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의 숨결은 태국 북부지역 곳곳에, 그리고 태국 전역의 수천명의 크리스챤들의 가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의 성공에 대하여 그는 아마도 아이삭 뉴튼의 말처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전능자의 어깨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translated by samseung kwon, from "DE MORTUIS", by R.W. Wood
(Craftsman Press, Co.Ltd, Bangkok, 1999,p.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