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공이 울리자 눈앞이 다 노래졌다. 야시마 유미가 달려나오는 순간, 나는 짧게 기도했다.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긴장한 탓에 팔이 뻣뻣하고 스텝이 꼬였다. 다시 아버지를 불렀다. 야시마의 허점이 보였다. 레프트 어퍼컷! 갑옷을 벗은 듯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주먹에 폭포 같은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첫 여자프로복서 이인영 선수(32). 지난 1월24일 일본 여자프로권투 플라이급 챔피언 야시마 유미를 꺾을 당시 1회전을 이렇게 회상했다. 2년 전 복싱에 입문, 27일 세계 플라이급 타이틀 도전을 앞두고 있는 그는 한국 여자복싱의 희망이다. 전적 6전6승(2KO). 한때 알코올 중독으로 허우적거렸던 늦깎이 복서의 무패행진은 ‘인생의 패자부활전’ 기록이라는 점에서 빛을 더한다. 그는 최근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두고 링에서 인생역전을 일궈낸 자신의 이야기를 ‘나는 복서다’(들녘)라는 책으로 펴냈다.
1971년 전남 광주에서 2남4녀의 막내로 태어난 이인영은 어려서부터 영락없는 선머슴이었다. 지금도 모자쓰고 말만 안하고 앉아 있으면 첫눈에 여자로 보아주는 사람이 열에 하나도 안된다고 하니 이전 모습은 시쳇말로 ‘안봐도 비디오’다.
사내같은 처녀 이인영은 남들이 피어날 나이에 시들었다. 20살 고개를 넘자마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연이어 큰오빠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머리를 감기는 미용사 보조, 실밥따는 봉제공장 ‘시다’, 학원 셔틀버스 운전기사, 택시기사, 5년여의 트럭운전 ‘이기사’, 거기에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중증 알코올 중독자. 그가 보낸 20대 10년간의 이력서다. 인생의 전반 라운드는 칙칙한 흑백필름인 셈이다.
“내 인생의 3분의 1을 술에 절어 살았다. 술에 빠진 10년여 세월. 사랑하는 가족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끔찍한 시절이었다”
2001년 8월19일. 30살 생일을 보름쯤 남긴 어느날이었다. 낮술에 취해 방에서 TV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다 한국계 미국 여자복서 킴 메서의 세계 타이틀 매치를 보는 순간 그는 “내 곁에 모든 소리는 다 사라져버렸다”고 회상한다. 어릴적 ‘내가 남자였다면 링에서 죽기 살기로 싸워보고 싶다’던 억눌린 욕망이 갑자기 되살아났다는 얘기다.
“치고 때리고, 피하고 맞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멋졌다. 깨끗했다. 바로 저거다. 권투를 하자. 리모콘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길로 체육관을 찾았다. 권투 글러브를 매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술잔은 그의 손에서 멀어졌다. 알코올에 저당잡혔던 그의 영혼이 꿈틀댔다. “운동하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게 술은 꼴도 보기 싫더군요”. 금단현상도 없었다. 술꾼 ‘이기사’는 복서 이인영으로 거듭났다. 매일 달리고 치고 막고 샌드백을 두드렸다.
그는 주먹은 독하지만 마음까지 그렇지는 못하다. “링에서는 마음 약해질까봐 상대방 눈은 안보려고 해요. 눈을 보면 캔버스에 눕히겠다는 전투욕이 사라지거든요”. 지난 1월 시합 조인식 때도 예쁜 야시마의 얼굴이 마음에 걸려 먼산만 바라봤던 그다. 그의 권투인생을 이끈 김병주 관장은 “(남자같아 보여도) 여자는 여자다. 숫기도 없고 마음이 모질지 못해 그런 것도 같다”고 말한다.
그는 20대에 술에 절어 불룩했던 술배 자리에 지금은 단단한 ‘왕(王)’가 새겨진다고 자랑한다. 물론 아예 술을 입에 안대는 것은 아니다. 중독자가 아닐 뿐 땀흘린 뒤 한잔의 여유는 즐긴다는 것이다.
처음엔 남을 때리고 자기도 맞는 골병드는 짓에 뛰어들겠다는 그를 가족들이 곱게 봐줄 리 없었다. 단지 큰언니만 달랐다. “냅두소. 술 처먹고 사람구실 못하는 것보단 백번 낫제”. 이내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디, 술먹다 제명에 못사는 것보담은 백번 낫을팅게”. 이인영의 ‘술독살이’는 그만큼 가족 모두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의 20대. 무언가로 꽉 채웠어야 할 그 시간을 나는 어디에다 흘려보낸 것일까”
이인영은 되물어본다. 그리고 나이 서른에 권투를 통해 깨달은 삶의 비밀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나는 행복하다. 남들이 은퇴를 꿈꿀 나이에 권투라는 꿈의 실체를 발견했다. 먼 길을 돌아오느라 조금 늦었을 뿐이다. 내 꿈은 무한질주다. 좋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질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나 더.
“링 위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건 단지 복서다. 남과 여가 아닌 복서로 인정해주는 링을 사랑한다”
그는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10㎞의 로드워크에 나선다. 마흔살까지 링에서 뛰겠다는 것이 그의 야무진 포부이다. 목전에 다가온 세계 챔프를 거머쥐는 것도 물론이다.
“쓰러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다시 일어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다시 링에 오른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오기가 남아있는 한, 여기서 주저앉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는 한…”
--이인영 선수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운동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발견했다는것이 여자로서 복서의 길은 힘들지만, 이인영선수에게 있어 복싱은 자기 인생의 전부일 것입니다.
2년만에 세계를 제패한 이인영선수 ~!! 화이팅...-
첫댓글 나역시 복싱선수이지만은 이인영선수를 보고 나도 할수있다는 자신감 ... 그리고 이선수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실길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