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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장)’.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특별한 집회에 참석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영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런 삶이 진정 가능한 삶인가? 그런 삶을 사려면 아마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거기서 죽을 때 까지 수도사로 살아가야 가능하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얼마든지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 갈 수가 있다. 교회에서 하루 종일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라는 말도 아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나, 철야 기도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 살아가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나,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을 영양가 좋은 음식으로 먹이고 교육 시키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회사에서, 사업체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부부간에 사랑하면서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자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생명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모이는 예배 뿐 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드려지는 예배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모든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잠을 자고, 아침에 출근하고 사람을 만나는 모든 순간에서 주님을 의식하라. 이것이 바로 24시간 주님을 경험하는 영적인 생활이다.
우리는 흔히 지극히 평범한 일, 일상적인 일에 대해 소홀히 생각하며 이런 생활이 지루한 일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런 일보다 더 큰 일을 자기에게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소중한 가정 조차, 평범한 일 조차, 직장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는 그런 것 조차 못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길 수는 없다.
영성에 대해, 영적인 삶에 대해 오해가 많다. 영성에 대한 기준이 없다. 무엇이 영적인 것인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곳을 떠나야 하나? 미래의 문제를 알아 맞추거나 병을 고쳐주는 그런 것이 영적인 삶인가? 영성은 삶의 일상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삶의 일상 가운데 영성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어디에 있던,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바로 영적인 생활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영적 예배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환상을 본다던가, 이상한 초자연적인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삶을 말한다. 몸과 마음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영적 예배이다. 몸은 예배 드리러 나왔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혹은 마음만 있고 몸이 다른 곳에 있다면 이 역시 영적 예배가 아니다. 나에게 없는 다른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닌, 단순히 종교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어렸을 때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했다가 곤경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형들 보다 요셉은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살았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을 꾸고 그 이야기를 부모와 형들에게 하자 10명의 형들이 요셉을 더 미워하게 된다. 결국 형들이 광야에서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리고 애굽 왕 바로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간다. 노예가 된 것이다. 어떻게 살겠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다. 어떡하나? 살 수가 있겠나? 아무런 잘못 없이 노예로 팔려 갔다. 부모로부터 떨어져서 노예가 되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집중을 했다. 성실히 일하던 요셉은 드디어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 그 가정을 관리하게 되었다. 요셉은 노예라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몰입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형통한 삶이다. 이 후로 잘 되었나? 아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였는데 그 유혹을 뿌리침으로 인해 오해를 받아 감옥까지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던 아들이 노예가 된 것도 부족해서 억울하게 감옥까지 간다. 하지만 요셉은 이것을 순순히 받아 들였다. 불평 불만하지 않았다. 요셉은 변명도 따지지도 않고 순응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감옥이라는 환경을 받아들이고 실망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을 했기에 감옥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이때 왕의 신하 두 사람이 잘못되어 이 감옥에 들어왔다. 그들이 꿈을 꾸었는데 각기 다른 꿈을 꾸었고 요셉은 이 꿈을 해석해 주었다. 요셉이 자포자기 했다면 이들의 꿈에 간섭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꿈을 해석해 주었고 꿈 해석대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복직하게 되었다. 요셉은 자신은 잘못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복직하게 되면 자신을 구해달라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복직 후 요셉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요셉은 이 사람을 당연히 원망하여야 하지 않겠나? 자신이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던 이 사람이 요셉을 잊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다. 이토록 억울한 환경 가운데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몰입하였다. 분노에 찬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요셉이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에 최선을 다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환경에 접하게 된다. 때로는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오해 받는, 참으로 화도 나고 지루하기도 한 그런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나의 반응은 어떠한가? 아무리 억울하다 할지라도 요셉보다 더 한 억울한 삶이 있겠는가? 우리는 많은 순간 남을 탓한다. ‘내 남편 때문에 내가 이래. 내 아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해. 이놈의 자식들만 아니라면… 자식이 아니라 원수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온갖 화나는 일에 접하게 된다. 차를 운전해 보라. 핸들을 잡아 보면 중국에서의 운전은 참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화가 나게 한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끝내 총리에 오르게 된다. 그것도 왕의 꿈을 해몽 하게 됨으로 총리에 오른다. 수 많은 연단을 거친 후 드디어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 쓰신다. 그는 애굽 왕에게 쓰임 받기 전에 애굽을 미리 배웠다. 좋은 환경에서 애굽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극한 환경 가운데서 애굽을 배운 것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그의 집을 관리하면서 나라 경제를 관리하는 법을 익혔다. 감옥에 들어가서 나라를 치리하는 정치를 배웠다. 왜냐하면 그 감옥에 왕의 가장 측근인 두 신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요셉은 애굽 정치에 관한 최고급 정보를 다 수집하였을 것이다. 죽게 된 마당에 두 신하가 요셉에게 하지 못할 국가 기밀은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은 참으로 억울한, 말도 안 되는 환경을 통해 요셉을 준비시키신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이 요셉을 크게 쓰시고 싶었어도 요셉이 보디발의 노예로 살아가면서 불평만 했다면, 감옥에 갇혔을 때에 살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 했다면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2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후반절 말씀은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범사에 형통하게 하였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귀한 집에서 가장 사랑을 받던 아들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기 까지 하였는데 성경에서는 이 상황을 형통한 상황이라 기록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사형통은 ‘돈도 많이 벌고, 몸도 건강하고, 자식들도 잘 되는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통은 우리의 환경과 관계가 없다. 형통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지, 하시지 않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한 것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형통하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자식에 관한 걱정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돈이 많은 분인데 그 재산을 자기 자식에 까지 대대로 물려 줘야 되는데 혹 못된 며느리가 들어와서 아들의 재산이 없어지게 된다면 어떡하겠는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돈이 너무 없어도 문제이지만 너무 많으면 문제는 더 심각해 진다. 그 돈을 사회에 기부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 베풀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에게 물려주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이 과연 이 세상을 떠날 때 쉽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평생을 통해 모아둔 피와 같은 재산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식 후대에 이르러 재산이 지켜지리란 보장도 없다. 참으로 불행한 인생의 종말이다. 하지만 나는 참으로 감사가 넘쳤다.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도 없고 인생을 마칠 때 영원하고 행복한 진짜 삶이,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의 삶이 새로 시작이 된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야 말로 진짜 형통한 삶이다.
여러분은 형통한 사람들인가? 자신 있게 ‘아멘’해 보라.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형통한 것이다. 여러분은 어쩌다 보니 이곳에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이 부르지 않았다면 이 곳에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렀기 때문에 이곳에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형통한 사람들이다.
오늘 주어진 삶에 대해 만족하고 항상 감사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아니 많이 어렵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만 같다. 그 이유는 아시다시피 주일 설교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설교 시간은 30여분이지만 준비하는 시간은 일주일인 것 같다. 주일 오후부터 다음 주 설교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기도한다. 월요일부터 마음은 온통 설교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나의 환경은 회사에 출근하자 마자 긴장 상태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지라, 그 틈에 설교 준비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로 인해 어떤 때에는 이런 생각도 가끔 해 본다. ‘아! 나도 세상 일하지 않고 전 시간으로 하나님 말씀 연구하고 기도하고 설교 준비 했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이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바라시는 것은 하루 종일 말씀 연구하고 기도하고 목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일상 생활 가운데서 말씀을 추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것도 내게 맡길 수가 없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지금 하는 일이 정말로 싫은가?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집중하길 바란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참으로 고달프고 힘들다. 주말에는 그나마 쉴 여유라도 있는데 월요일이 되면 또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나를 기다린다. 참으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요즘 같은 날에는 말도 안 되는 그런 뉴스를 들으며 가슴에 울분이 터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환경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최고로 좋은 일들이다. 여러분이 처한 일들에 집중을 하고 몰입을 해 보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그 일들을 즐겨보라. 그 날 만큼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고의 날들이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는 그럼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사실은 아니다. 부끄러운 간증을 하겠다.
이번 주에는 월요일 날 업무 관계로 남방으로 출장을 갔다. 간담회가 있어 참석하고 저녁 만찬이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거의 50여명이 넘은 인원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술 건배를 외치고 즐기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이 그곳에 위치한 업체들인지라 나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들끼리 서로 만나 대화하고 술을 나누는데 술도 못하는 나로서는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적지 않게 부담 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사도 나누고 유익한 정보도 주고 받았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끝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그야말로 너무도 행복했다. 밤비가 주룩 주룩 내리고 있었지만 참으로 행복했는데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서 애굽을 탈출하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 깨달음이 생겼다. 내가 오늘 보낸 그 시간과 환경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고 좋은 환경이었건만 나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이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람들을 살피고 술 잔이 비면 술도 따라주고, 그들 모두에게 친절하게 하는 행위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상이고 영적인 삶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일상을 벗어나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 생활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하고 부족한 것을 달라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종교적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 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신다. 그 환경이 노예이던, 감옥이던, 나처럼 술자리이던 어떤 상황이던간에 이 모든 환경은 나에게 있어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재료가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이란 것은 먼데 있거나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을 교회에서 찾으러 하지 말라. 24시간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 영성을 찾으라. 숨 쉬고 호흡하고 밥 먹는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영성 훈련을 하라. 사탄은 우리의 주어진 환경에서 불만을 가지게 하고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찾게 한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은 영적인 것이 아니므로 신경 쓰지 말고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달라고 신께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가정! 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사업체와 직장은 참으로 소중한 곳이다. 이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를 소중히 여기고 그 곳에서 요셉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상대방을 섬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적인 삶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디로 가던지 무슨 일을 하던지 다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른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므로 최대한 세상에서 벗어나서 교회에 자주 가서 기도도 하고 예배 드리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세상에 나가서 생활하는 것 보다는 교회에 오는 것이 더 영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배당에 와서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영적인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 이 빛이 하는 역할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다면 언제 이 세상을 비출 것인가? 여러분! 세상으로 나가라. 교회에만 있지 말고 교회 안에서만 교제하지 말고 이 세상에 나가서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라. 교회에서는 거룩하게 살고, 교회 밖 가정과 사회에서는 엉망으로 사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 형제, 자매끼리 교제하는 그 시간을 아껴서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빛 되신 하나님을 말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행실로 보여주라.
프란시스코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항상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러나 꼭 필요할 때만 말을 사용하십시오’. 전도를 말로만 하려 하니 실제 전도가 안 된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예수쟁이들은 입만 살아서 말만 잘한다고 할 정도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전도하는 사람을 귀찮게 여긴다. 말로만 예수 믿으라고 하니 그렇다. 우리는 삶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말로만 복음 전하지 말고 삶으로 행동으로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몸으로 복음을 전해 보라. 밥이나 커피를 사야 한다면 돈을 투자하라.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몰입하는 삶이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영적인 삶이다.
말씀을 맺겠다. 오늘 나에게 없는,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아 다니고 소망하는 그런 종교적인 삶에서 떠나라. 그리고 로마서 12장 1절 말씀과 같이 평범한 삶 가운데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적인 평범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영적인 삶이요, 영적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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