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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98학번의 차례가 되었다.
이들에 대한 나의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애증'일 것이다.
정말 이들에 대한 생각은 애증이 교차한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마음의 어떤 감정이 솟아오르는 듯 하다.
같은 학번이었지만 학교 다니는 중에 가장 관계가 좋지 못했던 사이이기도 하였고(물론 개인대 개인으로는 그다지 불편할 것도 없었다.)싸우기도 엄청 싸운 듯 하다.(물론 난 싸운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욕을 처먹었을 뿐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나의 이 모난 성격이 제대로 한 몫을 한 듯 하다.
이 죽일 놈의 성격이 그들과 융합하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을 멤돌게 한 듯 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98학번은 교육학과 역사상 가장 특이한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물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정신 도라 소리를 듣고 있는 본인이 평범할 정도이니 말이다.
98학번에 대해 모두 쓰려면 정말 하루 종일 써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 글을 쓴 취지가 사라지게 되어 이전의 글과 같이 굉장히 특이하거나 본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만 쓰도록 하겠다.
물론 순서에는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번호 순서로 쓸 것이기 때문이다.
1. 미다리(98학번 1번 강지행)
미다리는 그 당시 유행하던 순풍산부인과에 나오는 깜찍한(?) 어린이인 미다리와 너무나도(정말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미다리라고 불렀다.
(얼마나 비슷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이 '쟤 별명이 미다리 아니야?'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미다리는 참 특이한 인간이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항상 걱정을 자아내게 한다. 1학년 2학기 때 두레라는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서
항상 아침마다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두레가 원래 좀 빡시다.) 주위에서 너도 나도 걱정을 하였다.
저렇게 피곤하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느냐고 말이다. 심지어 일부는 두레를 그만두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본인도 여러 차례 두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우회적으로 표현하였으나 미다리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는 훌륭하게 4학년을 칼같이 잘 마쳤다.
그리고 두레의 활동 또한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잘 해내었다.(기억하기론 두레 회장도 했었던 거 같다.)
즉 다시 말하면 주위에서 보는 것과 실제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위에서는 늘상 걱정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다리가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본인은 괜찮은데 주위에서는 당장이라도 큰 일이 일어날 것처럼 그렇게 걱정을 해댔으니 말이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미다리에게 있어서 두레 활동은 어떤 큰 의미가 있었던 거 같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미다리는 술을 아주 많이 들이 붓는다.
실제로 나는 미다리의 주량의 끝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들이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두레에서 쌓은 내공이 상당한 듯 싶다.
그리고 술을 아주 많이 들이부은 날이면 욕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꼭 1명씩 불러내어 술집 밖에서 욕을 한다는 것이 무척 특이하다.
그리고 그 욕은 아주 긴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 욕의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명만은 확실하다. 그 한명은 본인이고 다른 한 명은 박미영이다.
(박미영이 미다리에게 욕을 먹고 있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는데 그때마다 난 들키지 않고 얼른 술집으로 들어갔던 거 같다.)
아마도 회장단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욕을 한 듯 싶다.
그 욕도 굉장히 다양하다.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된다부터 시작해서 학생회 일까지.
아마도 내가 총무를 할 때 불만이 상당히 많았나 싶다.
2. 박미(98학번 4번 박미영)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기는 바로 박미영이다. 아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1학년 때 방황하는 날 돌보아준 유일한 98학번이다.
박미영을 나는 은인이라고 불러야 좋을 것이다.
항상 나의 실수와 경박스러움을 탓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었다.
나는 이상하게 다른 사람에게 잘 의지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는 내가 살아온 환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항상 생활로 인해 바쁘셨고, 나는 늘상 혼자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적응력이 그렇게 느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미에게는 고민을 얘기하고 의지했던 거 같다.
뭐 의지했다고 해서 박미가 날 위해 크게 어떤 조치를 취하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얘기를 들어주고, 마음 속으로 날 응원해 준 거 같다.
나는 그에 대해 적지 않은 용기와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거 같다. 그리고 박미와 함께하는 모임은 언제나 즐거웠다.
박미의 활약은 1학년 때가 전성기를 이룬다. 박미는 이미 1학년 때 대부분의 선배들을 두루 섭렵하며
교육학과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선배들은 모두 미영이를 친자식처럼 이뻐하며 돌보아 주었다.
술을 들이부음에 있어서도 이미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고, 선배들을 대하는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특차에 합격하고 정시 면접 때 놀러와서 선배들과 잼나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그의 활약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2-4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그를 뒷받침해줄 동기나 후배가 없었기 때문에 1학년에 비해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했던 거 같다.
만일 그의 활동을 도와줄 몇 명의 학우들만 있었다면 그의 능력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활약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3학년 때 학생회장으로서 교육학과 교수님의 참여를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지금이야 교수님들이 각종 학생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지만 본인이 1,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교수님들께서 학생회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 교수님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박미가 그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겠다.
박미는 그 특유의 풍부한 인간과계로 학생회의 활동을 교수님들께 알리고 교수님들께 참여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성일당(98학번 5번 박성일)
성일이형은 정말 특이함의 극치를 달린다.
우리 98학번과 5살 차이이니 1학년 때 그의 나이가 25살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25살의 나이가 그리 많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성일이형과 굉장히 많은 나이 차이가 나는 듯 인식이 되었다.
그것은 특히 성일이형이 우리와는 매우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색함이기도 하고 친근함 이기도 했다.
1학년 때는 성일이형과 그야말로 함께 한 시간이 무지 많았다.
특히 방학 때 성일형과 나는 학교에 남아서 온갖 유희의 극치를 맛보았다.
매일 매일 과실에 모여서 파워포인트를 하고(난 그때 파워포인트의 진의를 깨달았다.)
또한 매일 매일 과실에서 한컴타자연습을 미친 듯이 했다.(그때 나는 타자의 고수 반열에 올랐다.)
또한 만화도 미친듯이 봤다. 정말 그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원없이 놀았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우리는 가끔 교수님들의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교육학과 동창회 모임이었는데 우리는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교육학과 선배님들은 갈 때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재학생들이 동창회에 참가한다고 무척이나 신기해 하셨다.
어떤 날은 책을 본다며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있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다.
또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를 먹으며 모기에게 회식을 시켜준 기억도 있다.
나의 마음에 남아 있는 그런 추억들은 여전이 즐겁고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성일이형의 가장 큰 장점은 틀에 박혀 있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교사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성일형은 다양한 길을 알아보고 또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로 또한 그리로 결정하여 천안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성일형은 만화 스토리 작가에도 관심이 있다고 한다.
성일형은 얼마전에 결혼을 했는데 연락을 받지 못해서 무척이나 아쉬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4. 정백당(98학번 9번 서정백)
교육학과 정신도라계의 최고봉을 꼽으라면 단연 정백당을 꼽아야 한다.(물론 여고딩이라는 강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과 엽기는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의 무서운 외모 때문에 함부로 그에게 정신 도라의 칭호를 붙이지는 못하는 거 같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기인이고 그의 참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본인도 그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는 못한다.)
미다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대학 생활은 두레를 빼 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학업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그는 두레를 위해 노력했던 거 같다.
정백당의 주특기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백당의 모습 중에 가장 많은 것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다.(굉장히 무섭다.)
그런데 아침이 되고 잠잔 시간이 10시간이 넘어도 좀처럼 그는 일어날 줄을 몰라한다.
항상 두레 활동으로 지쳐있어서 그런 듯 싶다.
정백당은 날 스타의 세계에 입문시킨 공로(?)가 있다. 나는 새로운 것들이 나오면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다.
종래의 오락실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전략시뮬레이션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백당이 나에게 스타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처음에 제안을 했을 때
나는 그것이 뭔지 모른다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정백당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날 집요하게 PC방에 데리고 갔으며 그때마다 나는 다른 인터넷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PC방에 3번째 방문을 했을 때 정백당의 권유가 귀찮아 한번 해 보기로 하였다.
(물론 정백당이 그 전에 알려주기는 했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번이 날 겉잡을 수 없는 스타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후 한동안 스타를 위해 밤을 새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학기 중에도 밤을 새워가며 스타를 했다.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스타를 한 후 수업을 듣고 좀 자다가 다시 스타를 하곤 했다.
정말 정신병자의 삶이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낯선 게임을 그렇게 미친 듯이 하게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정백당은 처음부터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그냥 특유의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정백당은 그리고 98학번에게 아지트를 제공했다.
정백당은 그 당시 꽤 넓은 집에서 살았는데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정백당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본인은 1학년 때 통학을 했는데 일주일에 3회 이상은 꼭 외박을 하였다.
그때마다 정백당의 집에 갔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정백당의 정신 중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무조건 하고 보는 정신이다. 요리를 해도 무조건 하고 본다.
정백당은 실제로 우리들에게 여러 요리들을 선보였는 데그것이 맛이 있었는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요리들은 상당히 대담하고 혁명적이었다.
실제로도 우리는 정백당이 만든 요리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맛나게 먹은 듯 싶다.
나는 죽어도 저런 요리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다.
실제로 정백당은 심리극도 대본 없이 시도하였다.
물론 그것이 성공하였는가 하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을 시도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했다.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5. 윤여백(98학번 10번 윤여범)
윤여백은 동기 중에서 나와 밥을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이다. 우리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1학년 때였다.
여백이는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갔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백이와 나는 통학을 했기 때문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막차(10시 통학버스)를 탔다.
수업이 일찍 끝나도 항상 과실에 남아서 쌩 놀다가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업이 일찍 끝나면 집에 갈 법도 한데 우리 둘은 한번도 집에 일찍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둘이서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그 같이 먹은 밥이 굉장히 다양했다.
길거리 포장마차의 떡볶이에서부터 학생 식당의 돈까스, 라면, 그리고 21세기의 오므라이스 등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먹은 21세기의 오므라이스는 지금껏 먹어온 오므라이스 중에서 가장 맛난 오므라이스였다고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오므라이스들은 상대가 되지 못한다.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먹어야 할 오므라이스가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맛으로는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다.
21세기에서 오므라이스를 더이상 하지 않았을 때 나는 오므라이스를 거의 먹지 않았다.
여백이와 나는 1학년 2학기 때 우리 학교 방송국에 나란히 시험을 보았다.
KNUBS이다. 나는 보도국에 여백이는 기술국에 시험을 보았다.
KNUBS 선배들은 모두 여백이를 마음에 들어 하였다. 합격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 또한 선배들이 마음에 들어했다. 선배들이 날 마음에 들어한 이유는 내가 자기소개란의 '주량'부분을 아주 잘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소개서에 왜 주량이 들어가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그 당시 나는 나의 주량을 맥주, 소주, 레몬소주, 양주로 나누어 아주 세세하게 썼던 거 같다.
그걸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참 이상한 집단이다.
그래서 나는 시험에서 아주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을 하게 되었다.
물론 여백이는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KNUBS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가지 않았다.
그때 내가 KNUBS에 들어갔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없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여백이와의 추억 특히 같이 밥을 먹고 타자 연습을 하고 같이 집에 갔던 그 추억들은 아직도 나에게 아련함으로 남아 있다.
6. 언휴먼(98학번 12번 최윤선)
여러분들은 언해피(unhappy)라는 단어를 알고 있을 것이다.
happy의 반대말로 우리는 영어에서 형용사의 반대대는 개념은 흔히 앞에 un을 붙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에 착안을 하여 나는 우리 학번의 최윤선을 언휴먼(unhuman)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영어 단어가 아님은 불을 보듯 뻔하겠지만 그의 특성을 나타내주는데는 절묘하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행동이 도무지 휴먼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언휴먼은 1학년 때부터 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를 하였다.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차가 아반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그 후로 7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아반떼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니 그의 삶이 우리 아니 나와는 얼마나 달랐는지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언휴먼은 도망가기의 명수였다. 1학년 때 학생회 행사에 참여를 부탁하면 항상 도망가곤 했다.
어찌나 잘 도망가는지 정말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늘상 도망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도망가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언휴먼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미워할 수 없는 어떠함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언휴먼의 엽기 행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98학번의 1학기 엠티가 4월인가에 있었다.
대둔산으로 갔던 기억이 나는데 언휴먼은 엠티 당일 날 음식을 아이스 박스에다가 바리바리 싸 왔다.
(아이스 박스 5개 분량은 넘은 듯 하다)
나는 엠티에 왜 저렇게 많은 음식을 싸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엠티는 그야말로 우리가 음식을 준비해서 먹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은가? 그런데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물론 그가 싸온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내 마음에는 어떠함이 남아 있었다.
물론 밉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람이 하는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대둔산에 올라갔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고 혼자서(마현주와 같이 갔나?) 사우나에 다녀왔다.
엠티에 가서 싸우나라니...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미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소프트볼 대회에 하이힐을 신고 출전한 경험이 있다.(치마를 입은 거 같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원래 그런 행사에는 잘 나오지 않는 그였지만
어느 날인가는 소프트볼 대회에 구경하러 나왔다가 돌발적으로 타석에 들어섰던 기억이 난다.
물론 안타를 치지 못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말 일반인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언휴먼의 행동은 일반인의 경지를 뛰어 넘는다. 하지만 언휴먼을 미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았다.
나는 언휴먼을 진정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한 명 밖에 알지 못한다.(프라이버시상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휴먼의 엽기 행각에 대해 가치 중립을 지키고 있는 듯 하다.
그가 한 행동이 이상하다고는 느껴도 밉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언휴먼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교육인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이 있다.
언휴먼은 대부분의 교육인에게 관심이 없는 듯 하지만 일단 한 번 관심을 가지면 무척이나 잘해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몇 몇과는 아주 특별한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그 점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어쨌든 언휴먼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치중립적이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7. 황설탕(98학번 15번 황설영)
이름이 황설영이라는 이유로 황설탕으로 불리운 설탕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동기이다.
일단 설탕은 학업 면에서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학년을 제외하고 2, 3학년 때 한번도 과톱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물론 98학번이 공부를 잘 하지 않는 학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연속으로 그렇게 과톱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4학년 때가 빠진 이유는 3학년을 마치고 편입을 했기 때문이다.(서울의 유명 사립대학교로 기억한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설탕은 영어를 복수전공을 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마도 그때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영어를 복수전공하는 사람이 에이플러스 학점을 획득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심지어 복수전공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에이플러스를 주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돌던 시기였다.
물론 영어 뿐만이 아니라 국어나 일사도 그런 인식이 당연하듯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설탕은 영어 복수전공 과목에서 당당히 에이플러스를 맞아 제끼며 4.2가 넘는 학점을 받기도 하였다.
오히려 영어보다 전공 점수가 더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던 거 같다.
나 또한 매일 일반사회는 에이플러스를 아예 주지 않는다며 핑계를 댔지만 그건 그야말로 핑계에 불과함을 설탕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난 일사를 복수전공하면서 51학점(일사 42+ 역사, 지리9)을 듣는 동안 에이플러스를 맞은 적이 1과목 밖에 없었다. 그 1과목도 공주교대 교수님이 강의하신 과목이었다.)
결국 우리들은 복수 전공에 대한 공부를 죽도록 하지도 않아 놓고서 교수님들이 학점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는 핑계만 댔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설탕은 영어에서 에이플러스 학점을 꽤나 많이 받았다.
어쩔 때는 한 학기의 영어과 전 과목을 에이플러스를 받은 적도 있었던 거 같다.
설탕의 강점은 암기력이 정말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어학에서 암기력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그 뛰어난 암기력과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적을 거둔 듯 하다.
또한 설탕은 발표 수업에 굉장한 소질을 보이곤 했다.
평상시에 설탕은 굉장히 조용하고 심지어 애기 같은 목소리로 사람을 대한다.
말투도 매우 느리다. 본인도 느리다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설탕은 훨씬 더 느리다.
하지만 발표수업을 할 때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뀐다.
그야말로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완전 샤프함 그 자체이다. 일단 눈빛이 변하고 목소리를 쫘악 깐다. 그리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발표를 해 나간다.
더듬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발표를 해나가는 것이다.
교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휴 공부 얘기로 이렇게 많이 쓰다니. 설탕에 관한 얘기는 더욱더 많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98학번에 대해서 할 말이 무척이나 많지만 자칫 글의 의도와는 다르게 길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의도적으로 7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써도 모자랄 것이다.
이들에게 왜 그렇게 모나게 굴었는지 무척이나 후회되는 하루이다. 더 쓰고 싶으나 힘들어서 그만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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