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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머리말
현대 산업사회와 문화 그리고 현대인이 처한 위기의 성격과 그 기원을 '소외(疎外)'의 개념만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은 없다. 우리 사회의 소외 의식은 어떻게 표출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부품화와 인간 존엄성의 상실로, 일차적 사회관계의 쇠퇴에 따른 원자화된 개체(atomized individual)로, 물질 만능주의와 지나친 과학기술 문명에의 의존으로, 자원 고갈과 공해 문제로, 관료제의 폐단과 독점 기업의 횡포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소외(alienation)'의 개념은 현대 산업 사회의 인간과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Ludz 1976 : 3).
물론 소외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있어 왔던 것으로서 결코 현대 특유의 현상이 아닌,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에리히 칼러(E. Kahler)가 지적하였듯이 "인간의 역사는 곧 소외의 역사"(Kahler 1957 : 43)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소외는 그 규모, 양상, 성격으로 보아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전면적이고 보편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현대에 접어들며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기계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제 소외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사회병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소외는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적 열쇠가 된다(박창희 1989 : 215 ; 하우저 1982 : 2).1)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이 소외라는 말은 거의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 많은 경우에 손쉽게 사용되고 있다. 동료나 친구 등 타인과의 관계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나,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 불만을 느낄 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이나 대중문화에 낯선 이질감과 괴리감이 들 경우에도 서슴없이 이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외의 개념이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는 그것이 지시하는 현상도 분명하고 익숙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소외의 대중성'은 학문적 연구의 입장에서 보면 모호성을 증대시키게 된다. 즉, 단순히 소외는 '개념'이 생략된 채 '단어'만을 사용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소외가 이러한 일상적인 표현이 아닌 학문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소외는 학문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가진다. 처음에는 철학이나 문학 등 주로 인문과학에서 관심을 기울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학을 비롯하여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제반 사회과학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건 소외의 개념은 현대사회에서의 인간과 그들이 놓여있는 구조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용어로서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소외개념은 엄밀한 경험·분석적인 방법에서부터 거시적인 역사·철학적인 방법, 나아가서는 비판적·이상적 접근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이 여기에 동원될 수 있다. 따라서 소외라는 관점은 산업화 이후 복잡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정직한 산물이며 동시에 한 사회가 당면해 있는 사회적 병폐를 밝혀주는 바로미터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국내 영화학계에서의 소외연구는 다른 예술분야에서의 소외연구와 비교하여 전무한 상태이다. 비단 이런 문제는 국내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UMI에서 제공하는 미국 및 캐나다 학위논문검색시스템(PQDD―Pro Quest Digital Dissertations : http://www.lib.umi.com/)을 조사해 본 결과, 북미 지역 역시 영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소외 논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영화학에서 소외론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찾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서 소외 의식을 반영하는 작품의 수가 적기 때문인가? 아니면 영화에서 소외라는 주제는 너무나 일상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시하는 현상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가? 이런 물음이 연구자로 하여금 본 연구를 시작하게 하는 궁극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실 소외 문제를 다룬 영화는 양적으로 볼 때 결코 그 수효가 적은 것은 아니다. 먼저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초기 코미디 영화에서도 이런 소외의식은 나타난다. 채플린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계급과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외된 이웃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었다. 특히 <모던타임즈 Modern Times>(1936)에서 보여준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와 인간소외에 관한 주제의식은 이후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코미디 영화에서의 주제의식은 1930 · 40년대 대공황의 시름으로 괴로워하는 미국의 소외 받는 계층과 빈민을 위해 '이상주의적 공동체'의 모습을 그린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의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레슬링을 소재로 소시민의 억눌린 무게와 소외를 주제로 삼은 <반칙왕>(2000)도 이러한 주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비단 영화에서 나타난 소외 의식은 코미디 장르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스릴러물들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의 정신적인 불안요인을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로부터 기인한다고 묘사한다. 예를 들어 <세븐 Seven>(1995)과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2000)의 연쇄살인범은 점차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로부터 구조적으로 고립된 인간을 상징한다. 또한 인간 소외라는 주제의식은 소외된 성적 소수집단을 바라보는 퀴어시네마(Queer Cinema)에서도 나타나고 노동 소외로부터 인간 해방을 꿈꾸는 노동자 뉴스제작단의 다큐멘터리나 서울올림픽이라는 국가행사로부터 소외된 상계동 철거민들의 삶을 다룬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1988)과 같은 독립다큐멘터리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소외 의식은 특정 장르에서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소외 이론은 한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주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데 유용한 이론적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애정만세 愛情萬歲>(1995), <하류 下流>(1997), <구멍 洞>(1998)등을 통해 현대인의 인간소외와 그 소통의 가능성을 특유의 스타일로 표현하고 있는 차이밍량(蔡明亮)과 <소년 소녀를 만나다 Boy Meets girl>(1984), <나쁜 피 Mauvais Sang>(1987),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1991)등을 통해 사랑의 불가능을 소외라는 주제로 풀어내는 레오 카락스(Leos Carax)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는데도 소외의식은 적용될 수 있다.
더구나 인간소외라는 주제의식은, 아서 펜(Arthur Penn)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 Clyde> (1967),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의 <이지 라이더 Easy Rider>(1969) 등으로 대표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New American Cinema) 같은 특정한 영화 경향을 이해하는데도 효과적인 단위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주인공들은 60년대 청년 문화의 흐름 속에서 주로 주변계층이나 사회 구조에서 소외된 인간들이고 영화는 그들을 통해 자신과 타인, 사회,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구 시대적 가치와 새로운 것의 불확실성을 모두 거부하는 문명과 도시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등장한 비판적 사실주의 계열의 한국 영화들에 있어서도 소외는 핵심개념으로 기능한다.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은 군사독재시절의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을 그려내고 있으며,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은 달동네로 상징되는 소외계층의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임권택의 <티켓>(1986)은 소외된 여성을 상징하는 항구도시의 티켓 다방 종업원들의 질펀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한편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는 기지촌 출신의 페인트칠 보조원 칠수와 반공법에 연루된 아버지로 인해 앞길이 막힌 숙련공 만수로 대변되는 소외인의 모습에서 산업 사회의 도래로 가려진 한국 사회의 아픈 상처를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사회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 소외 계층과 소외된 사람들의 등장과 그들의 삶을 통해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 전체를 비판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소외 문제가 영화의 주제로 꾸준히 다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이 매우 소홀한 것은, 그만큼 국내 영화학계와 비평계에서 소외에 대한 관심이 크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인간 소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학에서 소외 이론이 가지고 있는 그 학문적 유용성과 의의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또한 소외 이론과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하는 영화사회학이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도 밝혀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해 본 연구는 '미래사회를 영화적 배경으로 삼고 미래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SF영화에 소외이론을 적용하고자 한다. SF영화를 통해 소외이론의 유용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SF영화의 소재적 특징과 주제의식의 변천사가 소외 이론의 궤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SF 초기작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6)의 지배집단과 노동계급의 갈등부터 사이버 펑크 SF <매트릭스 Matrix>(1999)의 정보소외에 이르는 주제의식의 변천 과정은, 철학적 이론부터 사회학적 방법론에 이르는 소외론의 발달사와 상동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SF영화가 기타 장르 영화에 비해 인간소외의 사회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학적 가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유용한 장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주제의식의 공유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가 언젠가는 소외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하게 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소외이론의 치유적 기능과 미래의 인류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는 SF영화의 주제의식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둘째, 관료제가 발달한 거대한 조직체 속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SF영화의 중심 주제는, 관료제의 발달을 현대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소외 양상으로 보는 소외 이론과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 인간의 편익을 위해 창출된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간의 기계예속과 비인간화 현상을 초래한다는 SF영화의 디스토피아적 주제는, 현대 산업기술 발달 과정이 인간소외 심화의 주원인이라고 보는 소외이론의 시각과 일치한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SF영화가 가지는 소외론적 특징을 바탕으로 'SF영화에 나타난 소외 의식'을 분석하였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다음 두 가지 기준으로 한정시켰다.
첫째, 미래를 배경으로 현대 사회를 조망하고 미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
둘째, 내러티브와 인물, 공간 및 시각적인 요소를 통해 인간소외라는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
이러한 기준을 통해 선정된 작품과 그에 따른 소외의식은 다음 세 가지로 유형화될 수 있다.
1) 사회구조와 소외: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6), <매드 맥스 3 Mad Max: Beyond Thunderdome>(1985), <델리카트슨 Delicatessen>(1991), <데몰리션 맨 Demolition Man>(1993) 등
2) 관료제와 소외: <THX 1138>(1971), <브라질 Brazil>(1985), <카프카 Kafka>(1991), <저지드레드 Judge Dredd>(1995), <가타카 Gattaca>(1997),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1998) 등
3) 테크놀로지와 소외: <알파빌 Alphaville>(1965), <화씨451도 Fahrenheit 451>(1966),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1971),<핸드메이즈 The Handmaid's Tale>(1990), <포트리스 Fortress>(1992), <코드명 J Johnny Mnemonic>(1995), <압솔롬 탈출 Escape From Absolom>(1994) 등
본 연구는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의 스펙트럼 중, 사회구조와 소외에 속하는 작품인 <메트로폴리스>, <델리카트슨 사람들>, <데몰리션 맨>, <매드 맥스 3>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제2장 소외론의 전개
1. 소외개념의 연원과 성립
소외개념의 역사를 어디에까지 소급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많은 학자들간에 그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소외개념의 다의성은 본래 그 어원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소외(alienation, alienation, enfremdung)의 어원은 라틴어의 'alienatio'인데 여기에는 법률적 측면, 사회적 영역, 심리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Ludz 1976 : 5). 또한 오늘날 영어권에서 소외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수히 많다.2) 이처럼 소외는 고대 라틴어에서부터 사용되었던 용어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소외개념의 연원을 어디까지 소급할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을 벌이고 있고 이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소외는 현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운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소외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며, 특히 최근 20, 30년 사이의 정치·경제 발전 때문에 소외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는 인간의 소외를 특수한 시기에서만 나타나는 특성이 아닌 전반적인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주장이고 후자는 인간의 생활 속에서 소외가 나타나게 된 것은 단지 근대가 시작되고 난 뒤, 즉 상품 생산이 증대되고, 한 사회가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이행한 이후부터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박창희 1989 : 217 ; 파펜하임 1992 : 57, 127, 128, 130).
소외 개념의 연원에 대한 이 같은 추적은 소외의 개념이 결코 근대나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백히 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근대이전의 소외가 근대이후의 소외와 과연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는 점이다(정문길 1998 : 18).3)
파펜하임(F. Pappenheim)에 의하면 소외는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도 존재했으나 그 현상은 산발적인 것이었고 소외가 현저해진 것은 상품생산을 향한 경향이 보다 확고하고 보편화된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이르러서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소외는 우리 시대의 소외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그는 주장하고 있다. 즉, 파펜하임은 "인간이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같은 정도, 같은 종류의 소외를 경험했다는 견해를 주장할만한 증거는 없다"(파펜하임 1982 : 73-74, 97)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파펜하임의 논지에 의거해 근대 이전 사회에서도 소외가 존재했다는 점은 인정하되, 그 주된 개념은 근대사회의 성립 이후로 찾기로 한다.
2. 소외론의 유형
현대의 특징과 인간적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소외의 개념은 시대와 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파악되어 연구되어 왔고 그 학문적 연구 또한 방대한 양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광범하고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소외의 의미는 지극히 다양하여 사용하는 사람, 사용되는 상황,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소외가 갖고 있는 이러한 용어상의 혼란은 일상적인 대화나 문장 가운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연구의 용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4)
그렇다면 소외를 둘러싼 이처럼 잡다한 견해의 혼미 상태를 정리·분류할 수 있는 스펙트럼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방향에서의 소외 이론의 정리분류가 가능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첫째, 여러 가지 이론을 심리학적, 사회구조적, 그리고 일반적인 문화적 환경의 일부로서 정리해 보는 방향. 둘째, 소외의 분석 양식(modality of analysis)에 따라 경험적 사회학적 접근방법(empirical or sociological approach)과 이론적 철학적 접근방법(theoretical or philosophical approach)을 사용하여 소외 이론을 서로 분류·정리하는 것이다(정문길 1998 : 202).5)
본 연구에서는 소외론의 두 분류 중 후자의 입장인 철학적 접근방법과 사회학적 접근방법을 통해 연구하고자 한다. 사실 소외론을 철학과 사회학이라는 두 잣대로 구분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자가 이러한 분류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다양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다수의 소외이론을 연구하는 이들의 공통된 견해가 "소외라는 말은 본래 철학적인 개념으로 쓰여지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 이 개념은 철학적인 의미보다는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황을 상징하는 사회학적인 개념으로서 널리 인식되고 있다"(파펜하임 1982 : 55)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6)
소외 의식을 연구하는데 있어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대표적 사상가로는 루소, 헤겔, 포이에르바하를 비롯하여 마르크스, 프롬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18세기 후반 유럽 사상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루소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해 주도된 근대사회의 비판과 소외 개념의 형성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헤겔의 소외개념은 관념론적 입장이나 반동적인 현실 옹호라는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포이에르바하라는 가교를 통해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아 헤겔이 현상학에서 다루었던 소외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고 프롬은 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을 결합시켜 현대사회의 특징과 인간적 상황을 파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사회학자들의 소외에 대한 논의는 철학적 지향성을 가지는 비판적 사회이론과는 구별된다. 경험 실증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학자들은 소외를 주로 사회심리적 양상으로 보고 사회구조적 조건들이 개인 또는 사회집단의 가치관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였다. 소외를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는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이론은 시먼(M. Seeman)의 소외 유형론(varieties of alienation)논의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학적 전통은 오늘날 파펜하임에게도 계승되어 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적(이론적) 접근 방법은 소외를 현실 비판을 위한 가치 내재적인 개념으로 사용함으로써 개념 자체의 모호성과 불특정성은 피할 수 없으나, 서구 사상사의 휴머니즘적 전통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반해 사회학적(경험주의적) 접근방법은 소외 개념의 가설을 중요한 사상적 이론으로부터 끌어내어 이 가설을 경험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소외를 엄정한 과학적 용어로만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사회학상의 소외 논의는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조작하거나 측정할 수 있는 소외의 의미를 규정하는데 유용하며, 소외의 철학적 논의는 프롬(E. Fromm)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처럼 사회 개혁을 위한 현실 비판의 중심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가장 바람직한 소외이론은 소외를 분석하는 두 가지의 중심적인 조류인 철학적 접근방법과 사회학적 접근방법의 통합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소외의 현실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사회학적 논의에 의존해야 하고 소외가 극복된 미래사회의 모습은 철학적 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정문길 1998 : 202-203, 237-238 ; 김주연 1992 : 85).
따라서 본 연구는 철학적 접근방법의 사상적 원류인 루소의 '자연인(l'homme naturel)' 사상과 사회학적 접근방법의 시원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게젤샤프트(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이론의 결합을 통해 SF영화에서 나타난 소외의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자가 두 사상의 결합을 꾀한 이유는 첫째, 기존의 소외연구가 지나치게 마르크스와 프롬의 논의에 집중됨으로써 소외론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유용성을 스스로 좁혀버리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함이며 둘째,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흡한 영화학에서의 소외 논의는 보다 근원적인 원류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3. 자연인 사상과 게마인샤프트의 접점
오늘날 루소와 퇴니스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에 만연되어 있는 소외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루소와 퇴니스가 제시하는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단초와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먼저 루소에 있어서 인간의 소외는 본질적으로 '문명화'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문명과 기술의 진보로 인한 물질적 부의 생산 및 축적과정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타락과 진보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였다. 인간은 이러한 문명과 문화의 창조활동을 통해서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고, 그로 인해 자연과 대립하는 관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야말로 인간 소외 현상을 주목하고 이의 중요성을 최초로 제기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erdinand Tonnies)는 많은 사회학자들 가운데 사회구조와 소외의 관계에 대해 특히 탁견을 보인 사상가이다. 인간의 소외와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공헌을 이룩한 퇴니스의 저서「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Gemeinschaft und Gesellschaft)」는 대부분의 사회학 교과서나 논문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그 이론이 흡수되어 있지도 않고 또한 비교적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실정이다. 이 책은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은 노스탤지어적인 기분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이 책의 영속적인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퇴니스의 저작은 심리학과 사회학의 결합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학문적 공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저서의 기본 개념은 역사적 현실 속에 갖추어져 있는 사회 구조를 그 현실로부터 잘라내지 않고서도 분석할 수 있게 하며, 근대 사회가 움직여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의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파펜하임 1992 : 25-26 ; 박창희 1989 : 284).
루소의 '자연인 사상'과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이하 공동사회)·게젤샤프트(이하 이익사회)'이론의 가장 큰 공통점은 인간과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특성으로서 인간 사이에 나타나는 분리 현상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접점은 역사적 현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사회 구조를 그 현실로부터 잘라내지 않고서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며, 근대 사회가 움직여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의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자연인 사상'과 '공동사회이론'의 접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두 가지 상이한 사회결합과 인간의지', 둘째 '사회구조의 변동과정', 셋째 '소외 치유의 과정'이 그것이다. 먼저 첫 번째 접점에 대해 알아보자.
루소는 인간의 '사회 결합'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사회 결합은 현실 사회와는 거의 단절된 듯한 자연상태에서 생활하는 고립된 자연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소에 의하면 자연인에게는 문명인과 같은 이성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며 자연적인 자기 보존의 욕구만 갖고 있을 뿐이다. 또한 자연상태에서는 언제나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질서가 지배하였다. 따라서 자연상태의 질서는 거의 불변하는 자연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루소 1999 : 247-248). 7)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으며 그 영향도 거의 무(無)에 가깝다(루소 1999 : 250).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아무런 곤란을 느끼지 않고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사람들 간에는 아직까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분리는 인정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융합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생활양식을 공통으로 하고 희로애락도 같이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외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상태이다.
두 번째 사회 결합은 원시사회가 타락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서 불완전한 사회가 성립되었을 때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문명화된 시대에서는 어디에서나 흔히 보게 되는 사회적 결속이다. 사실 루소가 '사회(la societe)'라고 말할 때는 대체로 불완전한 사회를 의미하며, 루소가 비판하고 있는 사회는 이기적인 종류의 사회적 결속이 지나치게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루소는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한 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으며, 철저히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루소는 인간이 타락하고 불행하게 된 일차적 원인은 사회에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박호성 1993 : 12).
이러한 사회 결속에서는 이미 어떤 본질적 결합도 구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든 외면적인 결합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사회에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은 사사건건 충돌하고 서로간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자기의 이익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공공복지와 개인의 이익은 완전히 대립되어 전자는 후자의 희생물이 되고 정의와 복종은 한낱 폭거의 도구가 되고 불의의 무기로써 사용된다(루소 1999 : 253-283). 루소는 시민사회의 현실이 바로 이와 같은 인위적 불평등의 최후 단계라고 보고 불평등이 초래하는 제반 폐해를 여러 각도에서 지적하고 있다.
한편 루소는 '인간 의지(la volonte)'를 일반의지(la volonte generale)와 전체의지(la volonte de tous)로 분리시켜 사고한다. 일반의지가 공동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인데 반해, 전체의지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특수의지(la volonte particuliere)들의 합계에 불과하다(루소 1999 : 44).
일반의지란 개념은 루소의 독창적이고도 핵심적인 개념이다. 일반의지는 국가 구성원들의 동질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할 수 있다. 일반의지는 동질적인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 같이 바라는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파괴되거나 분할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특수의지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동질성을 파괴하는 개인의 사적이익만을 추구하므로 그것이 일시적으로 전원 합치가 되어 전체의지를 형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구히 공공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반의지와는 다르다(루소 1999 : 351).
한편 퇴니스도, 루소의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별과 유사하게, 인간의 결합을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공동사회는 원초적이며 본연의 상태로서 인간의지의 완전한 통일상태를 기점으로 해서 전개된다. 또한 공동사회의 모든 관계는 일종의 생명들이다. 이에 반해 이익사회는 자기 외의 모든 사람에 대해서 긴장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재적 적대관계 또는 잠재적 전쟁이 인간상호간의 관계에 내재하는 사회이다. 즉, 공동사회는 임시적인 분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며 이익사회는 임시적인 통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가 우위를 점하는 차이를 보인다(퇴니스 1986 : 36, 66-71, 193).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익사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퇴니스 역시, 루소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의지를 '본질의지(Wesenswille)'와 '선택의지(K rwille)'로 구분하고 있다. 본질 의지는 수단과 목적을 서로 혼합된 그리고 분화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선택의지는 수단과 목적을 두 개의 각각 다른 독립된 요소로 의식한다(파펜하임 1992 : 86).
이러한 첫 번째 접점은 주로 SF영화의 '내러티브와 인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SF영화에서도 두 가지 상이한 사회 결합과 인간 의지가 등장하고 주로 사회상태와 이익사회 그에 따른 전체의지와 선택의지의 병폐에 대해 비판한다. <메트로폴리스>, <델리카트슨>, <데몰리션 맨>의 지상사회와 <매드 맥스 3>의 거래도시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사회 혹은 전체주의 사회의 전형을 보여주며 이들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 역시 어떠한 본질적 결합도 구할 수 없는 분열된 존재로 그려진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자연상태와 공동사회는 주로 지하에 존재하는 사회로 상징된다. 그러나 SF영화에 등장하는 자연상태와 공동사회는 결코 완벽한 사회가 아닌 지상사회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제시되고 있다. SF영화는 이러한 상이한 사회 구조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소외를 묘사하며 이들 사회를 융합할 중재자(mediator)를 등장시킨다.
한편, 자연인 사상과 공동사회이론과의 두 번째 접점은 '사회구조의 변동과정'과 관련이 있다.
먼저 루소는 인류의 역사를 자연상태로부터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자연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인간의 속성은 자유의식과 완성능력(la perfectibilite)이다(루소 1999 : 223-225). 그러나 정작 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일 수 없다. 인간은 단지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마저 상실당한 채,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다. 근대 사회의 억압적 현실이 빚어낸 비극의 결과로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는 파국을 맞게 된다. 루소는 여기서 상호의존관계에 기초한 근대시민사회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서로를 타락시켜 전적으로 파멸되기에 이르는 근대인의 비극적 운명을 보았다.
한편 퇴니스도 역사 발전의 관점을 공동사회적인 사회질서에서 이익사회적 사회질서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보았다(퇴니스 1986 : 20). 즉, 사회라는 것은 공동사회가 지배적이던 시대로부터 이익사회가 지배적인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본질 의지로부터 선택 의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퇴니스는 공동사회로부터 이익사회로의 변화를 본질 의지로부터 선택 의지로의 이행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사회의 힘과 개인의 의지는 서로 간에 작용과 역작용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사회의 결속이 변화함에 따라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인격의 존엄성과 인간성 자체가 상실되고 추상적 거래관계만이 남는다는 것이다(박창희 1989 : 280). 따라서 인간의 자발성은 상실되고 피동성만이 늘어나는 '비인간화된 인간(the dehumanized human being)' 즉, 소외된 인간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두 번째 접점은 주로 '영화적 공간과 시각적 요소'에 의해 형상화된다.
SF영화는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동을 '지상(above)'과 '지하(below)'라는 영화적 공간으로 분리시켜 강조한다. <메트로폴리스>, <델리카트슨>, <데몰리션 맨>은 지상(over)사회와 지하(under)사회로, <매드 맥스 3>는 사막 '밖(out)'과 사막 '안(in)'으로 분리되고 이러한 공간의 분할은 사회구조의 변동에서 발생되는 소외감을 증폭시키고 사회간의 단절감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상세계는 '타락한 공간'이자 동시에 가장 '문명화된 공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부여받으며 지하세계는 문명의 진보가 갖는 모순을 비판하는 공간으로써 기능한다. 또한 이러한 공간의 대조는 중요한 시각적 요소에 의해 강화된다.
자연인 사상과 공동사회이론이 갖는 마지막 접점은 앞서 살펴본 두 접점의 토대 위에서 성립되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루소에게 있어 '소외 치유의 과정'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 이어 퇴니스의 소외 극복 과정을, 마지막으로는 이 두 사상의 공통점을 통해 '소외 극복의 3원 구조'를 도출해 보도록 한다.
루소의 사상 중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말은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다. 또한 루소의 자연상태의 의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은 이 말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루소가 자연상태와 자연인을 논의하는 주된 이유를 단순히 '원시사회로 회귀'하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오히려 루소는 근대 시민사회의 근대인의 모순을 타락하기 이전인 '본질적인 자연'과 대비시킴으로써 문명의 진보 자체가 갖는 내재적 모순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단서를 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루소의 자연상태를 둘러싸고 왜 이러한 논란이 발생되는가? 그것은 루소가 인간의 진보가 지닌 양면성을 피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현재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하나의 상태(un etat qui n'existe plus, qui n'a peut-etre point existe, qui probablement n'existera jamais)"(Derathe 1964 : 114)로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모든 추론들은 '상상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자연적인 원시인을 가정한다. 그러나 루소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은 바로 이러한 '가공의 산물로서의 자연상태'를 등한시한 채, 루소의 사상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반박한다. 이들이 루소를 이상주의자라고 보는 이유는 자연상태를 오로지 '과거'와 '현재'의 산물로서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연구자의 판단으로는 자연상태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지향적' 시각이다. 즉,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하나의 상태(un etat qui probablement n'existera jamais)'가 바로 루소 사상이 가지고 있는 핵심인 것이다. 루소 사상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상력의 힘'은 대부분의 SF 영화가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가능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이야기한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메트로폴리스>, <델리카트슨 사람들>, <데몰리션 맨>, <매드 맥스 3>는 모두 하나의 상상적 공간을 통해 소외 극복 구조를 갖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루소는 자연상태에 대해서 가정한 것인가? 그것은 루소가 현재 사회상태에 대해 보다 명확한 판단과 정확한 관념을 내리기 위해 자연 상태를 가정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상태나 공동체의 존재 없이는 자연상태 역시 진정한 의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는 결코 자연상태의 야만인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일단 자연 상태를 떠난 인류는 다시 그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구조 또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변해버렸다. 따라서 현실의 타락한 사회에 대한 해결은 자연상태에 대한 단순한 복귀의 형태를 취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루소가 제시하고 있는 소외 극복의 과정은 무엇인가?
루소의 인간에 대한 연구는 '자연인'과 '사회인'의 대립에 의해서 지배되어진다. 자연인과 사회인은 심성과 경향면에서 서로 다른 존재이다. 하지만 루소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러한 단순 대조를 뛰어넘어야 한다. 혹은 그 차이를 더 미분시켜야 한다. 루소의 작품을 주의 깊게 보면 인간에 대한 두 상반된 유형들이 다시 세분화됨을 알 수 있다.
* l'homme naturel: ① l'homme naturel en homme sauvage
(야만인으로서의 자연인)
② l'homme naturel vivant au sein de la societe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자연인)
* l'homme civil : ① l'homme civil en bourgeois(부르조아 사회인)
② l'homme civil en citoyen(시민으로서의 사회인)
즉, 자연인(l'homme naturel)은 '야만인으로서의 자연인'과 '사회에 살고있는 자연인'으로 분리된다. 한편 사회인(l'homme civil)은 부정적 의미인 '부르조아 사회인'과 긍정적 의미인 '시민으로서의 사회인'으로 분리된다. 기존의 역사가들은 이렇게 세분화되어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루소에 대해 아주 단순하고 미묘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의 진정한 자연인에 대한 의미는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즉, 자연은 옹호하고 정작 중요한 사회 속에서의 삶은 정지되었다(Derathe 1984 : 110).
루소가 묘사하고 있는 자연인은 타인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지 않은 고립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연인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루소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단순히 자연으로의 회귀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또 사회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인의 두 종류 중 사회상태에서 살고있는 자연인만이 그 단어의 온전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며, 진정한 인간의 상태까지 도달한 자연인이다. 사회상태에서 살면서도 슬기로움을 간직한 자연인은 '영혼의 평정(la tranquillitas animi)'8)을 간직한 자연적 인간이다(Derathe 1964 : 111, 117). 루소가 제시한 '사회 내에서의 자연인'은 아래의 도표와 같이 성립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참된 자유와 소외의 치유는 사회적 삶이 전제가 되었을 때만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민사회의 타락을 벗어나기 위해 자연상태로 돌아갈 수도, 돌아갈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시민사회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자연의 이상에 합당하다. 루소는 가상의 자연 개념을 통해 근대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소외의 근원적인 해결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인 사상의 3원 구조는 퇴니스의 공동사회이론과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루소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퇴니스 역시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인 공동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퇴니스는 이익사회의 힘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는 사회에서 공동사회적인 것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간 소외의 심화를 저지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 역시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퇴니스가 주장하고 있는 소외 극복의 과정은 무엇인가. 그는 지나가 버린 시대로 단순히 회귀하려는 환상을 버리고 차라리 이익사회로 향하고 있는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때, 공동사회 시대의 기반이 되고 있는 건설적인 에너지가 다시 작동되며 이것을 발판으로 궁극적으로는 보다 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란 이익사회와 공동사회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양자가 서로 결합되어 보다 높은 단계로서 건설된 사회를 말한다(파펜하임 1992 : 84-85, 155)
. 따라서 루소와 퇴니스의 '소외 치유 과정'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인간 소외의 원인이 사회 발전과정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하며 소외 극복의 가능성 역시 진보된 상태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루소와 퇴니스는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야기된 이중적 측면에 주목한다. 이중적 측면이란 인류에게 윤택함을 가져다 준 문명이 동시에 인간 병폐의 심화 역시 제공한 상황을 말한다. 두 사상은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구제하기 위한 치유책을 '변증법적인 조화'에서 찾는다.
둘째, 인간의 소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개선해야 한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즉, 소외의 문제를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의 한 영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소외 극복의 출발점을 사회 제도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갈 수 있는 전체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연인 사상과 공동사회 이론의 공통점은 '인간의 소외를 없애려면 기존의 사회구조를 제거해야 한다'가 아니다. 이 두 사상의 공통점은 새로운 사회 구조의 창조가 아닌 기존의 두 사회체제의 장단점을 깊이 있게 파악하여 변증법적으로 조화시키는 '양의(兩意)적 유토피아(an Ambiguous Utopia)'9) 개념에 있다.
이러한 '양의적 유토피아' 개념은 SF영화의 '결말구조'와 상동구조를 가지고 있다. SF영화 역시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동은 결국 두 세계의 공멸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중재자를 통해 지상과 지하로 분리된 두 사회를 융합하는 결말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3장 SF영화에 나타난 소외의식
1.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6)
1) 내러티브와 인물
메트로폴리스는 거대한 빌딩과 마천루로 가득 찬 도시이다. 노동자들은 오직 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소외된 인간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거대 도시의 지하(below ground)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지상(above ground)에는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프레드슨이 살고 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던 프레드슨의 아들 프레더는 어느 날 마리아라는 노동자의 딸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통해 지하 세계의 비참한 생활을 알게된다. 프레더는 아버지 프레드슨에게 노동자의 근로 조건을 개선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한편 프레드슨은 과학자 로트방과 결탁해 지하세계의 영적 지도자인 마리아와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을 교란할 것을 꾀한다. 마리아의 복제 로봇은 노동자를 선동해서 중앙 발전기를 파괴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지하세계는 홍수가 나며 모든 지하 도시의 건물은 무너져 내린다. 마침내 프레더와 마리아의 중재로 노동자는 자본가 프레드슨과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메트로폴리스>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인물은 크게 4명이다.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프레드슨은 노동자의 처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본가를 상징하고 프레드슨의 협력자 로트방은 자본가와 결탁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과학기술을 표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프레더와 마리아이다. 먼저 프레더는 영화에서 중재자(mediator, mittler)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0) 중재자는 노동과 자본을 화해시킴으로써 '노동자의 소외'를 치유하는 중심축으로써 기능한다. 프레더는 이러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유일하게 영화가 제시하는 모든 공간(인공적인 자연을 상징하는 정원, 프레드슨의 사무실, 지하 공장, 지하묘지(catacomb), 로트방의 연구실, 노동자 도시, 교회 등)에서 활동하며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프레더슨, 마리아, 로트방, 조셉 등)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한편 마리아의 극중 역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 제목인 'Metropolis'가 가지는 어원학상 의미를 알아야 한다. 어원학상 'Metropolis'는 그리스어 'metro'와 'polis'의 합성어이다. 'metro'는 어머니(mother)를, 'polis'는 도시(city)를 의미한다. 따라서 'metro+polis'는 '어머니 도시(mother-city)'를 의미한다. 마리아는 이러한 '어머니 도시'에서 이중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마리아는 노동자들에게 중재자의 재림을 전파하는 '좋은 어머니(good mother)'를 상징하고 로봇으로서의 마리아는 '나쁜 어머니(bad mother)'를 상징한다(Dadoun 1991 : 137-139).
인간으로서의 마리아가 '좋은 어머니'로 상징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자본가의 아들 프레더는 어머니가 부재한 존재로 그려진다. 따라서 프레더에게 있어 마리아는 연인이자 동시에 잃어버린 어머니로써 기능한다. 둘째, 항상 아이들을 동반해서 등장하는 마리아는 영화 도입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프레더를 찾아가 '형제(brother)'의 존재를 알려준다. 또한 홍수가 났을 때 마리아가 울리는 비상벨은 일종의 '자궁(uterus)'(Dadoun 1991 : 139)으로 기능한다. 결국 아이들은 마리아의 '자궁'으로 모여들고 마리아의 모성애는 그들을 홍수로부터 구한다. 셋째,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은 종교적 의미로 성모 마리아(The Holy Mother)를 상징한다. 마리아는 기독교도의 피난처였던 지하묘지(catacomb)에서 노동자들에게 바벨탑의 전설을 들려주고 그들이 처한 모순된 상황을 구원해줄 중재자(mediator=God)의 존재를 설교한다.
'나쁜 어머니(bad mother)'로 상징되는 로봇으로서의 마리아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탄생된 마리아이다. 로봇 마리아는 공산주의와 테크놀로지의 병폐를 상징한다. 로봇은 노동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선동하고 공장을 파괴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로봇 마리아를 마녀로 판단하고 화형시킴으로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편 영화에서 나타나는 어머니의 이미지와 히틀러의 욕망 사이에는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홍수로 잠긴 노동자의 도시는 위험에 직면한 독일을 상징하고 아비규환 속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마리아는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또한 마리아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울리는 비상벨은 어머니의 도시를 세우려는 히틀러를 호명하는 것과 같고 마리아를 중심으로 융합된 두 계급은 히틀러가 주장하는 독일의 결합과 일치한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주로 '아버지의 땅(Fatherland)'으로 부른 것에 반해, 히틀러는 그의 어머니를 다시 세우고(remodel) 싶은 심정으로 항상 독일을 '어머니의 땅(Motherland)'으로 명명했다(Dadoun 1991 : 154-155).
2) 영화적 공간과 시각적 요소
<메트로폴리스>는 주로 건축양식을 통해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을 극단적으로 분리한다. 이러한 공간의 분할은 최상층 계급(upper)과 최하층 계급(lower)을 만들어 낸다. 최상류 계급이 살고 있는 지상은 도시를 지배하는 자본가들의 세계이고 최하층 계급이 살고 있는 지하는 노동자들의 세계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공간의 분할은 노동자의 소외감을 증폭시키고 계급간의 단절감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의 분할은 영화의 도입부부터 극명히 대조된다. 고층빌딩들과 거대한 도시는 마치 현대의 뉴욕(New York)시를 연상시킨다.11)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하 세계는 거대한 기계가 뿜어내는 증기와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교대 행렬로 그려진다. 노동자들은 마치 기계와 같이 걷고 움직이고 일한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에서는 원자재의 모습도 완제품의 모습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노동 그 자체로만 존재한다(Dadoun 1991 : 138).
또한 이러한 대조는 프레더가 놀고 있는 지상 세계의 인공적인 정원과 그가 방문한 지하 공장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맑은 연못과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정원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미녀들과 하얀 백조들이 날아다닌다. 이때 마리아가 남루한 검은색 옷차림을 한 아이들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공간의 대비가 갖는 분리감은 배가된다. 이러한 공간의 분리를 배가시키는데 기여하는 중요한 시각적 요소는 바로 하얀색(white)과 검은색(black)의 대비이다. 프레더가 입고 있는 하얀색은 자본가 즉,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검은색은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한다. 영화에서 검은색은 구체적으로 금지, 죽음, 재앙을 상징하고 하얀색은 지위, 권력, 사치를 나타낸다. 지하 노동자들의 다 떨어진 검은 작업복은 획일화된 움직임과 맞물려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표상한다. 프레더가 지하에 내려가 검정색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노동자와 동화되려는 심리상태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영화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작업복과 턱시도의 대비 등) 상반된 이미지들은 영화가 표상하는 이데올로기와 소외된 존재로서의 문화적 지위를 상징한다(Dadoun 1991 : 144).
3) 결말구조
<메트로폴리스>에 나타나는 인간 소외는 마르크스의 4가지 소외된 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지하 세계의 노동자는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이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으로 작동되는 거대한 발전기는 메트로폴리스의 밤을 밝히고 화려한 미를 창조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지하 노동자는 그들이 생산한 로봇(간접적 생산물)에 의해 선동되어지는 음모에 희생당한다. 결국 이러한 노동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자본가인 프레드슨의 소유가 됨으로써 노동자는 생산물에 소외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또한 지하 세계는 자본가로부터 소외된다. 이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10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을 때 지상 세계에서는 화려한 턱시도를 입고 로봇 마리아가 추는 퇴폐적인 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는 결국 유산자와 무산자의 대치를 의미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유재산의 문제와 관련된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의 고찰을 통해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하며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다는 필연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는 기존 사회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한다.12)
로봇 마리아에 의해 공장이 불타고 홍수가 나자 지하세계는 붕괴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지상 세계의 전력도 끊겨버린다. 즉, 영화는 이러한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동은 결국 두 세계의 공멸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신 <메트로폴리스>는 루소·퇴니스의 '양의적 유토피아' 개념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소외 극복의 가능성을 양자의 융합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프레드슨과 프레더 그리고 마리아와 작업반장이 새로운 날을 창조하기 위해 모인다. 마리아는 프레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과 두뇌 사이에는 중재자가 필요하고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열었을 때만 가능하다(There can be no understanding between the hands and the brain unless the heart acts as mediator)."
여기서 말하는 손은 노동(the hand=labor)을 상징하고 노동은 다시 작업반장(foreman)을 상징한다. 또한 두뇌는 자본(the brain=capital)을 상징하고 자본은 프레드슨을 상징한다. 프레더와 마리아는 바로 노동과 자본이 분리된 두 세계를 결합시켜주는 중재자(the heart as mediator)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융합은 서로의 악수로서 암시된다. 중재자인 임무는 파편화되고 분열된 자본과 노동(capital and labor)을 지식과 노동력(brain and hand)으로 이어주는 것이다(Dadoun 1991 : 148, 151).
2. <델리카트슨 D licatessen>(1991)
1) 내러티브와 인물
정확한 시대를 알 수 없는 황폐한 세상. 식량 부족으로 인육을 먹는 것이 당연시되는 어느 교외 도시. 델리카트슨이라는 푸주간 간판을 내건 한 퇴락한 건물에 14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한 마을 사람들처럼 지내지만 서로를 감시하는 삭막한 집단이다. 이들의 삶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전직 서커스 광대 출신인 뤼종이 찾아오면서부터다. 잡부로 취직되어 일하던 뤼종은 푸주간 주인의 딸 줄리를 만난다. 식량 부족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아버지를 극도로 혐오하는 줄리는 뤼종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줄리는 뤼종을 죽여 부족한 고기를 공급하려는 아버지의 음모를 알고 지하인간들에게 뤼종을 구해달라고 찾아간다. 한편 굶주림에 못 견딘 세입자들은 단체로 뤼종을 죽이러 나서고 뤼종은 줄리와 함께 욕탕으로 도망친다. 결국 푸주간 주인은 자신이 잘못 던진 부메랑에 맞아 죽고 뤼종과 줄리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연주를 한다.
'델리카트슨'이 존재하는 시대는 명확히 정해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렇게 뚜렷한 시대 구분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인간병폐를 모든 시기에 존재하는 전면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델리카트슨>에는 세 부류의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은 푸주간 주인이자 건물주인 끌라베를 중심으로 살고있다. 끌라베는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온 외지 사람들을 죽여 자기 세입자들에게 인육을 공급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주민들을 관리·통제한다. 세입자들 또한 고기를 먹기 위해 끌라베에게 기생하며 동조한다. 끌라베는 마을의 독재자이자 자본가이며 세입자들은 노동자 계급과 삶의 목표를 상실한 부르주아를 대표한다.
이들은 루소가 비판하는 '사회(la societe)'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델리카트슨'의 사회는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한 사회이고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으며 철저히 타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사회 결속에서는 이미 어떠한 본질적 결합도 구할 수 없다. 사람들은 끌라베를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관계다. 이들의 개인적인 이익(고기를 먹는 것)은 사사건건 충돌하고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때로는 이웃의 장모를 죽여 육류를 섭취하고 남에게 온 식품이 든 소포를 빼앗기 위해 싸우기도 한다. 심지어 이웃의 다리까지 잘라 먹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이다. 결국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 의지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특수의지들의 합계에 불과하다. 즉, 이들은 임시적인 통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가 우위를 점하는 이익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두 번째 부류의 인간들은 지하 하수구에서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을 하는 인간들이다. 이들은 지상인들에게 있어 단지 하나의 사냥감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하인간들은 지상인들을 적대시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사회가 공동사회적인 특징과 본질의지를 지녔다고는 볼 수 없다. 지하인간들은 루소의 자연인 개념 중 '야만인으로서의 자연인(l'homme naturel en homme sauvage)'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지하인들은 타인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지 않은 고립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연인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는 이들의 존재를 '인간의 본성은 단순히 자연으로 회귀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명제를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직 서커스 광대 출신인 뤼종과 푸주간 주인 딸인 줄리는 지상인간이면서도 타락하지 않은, 다시 말해 '영혼의 평정(la tranquillitas animi)'을 간직한 사회상태에서 살고있는 '참다운 자연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세 번째 부류의 인간에 해당하는 뤼종과 줄리는 <메트로폴리스>의 프레더와 마리아와 같은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줄리와 뤼종은 타락한 지상인들이 잃어버린 순수와 인간성의 상징이며 동시에 개인의 참된 자유와 소외 치유를 위해 지상과 지하를 융합한다.
2) 영화적 공간과 시각적 요소
<델리카트슨>은 <메트로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주로 표현주의적인 세트를 통해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을 분리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음산하고 어두운 화면으로 채워져 있으며 카메라는 항상 인물들을 위나 아래, 혹은 측면에서만 바라봄으로서 왜곡된 영상을 전달한다.
영화의 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지상에 있는 주변 건물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폐허처럼 변해있다.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은 푸주간 '델리카트슨'과 세입자들이 모여 사는 건물뿐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지상세계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으로 비춰진다. '델리카트슨'은 '인육을 공급하는 집'을 의미하고 절대권력은 사람고기를 공급하는 자로 비유된다. 지상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마치 1950년대나 60년대를 연상시킨다. 거의 축음기에 가까운 레코드 플레이어, 줄리가 지하인간들과 교신하는 무전기, 그리고 초기 흑백 TV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도 모두 지나간 옛 향수를 달래주는 프로들 뿐이다. 이러한 소품의 사용은 시대적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델리카트슨>의 배경이 지나간 과거인지 미래의 핵전쟁 이후의 상황인지 구별하기 힘들게 한다. 지상세계를 특징짓는 중요한 시각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방을 연결하고 있는 환기통, 쓰레기 배출구, 수도관이다. 이는 마치 현대 사회에 퍼져 있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 장치 같은 기능을 한다. 끌라베는 인육을 공급함으로써 권력을 갖고 각종 연결관을 통해 세입자들을 통제한다. 특히 이러한 감시와 통제는 끌라베와 그의 정부 쁠뤼스의 정사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침대의 스프링 소리는 방들을 연결시키는 관을 따라 다른 세입자들의 방으로 전달된다. 첼로 연습을 하는 줄리, 천장을 칠하는 뤼종, 카페트를 터는 아줌마, 뜨개질하는 할머니, 타이어에 바람 넣는 아저씨 등은 그 소리에 맞춰 일괄적으로 움직인다. 처음에는 천천히 들려오던 스프링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그에 따라 세입자들의 움직임도 빨라진다. 이런 모습은 지상세계가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라는 것을 나타낸다.
반면, 지하세계는 오로지 곡물만을 먹는 일련의 사회로 설정되어있다. 이들은 지상인들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폐쇄적인 공간에서 숨어살고 있다. 지하 인간들은 지상인들에게 있어 반체제적인 집단으로 상정된다. 신문에는 이들을 무법자로 묘사하고 한번도 이들의 실제 모습을 본 적 없는 지상인들 조차 이들을 흉악한 범죄 집단으로 취급한다. 이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지상인들과 비교해 매우 특이하다. 광부의 복장과 잠수부의 의상이 결합되어 있는 이들의 의상은 지하라는 공간을 더욱 단절되어 보이게 한다.
지상과 지하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는 바로 '곡물(the grain)'이다. 콩이나 옥수수로 상징되는 이 곡물의 쓰임새는 지상과 지하의 세계에서 전혀 상반되게 나타난다. '채식'만을 하는 지하 인간들에게는 당연히 없어서는 안될 '식량(the food)' 개념으로 쓰인다. 그러나 육식을 하는 지상인들에게 있어서는 '육류'를 바꿔 먹을 수 있는 '화폐(the money)'로써 기능한다. 이러한 대조는 새로운 사회·경제적인 제도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도상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식량으로서의 '곡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공동사회적 뿌리'이다. 말하자면 식물은 인간공동 생활의 실체적 기초이기도 하다(퇴니스 1986 : 227). 그렇다고 해서 곡물을 식량으로 삼는 지하세계가 공동사회적 특질을 전면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상세계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본질의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하세계가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공동사회적 특질은 곡물(공동사회적 뿌리)을 얻는다는 공동의 목적과 그 목적을 실행하는 수단을 서로 혼합된 그리고 분화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본질의지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지상사회는 인육을 먹겠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선택의지를 갖는다.
3) 결말구조
영화의 결말부에서 '델리카트슨'의 절대권력자인 끌라베는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의해 죽고 뤼종과 줄리는 그들을 감시하던 모든 '구멍'을 막고 거대한 '물'을 만들어낸다. 결국 타락한 지상 세계는 정화되고 뤼종과 줄리는 지하인간들에 의해 구조된다. 두 사람의 중재자가 만들어낸 '양의적 유토피아'는 지하도 지상도 아닌 '지붕(the roof)'이라는 '제3의 공간'을 창조해낸다. 즉, '지붕'은 사회인(지상)과 자연인(지하)이 결합된 형태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의 자연인(l'homme naturel vivant dans l' etat de la societe)'을 상징한다. 이러한 소외 치유의 암시는 영화의 엔딩 부분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뤼종과 줄리가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 톱과 첼로의 합주를 한다. 톱과 첼로라는 상이한 악기의 합주는 두 사회의 융합을 의미한다. 한편 그들의 뒤에서 연주를 흉내내는 어린 형제들은 미래의 희망을 뜻한다.
제4장 소외론과 영화사회학
소외 연구가 한 사회가 당면해 있는 사회적 병폐를 밝혀주는 '바로미터'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역시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일종의 '거울'로써 기능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화는 단순히 오락을 제공하는 유희의 수단이 아닌 중요한 사회제도이며 영화는 그 시대 사회에 대한 욕망, 욕구, 공포, 동경을 반영한다(앨런 & 고메리 1998 : 232 ; 조웻 & 린튼 1994 : 113).
소외 이론이 인간 소외에 대한 다양한 현상을 밝혀주는 단초로써 기능하듯이, 영화사회학(Sociology of Film, Film Sociology)은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방법론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영화사회학의 초기 연구는 1920년대 말 미국 페인 기금(Payne Fund) 연구로 대표된다. 페인 프로젝트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영화가 청소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연구였다. 이 연구는 이후 많은 사회학자와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이 취한 조사방법은 경험적 연구부터 사회조사방법론, 인터뷰까지 다양하게 선택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영화가 우리 시대에 새로운 강력한 매체로 등장했음을 암시하는 결과물들이다. 페인 기금 연구는 궁극적으로 영화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영화사회학이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론임을 입증했다(Tudor 2000 : 188-189).
이러한 영화사회학은 1950년대 들어서면서 양적조사방법과 통계방법을 이용하여 영화산업적 측면에서 관객조사가 이루어졌고 본격적인 대중매체 사회가 논의되면서 사회학적인 접근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1970년대들어 영화사회학은 영화기호학 및 정신분석학과 융합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서는 사회구조와 사회작용의 상호연관성에 관한 논의가 주 관심사로 떠올랐다(Tudor 2000 : 189-191).
카세티(F. Casetti)는 이렇게 다양한 영화사회학의 영역을 크게 사회·경제학적(socioeconomic)인 측면, 영화제도적(cinematic institution)인 측면, 문화·산업적(culture industry)인 측면, 사회반영적(representation of the social)인 측면으로 구분한다(Casetti 1999 : 109, 114, 117, 131).
첫째, 사회·경제학적(socioeconomic)인 측면이란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을 사회·경제학적 측면의 하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즉,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을 산업적인 측면과 분리시켜 접근하는 것이다.
둘째, 영화제도적(cinematic institution)인 측면이란 영화가 소비되는 과정과 영화의 구조와 사회적 구조를 비교하는 측면을 말한다. 즉, 영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사회조사방법(survey)을 이용하여 측정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회·경제적인 측면과 비교하여 좀 더 엄격한 사회·인류학적인 방법을 통원하여 이루어진다.
셋째, 문화·산업적(culture industry)인 측면이란 영화를 문화산업이라는 좀 더 확장된 범위 안에서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벤야민(W. Benjamin)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6)은 이 연구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와 아도르노(T. Adorno)의 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넷째, 사회반영적(representation of the social)인 측면은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데 있어 작용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영역을 말한다. 즉, 영화를 사회를 반영하는 하나의 특별한 징후로서 접근하는 영역이다(Casetti 1999 : 108).
이러한 네 가지 영역 중 소외 이론이 영화사회학과 관련을 맺고있는 지점은 바로 '사회반영적인 측면'이다. 영화는 높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신념들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소외 이론은 이러한 영화를 통해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과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소외연구를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사회학적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사회반영적인 측면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크라카우어(G. Kracauer)의『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From Caligari to Hitler)』(1947)는 영화사회학과 소외 이론이 맺고있는 접합점에 많은 영감을 준다.
크라카우어는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른 어떤 예술 매체보다 더 직접적으로 국가의 정신적인 측면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첫째, 영화는 개인적인 작업이 아니라 집단적인 작업이다. 둘째, 영화는 대중을 위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상의 논거를 토대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크라카우어의 논의를 요약하면 영화는 '한 사회의 내면(social testimony)', '문화의 무의식(culture's unconcious)', '사회의 심리적 성향(social psychology)'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다른 어떤 매체의 텍스트보다 한 사회의 숨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측면'을 정확하게 묘사해낸다고 볼 수 있다(Casetti 1999 : 124-126, 127).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성은 소외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상적 열쇠라는 점과 일맥 상통한다.
물론 많은 학자들에 의해 크라카우어의 연구는 지나친 단순주의와 결정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받은 것도 사실이다.13) 하지만 그의 연구는 영화를 단순히 미학적인 측면에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 역사적 측면 더 나아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끌 수 있는 매체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Casetti 1999 : 127).
크라카우어의 연구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갈리(G. Galli)와 로시티(F. Rositi)는 1967년 나치 전 시대의 영화와 동시대의 미국 영화 산업을 비교 연구하여 영화는 사회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의해 구성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들은 크라카우어 연구의 지평을 넓혀 영화의 정치·사회학적인 측면을 밝혀내었다(Casetti 1999 : 127).
한편 페로(M. Ferro)는 크라카우어가 제시한 영화와 역사라는 문제틀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데 있어 작용하는 네 가지 원리를 발견하였다. 첫째, 영화는 개별 작품 속에서 제시하는 상황에 의해 한 사회에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둘째, 영화는 편집과 같은 작품의 스타일에 의해 사회를 반영한다. 셋째, 영화는 구체적인 사회 운동과의 관련성을 갖는다. 즉, 영화는 단순히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일종의 무기로서 기능한다("Images are not simply a mirror, but also a weapon"). 넷째, 영화는 작품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수용된다. 즉, 모든 사회는 각 사회의 고유한 방식으로 영화를 해석한다. 크라카우어의 연구를 보다 정밀하게 다듬은 페로의 연구는 영화가 단순히 사회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어두운 측면과 정신적인 과정, 그리고 사회를 변혁시키고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지표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Casetti 1999 : 128-129).
이상으로 살펴본 논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점은, 영화에 나타난 시각적이고 구술적인 모티프는 개인의 정신상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정신상태를 반영한다는 점이다(앨런 & 고메리 1998 : 241-242). 이러한 특성은 영화에 나타난 소외의 모티프들을 통해 한 사회에 내재해있는 소외 현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영화적 이미지는 단지 상황이 아니라 사회의 시각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의 시각적인 면은 한 사회에 내재해 있는 소외와 같은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주며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기제이다. 또한 시각적인 면은 한 사회의 정신적·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드러낸다. 즉, 영화는 우리에게 단지 한 사회의 이미지만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그 이미지를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Casetti 1999 : 130-131).
따라서 영화사회학은 소외 이론과 영화 텍스트간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종승(roksa@cinefocus.co.kr)
※ 미주
1) '소외개념의 역사를 어디까지 소급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한 논란은 제2장에서 자세히 다루어 질 것이다.
2) 예를 들면 'separation, objectivation, detachment, distancing, estrangement, bifurcation, isolation, exteriorization, reification, rationalization, ritualization, disorganization 등이 있다(박승위 1996 : 30).
3) 유럽에서의 근대사회의 성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에서 18세기말에 이르는 시민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다(정문길 1998 : 20).
4) 실제로 사회과학자들 가운데서는 이 개념의 사용을 전적으로 포기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일반적으로 소외라고 불리워지는 현상과
유사한 현상을 포함하면서도 소외에 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정문길은 소외라는 개념의 사용 여부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접근 방법이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1) 소외개념의 사용을 포기하는 방법, 2) 엄정한 과학적 용어로만 사용하는 방법, 3) 가치내재적인 철학적 용어로 사용하는 방법, 4) 현재의 개념의
모호성과 사용상의 혼란을 방치해 두는 방법. 하지만 4가지 방법 역시 많은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정문길 1998 : 198-199).
5) 그 외에도 소외 이론을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1) 인간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뒤르켐학파(Duekheimians)와 사회가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마르크스주의자를 구분하는 방법, 2) 소외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는 주관주의자와 마음의 상태는 진정한 소외를 은폐한다는 객관주의자를 분리하는 방법, 3) 같은 사회학자라도 몰가치성을 주장하는 자와 참여주의자를 구분하는 등, 관점에 따른 구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는 철학에서의 전통철학과 윤리실증주의의 갈등, 심리학에서의 프로이트 계열과 실험심리학의 대치 등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정문길 1998 : 202).
6) 그렇다고 이러한 분류 방법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개념상의 혼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학상의 중립적인 소외 개념이 가치전제를 포함하는 철학적 소외 개념과 은연중에 혼합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7) 한가지 중요한 점은 루소는 미개인(L'homme sauvage)과 자연인(L'homme naturel)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 번째 접점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8) 여기서 말하는 '영혼의 평정'이란 쓸데없는 상상력과 정열이 없었던 자연인들이 누렸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영혼의 평정 상태는 그저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일념으로 뭉친 사회인의 광기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Derath 1964 : 118).
9) 양의적 유토피아라는 말은 美 페미니즘 SF 작가인 어슐라 르귄(Ursula K. Le Guin)의 작품 「빼앗긴 자 The Dispossessed」(1974)의 부제이다.
10) <메트로폴리스>가 파시스트적인 작품이며 나찌 집권의 전조를 알리는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중재자의 어원이 히틀러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독일어 'Mittler'는 중재자라는 뜻이고 이는 히틀러의 철자인 'Hitler'와 유사하다. (Mediator=Mittler=Hitler) 실제로 히틀러는 영화 속에 나오는 Mittler라는 단어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히틀러는 실제로 집권 초기에 Hitler 대신 Hittler로 문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Dadoun 1991 : 153).
11) 실제로 프리츠 랑은 1924년 미국에 가서 뉴욕의 야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뉴욕의 고층빌딩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의 <메트로폴리스>에 반영되었다(Gressard 1988 : 13-15)
12)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거부는 나찌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히틀러 역시 독일민족지상주의를 위해 국제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찌즘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나찌즘은 퇴니스가 우려한 공동사회로의 맹목적인 회귀를 꾀했기 때문이다. 퇴니스는 공동사회를 마음대로 부활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라고 경고했지만 히틀러와 나찌는 민족적 공동사회(National Gemeinshaft)라는 관념에 사로 잡혀 독일인의 생활 진행 방향을 역전시키려고 했다.
13) 이에 대해 앨런(R. C. Allen)은 "크라카우어의 방법론이 역사 추리에 있어 사건 B가 사건 A 이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전자가 후자의 결과로서 발생했다고 추론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고 논평했다. 즉, 크라카우어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히틀러에 의해서 독일 사회가 파괴된 이후에 저작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결과로부터 추정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보는 것이다(앨런 & 고메리 1998 : 247)
☞ 참고문헌
김주연(1992),『현대문화와 소외』, 현대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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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1989),『갈등과 소외』, 단국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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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http://www.cinefoc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