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문학기행 특구 지정에 따른 대안 제시의 글
늦은감이 없쟎아 있지만은 이제라도 우리 장흥이 문학관광 기행 특구 지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얼마나 마음이 기뻤는지 모른다!
그동안 근동의 타 시군들의 문화사업 시행들을 지켜 보면서 많이도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문학을 들고나와 다산초당과 유물관을 짓고 관광지화 하였으며
신구를 겸해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의 영랑 김윤식선생 생가 복원에서 이제는 영랑생가 부근에
현대문학 전시관을 짓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부지매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해남은 진즉에 부터 고산 윤선도님의 시조문학을 가지고 문화사업에 박차를 가하여 근동을
국립관광지 화 하여서 입장료 수입이 꽤나 짭짤하다는 소식이고 최근에는 대흥사와 두륜산을 묶어서
케블카 까지 운영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으며,
진도는 진도 아리랑과 운림산방, 울돌목까지 연결해서 해남과 더불어 어깨동무를 해서 가고 있으며,
목포는 유달산을 조각공원화 해서 이난영 의 목포에 눈물로 가요축제를 열어가더니 이제는 세계적인
요트산업단지 개발박차. 신안까지 묶어서 다이아몬드 관광지로 묶어가고 있으며,
영암은 월출산이라는 천혜의 소금강산을 활용해서 성기동을 왕인박사 유적지로 개발하고
왕인 벗꽃축제로 일본인들의 관광 순례지화 되어가고 있고 더불어 최도선과 최주몽까지 묶어서
낭주골 처녀, 영암 아리랑까지 히트치고 있으며,
보성은 우리 장흥 강산 판소리를 선점해서 서편제소리 국립 문화관을 짓더니
이제는 조정래님의 소설 태백산맥을 테마 마을로 묶어서 보성녹차 국립연구소에 이어,
율포를 해수탕으로 개발해서 연간 800 만명의 관광객이 다녀 간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겨울동화라는 영화 촬영으로 힛트를 녹차밭을 배경으로 쳤던 것은
저~ 모래시계의 영화촬영 배경지 정동진의 시원한 바다 배경에서 벤치마킹 해 왔으리라~
요사이 느닷없이 담양은 가사문학을 들고 나와서 국립 관광지 화에 열중하고 있으니
물론 송순의 면앙정이 있고 소쇄원이 있고 정자 문화가 발달해 있고,
송강 정철선생이 7년동안 유배지요, 처가동네이며, 만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가시면서
읊었다는 " 죽림에 누었더니 관동 팔백리에 관백을 맡기시어 연추문 드리도라로" 이어지는 가사가
기봉 백광홍 선생의 "관서별곡" 어명을 받자옵고 행장을 다사리니 칼한나 뿐 이로다
연조문 내달려 모화고개 너머드니 귀심이 따르거니 고향을 사념 하랴로 " 이어지는
관서별곡을 정송강이 모방해서 25년 후에 지었다는 것이 학계에 비교 문학으로 밝혀지고
더군다나 기봉님의 동생 옥봉 백광훈님과는 정 송강이 절친한 친구로서 담양에서 장흥 기산을 자주
놀러와서 친구 형의 작품 관서별곡과 사미인곡을 흠모해서 10년 선배인 기봉 평안도 평사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고,
이제 국문학사에서 고교 국어2 에 관서별곡에서
작자 기봉 백광홍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줌 으로 요사이 표기되어 교과서가 바뀌고
문화 관광부에서 2004년 6월의 문화 인물로 지정되고 성균관에서 과거 급제자 들만의 시회에서
명종 임금님이 내린 시의 운 동지부로 장원하여 하사받은 선시십권은 국내 유일의 보물로 지정되어서
배향하는 기양사가 도 지정 문화재 207호가 되었다~
이러한 차제에 그렇다면 왜? 하나같이 타 시군들은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그렇게 앞 다투어서
국립 관광지화에 열중이고 혈안 들일까?
문화 권력이란 천년을 가는것이며 소위 굴뚝없는 산업 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장흥군이 그동안 행해왔던 한심함 이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았음은 여기에 다 열거할수없고
대표적인 몇가지만 사실적으로 지적 하고자한다,
광산으로 빼앗긴 아니 넘겨준 고싸움은 원래 우리 장흥 고 다,
1968년 보림문화재에서 도민체전으로 출전했던 우리 장흥의 고는 일등을 했다고하며
그 당시 광산은 갱메구로 이등을 하였는데, 도에서 장흥이 고 싸움을 가지고 전국체전에 나갈것을
권유하자 예산 700만원이 없어서 못 나간다고 예산타령만 하다가 광산이 고 싸움을 가지고 나가라고
도에서 권유해서 장흥이 광산으로 고를 넘겨 주는데, 행원에 고 잘꼬는 머슴까지 붙여서 광산에 집도 사주고
논3 마지기 사주고 이주까지 시켜서 넘겨 주었다고 그당시 공보실장 김복수씨는 말하고있다,
서편제의 마지막 전승자 정응민씨는 본적이 안양면 학송이고 만년에 보성 강산과, 회천 오세 에서 전수하다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1912년 행정개혁개편 이전의 웅치강산과 회천은 원래 우리 장흥땅 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국악인 조상현씨도 용산면과 안양면 사람이다, 득음을 회천 오세에서 했다는 것이지만~
이상의 간략한 예 들을 열거하는 것은 우리군이 전국 최초로 문학기행 특구로 지정되었으니
이제 진지하게 우리군은 어떻게 문학을 형상화 해 가야 할지를 논해야 할때라고 보는것이다,
여기에 이러한글을 올려 보는것은 현임 군수님이신 이명흠 군수님이 유달리 문학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제라도 장흥을 전국 최초로 문학관광 기행 특구로까지 지정을 받으시고 지역 발전에 남다른 관심과 박차를
가하고 계신다는 점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에 주제넘게 용기를 내어 이글을 작성해 보는 것이다,
(1)
이번에 기산마을에서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운 좋게도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의 타이틀을 가지고 전국 대상으로 일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조선팔문장 기봉 백광홍님과 기산 팔현에대한 자료 수집을 하던차에
국립중앙 도서관과 한국 고전문학 번역원, 서울대학교 중앙 도서관에서 용산면 금곡출신 김규정님의 협조로
조선 왕조실록 선조 18년 2월1일자와 12월1일자 송구,송시열의 문집등에서 기록을 찾아서 복사해 와서 문집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현재 이희승 국어 대 사전이나 네이버 검색등에 팔문장에 대해 옥봉 백광훈으로 오기되고 있고
조선 팔문장은 기봉 백광홍, 이산해,윤탁현,이순인,송익필,최립,최경창,하응림,등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명종과 선조시대가 조선시대 학문의 르네상스 시대로 당대 거유 학자들을 일컬어
조선 팔문장이라 칭하고, 옥봉 백광훈과 이달, 최경창은 삼당파 시인으로 기록을 전하고 있었으며,
기봉 백광홍님이 장흥 기산출신으로 조선 팔문장으로 칭해지자 동문수학을 했던 훈장 남계 김윤,지천 김공희,
동계 백광성,풍잠 백광안,옥봉 백광훈,서곡 임분,죽곡 임회 등을 한 마을기산 봉명재에서 사마시에 합격을
동 시대에 하였다고 하여 기산팔현 세칭 장흥기산 팔문장이라 칭을 하였다고 강진 성전 월남리 원주이씨 이 금
존재 위백규님의 동생이신 서계 위백순님 등이 기산팔현지 서문과 찬을해서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고보면 고려말에 장원봉 하에서 위원개님 위문개님 위신개님의 장원에서 비롯되고
봉명재에서 비롯된 석학들이 기행가사 문학의 관서별곡 등이 효시가 됨으로,
그 를 본받고 모방해서 지어진 작품들이 부산면 관한 노명선님의 천풍가와 금장 이중전님의 장한가,
방촌 위세직님의 금당별곡,존재 위백규님의 권학가, 용산 묵촌 이상계님의 인일가 유치 단산 문계태님의 권농가등,
현존하는 장흥 가단의 가사문학작품 17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일부는 국문학계에서 한글로 번역되어서
장흥 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대학교 백수인 교수님은 장흥의 가사문학이라는 논문에서
전라도 에서 우리 장흥의 가사문학 작품 점유율과 학자수가 27,6%로 으뜸을 차지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바로 장흥이 문림고을 이라고 호칭을 하는것도 가사문학 작품들 때문이며 현재의 문단에 대뷔된 장흥의
문인들이 120 명이고 80 명이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중견 소설가로 이청준님이나
송기숙님 한승원님 김명남님 백성우님 등으로 이어지는 문맥의 근원지가 기산의 봉명재가 발원지라고 정의 하고있다,
그 동안 장흥군에서는 천관산 남쪽 연지리에 돌탑 문학공원을 세우고 현대 문학관을 짓고 예산을 많이도 투입해서
이청준 선생님의 생가복원과 한승원님의 문학 산책로에 이어 문학관까지 예산을 투입했다,
어차피 추진해 오신 일 그 쪽은 현대 문학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기왕에 문학기행 특구가 된 마당에
차제에 우리 장흥군은 국립 문학관을 기양사 부근으로 추진해서 고전문학 시가비를 기양사와 봉명재 사잇길에
세우셔서 전국 유일의 가사문학과 고전 문학 시가비를 세워서 관광지화 한다면 문집 출현율이 장흥읍과 안양면 용산면
관산읍 부산면이 가장 많이 보유되고 있으니 만치 장흥읍의 가까운 기산마을에 국립 문학 박물관을 지어 보자는 것이다,
문림의향장흥을 의향의 기틀을 잡기 위하여 동학의 마지막 결전장 석대들은 의향의 향기로 개발하고
우드랜드와 연계해서 기산마을의 봉명재를 복원하여 고전문학 시가비를 현창하고 비동의 돌담과 팔장사를 현창해서
비동사람들이 장흥장에 앵두팔러 다니던 송정골 옛길을 연화골과 오솔길을 연계해서 앵두나무와 살구나무길로 만들고
동계마을 입구에서 기양사 봉명재로 기산 팔문장 문화마을로 테마파크를 연결해서 안양의 쪽파와감자 수문의바지락으로
파전을 붙이고 안양 막걸리와 더불어 한 5,000 원정도 받고 제암산 사자산 등산객들의 하산길 기산마을 입구에
목을 축이는 소득 사업으로 연계하고,
기산 명밭 무시 짓감김치 그 유명하고 뒷맛이 달다고 해서 근동의 짓감 장시들이 하나같이 기산 짓감이라고 팔았던
그 무시 짓감을 또 생약초 한방약초를 채소화 채계로 만들어서 천혜의 친환경 농산물 재배지 요소를 갖춘 기산마을 쌀로
데친 무시짓감 김치로 한약재 채소로 비빔밥 한그릇에 한 3,000 원씩만 받고 동네앞에 몇천평 정도의 부지에
주차장을 몇백대 라도 차를 대게하고 1,000 여명이 동시에 식사할수있는 호남의 명 비빔밥 식당을 개설해 놓고
관광버스 기사님 들께 로비만 잘 한다면 남도답사 일번지 저 년간 800 만명의 보성 녹차밭 관광객들도 점심때면
저녘 식사때면 몰려오게 할수도 있고, 우리장흥의 숙박업소 들도 우화하!!!웃을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참고", 옛날의 되쟁이 쌀 장사들이 기산쌀은 꺼렸다고 합니다,
이유인즉은 143 근을 되로되면 닷말이 나와야 하는데 쌀이 무거워서 너말 일곱되밖에 안 나왔답니다
근동의 자갈모래 논들의 쌀은 닷말 서되까지 나왔다니 손해가 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생긴 속담이 기산쌀을 먹은송장은 송장도 무겁다! 였다네요!
도룡평 기산쌀은 경기미 하고도 안 바꾼다고 해서 서울로 지금도 많이 갑니다만,
밥을 해 놓으면 유난히 기름져서 윤이나고 간척지 쌀은 설을 쇠면 밥맛이 떨어 진다지만
기산쌀은 년중 변함이 없답니다,
명밭 짓가심을 심던 밭들에는 참다래가 6 만평 정도 심어져서 특산물로 되어있고
군에서 비가림 하우스만 지원해 주신다면 그 명성 높았던 기산 짓감을 다시 생산해 낼수 있겠습니다,
탐진강이나 타 동네의 물이 오는것이 아니고 사자산과 억불산의 흘러 내리는 청정수와
지하수 관정으로만 농사를 짓기 때문에 제초제와 비료사용을 억제하고 친환경 농사를 지을수 있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마을이며 장흥읍과 안양면의 경계로 해발 100 여 미터 물 저울이 형성된 유일한 마을입니다,
광광객이 몰려와서 열무김치 데치고 한약재 채소데친 비빔밥에 쌀맛을 보신다면
분명히 고품질 쌀로 없어서 못팔것이 분명합니다,..
2009년 2월 4일밤 기산이장 백광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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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좋은 아이디어 입니다.늦은감 있지만 지금이라도 일심단결 한다면 .화이팅 ~ ~ !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장흥신문에도 게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