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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177강(三十六. 寂靜音海主夜神 -- 第五難勝地善知識)
(7) 發心의 久近 가. 第一刹塵劫修行 善財童子가 言호대 聖者여 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 其已久如니잇고 夜神이 言하사대 善男子야 此華藏莊嚴世界海東에 過十世界海하야 有世界海하니 名一切淨光寶요 此世界海中에 有世界種하니 名一切如來願光明音이며 中有世界하니 名淸淨光金莊嚴이라 一切香金剛摩尼王으로 爲體하야 形如樓閣하며 衆妙寶雲으로 以爲其際하야 住於一切寶瓔珞海하며 妙宮殿雲으로 而覆其上하야 淨穢相雜이러라 此世界中에 乃往古世에 有劫하니 名普光幢이요 國名은 普滿妙藏이요 道場은 名一切寶藏妙月光明이요 有佛하니 名不退轉法界音이라 於此에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어시든 我於爾時에 作菩提樹神하니 名具足福德燈光明幢이라 守護道場이라가 我見彼佛이 成等正覺하사 示現神力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卽於此時에 獲得三昧하니 名普照如來功德海며 此道場中에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法樹威德山이어든 我時命終하고 還生此中하야 爲道場主夜神하니 名殊妙福智光이라 見彼如來가 轉正法輪하사 現大神通하고 卽得三昧하니 名普照一切離貪境界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一切法海音聲王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生長一切善法地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寶光明燈幢王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普現神通光明雲이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功德須彌光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普照諸佛海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法雲音聲王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一切法海燈이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智燈照耀王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滅一切衆生苦淸淨光明燈이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法勇妙德幢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三世如來光明藏이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師子勇猛法智燈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一切世間無障碍智慧輪이며 次有如來가 出興於世하시니 名智力山王이라 我於彼時에 身爲夜神이라가 因得見佛하야 承事供養하고 卽獲三昧하니 名普照三世衆生諸根行이라 善男子야 淸淨光金莊嚴世界普光明幢劫中에 有如是等佛刹微塵數如來가 出興於世어시늘 我於彼時에 或爲天王하며 或爲龍王하며 或爲夜叉王하며 或爲乾闥婆王하며 或爲阿修羅王하며 或爲迦樓羅王하며 或爲緊那羅王하며 或爲摩睺羅伽王하며 或爲人王하며 或爲梵王하며 或爲天身하며 或爲人身하며 或爲男子身하며 或爲女人身하며 或爲童男身하며 或爲童女身하야 悉以種種諸供養具로 供養於彼一切如來하고 亦聞其佛所說諸法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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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발심(發心)의 구근(久近)
오늘은 화엄경 303쪽 발심의 구근부터 할 차례입니다. 발심한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아니면 최근인지 그것을 합해서 발심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선재동자가 많은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중에 적정음해주야신이라고 하는 선지식을 만나 이 분에게서 그동안 어떻게 공부를 했고, 또 어떤 삼매를 얻었고, 어떤 법을 얻었는가를 묻고 적정음해 주야신이 그것을 죽 소개를 하는 중에 발심한 지가 또 얼마나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는 대목입니다.
화엄경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이야기합니다. 근본적으로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드넓은 세계를 표현하는 입장에서는 사실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이다, 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적합하지는 않아요.
상당히 길고 긴 무한한 시간을 또 이렇게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물론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인생은 짧다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삶이 그대로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인생 또한 영원한 것이지요. 마음이 영원성이면 그 다음 인생도 영원성임을 우리가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공간도 무한하고 시간도 무한하니, 무한한 그 세계 속에 우리도 또한 무한한 삶을 산다는 것을 화엄경에서는 일깨워 주는 거지요. 그것을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깨달음의 문제이며 각자가 아는 만치 느끼는 것이지요.
바닷물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갖고 간 그 그릇 만치 밖에 못 뜬다고요.
종지를 가져간 사람은 한 종지를 뜰 수 있고, 컵을 가져간 사람은 그 컵만치 떠오고 양동이를 가져간 사람은 한 양동이쯤 떠오고 바가지를 가져간 사람은 한 바가지 떠오겠지요.
이런 식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량, 수행의 깊이에 따라서 불법의 세계, 또는 마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미 우리들 속에 내재해 있는 마음의 세계는 무한한 시간이요, 무한한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바다가 무한하지만 내가 가지고 간 그릇은 유한하거든요. 내가 조금 밖에 못 떠 온다고 바닷물이 적거나 바다가 좁거나 한 것이 아니듯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닦은 것, 우리가 깨우친 것, 이것은 얼마 안 된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의 세계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적으로 역시 무한하며, 그래서 영원한 생명, 무한한 능력이라고 불교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지요.
또 보통 중생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유한하다고 보지만 그 유한한 데서 무한한 데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종교, 특히 불교가 지향하는 바이지요. 불교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지요.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보면 적정음해주야신이 아주 오래 전에 발심을 했고 수많은 부처님을 만났고 수많은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설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요. 사실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있다고 하는 것과 없다고 하는 이 문제를 일차원적인,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안목을 가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과거에 부처님이 있었다, 또 역사적으로 없었다, 그렇게 분별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하는 그런 성자들도 역사적으로 있었느냐?
석가모니는 틀림없이 역사상의 인물이고 사리불이나 목건련, 수보리 이런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틀림없이 있어서 지금도 인도에 가면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렇지요. 그런데 그 외의 부처님, 특히 화엄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부처님, 수많은 보살들은 진짜 역사적인 인물이냐 아니냐를 우리가 따지면 그건 분명히 경전 상의 인물이지 역사상의 인물은 아니라고요, 그걸 우리가 분명히 선을 그어놓고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해요.
우리가 세속적인 안목으로 볼 때 역사적으로 있었던 인물이냐 아니면 비역사적인 인물이냐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분명히 이해를 한 다음에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불교적인 안목으로도 봐야 합니다. 불교적인 안목, 불교적인 시각을 무시하면 불교공부를 할 의미가 없거든요.
불교공부를 한다고 하면 우리가 당장에 거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더라도 이론적으로라도 불교적인 시각은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럼 불교적인 시각으로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할 때는 그것은 또 다른 거예요.
아까 말한 것은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역사적인 인물이냐, 비 역사적인 인물이냐, 하고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는 것이고 불교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과거에 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물론 다 포함되고, 예를 들어서 지금 이렇게 연필을 들고 있는데 이것이 진짜로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요.
또 우리가 말을 하고 듣고 육신을 가지고 멀쩡히 살아 있지만 이것을 진짜 좀 더 다른 안목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실지로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이건 좀 더 다른 이야기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보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지요.
무안이비설신의, 안이비설신의도 없다고 하면서도 없다고 하는 그 사람은 분명히 있거든요. 있어서 없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결국은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나로서 내가 없다고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그런 것이 불교적인 시각인데 분명히 내가 이렇게 있으면서 내가 없다고 하는데 그 없다고 하는 것이 또 엉터리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좀 더 다른 안목으로 보면 없는 도리가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해 가지고 인간이 접하고 있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세계를 다 한결 같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없는 시각이 분명히 있어요. 있어도 없는 입장이 분명히 있다고요. 지금 우리가 분명히 이렇게 있지만은 없는 시각이 있고, 전혀 없는데도 틀림없이 있는 입장이 또 있어요.
이건 뭐 적절한 표현이 될는지 모르지만 이 공기 중에도 백 가지가 넘는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발견해 낸 요소가 백 가지가 넘거든요. 앞으로 물리학이나 과학이 좀 더 발달하면 이 안 보이는, 없다고 생각하는 공간 속에 수천, 수만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아마 발견해 낼지도 몰라요.
그와 같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속에도 상당한 것이 있고, 있다고 보는 거기에도 텅 비어 없다고요. 있다고 하는 문제와 없다고 하는 이 문제를 우리는 좀 더 다른 차원, 불교공부를 하니까 불교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생각할 때 있는 것을 꼭 있다고 못하고, 없는 것을 꼭 없다고 못하는 그런 입장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경전 상에 소개된 관세음보살이지만 꼭 없다고는 못하거든요. 역사적으로 보면 없지요. 그것은 역사적인 시각이고, 불교적인 시각으로 보면 꼭 없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석가모니도 꼭 있다고도 못해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 내놔 봐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이게 또 없는 거예요.
그러니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나눠서 이해를 해야지, 두루뭉실 이해를 해 가지고는 이게 분별이 잘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있는 거예요. 또 영험도 있고요.
또, 내가 마음을 쏟으므로 해서 없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영험을 주든, 내 마음이 어떤 영험을 만들어 내든, 어쨌든 그게 헛된 게 아니라고요.
예를 들어서 좋은 표현으로 기독교인은 하나님이란 존재가 없지만 의식적으로 있다고 하지요, 의식화 운동이거든요. 그것을 마음으로 만듦으로 해서 있는 거예요. 마음이 만듦으로 해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도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었다는 이런 말을 거침없이 쓰거든요, 그 사람들도 이제 그렇게 이야기 한다고요.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었다, 사람이 있다고 함으로써 있게 된다고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는 게 모든 존재의 존재실상이고 존재원리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있다고 하는 것과 없다고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참 구구하게 이야기를 많이 해요. 꼭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한다,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좀 세속적인 말로 보면 아주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깨달음의 안목으로 모든 존재를 보면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는 이런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고요. 딱 있다 라고 하면 다른 입장에서 보면 없는 거예요. 없다 라고 하면 또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주먹을 가지고 이렇게 탕! 쳐놓고 “소리가 있느냐?” 물으면 분명히 소리가 있었잖아요. “있다.” 하거든요.
그럼 조금 있다가 “그럼 그 소리가 있느냐?” 물으면 그 소리가 없잖아요. 소리가 틀림없이 있었는데 없어졌으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분명이 아까는 있었으니까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있다가 없다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거지요. 그래서 4구라고 그래요, 유무(有無), 비유비무(非有非無), 역유역무(亦有亦無), 있다 없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또한 있고 또한 없다.
문자는 또 잘 외네요. 내가 말로 설명한 것은 더 어렵나 보지요? 있다 없다, 그 다음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그걸 유식하게 문자로 그렇게 써요, 한자로 쓰면 그렇게 비유비무(非有非無)가 돼요. 그 다음에 또한 있고 또한 없다, 역유역무(亦有亦無). 이걸 4구라고 해요.
그러니까 모든 것,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눈앞의 것이든 눈 밖의 것이든 간에 전부가 사실은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 그게 불교적인 시각입니다.
우리의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전혀 다르지요. 불교적인 시각은 그러니까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또 그 뭐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이 공한 것이고 공한 것이 물질이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불교는 몰라도 그건 안다고요. 세상 사람들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알아요. 그런 정도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설명한 것이 그겁니다. 그 얘기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만 잘 알면 아까 설명한 그 4구도 똑 같이 그 속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불교적인 시각, 불교적인 안목으로 모든 존재를 봤을 때 그 존재는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면 그렇게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는 거지요. 그걸 중도라고 해요.
그렇게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중도라고 합니다. 중도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모든 게 그래요. 전부가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고 우리의 육신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습니다. 미워하려니까 때로는 곱고, 곱다고 생각하려니 때로는 미워죽겠고, 미운 것도 아니고 고운 것도 아니에요. 그런 것은 당연히 알겠지요? 그래요. 우리 감정도 전부 그렇습니다.
사람이 접하는 정신세계도 똑같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까마득히 잊어버렸는가 하면 어느새 내 머리 속에 와 있고, 항상 내 머리 속에 와 있는가 하면 또 찾아보면 없는 거예요.
정신세계도 그렇고 물질세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물질도 눈앞에 보이는 이게 헛것으로 있다는 겁니다. 헛것으로 있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 또 헛것이고,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깨달은 안목으로 세상을 살면 홀가분하게 살지요. 그러니까 크게 집착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 않지요. 억지 안 부리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사는 거지요.
억지 부리며 사는 사람들은 이치를 모르는 거예요.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지요.
우리가 분재를 만들 때 생나무를 휘어잡아서 철사로 감아 겨우겨우 어떤 모양을 만들어 놓는데 그건 아주 부자연스럽잖아요. 그런 것은 불교적인 삶이 아니지요. 우리의 삶이 안 되는데도 아등바등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든다든지 그냥 흘러가는 물길대로 두지 않고 그 물길을 터 가지고 딴 데로 흐르게 하면, 결국은 피곤해지지요. 피곤하게 힘들게 해서 물길을 터놔봤자 그 물길이 온전하게 제대로 흘러가는 것도 또 아니지요.
그래요, 불교적인 삶은 그럼 왜 그렇게 사느냐? 모든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꿰뚫어 본 거예요. 우리도 살면서 경험을 많이 하면 어지간히 그게 이해가 된다고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이해가 돼요.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게 있는 것이라는 그게 이해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 항상 궁금한 것이 수많은 부처님이 등장하는데 이 많은 부처님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인데 그럼 이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거예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알고 보면 이미 알고 있던 거예요. 이미 잘 외고 있는 거지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주먹으로 딱~ 소리를 쳐 놓고는 “있나?”하면 금방 소리가 났지 않느냐고, 있지요.
그럼 또 한 번 묻는 거예요. “또 있나?” 그때는 없지요.
그럼 금방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으니까 “그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네?” 자동적으로 그렇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네?” 그렇지요.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물질이 다 그래요. 물질도 그렇고 우리 마음은 말할 것도 없지요.
마음은 이해하기가 더 쉬워요. 사람들 마음에 일어나는 온갖 감정은 더 그렇지요. 더 이해하기가 쉽다고요.
곱다가 밉고 밉다가도 곱고,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간단히 이해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고와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는 거예요. 그냥 인연 따라서 순리대로 사는 거지요.
발심의 구근, 여기에 많은 부처님과 과거 수행의 경험이야기가 나와요.
가. 제일찰진겁수행(第一刹塵劫修行)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언(言)호대 성자(聖者)여 여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 기이구여(其已久如)니잇고
제일찰진겁수행(第一刹塵劫修行), 첫째는 찰진겁 수행이라, 아주 오랜 세월동안의 수행이라고 제목이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언(言)호대, 선재동자가 말하기를
성자(聖者)여, 성자시여,
여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 그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기이구여(其已久如)니잇고, 이미 얼마나 오래입니까?
야신(夜神)이 언(言)하사대 선남자(善男子)야 차화장장엄세계해동(此華藏莊嚴世界海東)에 과십세계해(過十世界海)하야 유세계해(有世界海)하니 명일체정광보(名一切淨光寶)요 차세계해중(此世界海中)에 유세계종(有世界種)하니 명일체여래원고아명음(名一切如來願光明音)이며
야신(夜神)이 언(言)하사대, 야신이 말하기를
선남자(善男子)야, 선남자야
차화장장엄세계해동(此華藏莊嚴世界海東)에, 이 화장세계해 동쪽에
과십세계해(過十世界海)하야, 십 세계해를 지나서
유세계해(有世界海)하니, 세계해가 있으니,
여긴 법계해가 안 나와 있는데 뒤에 나오지요. 법계해가 제일 큰데 법계해에서 단위를 더 작게 나누면 세계해가 돼요. 세계해 다음에 세계종이 있고 세계종에 세계가 있어요.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어쨌든 십 세계해를 지나서 세계해가 있으니
명일체정광보(名一切淨光寶)요, 이름이 일체정광보요,
차세계해중(此世界海中)에 유세계종(有世界種)하니, 이 세계해 가운데 세계종이 있으니,
종자 종(種)자, 이건 좀 더 작은 단위 이지요.
그러니까 지구라고 하면 지구가 있고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고 도가 있으며, 도가 있고 시와 군이 있지요. 부산시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시가 있고 시 안에 뭐가 있지요? 구가 있고 구 안에 동이 있고 동 안에는 뭐가 있지요? 동 보다 더 작은 단위가 또 있지요? 통이 있고 반이 있고 번지가 또 있고 그리고 가가호가 또 있지요.
이런 식으로 단위를 축소해서 어느 지점에다 초점을 맞추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계종이 있으니
명일체여래원광명음(名一切如來願光明音)이며, 이름이 일체여래원광명음이다, 세계종의 이름이 그래요.
중유세계(中有世界)하니 명청정광금장엄(名淸淨光金莊嚴)이라 일체향금강마니왕(一切香金剛摩尼王)으로 위체(爲體)하야 형여누각(形如樓閣)하며 중묘보운(衆妙寶雲)으로 이위기제(以爲其際)하야 주어일체보영락해(住於一切寶瓔珞海)하며 묘궁전운(妙宮殿雲)으로 이부기상(而覆其上)하야 정예상잡(淨穢相雜)이러라
중유세계(中有世界)하니, 그 세계종에 또 세계가 있으니
명청정광금장엄(名淸淨光金莊嚴)이라, 이름이 청정광금장엄이라. 세계의 이름이 그렇다는 거지요.
일체향금강마니왕(一切香金剛摩尼王)으로, 일체 향금강마니왕으로써
위체(爲體)하야, 체가 되고
형여누각(形如樓閣)하며, 형이 누각과 같으며,
지금은 고층빌딩이 많지만 옛날에는 볼만한 근사한 건물이 누각이지요. 2층 누각, 3층 누각을 근사하게 지어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풍류나 잡히고 이렇게 잔치를 벌이는 그 풍경은 최고인 겁니다. 아주 훌륭한 거지요. 그러니까 경치가 좋은 데는 어디든 다 누각을 지어놓잖아요. 누각을 짓고 옛날에는 귀족들이 있어서 풍류를 잡히고 하는데 그 풍경이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풍경인 겁니다. 그래서 경전을 보면 누각이야기가 자주 등장을 해요.
형이 누각과 같으며,
중묘보운(衆妙寶雲)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보배구름으로써
이위기제(以爲其際)하야, 그 경계를 삼았고, 제(際)자는 경계란 뜻입니다.
주어일체보영락해(住於一切寶瓔珞海)하며, 또 일체 보영락해에 머물며
묘궁전운(妙宮殿雲)으로 이부기상(而覆其上)하야, 아름다운 궁전구름으로써 그 위를 덮었고
정예상잡(淨穢相雜)이러라,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서로서로 섞여 있더라.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게 전부 깨달음의 세계인데 섞여 있더라고 하는 말은 하나로 다 통일되어 있다, 또 근본이 다 공하다는 말입니다. 공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한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차별한 현상이 있는 거지요. 사람마다 얼굴이 다 다르고 특성이 다르고 재주가 다르고 그런 것은 차별적인 것인데 그것이 어떻다고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다 공한 거라고요. 다 없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섞여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평등하다는 거지요.
차세계중(此世界中)에 내왕고세(乃往古世)에 유겁(有劫)하니 명보광당(名普光幢)이요 국명(國名)은 보만묘장(普滿妙藏)이요 도량(道場)은 명일체보장묘월광명(名一切寶藏妙月光明)이요 유뷸(有佛)하니 명불퇴전법계음(名不退轉法界音)이라 어차(於此)에 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어시든
차세계중(此世界中)에 내왕고세(乃往古世), 이 세계 중에 지나간 오랜 세월에
유겁(有劫)하니 명보광당(名普光幢)이요, 겁이 있으니 이름이 보광당이요,
국명(國名)은 보만묘장(普滿妙藏)이요, 또 나라가 있었는데 나라 이름은 보만묘장이요,
도량(道場)은 명일체보장묘월광명(名一切寶藏妙月光明)이요, 도량이 있었는데 이름은 일체 보장묘월광명이요,
유불(有佛)하니 명불퇴전법계음(名不退轉法界音)이라, 이름이 불퇴전법계음이라는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 부처님을 들먹거리려고 지금 이렇게 드넓은 세계, 그러니까 지구, 지구에서 한국, 한국에서 부산, 부산에서 어디, 어디..
이런 식으로 찾아 들어오는 것이지요.
어차(於此)에 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어시든, 여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거든
아어이시(我於爾時)에 작보리수신(作菩提樹神)하니 명구족복덕등광명당(名具足福德燈光明幢)이라 수호도량(守護道場)이라가 아견피불(我見彼佛)이 성등정각(成等正覺)하사 시현신력(示現神力)하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즉어차시(卽於此時)에 획득삼매(獲得三昧)하니
아어이시(我於爾時)에 작보리수신(作菩提樹神)하니, 내가 그 때에 보리수신이 되어 가지고, 보리수를 지키는 신이 되었는데 그 때 이름이 뭔고 하니
명구족복덕등광명당(名具足福德燈光明幢)이라, 구족복덕등광명당, 복덕을 구족한 등(燈) 광명깃발이니라.
수호도량(守護道場)이라가, 도량을 수호하다가
아견피불(我見彼佛)이, 내가 저 부처님이
성등정각(成等正覺)하사, 등정각을 이루사
시현신력(示現神力)하고, 신통을 나타내시는 걸 보고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즉어차시(卽於此時)에, 곧 이때에
획득삼매(獲得三昧)하니, 삼매를 얻으니,
그러니까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는 것을 봤어요. 부처님이 어디에서 정각을 이루었지요? 보리수 밑에서 정각을 이루었지요. 보리수 신이 되어서, 다시 말해서 보리수가 되어서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아,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밑에서 정각을 이루시고는 온갖 신통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리수 신이 굽어보고 있다가 환희심이 났는데 그 환희심이 그만 자기 공부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획득삼매라, 삼매를 얻으니
명보조여래공덕해(名普照如來功德海)며 차도량중(此道場中)에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법수위덕산(名法樹威德山)이어든 아시명종(我時命終)하고 환생차중(還生此中)하야 위도량주야신(爲道場主夜神)하니 명수묘복지광(名殊妙福智光)이라
명보조여래공덕해(名普照如來功德海)며, 이름이 여래의 공덕바다를 널리 비추는 것이며,
그러니까 보리수신이 되어서 죽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차도량중(此道場中)에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아까 불퇴전법계음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계셔서 성도하는 걸 지켜봤는데 이 도량 다음으로 이 보리수 밑에서 또 여래가 있었어요. 세상에 출세했는데
명법수위덕산(名法樹威德山)이어든, 부처님 이름이 법수위덕산이며
아시명종(我時命終)하고, 내가 그때에 목숨이 다하고
환생차중(還生此中)하야, 다시 이 가운데 탄생해서
위도량주야신(爲道場主夜神)하니, 도량주야신이 되었으니,
지난 번에는 보리수신, 이번에는 도량신이 되었지요. 도량의 밤을 맡은 신이지요. 도량의 낮을 맡은 신은 뭐지요? 주주신(主晝神)이지요. 일체 사람이 접하는 모든 하나하나를 전부 신격화 한 거예요. 신격시해서 신격으로 보는 거지요. 주야신이 되었는데
명수묘복지광(名殊妙福智光)이라, 이름이 수묘복지광이라, 아주 뛰어난 복과 지혜의 광이더라.
견피여래(見彼如來)가 전정법륜(轉正法輪)하사 현대신통(現大神通)하고 즉득삼매(卽得三昧)하니 명보조일체이탐경계(名普照一切離貪境界)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일체법해음성왕(名一切法海音聲王)이라
견피여래(見彼如來)가 전정법륜(轉正法輪)하사, 저 여래가 바른 법의 바퀴를 굴리사
현대신통(現大神通)하고, 큰 신통을 나타내는 것을 떡 보고는
즉득삼매(卽得三昧)하니,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고,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고 신통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그만 삼매를 얻어,
전부 이 적정음해주야신의 자기 경험이지요.
삼매를 얻었는데 그 삼매 이름이 뭐라고요?
명보조일체이탐경계(名普照一切離貪境界)며, 일체 탐을 여읜 경계를 널리 비추는 것이라.
그렇게 했고요, 또 여래가 있어요.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세상에 출현하시니
명일체법해음성왕(名一切法海音聲王)이라, 이름이 일체 법해음성왕이더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생장일체선법지(名生長一切善法地)며
아어피시(我於彼時)에, 내가 그때에 몸이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야신이 되어, 여기에서는 그냥 야신이 되어, 그로 인해서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부처님을 친견하고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되었으며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곧 삼매를 얻었으니
명생장일체선법지(名生長一切善法地)며, 이름이 생장일체선법지이이다.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보광명등당왕(名寶光明燈幢王)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보현신통광명운(名普現神通光明雲)이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또 여래가 있어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명보광명등당왕(名寶光明燈幢王)이라, 이름이 보광명등당왕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몸이 야신이 되었다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부처님 친견함을 얻고는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을 해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곧 삼매를 얻었으니
명보현신통광명운(名普現神通光明雲)이며, 이름이 보현신통광명운이더라.
자기가 얻었던 삼매와 친견했던 부처님을 낱낱이 다 소개하는 거예요.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공덕수미광(名功德須彌光)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획득삼매(卽獲三昧)하니 명보조제불해(名普照諸佛海)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또 여래가 있어서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명공덕수미광(名功德須彌光)이라, 이름이 공덕 수미광이더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몸이 야신이 되었다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부처님 친견함을 인해서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승사하고 공양하고
획득삼매(卽獲三昧)하니, 곧 삼매를 얻었는데
명보조제불해(名普照諸佛海)며, 이름이 보조제불해라.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법운음성왕(名法雲音聲王)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일체법해등(名一切法海燈)이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또 여래가 있어서 세상에 출현하시니
명법운음성왕(名法雲音聲王)이라, 이름이 법운음성왕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몸이 야신이 되었다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부처님 친견함을 인해서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승사하고 공양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삼매를 곧 얻었으니
명일체법해등(名一切法海燈)이며, 이름이 일체법해등이라.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지등조요왕(名智燈照耀王)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멸일체중생고청정광명등(名滅一切衆生苦淸淨光明燈)이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또 다음에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시니
명지등조요왕(名智燈照耀王)이라, 이름이 지등조요왕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몸이 야신이 되어가지고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그로 인해서 부처님을 친견하고는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승사하고 공양해서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그래서 곧 삼매를 얻었으니
명멸일체중생고청정광명등(名滅一切衆生苦淸淨光明燈)이며, 이름이 멸일체중생고청정광명등이라.
일체 중생들의 고통을 소멸하는 청정광명의 등불이라. 이 삼매는 이름이 아주 좋구만요.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법용묘덕당(名法勇妙德幢)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득견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삼세여래광명장(名三世如來光明藏)이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다음에 또 여래가 있어서 세상에 출현하시니
명법용묘덕당(名法勇妙德幢)이라, 이름이 법용묘덕당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또 몸이 야신이 되어 가지고
득견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부처님 친견함을 인해서 승사하고 공양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또 삼매를 얻으니
명삼세여래광명장(名三世如來光明藏)이며, 이름이 삼세여래광명장이라.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사자용맹법지등(名師子勇猛法智燈)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획득삼매(卽獲三昧)하니 명일체세간무장애지혜륜(名一切世間無障碍智慧輪)이며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다음에 또 여래가 있어 세상에 출현하시니
명사자용맹법지등(名師子勇猛法智燈)이라, 이름이 사자용맹법지등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몸이 야신이 되어 가지고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그로 인해서 부처님 친견함을 얻어서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획득삼매(卽獲三昧)하니, 승사하고 공양하고 그리고는 곧 삼매를 얻으니
명일체세간무장애지혜륜(名一切世間無障碍智慧輪)이며, 이름이 일체세간무장애지혜륜이라.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명지력산왕(名智力山王)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보조삼세중생제근행(名普照三世衆生諸根行)이라
차유여래(次有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하시니, 다음에 또 여래가 있어 세상에 출현하시니
명지력산왕(名智力山王)이라, 이름이 지력산왕이라.
아어피시(我於彼時)에 신위야신(身爲夜神)이라가, 내가 그때에 몸이 야신이 되어가지고
인득견불(因得見佛)하야 승사공양(承事供養)하고, 그로 인하여 부처님을 친견함을 얻어서 승사하고 공양하고
즉획삼매(卽獲三昧)하니 명보조삼세중생제근행(名普照三世衆生諸根行)이라, 곧 삼매를 얻으니 이름이 보조삼세중생제근행이라.
삼세 중생들의 모든 근행을 다 비추어 보는 거지요. 중생들이 무슨 짓을 하는 가를 환히 비추어 보는 그런 삼매를 얻었다.
선남자(善男子)야 청정광금장엄세계보광명당겁중(淸淨光金莊嚴世界普光明幢劫中)에 유여시등불찰미진수여래(有如是等佛刹微塵數如來)가 출흥어세(出興於世)어시늘
선남자(善男子)야 청정광금장엄세계보광명당겁중(淸淨光金莊嚴世界普光明幢劫中)에,
유여시등불찰미진수여래(有如是等佛刹微塵數如來)가, 이와 같은 등의 불찰미진수 여래가
출흥어세(出興於世)어시늘, 세상에 출현하시거늘
아어피시(我於彼時)에 혹위천왕(或爲天王)하며 혹위용왕(或爲龍王)하며 혹위야차왕(或爲夜叉王)하며 혹위건달바왕(或爲乾闥婆王)하며 혹위아수라왕(或爲阿修羅王)하며 혹위가루라왕(或爲迦樓羅王)하며 혹위긴나라왕(或爲緊那羅王)하며 혹위마후라가왕(或爲摩睺羅伽王)하며 혹위인왕(或爲人王)하며 혹위범왕(或爲梵王)하며 혹위천신(或爲天身)하며 혹위인신(或爲人身)하며 혹위남자신(或爲男子身)하며 혹위여인신(或爲女人身)하며
아어피시(我於彼時)에, 내가 그때에
혹위천왕(或爲天王)하며 혹위용왕(或爲龍王)하며 혹위야차왕(或爲夜叉王)하며 혹위건달바왕(或爲乾闥婆王)하며 혹위아수라왕(或爲阿修羅王)하며, 혹은 천왕이 되고 혹은 용왕이 되고 혹은 야차왕이 되고 혹은 건달바왕이 되고 혹은 아수라왕이 되었으며,
혹위가루라왕(或爲迦樓羅王)하며 혹위긴나라왕(或爲緊那羅王)하며 혹위마후라가왕(或爲摩睺羅伽王)하며 혹위인왕(或爲人王)하며 혹위범왕(或爲梵王)하며 혹위천신(或爲天身)하며 혹위인신(或爲人身)하며 혹위남자신(或爲男子身)하며 혹위여인신(或爲女人身)하며, 혹은 가루라왕이 되었으며 혹은 긴나라왕이 되었으며 혹은 마후라가왕이 되었으며 혹은 인왕이 되었으며 혹은 범왕이 되었으며 혹은 천신이 되었으며 혹은 인신이 되었으며 혹은 남자신이 되었으며 혹은 여자신이 되었으며,
혹위동남신(或爲童男身)하며 혹위동녀신(或爲童女身)하야 실이종종제공양구(悉以種種諸供養具)로 공양어피일체여래(供養於彼一切如來)하고 역문기불소설제법(亦聞其佛所說諸法)호라
혹위동남신(或爲童男身)하며 혹위동녀신(或爲童女身)하야, 혹은 동남신이 되고 혹은 동녀신이 되어
실이종종제공양구(悉以種種諸供養具)로, 여러 가지 공양구로서
공양어피일체여래(供養於彼一切如來)하고, 일체 여래에게 공양 올리고
역문기불소설제법(亦聞其佛所說諸法)호라, 역문, 다 들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가르침을 다 듣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할 일이 뭐 있습니까? 이런 일 밖에는. 다른 세속적인 일을 했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지요. 이게 그냥 사람 사는 길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다는 뜻이지요.
천왕이 되고 용왕이 되고 야차 ․ 가루라 ․ 아수라 ․ 긴나라 ․ 마후라가 ․ 범왕 ․ 천신 ․ 인신 ․ 남자신 ․ 여자신 ․ 동녀신 ․ 동남신 ․ 처녀 때나 총각 때나, 이게 전부 그런 말 아닙니까?
어느 때의 어느 삶을 막론하고 전부 공부하는 일로써, 종종공양구로서 일체 여래에게 공양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가 듣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삶이었다, 이것이 세세생생의 나의 삶이었다는 겁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 속뜻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실이종종제공양구(悉以種種諸供養具)로, 공양어피일체여래(供養於彼一切如來)하고, 역문기불소설제법(亦聞其佛所說諸法)호라...일체 여래에게 공양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가 듣는 것, 이것이 세세생생의 나의 삶~.고맙습니다._()()()_
種種諸供養具로 供養於彼一切如來하고 亦聞其佛所說諸法호라..여러가지 공양구로서 일체 여래에게 공양올리고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다 들었노라..<이것이 우리 인생의 세세생생의 삶이다.>..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연보리 님,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_()()()_
연보리님, 고맙습니다._()()()-
고맙습니다. _()()()_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적 안목으로 보면 일체 존재는 중도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억지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세세생생의 삶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일체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이었다.
연보리님, 수고하셨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있는 것을 꼭 있다고 못하고 없는 것을 꼭 없다고 못한다
경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부처님은 실재하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적정음해주야신
-과거 무수한 부처님을 공양하고 공부해서 무수한 삼매를 얻었다
어느 때의 어느 삶을 막론하고 공부하고 종종 공양구로 무수한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무 입법계품
_()()()_
'어느 때의 어느 삶을 막론하고 전부 공부하는 일로써, 종종공양구로서 일체 여래에게 공양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가 듣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삶이었다, 이것이 세세생생의 나의 삶이었다는 겁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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