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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헤겔 철학 여행, 독일철학(5)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 역사철학, 미학 입문
철학의 항해 선장 안재오입니다. 철학의 역사는 길고 철학가들도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본질이 심오하고 또 그 영역이 체계적이고 방대합니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 그리고 서양 철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그만큼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이 강의는 헤겔의 다양한 저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저술들 즉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 역사철학, 미학을 정리하고 쉽게 설명하는 방송입니다.
(1) 정신현상학
이 방송의 첫 번째 강의인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우선 변증법적인 사유가 최초로 드러나는 저서입니다. 정신현상학의 기본적인 논리는 의식과 대상의 불일치입니다. 이것을 다시 지양하는 과정에서 부정성, 모순 그리고 지양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적 핵심 논리가 출현합니다.
본 방송은 정신현상학에서도 A, 의식장의 전영역 즉 1, 감각적 확신,
2, 지각, 3, 오성을 논의합니다.
정신현상학의 B 장은 자기의식의 단락입니다. 본 방송에서는 정신현상학에서도 가장 알려진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다룹니다. 책 속에서의 명칭은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입니다. 그 다음은 6, 정신 편에서 1, 인륜의 세계, 인간의 법칙과 신의 법칙, 남성과 여성 단락을 논의합니다. 이 부분은 고대 그리이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소재로 합니다. 그 다음은 정신편의 2장“소외된 정신, 교양”부분을 논의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인 소위 소외, alienation 이 처음 나옵니다. 여기서 교양은 출세와 사회진출을 말합니다.
(2) 대논리학
정신현상학에 비해서는 추상적이며 더 논리적인 헤겔의 대논리학은 1, 존재론 2, 본질론 3, 개념론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 강의는 제1장 존재에서 A, 존재 B, 무(無) C, 생성을 다룹니다. 2, 본질론에서 반성 개념을 논구합니다. 여기에는 1, 정립적 반성, 2, 외적 반성, 3, 규정적 반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변증법의 핵심이 있습니다. 3, 개념론에서는 객관성과 이념에 대해서 논의를 합니다.
(3) 법철학
도덕에서 인륜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헤겔의 법철학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륜성은 경제 생활을 포함합니다. 경제 생활을 헤겔은 시민사회라고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인륜성은 근대의 경제 생활 즉 자본주의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의 법철학은 법학, 도덕학 그리고 경제학을 섭렵합니다. 본 방송은 인륜성 중에서도 욕망과 경제활동을 주로 고찰하겠습니다.
(4) 역사철학
헤겔의 역사 이해는 아주 간단합니다. 세계사는 자유의 의식의 발전에 따라서 3단계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즉 동양인은 한 사람만이 자유임을 알고 있었을 뿐이고. 이에 비해서 그리이스인과 로마인들은 약간의 사람이 자유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게르만 (유럽)의 시대에 와서 만인의 자유가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5) 미학
헤겔의 예술 철학은 그의 전반적인 철학 체계의 일부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의 예술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철학 전체의 주요 주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헤겔은 그의 추측 논리에서 존재는 자기 결정적 이성 또는 "이념", (Idee) 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이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무(無)육체적인 로고스가 아니며, 합리적으로 조직된 물질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 헤겔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순수한 이성뿐만 아니라 합리적 원칙을 따르는 물리적, 화학적, 살아있는 물질입니다.
117. 헤겔 철학의 항해 본강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체계적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헤겔은 독일의 이상주의 혹은 관념론. idealism 철학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 체계가 이전의 모든 철학 사상의 역사적 정점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했습니다.
본 유튜브 방송에서는 헤겔의 광범위한 사상을 모두 알도록 강의를 진행합니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은 모두 할 수는 없고 각 저서의 기본적인 개요와 그 중 몇 가지 세부 사항만을 상세히 분석할 계획입니다.
(1) 정신 현상학
1807년에 출간된 『정신현상학 즉 (Phaenomenologie des Geistes)』은 헤겔의 첫 번째 주요 종합 철학 저작입니다. 원래는 종합적인 학문 체계 즉 (Wissenschaft) 또는 철학 체계의 첫 번째 부분으로 의도되었지만, 헤겔은 결국 이 책을 자신의 체계에 대한 서론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작품은 “정신의 자서전”, 즉 인류 역사의 중심적인 인식론적, 인류학적, 문화적 주제의 맥락에서 의식과 자기의식의 발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의식, consciousness이란 경험적인 지식을 말하고
자기의식, selfconsciousness 이란 소위 임마뉴엘 칸트가 선험적 통각이라고 하는 바로 그 의식입니다.
후설 즉 Husserl은 이 두 가지의 의식을 자연적 태도와 반성적인 태도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헤겔의 의식과 후설의 자연적 태로란 다른 말로 소박실재론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이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내 밖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상식적인 태도입니다. 참고로 영국의 경험론자 로크는 경험을 외부 경험과 내부경험으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런 내부경험을 중시하는 서양 철학은 불교에서 일체유심소조와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마음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철학은 마음에는 복잡하고도 질서와 규칙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감성과 이성 혹은 자기의식과 대상의식 등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식의 두 가지 태도 내지 의식의 두 가지 종류는 특히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즉 의식과 자기의식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기본적인 구조를 설명합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정신현상학은 그 내용의 순서가 1장 의식, 2장 자기의식, 3장 이성, 4장 정신, 등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장과 3장은 의식적인 태도로 세상을 볼 때 생기는 현상을 다룹니다. 그 반면 2장과 4장은 자기의식의 태도로 세상을 보는 현상을 다룹니다.
(1) “정신현상학”에 나타난“감각적 확신”의 변증법
헤겔의 변증법 논리에 들어가기 전에 형식논리의 3대 근본 법칙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헤겔의 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논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법칙에 바탕을 둔 형식적 논리와 비교될 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칙이란 1. 동일률 2. 모순률 3. 배중률입니다. 이런 논리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변증법입니다. 즉 A와 not A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정신현상학의 군데 군데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 필자의 관점은 변증법이 형식논리학의 위반은 아니고 단지 A가 not-A가 된다 는 것입니다.
정신현상학의 제 1장은 의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의식이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소박 실재론의 세계 혹은 외부 경험을 그대로 믿는 태도를 말합니다. 혹은 후설이 말하는 자연적 태도를 말합니다. 의식장은 아래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1단락 즉 1, 감각적인 확신, 이것과 사념은 상세히 다루고 2 지각, 3 힘과 오성 단락은 간단히 그 큰 흐름만 잡아 보겠습니다.
1.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2. 지각 : 사물과 착각
3. 힘과 오성,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
정신현상학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지식은 “감각적 확신” 인데 이 단원의 정식 명칭은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思念)”입니다.
“감각적 확신”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많은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나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 때 나와 사물은 둘 다 독립적입니다.
또한 “감각적 확신”의 세계는 무한히 풍부한 물질과 사물들의 세계입니다. 예전 김우중 대우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라고 한말 기억나시죠? 이게 바로 “감각적 확신”의 세계입니다.
감각적인 확실성의 세계에서는 주체가 대상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이런 나와 세상의 분리 즉 주관와 객관의 분리를 전제 조건으로, 주체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헤겔은 "즉각적이다" 혹은 “순간적이다” 라고 부릅니다.
즉 “감각적 확신”은 사물에 대해서 즉각적인 지식을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감각적 확신의 눈앞에 놓인 대상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 "여기" 그리고 "지금"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즉각적인 사고방식은 그가 믿고 있는 진리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순간적(즉각적)으로 파악된 진실은 그러나 곧 인식의 현장을 빠져나갑니다.
이런 현실을 우리는 흔히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어떤 사람을 뒤에서 가리키며 이 사람은 바보다 라고 지시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헤겔이 말하는 “즉각적인 지식” 혹은 감각적 확신과 유사합니다.
텍스트. "지금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예를 들어 "지금'은 밤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감각적인 확실성의 진리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즉 만약 지금, 이 대낮에 우리가 밤에 써놓은 이 문장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다소 케케묵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단락 95)
이런 방식의 검사를 통해 감각적 확신의 진실은 믿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실패는 순간적으로는 절망을 가져 오지만 이전 과정을 취합함에 따라 긍정적인 결말로 귀결됩니다.
'이것', '지금', '여기' 등이 가리키는 대상은 사라졌지만 그 개념 혹은 보편자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혹은 문법적으로 말해서 명사로서의 '이것', '지금', '여기' 등은 남습니다.
가령 아이들에게 이런 단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이 장난감 혹은 이 과자 등이 아니라 바로 “이것” 이라는 대명사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 단어의 사용 방법과 의미를 가르칩니다. 이처럼 말 즉 (언어)는 근본적으로 주관적, (인간적)입니다. 말로서 사실을 나타내고 판단하고 비교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언어로서 객관적인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매개”의 뜻입니다.
“지금은 밤이 아니라 낮이다” 라는 언어 사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것], [지금] 또는 [여기]의 개념들은 대상이 아닌 주체 (혹은 언어 사용자)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주체와 대상의 매개를 말합니다. 헤겔의 매개(Vermittlung)란 주관적인 관념이 객관적인 감각에 투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증법, 지양 및 부정의 개념
감각적 확실성의 분석에서 헤겔은 변증법적 논리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 이라는 말로서 낮이나 밤을 지시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개별자들이 보편적인 개념 안으로 포섭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 내용을 좀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즉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파괴될 뿐만 아니라 실은 높은 단계, 즉 보편자 속에서 보존된다고 표현합니다. 밤은 낮으로 바뀝니다. 개별자의 진실은 부정됩니다. 하지만 밤도 지금일 수 있습니다. 감각적 확신의 내용은 어느 순간에서 파괴되지만 보편적 개념으로 보존된다. 이리하여 지양(止揚)의 개념이 나타납니다. 지양은 독일어로는 아우프헤붕 곧 Aufhebung입니다. 지양(止揚)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지양은 1 파괴하다, 2 보존하다, 3 고양(高揚)시키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결합될 때, 지양(止揚)의 개념은 즉각적인 내용의 파괴와 그것의 높은 수준에서의 보존에 있습니다. 파괴의 측면을 헤겔은 부정 (Negation)이라고 합니다. 감각적 확신의 믿음은 즉각적인 내용이 부정되면서 그 힘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은“밤”일수도 있고 낮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보편 개념으로 승화되면서 다시 그 실체성은 살려집니다.
이처럼 “부정” 이란 인식의 상위 단계, 즉 보편적 단계를 형성하기 위한 경험의 반대 방향의 움직임을 말합니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보편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예: 물질과 그 속성)
그러나 보편자 역시 부동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반대로 보편자란 눈 앞의 순간들을 부정하고 또 긍정하는 전체 과정입니다.
헤겔은 이런 변증법적 순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은 그 운동의 단순한 역사 (즉 경험)에 지나지 않으며, 감각적 확신 그 자체는 단지 이 역사일 뿐이다. (정신현상학 109 단락)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의 본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것이 형식적인 논리와 모순되는지를 말합니다. 헤겔이 파악한 보편의 개념은 형식논리의 두 번째 법칙, 즉 모순률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보편성은 부정과 긍정 모두를 자체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변증법은 형식논리학의 모순률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순률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를 수는 없다. 어떤 진술도 동시에 진실이고 또 거짓일 수는 없다.
변증법이 가지고 있는 부정(否定) 개념은 모순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으나 그들을 동시에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에 실은 모순율의 위반이 아닙니다. 변증법은 위에서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어떤 것이 대립자로 이동하는 운동이고 역사라고만 생각됩니다.
2, 지각, 사물과 착각
의식 장의 2단락은 2, 지각, 사물과 착각입니다. 독일어로는 디 바르네뭉 오더 다스 딩 운트 토이슝 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aeuschung입니다.
1단락에서 감각적 확신으로 표현되는 의식은 개별자 즉 눈 앞에 직접적으로 떨어진 개별적인 존재를 파악한다고 확신을 했지만 그 운동의 결과는 즉 그 확신은 실패했고 그 대신 보편자 즉 밤, 낮 등의 개념이 남아 있습니다. 의식 장의 2단락은 제목이 지각입니다. 부제는 위에서 본 것처럼 사물과 착각입니다. 여기서는 실체와 속성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논리는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헤겔은 그의 선배 피히테의 지식학을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 헤겔은 소금이란 물체 혹은 실체를 예로 듭니다. 소금은 그 성질이 1 희다, 2 입방체적이다, 3 짜다 등이 있습니다. 이번에 등장한 지각이라는 의식 형태는 말하자면 일상적인 의식입니다. 즉 소금이란 물체가 있고 그 속성은 위의 3가지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버클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런 실체에 해당하는 지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버클리는 실체 개념을 부정한 바 있습니다. 피히테나 헤겔 등은 그 실체 개념은 의식이 임의적으로 묶은 것으로 봅니다. 그런 면에서 물체 혹은 물건 개념은 부정됩니다. 요는 의식이 이들 여러 속성들을 하나로 묶으면 소금이란 실체가 살아나고 반대로 이들을 분해시키면 소금이란 실체는 사라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물과 속성이라는 오성의 범주는 분해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니 속성이니 하는 전통적인 개념들은 모두 의식의 작용에 불과합니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위에서 인용한 정신현상학 본문처럼 실체와 속성은 운동이다 혹은 실체와 속성은 운동의 역사이다 가 됩니다. 즉 실체와 속성은 서로 바뀌는 운동의 부분들이라는 것입니다.
3, 힘과 오성,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
정신현상학의 1장 의식의 2, 지각, 사물과 착각 단락에서 우리는 실체와 속성이라는 범주가 지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체는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표상이었습니다. 실체란 말하자면 용(龍)이나 일각수, 유니콘 같은 전설 속에 나오는 존재와 같습니다.
3 단락 힘과 오성,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임마뉴엘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문제를 피히테적으로 그리고 헤겔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힘과 오성의 부제(副題)인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입니다. 힘의 문제는 힘이 내부적인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이것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물리학적 지식을 반영합니다. 요즘 같으면 신체의 에너지가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화학적 에너지가 물리적 에너지로 바뀐 형상으로 보지만 헤겔 당시에는 에너지와 힘을 구분하지 못하여 이런 설명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체의 내부적인 힘이 외부적인 활동으로 표현되는 것을 헤겔은 힘과 외화(外化)라고 개념화합니다. 임석진 선생님의 번역에서는 외화 대신 발현(發現)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는 일반화시키면 내부적인 것은 외부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라고 합니다. 이를 좀 더 일반화시키면 정신적인 것이 물질적으로 나타난다 입니다.
그런 면에서 힘과 오성이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에 상응합니다. 이 구절의 후자 즉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는 임마뉴엘 칸트의 철학을 지시합니다. 칸트의 철학은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를 분리합니다. 감각적 세계는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또 달리 말하면 페노메논과 누메논 즉 phenomenon and noumenon, 현상과 본질입니다. 여기서 누메논은 물자체와 연결이 됩니다.
물자체(物自體, 독일어: Ding an sich, 영어: thing-in-itself) 또는 누메논, (Noumenon)은 칸트철학의 기본개념으로, 감각의 사용과 독립적으로 알 수 있는 사물 또는 사건을 말한다. "물자체,=누메논"과 대비되는 개념은 "현상,=페노메논", (phenomenon)이다. 즉슨 플라톤 철학과 비교하자면 물자체는 이데아에 해당한다. 위키백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칸트 철학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감각을 벗어난 개념인 물자체 혹은 초감각적 세계는 헤겔에 오면 양자가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초감각적 세계는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않고 마치 힘이 외화(外化)하는 것처럼 감각적인 세계를 인과율적으로 지배합니다. 단 감각과 초감각 사이에는 인간의 정신 즉 오성이 있어서 양자를 매개합니다. 헤겔은 이렇게 저술합니다.
이렇듯 보편과 개별의 대립을 말끔히 벗어난 절대적 보편자가 사물의 내면적 진리로서 오성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여기서 비로소 감각적 현상계를 넘어서는 하나의 초감각적 진리의 세계, 즉 덧없이 사라져가는 차안의 세계를 넘어선 항구적인 피안의 세계가 개시된다. 이것이 물 자체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만, 갓 드러났을 뿐인 지금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겨우 불안전한 이성의 모습을 한, 진리의 골격만을 나타내는 순수한 장으로 정립되어 있을 뿐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1, 임석진 번역 181)
여기서 물자체 역시 객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실은 오성에게는 절대적인 타자입니다. 왜냐하면 오성은 시간, 공간, 감각, 범주 등을 넘어서 있는 것을 물자체로 놓았습니다. 정신현상학의 의식의 단계 즉 소박한 실재론, 자연적 태도의 세계에서 물자체는 최고의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물자체 역시 절대적 자아로 인식이 되어야 비로소 그 실체가 알려집니다. 헤겔의 표현으로는 절대정신이 물자체입니다. 덧붙여서 헤겔은 차안과 피안의 대립 역시 해소합니다. 항구적인 피안의 세계 혹은 거룩한 물자체의 세계가 이미 이 세상 속에 드러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서 본질 즉 이데아가 현상 즉 감각의 세계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단 그 내용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말합니다. 이는 자기의식과 이성 그리고 정신의 영역을 다 통과해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2) 정신현상학의 B 장은 자기의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기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을 하겠습니다. 자기의식, selfconsciousness 이란 소위 임마뉴엘 칸트가 선험적 통각이라고 하는 바로 그 의식입니다. 칸트는 선험적 통각은 모든 표상에 수반되는 관념 즉 I think, 나는 생각한다 는 관념입니다. 선험적 통각이 칸트에 의해서 자기의식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관념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자기의식 또는 선험적 통각이 모든 지식의 최고점이라고 설명합니다.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서 칸트는 자기의식의 통일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칸트는 모든 인간 지식의 근거를 가장 깊은 곳, 즉 인식 주체의 선험적 자기의식까지 추적합니다. 이를 피히테는 나는 나다 라는 관념으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단락에서 나타나는 자기의식은 이런 인식론적 자기의식과는 다릅니다. 이 점이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사실입니다.
즉 헤겔은 이런 칸트적인 인식론적인 자기의식이 아니라 피히테의 자기의식 즉 실천적인 자기의식을 분석합니다. 피히테에 의하면 실천적 의식은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을 동시에 수반하는 복합적인 관념입니다.
즉 인간이 실천적인 활동을 할 때 나는 나다 라는 자기정체성과 나 밖의 환경이나 자연적인 본능이나 충동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포함합니다.
실천적 자아 혹은 실천적 자기의식은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그의 핵심이 되는 것만 간략히 말하겠습니다. 이는 바로 피히테의 추구 개념입니다.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의 형태들은 추구, 충동 그리고 동경입니다. 실천적 자아의 특징은 이들이 순수한 자아 즉 자기복귀적 자아이면서 동시에 경험적, 대상적 자아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피히테는 추구를 가능한 대상과 관련하면서 자신으로 복귀하는 자아의 활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에 바탕을 두고 헤겔은 이를 좀더 다양한 맥락에서 발전을 시킵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학의 실천편에 나오는 자아 개념을 헤겔은 차용(借用)하고 있습니다.
헤겔은 이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의식은 감각세계와 지각세계에 터전을 두고 있는 타자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자기의식이 행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그 운동에서는 자기로부터 구별되는 것 또한 다름아닌 자기인 까닭에 여기서는 타자존재가 의식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즉 구별은 없다고도 할 수 있으니,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는 나이다”라는 아무 운동도 없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도 하겠다. (헤겔, 정신현상학 1, 임석진 번역 211)
실천적 자아에 대한 피히테의 사상인 추구와 저지의 상호작용을
헤겔은 이처럼 타자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자체내로 복귀하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단 피히테의 경우 저지나 울타리 같은 의지의
방해가 되는 개념은 자아가 스스로 만든 것인데 비해서 헤겔은 타자를 처음부터 상정을 하고 타자와 주체의 통일성을 표현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헤겔은 타자를 통한 자기로의 복귀를 생명 개념으로 파악을 합니다. 어기서 생명은 일반적인 생명 개념과도 비슷합니다. 즉 생명이란 영혼이 육체의 여러 기관들을 운행시키고 또 영양분을 자기 에너지로 섭취한다는 측면에서 타자 혹은 물질을 뚫고 삶을 영속시키는 과정이 생명입니다.
자기의식에서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대상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역시 그 나름대로 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체내로 복귀해 있다. 바로 이 자체 내로의 복귀를 통하여 대상은 ‘생명’(Leben)이 되는 것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1, 임석진 번역 212)
헤겔 역시 피히테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사행 활동을 기술하는 것을 철학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고 단 때로 철학자가 의식의 연극 활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데 그 때는 우리에게 대해서 독일어로 fuer uns 라는 각주를 붙입니다.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 개념에서 출발한 헤겔의 자기의식 개념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이나 피히테의 나는 나이다 라는 이론적인 자아 개념을 벗어 납니다. 이제 자기의식이 생명 개념과 연결이 되면서 자기의식은 공동체와 타자와의 교섭을 타겟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자기 내적 활력에 의한 유 그 자체의 존재를 자각하면서 스스로가 유의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생명인 자기의식은 일단은 전적으로 단일한 본질을 지닌 수순한 자아로서의 자기를 대상으로 한다. 이제부터 다루게 될 자기의식의 경험 속에서 이 추상적인 대상은 우리가 바로 생명 부분에서 본 바와 같은 풍요로운 내용을 전개해나가게 될 것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1, 임석진 번역 217)
위에서 우리는 헤겔의 생명 개념을 타자를 통한 자기 복귀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의식은 인정 투쟁이란 현실을 맞이합니다. 자기의식은 오직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만 스스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이런 측면에서 나와 우리의 통합 개념인 정신의 개념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신은 마지막에 다시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정신은 “내가 우리이고 우리가 나”라는 문구로 표현됩니다.
(5). “자기 의식장”과 “주노 변증법”
앞에서 우리는 헤겔의 자기의식 개념이 순수한 자아 혹은 선험적 통각 등의 이론적인 기능이 아니라 실천적 자기의식 기능임을 알았습니다.
이를 헤겔은 자기의식의 본질은 감각세계와 지각세계에 터전을 두고 있는 타자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헤겔의 자기의식은 칸트적인 자기의식 즉 스스로 자립하여 모든 인식을 주관하는 인식의 깊은 장소가 아니라 타자 존재를 통하여 자체 내로 복귀하는 실체입니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타자를 통한 자기의 확립입니다. 그런 면에서 헤겔의 자기의식은 이미 그 안에 변증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피히테의 이론적 자기의식 곧 나는 나이다 와도 다릅니다. 헤겔의 동일성 개념은 벌써 나의 장소에 타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타자와의 상호성 내지 상호 인정 개념이 자기의식을 형성합니다.
인정 개념과 관련하여 또 다른 피히테적인 요소가 헤겔의 자기의식 관념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의 피히테의 법철학인 [자연법의 토대], 1796 to 1797 에 나타난 인간의 권리 개념입니다. 피히테는 권리 개념을 자유로운 주체들의 상호인정 관계라고 정의함으로써 헤겔에 앞서 인정 이론의 출발점을 제공한 철학자입니다. 피히테는 이성적 존재들의 공존이 상호인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상호인정은 의식주체들이 자기의식을 확보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현대의 인정 논의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임금희)
피히테는 상호인정은 의식주체들이 자기의식을 확보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드러난 자기의식 관념의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 안재오는 헤겔의 자기의식은 칸트와 달리 피히테의 실천적 자기의식과 또 피히테의 상호인정을 통한 자기의식의 확보, 이 두자기 요소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생산물이라고 파악합니다.
이런 자기의식 개념을 통해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B 장 즉 자기의식 장을 펼쳐 나갑니다. 이런 결실이 최초로 나타나는 장소가 바로
소위 주노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B 장의 1 단락 혹은 A 단락 즉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 이라고 불리는 단락입니다. 참고로 B 장은 제목이 두 개입니다. 즉 B, 자기의식과 4, 자기확신의 진리입니다. 여기서는 자기의식으로 통일합니다.
피히테의 상호인정을 통한 권리의 형성이라는 사상에 바탕을 두고서 헤겔은 아래와 같이 주·노 변증법을 시작합니다.
각자마다가 상대방에 대하여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이렇듯 중간항을 이루는 상호적인 타자를 매개로 하여 각기 저마다가 자기와의 매개 아래 자기와 합일된다. 결국 각자마다가 자기와 타자에 대하여 직접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러한 독자성은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인정상태에 있는 의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224)
여기서 요점은 인권 내지 인간의 주체성이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는 관념입니다. 또 여기서 중간항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내가 나되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타자가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원초적인 나, 인식의 주체로서의 나는 선험적 통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를 자아정체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원초적인 나 혹은 나는 나이다 는 관념만으로는 인권이 보장이 안 됩니다. 즉 초기의 자아와 후기의 자아 혹은 아이로서의 나와 성인으로서의 나 사이에는 그 중간항으로서 타자와 사회 등이 매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성장 과정에 타자와 사회가 끼어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호 평등의 상태에 있는 두 개의 자기의식은 혹은 인격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자연적인, 경험적인 차이가 아니라 논리적인 차이를 말합니다. 즉 여기서 주인과 노예의 인자가 따로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대자존재 (對自存在) 개념이 나타납니다. 대자존재란 독일어로 피어지히 자인 즉 Fuersichsein 영어로는 Being for itself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존재한다 는 관념입니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의 번역자 고(故) 임석진 선생은 대자존재를 독자존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대자존재와 관련있는 개념은 즉자존재 (卽自存在)입니다. 즉자(卽自)의 의미는 본성적으로 by nature 입니다. 그러나 이 본성은 의식에 대한 본성이므로 의식과 대립됩니다. 이런 즉자존재는 대타존재 (對他存在) 가 됩니다. 대타존재는 타자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의식과 독립하여 의식에 나타난 것 즉 즉자존재는 나중에 자기의식으로 규정됩니다.
대자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라이프니쯔의 모나드 개념과 연관이 됩니다. 오직 정신만이 단순하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은 분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상입니다. 그 반면 자연은 항상 의식의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즉 대타존재이며 즉자존재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의식은 대자존재이고 자연 사물은 즉자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철학에서는 사물의 본성이었던 즉자존재가 근대에서는 대타존재로 낙하합니다. 또 즉자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혹은 처음에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일단 즉자로 혹은 직접적으로 파악이 되다가 나중에 자기의식의 세계로 환원되면서 정신의 일부로 귀착합니다.
상호 인정을 통한 자기의식의 완성은 처음에는 불균형적인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노 변증법입니다. 즉 타자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자기의식 혹은 타당성을 인정받는 의식의 형태와 그 반대로 자기의 존재를 부정당하면서 타당성을 인정받는 의식의 형태입니다. 전자를 주인이라 하고 후자를 노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헤겔은 자기의식의 상호 인정 문제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역사적인 노예제도를 끌어 옵니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다. (정신현상학 226)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주인과 주체성과 재산을 모두 잃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게 된 노예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인과 노예가 개인인지 아니면 역사적이며 제도적인 계급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더 밝히겠지만 역사적인 계급 사회로서의 주인 계층과 노예 계층이 이런 사정 때문에 역전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가 왜 생사를 건 투쟁을 벌려야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인정 투쟁을 하기 위하여 생사를 건 전투를 치르는지 현실적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즉 위의 인용문의 표현처럼 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생사를 거는 전투란 예를 들어 영토욕이나 자원의 욕심 등 탐욕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기의식 장에서 말하는 생사를 건 전투라는 표현은 자존심 문제로 목숨까지 위협하고 이기기 위해서 사생결단을 마지 않는 가족적인 갈등이나 부부 싸움 혹은 우정의 갈등 등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말고는 자기 존재의 확인을 위해서 목숨을 건 투쟁은 없습니다. 따라서 타인의 죽음 즉 살인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살인이 아니라 정신적인 갈등과 투쟁을 말합니다. 타인 혹은 적의 죽음이란 실제로 살인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부친의 잘못을 막기 위해서 경찰에 고발하는 정도의 사건을 암시합니다. 즉 타자의 인격과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정도의 정신적, 심리적인 승부를 말한다고 봐야 합니다.
노예는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사물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물성을 띠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종속적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주인은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사물의 존재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은 주인에 대치하는 노예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는 까닭에 이 지배적인 힘의 사슬 속에서 주인은 노예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228)
문제는 이런 사건이 역사적으로 과연 존재했을까 아니면 헤겔의 단순한 상상력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노예가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주인의 위치에 오른 경우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노예 계급이 주인계급을 이기고 동등한 위치에 오르든지 혹은 주인을 복종시켜 노예로 만든 경우도 없습니다. 헤겔의 사유가 훌륭하긴 한데 주·노 변증법은 현실과 너무 일치가 안됩니다.
헤겔의 서술에 따르면 주인은 생사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일하지 않고 노예가 만들어 준 물질에만 의지하다가 결국은 노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주 노·변증법의 요점입니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서 주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자립성을 회복합니다.
사물을 부정하는 가운데 형식을 다듬어 가는 행위라는 이 매개적인 중심은 동시에 의식의 개별성 또는 순수한 독자성이 발현되는 장(場)이기도 한데, 결국 의식은 노동하는 가운데 자기 외부에 있는 지속적인 터전 (das Element des Bleibens)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하는 의식은 사물의 자립성을 곧 자기 자신의 자립성으로 직관하기에 이른다. (정신현상학 232)
헤겔의 생활과 철학, 인정투쟁과 주인·노예 변증법 해석
위에서 우리는 정신현상학에서 가장 유명한 소위 주·노 변증법 해석의 난관을 보았습니다. 주인이 노예한테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하는 사실도 현실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필자 안재오에 의하면 이런 헤겔의 주인노예 관계와 비슷한 현실의 어떤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부 싸움입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쓸 시기인 1807년에 독일의 예나에서 어떤 하숙집 거주하면서 예나 대학의 시간강사를 했고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는 또 나폴레옹이 예나에 쳐들어와 헤겔 역시 엄청난 재앙을 당했습니다. 문제는 노총각(37) 헤겔이 하숙집 여주인 부르크하르트와 결혼을 약속하고 애까지 낳은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루드비히 피셔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결혼 약속을 파기 했고 아이는 지인의 손에 자라다가 헤겔이 다른 여자와 결혼 한 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정신현상학의 가장 유명한 챕터인 주인노예 변증법은 이런 상황에서 집필된 것이었습니다.
자기의식(인간)은 다른 자기의식(인간)으로부터 인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부부관계나 남녀의 동거 관계에서 물질과 능력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헤겔 역시 이와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부싸움 내지 갈등에서 상대방이 죽기를 바랄 수가 있습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령 실제로 죽이지는 못하지만 미워하는 상대방의 죽음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부싸움에서 지는 경우 남자는 자신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부인의 지배하에 무릎꿇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자존심의 싸움입니다. 주인, 노예 라는 말도 지배와 복종을 말합니다. 실제의 주인과 노예가 아닙니다.
이것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상대방의 죽음입니다.
또 상대방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사의 투쟁이 발생합니다.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죽음이요 투쟁입니다. 이를 실제의 전쟁으로 오해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 때 각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다”라는 텍스트의 문장은 실은 부부 사이의 남녀 관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죽음은 격한 감정 싸움에서 패배하고 인격과 자부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 노예의 전투가 필요한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이 구절 역시 부부나 동거 커플 사이에서 쌍방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한다는 현실의 전투를 상기시킵니다. 즉 “아빠가 옳다, 엄마가 옳다”라고 팽팽한 부부 사이의 대결이 벌어지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자주 목도합니다.
주·노변증법은 어쩌면 헤겔의 사상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위에서처럼 인정 투쟁의 패배자가 노예가 됩니다. 이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말합니다. 노예가 된 자는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이긴 결과 주인인 된 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으로 먹고 삽니다. 이런 과정에서 나중에는 노예가 도리어 주인이 됩니다. 즉 노예는 생산물을 통해서 주인을 지배하게 됩니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면서 점차 그 지배력과 자립성을 상실합니다.
이런 사정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남편의 폭력과 공포 때문에 복종하여 일만 하게 된 부인이 열심히 생계 노동을 하여 나중에는 도리어 집안의 주인 대접 받는 경우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이처럼 노예의식이 노동을 통해서 참다운 자기의식의 자립성을 얻는 다는 것이 헤겔의 주노 변증법입니다.
이를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서 사회의 주인이 된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으나 이는 세부적인 증거가 부족합니다.
(6). 헤겔의 정신현상학 “소외된 정신. 교양”부분
부제: 철학자가 본 출세의 의미
(a) 마르크스주의 소외 개념 – 노동의 소외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철학에서도 최고로 어려운 책입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정작 독일에서도 최고의 석학들도 모든 구절을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챕터 “소외된 정신. 교양” 역시 극히 난해한 텍스트입니다. 그리고 이 챕터의 주제 소외. alienation, Entfremdung 개념은 너무나 유명한 개념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이 개념을 이용하여 자본주의 노동을 소외된 노동이라고 했다. 요즘 인간 소외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런 소외 개념의 원조가 바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있고 특히 오늘 다룰 “소외된 정신, 교양” 챕터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개념을 철학의 주제로 처음 만든 헤겔은 맑스와는 다르게 사용합니다. 즉 “인간은 자기소외를 통해서 발전한다”입니다. 즉 “나는 달라져야 한다” 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신의 소외란 (사회적인 성공.) 출세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겔의 정신의 소외 개념은 개인의 사회화 혹은 사회적인 행동.(social action)을 의미합니다.
즉 권력과 부와 명성을 획득하기 위해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여 사회적인 타당성. (Geltung) 인정.(Anerkennung, recognition)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교양.(Bildung) 개념 역시 “교양을 쌓는다”, “책을 본다”등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독일어 Bildung은 교양, 도야, 혹은 문화 라고 번역한 Bildung은 출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자아를 벗어나 사회적인 자아가 되어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b) 헤겔의 상황, 셸링의 상황
헤겔이 이 책을 쓸 무렵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나이는 많고 학문적인 인정은 받지 못하고 생계도 힘든 지경이었습니다.
그 반면 그의 절친인 셸링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신학대학을 마친후 바로 석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후 곧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절친 횔덜린은 소설 “휘페리온”을 가지고 문단에 등장했습니다.
그 반면 헤겔은 학부를 마치고 스위스의 베른과 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종교에 대한 글들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교 논문과는 다른 사적인 글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망하여 유산을 좀 남겼는데 이것으로 그는 당시 셸링이 교수로 있던 예나 대학교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 진학 합니다.
헤겔보다 5살이나 어렸던 친구 셸링은 기가 막힌 학문적인 처신을 했습니다. 즉 당시 유명한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있었다. 그리고 괴테는 자연에 큰 과심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식물에 대한 논문도 썼습니다. 셸링은 원래 피히테주의자 였습니다 그의 초기의 철학적 저술은 “나에 관하여”.(Vom Ich)란 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를 버리고 “자연철학의 이념”이란 책을 출판했고 이것이 괴테의 마음에 들어서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 대학의 교수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친구가 교수로 있는 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한 것이었습니다. 필자도 군대 시절 절친이 문단에 등단하고 신인문학생을 받아서 놀랐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게재된 친구의 작품과 사진을 보고 바위 뒤에서 운 적이 있었습니다.
(c). 자연적인 자아의 도야 : 사람은 (자연적) 자아를 소외시킴.(포기)으로서 사회적 인정(보편성, 현실성) 을 받습니다.
이런 면에서 헤겔의 텍스트의 한 구절이 잘 설명됩니다 :
개인이 어리석게도 본성과 성격의 특수성으로 규정되면 현실의 세계에서는 전혀 본성과 성격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개인들은 서로 서로에 대해서 동일한 현존을 가지게 된다. (PhG 352)
여기서 “본성과 성격의 특수성” 은 개인적인 본성과 성격을 의미합니다. 아직 시회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한 본성과 성격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본성과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뭔가 남과 다른 장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정이 필요합니다. 헤겔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사회에 진출을 헤겔보다 빨리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진출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청년 헤겔은 인정 곧 사회적인 승인의 문제를 그토록 갈망한 것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쓴 작품들은 객관적인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다시 대학의 문을 두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불우한 청년기의 고민을 보편적인 사상으로 승화시킨 것 입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청춘이었습니다.
자신만이 아는 재능 혹은 작품 등은 결국 객관적인, 사회적인 적응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감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소외의 개념이 나옵니다. 즉 자연적인 자아를 (natural Self)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림(소외)시킴으로서 남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가 그의 초년기의 화풍을 버리고 당시 유행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풍을 받아들임으로써 세계적인 명작을 만든 것과 비슷합니다.
헤겔의 경우는 청년헤겔의 신학논집에서 정신현상학 등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헤겔의 소외 및 도야 즉, 출세를 위한 노력 개념은 이처럼 예술이나 학문 등의 분야에서 아주 유용합니다.
초기에 헤겔은 도야(陶冶)란 자신의 타자가 되어 원래의 자신을 잃고 다시 이를 획득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초기의 자신의 어려운 여건에서 비롯된 헤겔의 소외와 도야. (Bildung)개념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d). 군주 정치와 소외된 정신
헤겔은 원래 공화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봉건주의와 절대 군주제 모두 싫어했습니다. 헤겔이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란 말이 있었지만 최근 이것이 반박되었다. 특히 정신현상학에서는 군주정에 대한 반감(反感)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개인의 특수성을 버리고 시대적인 혹은 사회적인 가치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소외와 도야(출세) 문제를 다룬 다음 헤겔은 정신의 소외를 역사적인, 정치적인 맥락에서 고찰합니다. 그런 중에 경제 문제도 다루어 집니다. 경제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이 접목됩니다. 즉 개별이익은 보편 이익이다 입니다.
그러나 혁명전의 프랑스 같은 절대주의 군주국 나라에서는 국가 권력은 선이고 개인의 이익추구는 악이라는 의식의 유행했습니다. # 한국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참고하세요. 그러나 헤겔은 이를 비판합니다.
현실에서 출세하려는 의식 곧 소외된 의식은 이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들은 국가 권력을 위하여 헌신과 봉사를 합니다. 이들은 개별자의 개별성 즉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모든 것을 버리고 국가 즉 보편자를 위하여 충성을 하지만 군주주의 치하에서는 국가는 왕에 의해서 대표됩니다. 따라서 충성을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소위 봉사하는 영웅주의. (충신)는 군주주의 때문에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간신들이 나타납니다. 이를 헤겔은 아첨하는 영웅주의. (간신)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봉사하는 영웅주의는 저급한 정신으로 타락합니다.
아마도 프랑스 혁명을 통한 봉건주의 내지 절대 왕정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이런 분석은 당시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라는 작품에 나타난 비루한 인간의 언어와 의식 분석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이 부분은 길게 인용이 됩니다. 오히려 헤겔은 (필자의 관점에서) 영향을 받은 많은 사상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라모의 조카”를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은 당시 문화와 정치의 거두(巨頭) 괴테입니다. 이는 결국 헤겔 역시 당대의 권력자인 괴테에게 잘 보이려 했다는 뜻입니다. 헤겔은 괴테가 번역한 사실까지 각주로 달았습니다. 결국“정신현상학”역시 도야, 출세를 위한 책이었습니다.
[7]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헤겔의 해석,
헤겔의 정신현상학 안에는 “4장 정신 A. 진실한 정신, 인륜성” 이란 부분에서 안티고네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신현상학에 있어서 정신 즉 Geist의 개념은 2장 자기의식의 일반화 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공동체를 이루는 민중들의 정신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주로 국가와 인륜성 그리고 예술 종교 철학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헤겔의 인륜성이란 윤리 도덕을 넘어선 공동체의 삶을 구성하는 규범을 의미합니다.
◉ 줄거리
안티고네는 본래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입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장녀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을 받는 비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비밀이 밝혀져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테베에서 추방됩니다. 그러나 장녀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를 돕게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뽑고 그리스 곳곳을 배회하다 아테네에서 죽게 됩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네고 나서 안티고네는 테베로 돌아옵니다. 안티고네의 두 오빠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그런데 폴리네이케스는 이웃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형의 군대를 물리치려고 했습니다. 그런 중 두 형제는 모두 전사합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국가에 충성을 하다가 죽었으니 마땅히 예우를 갖추고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하고 반대로 폴리네이케스는 국가를 배반한 반역자, 매국노로 치부하여 장례식마저 치루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그렇지 않은 경우 시민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는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둘 다 오빠라고 하며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국법을 어기고 밤에 몰래 성을 빠져 나가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찾아서 홀로 장례식를 거행합니다.
이를 알게된 크레온은 분노하여 안티고네를 일단 지하 감옥에 가두게 합니다.
눈먼 예언자 티레시아스는 신들이 안티고네 편이라는 말을 합니다.
크레온은 이말을 듣고 뉘우쳐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안티고네를 살려 주려하지만 이미 때는 넘었습니다.
지하 감옥에 갖힌 안티고네는 자살을 하고만 것이었습니다. 한편 안티고네의 약혼자 하이몬은 크레온의 아들입니다. 하이몬은 크레온 아버지에게 안티고네를 용서 해줄 것을 호소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자살을 하고 맙니다. 아들의 비극을 들은 어머니도 자살을 합니다. 크레온은 신들의 노여움을 받아서 자녀와 부인을 잃는다. 그는 신의 형벌을 받고 교훈을 얻습니다.
◉ 인간의 법과 신의 법 (human law vs divine law)
크레온 왕과 안티고네의 죽은 자의 매장을 둘러싼 갈등은 헤겔에 의하면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갈등으로 파악이 됩니다. 크레온은 조국과 공동체를 대변하여 법을 선포합니다. 이 점에서 크레온은 폭군이 아닙니다. 자기 기분대로 명령을 발동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의 법령의 취지를 명백히 설명하고 심지어는 그 검증을 취해서 국가 원로들 ㅡ 드라마 내에서는 코러스로 나타납니다, 희랍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은 다양한데, 주로 주인공들의 행위에 대한 평가나 감동을 증폭시키고, 춤과 노래 등을 하며, 또 소위 “편집자적 논평” 같은 역할을 맡습니다,ㅡ 들의 자문을 구하고 승인을 받습니다. 즉 입법의 민주적인 절차를 밟은 것입니다.
따라서 크레온의 결정 즉 조국의 배신자는 장례식을 못해주고 들판에서 무덤없이 새와 개들에게 몸뚱이가 먹히고, 망가진채 구경거리가 되어야 한다 는 어쨌든 법의 형식을 갖추었고 내용적으로도 공감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부모, 친척 간에도 무참하게 학살한 6.25 전쟁에서 견주어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정치와 권역의 쟁탈 게임에는 고래로부터 끔찍하고 잔학한 일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입장도 그만큼 확고합니다. 그래서 비극적 파국은 필연적으로 이미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티고네의 죽은 오빠를 장례시킨다는 결단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배경이 있음을 알립니다. 즉 죽은 혈연의 매장이 단순히 혈연이나 가족의 윤리 문제일 뿐 아니라 종교적, 신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안티고네의 “범죄 행위” (법실증주의에 근거하여)는 타당성이 많이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또한 그녀가 죽은 위에도 영혼이 살아있다는 지하계를 믿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됩니다.
헤겔은 여기서 안티고네의 신의 법에 대항하는 하나의 개념을 주조해냅니다. 즉 인간의 법입니다. 실제 이것이 보통 말하는 법의 개념에 일치합니다. 즉 통치자가 입법가들이 입안, 혐의하고 (대중의) 묵시적인 시인을 받아서 공표되는 것이 법입니다.
여기에 비해 안티고네가 말하는 법은 실은 극히 개인적인 신념이나 사상을 말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녀 역시 법을 가지고 법을 대항합니다. 이럴 경우가 실은 자주 있습니다. 독일의 나찌스의 법이나 북한의 법 등은 실증법이지만 실은 악법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양심이나 사상은 실증법과 많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이 선포한 법이 신들의 법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들의 법의 객관적 존재 문제입니다. 아무도 그런 법을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록도 없습니다. 이런 법을 흔히 불문법, (unwritten law)이라고도 합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법은 크레온의 법과 다릅니다. 이는 가족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이를 여성으로 대표되는 가족의 규범와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규범의 충돌로 봅니다.
크레온, = 공동체, = 인간의 법, = 보편성,
(Allgemeinheit, Universality)
안티고네, = 가족, = 신의 법, = 개별성, (Einzelheit, Particularity)
헤겔의 해석은 크레온의 법은 보편성 즉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서 누구나 지켜야 할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공동체 또는 국가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 (Polis)를 말합니다.
반면에 안티고네의 법 즉 신의 법, (divine law)는 가족 구성원이 지켜야 할 개인적인 가치를 상징합니다. 즉 개별성을 상징합니다.
헤겔에게 있어 가족과 폴리스 사이의 갈등은 여성과 남성의 갈등에서 대표되는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헤겔에 따르면 자연은 신성한 법칙에 여성을, 인간에 대해서는 남성을 할당한다.
헤겔에 따르면 신적인 법칙도 인간적인 법칙도 그 자체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적 법칙이 신적인 법칙을 억누려려고 해도 실은 불가능합니다. 그 법을 안지키면 죽인다 라고 해도 안지키는 사람이 나옵니다. 안티고네에 의하면 가족의 윤리 혹은 인륜(人倫)이라는 이 법은 지하세계의 신들이 제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하세계란 지옥이 아니라 죽은 후에 도달하는 영적인 세계 혹은 내세를 말합니다.
따라서 국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안티곤를 바위로 된 지하 감옥에 가둔 크레온은 결국 자신의 아들과 아내마저 상실당하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를 헤겔은 국가의 권력이 가정을 파괴할 때 결국 그 공동체는 붕괴한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공동체 역시 가정으로부터 구성원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즉 가정은 아이들을 생산하고 양육하여 시민으로 키웁니다. 이 시민이 공동체를 이루어 갑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가정과 개인의 양심을 파괴하는 법은 실은 불법입니다. 크레온의 입법 역시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국가의 존립을 위한 법을 제정하더라도 예외 규정을 두어야 했었습니다. 즉 죄인이라고 해도 그 가족들은 시신은 수습할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경우를 고려하지 않는 법의 맹목적인 형식주의(Formalismus, formalism)이 무서운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 비극의 감상과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효과를 카타르시스 라고 합니다. 흔히 정화 라고 번역합니다.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의 과정과 결말을 통해서 삶과 공동체 그리고 가정 혹은 개인의 양심을 한번 더 숙고할 기회를 가지는 한편 연민와 공포(pity and fear), 흥분과 슬픔 등의 감정을 체험할 것이고 이를 통해서 묶은 감정의 찌끼들이 사라지고 내면 세계가 정화되는 예술적인 승화, (sublimitation)의 체험을 할 것입니다.
(8), 헤겔의 “대논리학”, Science of Logic, Wissenschaft der Logik
1812년에서 1816년 사이에 처음 출간된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자신의 논리학 비전을 설명한 저서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하면 “논리학의 과학”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를 “대논리학”이라고 의역합니다. 이 방송에서는 그냥 논리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헤겔의 논리학은 변증법 체계, 즉 변증법적 형이상학으로, 사유와 존재가 하나의 능동적인 통일체를 구성한다는 원리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헤겔의 논리학이란 책은 보통 말하는 논리학, (logic)이 아니라 실은 형이상학, (metaphysics)이요 존재론, (ontology) 입니다. 헤겔의 논리학은 굳이 말하면 존재의 논리학, 즉 존재 자체가 논리적이다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에는 세계가 논리적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를 범논리주의, (Panlogismus)주의라고 합니다.
전통논리학 혹은 형식논리학은 흔히 사유의 형식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단논법 입니다. 형식논리학의 예 : 삼단논법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입니다.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모순이 발생합니다.
칸트는 종래의 논리학에서 다시 오성의 개념을 도출했습니다. 칸트의 범주론 참조. 범주란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개념들 입니다. 이에는 양과 질, 그리고 관계 양상의 큰 4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헤겔에 앞서 피히테가 먼저 존재의 논리학 구상을 펼쳤습니다. 그는 그의 철학 원리인 자아(自我), (the Ego)와 비아(非我), (the Non-Ego)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범주의 연역을 시도했습니다. 피히테의 중요한 관점은 종래에 그냥 주어진 것으로 간주했던 수많은 사유와 논리의 개념들을 의식의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도출 곧 연역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피히테는 이런 과정을, 이행, 운동, 대립 및 모순을 통해서 설명했으나 종래의 형식 논리의 법칙 즉 동일률이나 모순률 등을 완전히 극복을 못했습니다. 헤겔의 공로는 바로 이것 즉 모순률과 동일률의 완전한 부정 및 모순 개념의 긍정입니다. 그는 동일성이 아니라 모순, (contradiction)과 부정, (negation)이야말로 존재의 뿌리임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헤겔 철학의 특징인 변증법입니다.
a) 헤겔 논리학의 구조와 본 강의의 주제 선정
논리학은 1, 존재론 2, 본질론 3, 개념론 이라는 3대 범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 존재론은 ㄱ, 질 ㄴ, 양 ㄷ, 도량 등을 말합니다. 2, 본질론은 ㄱ,본질 ㄴ,현상 ㄷ,현실성 등을 다룹니다. 3, 개념론은 다시 ㄱ,주관성 ㄴ,객관성 ㄷ,이념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존재론은 수학적, 물리적인 범주를 다룹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적인 것들 혹은 감각적인 범위를 취급합니다. 여기서 도량은 다른 데서는 척도 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론을 합하여 객관적 논리학이라고 하고 3권 개념론은 주관적 논리학이라고 다시 명명되어 있습니다. 본 강의에서는 1, 존재론은 ㄱ, 질 중에서도 다시 제 1장 존재 A, 존재 B, 무 C, 생성 부분만을 알아 보겠습니다.
b) 헤겔의 존재 개념의 특징
헤겔은 우선 감각적인 것 혹은 물질적인 것을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 철학에서는 존재 개념은 가장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모든 것이 다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의미는 다양하다 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존재의 의미는 사유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앞서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사유라고 했습니다.
이를 존재, 사유 동일성 명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근대 철학 특히 헤겔은 존재를 물질과 같이 봅니다.
그래서 그의 논리학 1부인 존재 편은 주로 물질 존재, 공간적 존재의 특성을 다룹니다. 그러나 그런 외부적인 사물을 다루기 전에 헤겔은 학문의 출발점을 다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정신현상학에서는 감각적 확신이 학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현상학은 대상과 주관의 관계를 추구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논리학은 사고 규정 자체의 자기 분석이 학적인 과정입니다. 헤겔이 생각하는 존재 개념은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혹은 자기 밖에 다른 규정이 없는 어떤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순수존재라는 말도 씁니다. 자기 외에 타자와 어떤 연관성도 갖지 않는 것이라는 존재를 상상합니다. 이것이 순수 존재의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 A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존재는 A 는 B이다 라고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 번 가정해 봅시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순수존재 혹은 그냥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물은 항상 A는 B이다 는 식으로 규정이 됩니다. 타자와 결부되거나 연관될 수 없고 오직 자신과만 결부되는 존재입니다. 이를 흔히 자기 동일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 즉 순수한 존재를 표상하자마자 곧 이는 자기 모순에 빠집니다. 즉 그런 존재를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순수한 존재는 머리 속의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생각하는 나 없이는 그런 순수한 존재가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존재 혹은 순수존재는 무,(없음) 이라는 범주로 이행합니다. 즉 “무(無)는 순수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새로운 규정이 발생합니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무규정적인 존재는 전통 철학에 있어서는 제 1의 질료, 물질 혹은 감각 등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오직 이와 같이 순수하고도 공허한 직관 그 자체일 뿐이다. 이에 못지않게 또한 존재 속에는 사유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니, 결국 이것은 오직 공허한 사유임을 나타내는 것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실로 무규정적인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존재는 무로서 결코 이것은 무(無) 이상도, 그리고 그 이하도 아니다. (헤겔 대논리학 임석진 번역 1권 75쪽)
헤겔은 순수 존재에서 순수 무(無)로 이행합니다. 이런 과정은 달리 말하면 생성입니다. 혹은 반대 즉 무에서 존재로도 이행합니다. 어느 쪽이든 생성이라고 불립니다. 소멸 역시 생성, 변화로 봐야 합니다. 생성, (Werden, becoming)은 유와 무의 상호 이동 내지 교환입니다. 생성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성은 존재에서 무로, 또는 무에서 존재로의 소멸이므로 결국 이것은 존재와 무가 다같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생성은 어디까지나 이 양자간의 구별에 기초하고 있다. (논리학 1권 102)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존재는 더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갑니다. 즉 존재와 무의 단순한 통일로 현존재, Dasein을 만듭니다. 이런 현존재가 자기복귀할 때 어떤 것 즉 something, etwas가 됩니다. 이런 과정을 더 거쳐서 사물의 특성 혹은 규정성이 나타납니다. 이를 통털어서 질(質)의 범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정성이 한계가 없어질 때 양(量)의 범주가 나타납니다. 헤겔은 이를 한계일 수가 없는 한계라고 표현을 합니다. 한계가 없는 것도 일종의 한계라는 사상입니다. 양의 범주는 발전하여 당시 수학과 물리학의 최고봉인 과학자 라그랑주의 미분방정식과 무한소 및 극한을 다루고 있습니다.
양(量) 분야의 마지막 단계인 도량(度量)은 질과 양의 통일을 말합니다. 헤겔은 직관적인 예를 통해 이 통일을 설명합니다. 물의 온도의 양적인 변화는 물의 상태의 질적 변화로 이어집니다. 즉 물은 얼거나 수증기가 됩니다. 그리하여 측정 조건에 따라 상태는 달라지나 근간에 자리하며 무차별적인 기저(基底)에 대한 규정이 등장합니다. 이를 헤겔은 자연속에 비약이 있다고 갈파합니다. 여기에 대한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국 일체의 생성소멸, 즉 모든 태어남과 죽음은 결코 지속적인 점진성, 완만한 진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완만하고 점진적인 것의 절대적 단절이며 양적인 것으로부터 질적인 것으로의 비약, 돌변인 것이다. (논리학 1권 385)
기저 즉 실체와 상태에 따라서 구분되는 이 무엇에 대한 사상은 논리학의 두 번째 부분인 본질론으로 이어집니다. 즉 실체와 속성이라는 상호규정이 바로 본질론의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C. 본질
본질 장의 기본적인 주제는 반성 즉 reflexion입니다. 즉 사물의 본질은 순간적인 포착이 아니라 뒤돌아봄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어에서 본질은 Wesen 인데 이는 원래 있다 즉 sein 동사의 과거분사 gewesen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질을 과거와 결부시키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 즉 essence를 규정할 때, 그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라는 뜻으로 말을 씁니다. 본질 즉 그리이스어로 to ti hen einai 은 불완전 과거 즉 (imperfect)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영어로 what something was to be 라틴어로 quod quid erat esse 입니다. 불완전 과거는 한때 어떠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는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의 본질 혹은 본성은 그 사물 즉 개별적인 존재자가 현재는 없더라도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동나무가 여기 없다고 하더라도 오동나무의 본성 혹은 지식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을 불완전 과거 시제로 표시한 것입니다.
헤겔의 본질 규명은 근본적으로 그의 선배인 피히테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 즉 Wissenschaftslehre의 실천편에서 순수한 활동과 대상적 활동의 상호작용을 추구합니다. 이를 순수한 자아와 대상적 자아라고도 합니다. 순수한 활동은 자기 복귀하는 활동입니다. 이를 피히테는 자기 복귀 혹은 자기 반성 즉 reflexion in itself 라고 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대상을 만나는 활동은 자아를 한정하면서 대상의 존재를 정립합니다. 이런 선행 지식을 가지고 헤겔의 본질과 반성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반성에는 3가지의 반성이 있습니다. 즉 1, 정립적 반성 2, 외적 반성 3, 규정적 반성입니다.
1, 정립적 반성은 쉽게 말해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는 의식입니다. 생각과 사유와 자아는 일체가 됩니다. 피히테는 이런 순수한 자아의 활동을 자기 복귀 혹은 자기 반성 즉 reflexion in itself 라고 나타냅니다. 이런 반성을 헤겔은 정립적 반성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즉
결국 본질 속에서 생성되어 간다는 것, 즉 본질의 반성적 운동이란 오직 무에서 무로 가는 운동이며, 따라서 이것은 자기자신에로 복귀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논리학 2권 32)
우선 반성은 무에서 출발하여 무를 향하여 가는 운동이므로 오직 이것은 자기자신과 합일되어 있는 부정이다 (논리학 2권 33)
무에서 무로 간다는 것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대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상이 없다는 말도 대상을 의심한다 혹은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부정이란 타자의 부정입니다. 즉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세상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자아의 사고입니다. 세상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자아는 그 부정성 때문에 도리어 자기 긍정을 획득합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의심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대상들에 대한 의심을 통한 자아의 긍정을 헤겔은 무(無)에서 출발하여 무(無)를 항하여 가는 운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상의 의심이란 대상을 허깨비처럼 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대상들, 사물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반성을 정립적인 반성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정립적 반성이란 타자를 부정하고 자기를 긍정하는 반성입니다.
2, 외적 반성
외적 반성이란 대상을 긍정하게 되고 자아를 상대적인 존재로 보는 반성입니다. 우리의 보통의 의식과 세상을 말합니다. 여기서 대상이나 외부적인 존재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입니다. 경험적으로는 이게 진리이긴 하지만 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를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관념론적인 입장은 이렇습니다. 위에서 말한 정립적 반성으로 인해서 자아의 존재는 확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상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긍정이 됩니다. 이를 헤겔은 대상의 피정립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대상을 부정한 정립적 반성의 상태를 다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정의 주체였던 나는 자신의 활동인 부정적인 활동 그 자체를 부정합니다.
나에 의해서 대상의 대상성이 확립됩니다. 따라서 자아의 정립성 혹은 반성의 정립성이 지양(止揚)됩니다. 그 대신 위에서 말한 대상의 피정립성이 긍정됩니다. 나는 사물 밖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태도입니다. 외적 반성은 달리 말해서 타자를 긍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반성입니다. 즉 사물은 나 없이도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 일상적인, 경험적인 태도입니다.
3, 규정적 반성
규정적 반성이란 정립적 반성과 외적 반성의 통일입니다.
위에서 타자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나의 사고, 행동이 긍정되었다고 했는 데 그 의심은 타자를 전제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를 헤겔은 타자를 피정립된 것으로 세운다고 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유로 본다는 것입니다. 즉 피정립성이 정립됩니다. 나에 의해서 대상의 대상성이 확립됩니다. 의식은 자기로 복귀하면서 대상을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나는 나를 절대적인 존재로 즉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정립하면서 세상도 나의 세상 즉 피정립성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4. 본질론의 개요
논리학의 2권 본질론은 위에서 언급한 반성의 3단계 이론을 활용하여 사상이 전개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동일성, 구별, 모순 등의 범주를 도출합니다. 그리고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이런 방식 즉 반성의 3단계 이론으로 파악합니다. 본질 논리학의 두 번째 장인 ‘현상’에서, 헤겔은 칸트와 물자체의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차별화합니다. 칸트의 물자체 thing in itself란 경험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벗어나 영원히 존재하는 초월적인 본질입니다. 칸트는 본질을 현상의 숨어 있는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헤겔의 의도는 이런 칸트류의 물자체와 현상의 차이를 해소하는 것뿐 아니라, 현상으로부터 물자체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현상은 물자체이며, 혹은 그것의 진리이다”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즉 즉자적 in itself 상태로 있는 것은, 헤겔에 따르면 실은 피정립태입니다. 즉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를 모르고 의식과 떨어져서 즉 의식의 이면에서 즉자태의 왕국을 쌓아올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현상은 물자체, 그리고 직접적 실존이라는 양자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진리”이며, 그것은 현상이 “본질적인 것이며 그에 반해 직접적 실존은 아직 비본질적인 상태의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에서는 현상이 본질의 본질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D, 개념
대논리학의 세 번째 권에서는 “개념”의 논리학을 주관성, 객관성, 그리고 이념의 세 장으로 나누어서 전개해나갑니다. (위키백과 인용)
주관성
주관성 장에서 헤겔은 개념과 판단, 추리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을 다룹니다. 헤겔은 개념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자아의 본성을 상기합니다.
본질론의 반성 편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헤겔 사유의 기본은 자아와 의식입니다. 특히 거기서 제신된 반성 관념이 근본적입니다.
따라서 개념과 자아에는 구조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개념과 마찬가지로 자아 역시 “스스로 자기와 관계하는 통일체이며,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모든 규정성과 내용으로부터 추상되어 자기 자신과의 제약 없는 일치의 자유로 복귀하면서 그러하다.”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정립적 반성과 대동소이합니다.
헤겔의 ‘개념’은 세 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성, 특수성 즉 (분리된 존재), 그리고 개별성 즉 (개별존재) 등입니다. 이 역시 반성의 3종류와 비슷합니다. 즉 규정적 반성, 외적 반성 그리고 규정적 반성입니다.
우선 보편성은 자기 복귀적 반성 즉 무에서 무로 향하는 반성과 같습니다.
그 다음인 특수성은 외적 반성과 같습니다. 즉 타자 혹은 인식의 대상을 자아와 분리시킵니다. 이는 보편성의 부정을 말합니다.
부정한다는 것은 규정하고 한계짓는 것을 뜻합니다. 보편적인 것의 부정의 결과는 분리된 것, (특수성)이며, 이 부정의 부정 (따라서 특수성의 부정)의 결과는 보편과 특수의 종합입니다. 왜냐하면 특수성이 본래의 통일로 돌아가서 개별성으로 화하기 때문이다.
개념의 예로서 인간이란 개념을 한번 봅시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습니다. 가령 인간은 이성적 동물입니다. 이게 바로 개념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나 개념작용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 단계가 특수성입니다. 즉 어떤 개념이 다른 개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 즉 개별성은 타자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개념은 그 다음 단계인 판단과 추론으로 전진합니다. 즉 개념, 판단, 추론이 주관성 장을 구성합니다.
객관성
논리학의 객관성 장은 신적인 문제 혹은 세계관의 문제를 다룹니다.
앞의 주관성은 실은 칸트의 선험적 주관과 연결이 됩니다. 선험적 통각의 기본적인 과업이 바로 대상에 대한 개념의 정립입니다.
이번에는 인식이 단순한 과학적인 법칙이나 개념 설정 등이 아니라 이들의 총체적인 양상 즉 자연이나 세계입니다. 이들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후기에 오는 딜타이의 관점을 따르면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객관성 장은 1, 기계론 2, 화학론 3, 목적론 이라는 과정을 통과합니다. 목적론적인 대상 속에서 이 과정은 목적으로 이어지고, 이 목적은 그 자체가 타자와 다를 수 없습니다.
목적론 즉 teleology란 자연의 활동은 큰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목적론은 주로 기계론과 대립된다고 합니다.
흔히 causa efficientis 와 causa finales로 불리는 작용인과 목적인과의 대립은 바로 이 기계론과 목적론과의 구별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의 절대적 맹목적인 자연의 기계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어떤 목적에 따라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오성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구도 역시 이와 같은 구별에 귀착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결정론이라고도 할 숙명론과 자유의 이율배반도 역시 기계론과 목적론과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논리학 3권 264)
칸트같은 경우 목적론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사실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자연 자체에는 목적이 없으나 사람들은 목적이라는 개념으로 자연을 볼 때 자연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목적론을 인정합니다.
이념
헤겔은 이념의 세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즉 생, 인식, 그리고 절대이념입니다.
이념과 대상은 개념과 실재성과 같은 말입니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국가나 교회와 같은 전체를 이루는 것도 만약 그 개념과 실재성과의 통일이 붕괴돼 버리면 더 이상 실존할 수 없을 것이며, 인간이나 생명체의 경우도 마음과 몸이 서로 분리되고 나면 죽게 마련이다. (논리학 3권 301)
생에서 이념은 위의 글처럼 영혼과 육체의 통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선의 인식에서 인식 주체는 주어진 대상에 대한 앎을 얻으려고 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적 사유의 절정으로서의 절대적 이념에서 의식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즉자적인 것과 대자적인 것의 동일성을 파악합니다. 주체는 스스로를 객체로서 인식하고 객체는 따라서 주체입니다.
[10] 욕망과 국가, 헤겔 [법철학]의 일부 해석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자 헤겔(G.W.F.Hegel, 1770-1830)은 그의 저서 “법철학”에서 근대 사회와 관련하여 욕망 혹은 욕구의 문제를 새롭게 부각시켰습니다. 헤겔의 “법철학”은 법과 도덕 그리고 인륜성 등을 종합하여 법의 체계로 다루는 방대한 사회학 내지 국가철학의 대작입니다. 헤겔은 종래의 철학가들이 보지 못한 영역, 즉 경제학의 영역과 그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파악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치, (G.Lukacs)사 쓴 “청년헤겔”이란 책은 헤겔 철학에 대한 발전사적 연구로 유명한 책인데, 이 책의 부제가 “변증법과 경제학의 관계에 관하여”입니다. 루카치는 헤겔의 변증법(Dialectics)사상이 근대 경제학의 알맹이를 사상적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헤겔은 당시대 자본주의 발전과 그의 학술적인 표현인 근대 경제학의 의미를 시대적으로, 철학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헤겔의 인륜성(人倫性)이란 쉽게는 이해가 안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 도덕은 아닙니다. 독일어로는 Sittlichkeit이고 영어로는 Ethical Life라고 합니다. 도덕은 개인적인 각성과 행동의 원리를 말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륜성 개념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공통체입니다. 인륜성은 보통은 도덕성을 포함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헤겔의 법철학에서는 인륜성은 도덕과는 구분이 됩니다. 인륜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인간, 즉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다룹니다. 인륜성은 가족,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를 포함합니다.
도덕에서 인륜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헤겔의 법철학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륜성은 경제 생활을 포함합니다. 경제 생활을 헤겔은 시민사회라고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인륜성은 근대의 경제 생활 즉 자본주의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의 법철학은 법학, 도덕학 그리고 경제학을 섭렵합니다. 본 방송은 인륜성 중에서도 욕망과 경제활동을 주로 고찰하겠습니다.
1) 근대 시민사회와 욕망의 체계
헤겔의 법철학 제3부 인륜성에서 시민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헤겔의 시민사회 Civil Society란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신분제 사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활동으로서의 사회를 말합니다. 헤겔은 우선 시민사회를 경제 사회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합니다. 즉 경제활동의 원리로서 욕구 혹은 욕망을 강조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헤겔의 법철학은 오늘날까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런 욕망의 활동이 도덕과 법 그리고 국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더욱 매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시민사회를 욕망 개념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식견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인데 이를 처음으로 철학의 차원에서 규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민사회란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인간적인 측면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욕망 혹은 욕구 개념도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동물이기 때문에 지니고 있는 욕망 즉 식욕, 성욕 혹은 의복의 욕구 등을 가진 시민들이 그 욕구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동과 그 밖의 경제 활동을 하는 체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욕망이 그냥 본능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문화와 사회를 통해서 형성되어지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의 욕망도 타자나 공동체를 통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 경제활동과 시장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사법의 체계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활동을 더 구체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로서 행정조직과 직업조합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이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자신의 노동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노동과 만족이 필요하다는 사상입니다. 즉 나의 욕구의 만족에 타자의 만족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노동을 통해서 욕구나 필요성이 채워집니다. 더 나아가서 타인의 욕구와 노동이 나의 욕구를 만족시켜 줍니다. 헤겔의 욕구 개념은 항상 타자의 욕구와 결부됩니다.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여 돈을 벌지만 이 돈으로 상품을 사야 합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상품들은 다른 사람들이 만듭니다. 헤겔이 상세히 공부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이런 내용들이 나와 있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제조업자들의 욕심 때문에 내가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욕구 때문에 나의 욕구가 채워집니다. 혹은 나의 욕구와 타인들의 욕구가 매개되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타인들의 욕구가 나의 욕구에 보탬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불법적인 욕구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국가나 행정 혹은 경찰 등에 의해서 방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의 욕망과 필요가 타인들의 욕망과 필요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를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 이라고도 합니다.
2)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
헤겔은 인간의 욕구 내지 욕망이 동물들과는 달리 무한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그 욕망의 범위와 그 충족 수단에 있어서 제한적입니다. 가령 사자는 용맹스러운 짐승이지만 배가 부르면 다 이상 사냥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그들의 본능적인 욕망을 채우는 방식은 지극히 단조롭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은 육식성, 채식성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거나 먹을 수 있습니다. 이를 인간의 욕구의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은 비단 먹는 것에 있어만 아니라 정신적, 지성적, 도덕적 욕망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종류가 무한하고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정신성 때문에 욕망의 범위도 불확정적이고 욕망 충족의 수단도 무한히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욕망은 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남보다 편하고 부유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나는 거기 만족하지 않고 더 편하고 더 부유한 생활을 바랍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의 특징은 기존의 욕망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고 또 욕망을 세분화시키고 특수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를 들어 옷이나 신발들의 디자인이나 기능의 다양성과 무한한 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헤겔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a. 욕구와 충족의 양식
헤겔이 말하는 욕망의 무한적인 발전과 세분화 혹은 추상화 등은 뒤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물질적인, 사회적 종속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추상적인 욕망이란 식욕이나 성욕같은 구체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떠난 다른 종류의 욕망, 가령 자아실현의 욕망이나 교육의 욕망 등을 말합니다. 또는 사회개혁의 욕망도 가능합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적, 도덕적 혹은 개인의 취향에 관련된 욕망이 인간의 욕망을 무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취미 생활의 다양성이 욕망의 무한성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런 욕망의 무한정한 증폭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헤겔은 19세기초에 살면서도 벌써 21세기 사회의 모순마저도 미리 보고 있습니다. 대중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욕망마저도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광고와 매스컴을 통해서 교묘하게 조작하는 일이 빈번하여 여기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헤겔은 이런 맥락에서 욕망의 증폭을 이용한 상업과 자본주의 문화의 병폐를 선구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추가) 영국인이 쾌적한(comfortable)이라고 일컫는 것은 좀처럼 그 속뜻을 알 수 없는 것으로,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일컬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쾌적하다고 해도 이는 다시금 어떤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어서, 그 편리함을 따지고 들면 끝이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욕구라는 것은 직접 그 무언가를 욕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안출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구가 생겨남으로 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안출된다. (“법철학” 370)
3) 욕구에서 노동으로
위에서 헤겔은 자본주의, 시장주의 하에서의 욕망의 개념을 밝혔습니다. 즉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의 욕망의 충족은 타자의 욕망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의 문제를 살펴봅니다.
b. 노동의 양식
§196 욕구와 욕구충족의 수단을 매개하는 노동
세분화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합당하고 마찬가지로 세분화된 수단을 조달하는 매개작용을 하는 것이 노동이다. 노동은 자연에서 직접 제공된 소재를 다양한 목적을 위하여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과정을 거쳐서 가공한다. 이러한 형성작용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에 가치와 합목적성을 부여하는데, 이로써 인간이 소비하는 것은 주로 인간에 의한 생산물이며 인간이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된다.
(“법철학” 374)
욕구의 세분화는 인간 욕구의 한 특징입니다. 특히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 형성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두드려 집니다. 예를 들어 술의 종류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욕구도 세분화되고 이에 따라 그 수단도 세분화됩니다. 욕구의 세분화를 위해서 노동 역시 세분화됩니다. 이 때 노동은 기술이라고 해야 하겠죠? 이런 기술은 노동에 가치와 합목적성을 부여합니다. 합목적성이란 목적에 부합한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유용성(utility)라고 합니다. “인간이 소비하는 것은 주로 인간에 의한 생산물이며 인간이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된다” 라는 말은 결국 인간의 소비는 자연물의 채취보다는 인간들을 만든 것, 가공한 것을 시장에서 사고 팔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분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를 헤겔은 “노동이 추상화된다”고 합니다. “동시에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한다” 는 말도 합니다. (“법철학” 375) “노동이 추상화됨에 따라 노동은 더욱 기계화되고 종국에 가서는 인간이 노동에 의해 유린당하고 그 자리를 기계가 차지하는 일이 벌어지게 만든다”고도 합니다. 이런 현상이 이미 헤겔의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로봇화, 자동화, AI등에 의해서 인간들은 더욱 기계에 의해서 유린을 당합니다. 많은 일자리들이 새로운 생산방식이 도입됨에 따라서 소멸되고 또 생성될 수 있습니다.
4) 개인적인 욕구와 노동이 공익을 창출한다.
욕구의 분석을 통해서 헤겔은 원론적으로 나의 욕구가 타인의 욕구와 매개된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는 실은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즉 개인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회적인 부(富)를 축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들로 하여금 가능하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이기심이 만인의 욕구 충족에 기여하는 것으로 전화한다”는 말은 경쟁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들에게는 쉽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즘은 무한한 경쟁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취업도 잘 안되고 결혼도 어려운 현실에서 나의 이기심은 사회적인 부(富)와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적인 부는 상위층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이기심이 공적인 이익과 일치한다는 원리가 경쟁 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만약 사익과 공익이 불일치한다면 우리들은 잘살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사회적인 부패와 가난으로 들끓고 있는 남미의 국가들은 이런 믿음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마약 사업으로 많은 청년들이 뛰어 듭니다. 사회의 재산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회는 불법과 불공평이 넘치는 사회일 것입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이기심이 만인의 욕구 충족에 기여하는 것으로 전화하는” 사회란 결국 전체와 부분이 일치하는 사회입니다. 즉 내가 열심히 일하면 그것이 타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만큼 보답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소나 돼지를 잡아서 뼈를 발골하는 그런 직업에서 기술을 연마하여 돈도 벌고 소비자들에게도 좋은 고기를 제공하는 경우입니다. 혹은 노래를 잘불러 돈도 많이 벌고 남들에게도 큰 기쁨을 제공하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하여간 나와 타자의 이익의 일치가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헤겔은 “각자가 저마다의 노동에 의해 취득한 것이 이 공동의 재산을 유지하고 증대시켜준다” 라고 합니다. 국가의 자산 역시 개인들의 자산의 총합에 불과합니다. 이런 면에서 국가에 대한 너무 큰 기대는 잘못입니다. 나 없이는 국가도 없습니다. 국가의 주인을 왕으로 보는 군주주의나, 국가가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는 공산주의 등은 이런 자유주의와 다릅니다.
그래서 헤겔은 국가를 욕구의 체계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시민사회는 국가 형성의 전 단계 혹은 국가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헤겔의 역사 철학
들어가기: 본 강의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헤겔 (Hegel)의 “역사철학 강의” 라는 저서의 전체를 3부분으로 나누고 그 1부를 방송용으로 편집한 강의입니다. 1부의 내용은 헤겔의 역사철학의 기본 원리와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유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유대의 역사는 생략이 됩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철학의 항해 92.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 (1)” : 서론, 중국, 인도, 페르시아, 유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세계 역사를 한 개의 원리를 통해서 전체를 분석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역사 서술입니다. 그 원리는 정신과 자유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의 본질이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과 자유는 고대 그리이스와 중세와 근세의 유럽 (게르만 세계)을 통해서 구현됩니다. 그런만큼 헤겔의 역사 파악은 철저히 서양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은 당연히 변방의 역사로 치부됩니다.
이런 점은 헤겔의 역사철학의 단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원리로 그토록 복잡하고 무궁무진한. 각 나라와 민족 그리고 동서양의 문명을 발전사적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은 분명이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책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합니다.
1장. 근대 역사과학의 시조 비코 (Vico)
헤겔의 말년의 작품인 “역사철학 강의”는 근대 역사철학의 시조인 비코 (Vico)에 대한 존경으로 시작합니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세기 초두에 이르러 비로소 비코에 의해서 그때까지는 우연적인 사건의 계기(繼起)로 간주되든가, 혹은 신앙상의 것이어서.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신(神)의 업(業)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역사의 근저에는. 법칙(法則)과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사상을 부여하려는 기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비코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고대 역사의 신비한 부분들을 합리적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가령 고대 역사 서술에 흔히 등장하는 탄생설화, 건국 설화 같은 것을 그 신비한 외관을 벗기고. 그 안에 담긴 합리적인 부분을 해석해 냅니다. 비코에 의한 재미있는 학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모든 민족은 항상 자기가 가장 오래된 민족이고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자기네 나라에서 나왔다는 한다는 것입니다. 이 통찰력은 한국이나 중국 등의 고대사를 봐도 곧 이해가 됩니다. 즉 한국의 단군 설화 그리고 중국의 삼황오제 설화 등입니다. 자기 민족 중심주의 역사관입니다.
또한 비코는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 즉 역사를 자연보다 더 잘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을 수학과 과학의 법칙들로 이루어진 현상으로 봅니다. 그런 만큼 수학적 자연과학은 큰 발전을 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역사학 등 전통적인 인문 과학은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태리 나폴리 출신의 철학자 비코가 나타나서 이런 물길을 돌려 놓았습니다. 그는 “진리란 만들어 진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베룸 팍툼 원리 (verum factum principle)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이 만든 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자연은 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 반면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이 가장 잘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자연 인식보다 오히려 역사 인식이 더 우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통찰을 통해서 비코는 역사과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통해서 비코는 괴테, 헤겔, 맑스, 딜타이, 니이체 등 후대의 인문 사회 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2장. 헤겔의 역사철학의 원리. 이성의 지배
헤겔은 비코의 합리적인 역사 이념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합니다. 즉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헤겔의 이성은 신과 같습니다. 단 신은 어떤 특별한 종교를. 예를 들면 기독교와 성경의 신을 연상시키므로. 헤겔은 이런 것을 없애기 위하여 굳이 이성이란 말을 씁니다. 이. 이성은 개인이 가진 이성이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는 이법(理法) 혹은 로고스라고 합니다. 혹은 세계 정신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이성적인 역사관 또는 목적론적인 역사관에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반대할 것입니다. 그래도 헤겔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보면 그 의미를 많이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쯔가 변신론(辯神論)을 주장했습니다. 변신론은 신의 섭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철학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신론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할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20세기는 나찌 히틀러의 유태인 집단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경험한지라. 세계역사가 신이나 이성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기가 극히 힘듭니다.
3장. 정신과 물질의 구분.
역사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헤겔은 우선 물질과 정신의 본질을 규명합니다. 그는 물질의 실체는 중력(重力)이고 정신의 실체는 자유(自由)라고 합니다. 물질의 실체가 중력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물질 혹은 질량은 힘 개념으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은 또 정신은 자기 내부에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물질은 자기 외부에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합니다. 물질은 외부에 중심점이 있다는 말은 물질들의 상호연관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물질은 자신의 외부에 그의 중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정신은 스스로 있는 존재입니다. 이를 대자존재 (對自存在) being for itself 라고 합니다. 물질은 자연이라고도 합니다.
4장. 자유의 발전으로서의 세계역사
헤겔의 역사 이해는 아주 간단합니다. 세계사는 자유의 의식의 발전에 따라서 3단계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즉 동양인은 한 사람만이 자유임을 알고 있었을 뿐이고. 이에 비해서 그리이스인과 로마인들은 약간의 사람이 자유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게르만 (유럽)의 시대에 와서 만인의 자유가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르만계 제국민에 이르러서 비로소. 기독교 안에서 만인의 자유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이) 자유이며, 정신의 자유가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는 의식이 획득되었다”. 라고 헤겔은 서술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서구 중심의 역사관입니다. 오늘 날 이런 역사관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여. 서구를 중심으로 동양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상식이긴 합니다.
우리는 흔히 서양의 물질문명 동양의 정신문명이라고 하지만 헤겔은 그와 반대로 봅니다. 서양에서 비로소 정신 개념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정신 개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신 개념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고대 그리이스라고 합니다.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
“동양인은 아직도 정신 또는 인간 그 자체가 그 자체로서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단지 한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유는 단순한 자의 횡포. 둔감 또는 그 자신 단순한 하나의 자연적 우연. 또는 자의에 불과한 열정의 유화. 순종이다. 그러므로 이 한 사람은 전제군주(專制君主)이지 자유성인(自由成人)은 아니다” 라고 헤겔은 서술합니다.
자유의 의식이 처음 나타난 곳은 고대 그리이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헤겔은 말합니다.
“그리이스인에 있어서, 자유의 의식이 비로소 나타났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리이스인은 자유였었다. 그러나 그리이스인도 로마인도. 다같이 약간의 사람만이 자유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고. 인간이 그 자체로서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고대 그리이스는 자유시민들이 만든 민주주의 국가 였으나. 여전히 노예제를 가졌고 로마의 경우도 자유민과 노예가 공존했기에 그리이스인도 로마인도. 다같이 약간의 사람만이 자유라고 하는. 위의 헤겔의 말은 맞습니다. 노예제를 비로소 폐지하고 인간 평등의 사회를 만든 것은 서구 문명이었습니다.
동양인들은 한 사람만이 자유임을 알았다는 헤겔의 말을 필자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즉 동양에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동양에서는 황제나 평민 혹은 노예 등이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인권이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서양에서는 벌써 로마시대부터 노예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이 제정되었고 노예들이 주인을 고소할 수도 있었습니다.
헤겔은 게르만의 여러 나라에서 자유가 성취되기는 하나 그 이유가 그들의 민족성 때문은 아니고. 기독교의 수용 덕분에 보편적인 자유가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이 말도 많은 보충이 필요합니다. 헤겔이 본문에서 언급하듯이 게르만 족이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해서 곧 만인평등. 만인 자유가 주어진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입헌민주주의와 계몽사상. 그리고 시민 혁명 산업혁명 등.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도외시하고 단순히 기독교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자유를 쟁취했다는 것은 역사를 상당히 단순화시킨 것입니다. 특히 그는 루터의 종교 개혁과 이에 따른 독일 국민들의 심성 변화에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통해서 자유에의 각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루터교회에 있어서는 주관성과 개인의 확신은 그대로 진리의 객관적 확신인 것이다. 루터파에게는 진리란 기성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주관은 자신의 특수적 내용을 실체적 진리를 위하여 내동댕이쳐 버리고. 이 실체적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함으로써. 주관 그 자체가 참다운 주관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해서 주관적 정신은 이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개별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진리 안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다”. (역사철학강의 2권 256쪽)
이렇게 종교를 통한 내면적 자유의 쟁취가 독일 국가에서 일어 났다고 헤겔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내적 자유의 원리가 프랑스에서는 행동으로. 즉 혁명으로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사법적 정의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한 독일의 군주들은 지혜롭고 따라서 법.정의.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노력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노년 헤겔의 순응주의적인 면모가 있다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청년기의 이상주의적인 열정은 이제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된 헤겔은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헤겔은 프로이센에서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헤겔 학파가 성립되어 헤겔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숭앙됩니다. 그의 제자들도 왕성한 학문적, 실천적 활동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겔은 청년기의 이상인 공화주의는 버립니다.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렇게 헤겔이 코페르니쿠스 적으로 변한 이유는 그의 철학 자체에 있습니다.
(11) 헤겔의 미학 (스탠포드 백과사전)
(1) 헤겔 체계 속의 예술, 종교, 철학
헤겔의 예술 철학은 그의 전반적인 철학 체계의 일부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의 예술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철학 전체의 주요 주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헤겔은 그의 추측 논리에서 존재는 자기 결정적 이성 또는 "이념"( Idee ) 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그러나 자연 철학에서 그는 논리가 이야기의 절반만을 말해준다고 보여줍니다. 그러한 이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무(無)육체적인 로고스가 아니며, 합리적으로 조직된 물질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 헤겔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순수한 이성뿐만 아니라 합리적 원칙을 따르는 물리적, 화학적, 살아있는 물질입니다.
생명은 단순한 물질보다 더 명확하게 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더 명확하게 자기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생명 자체는 의식하고 자기의식이 될 때 더 명확하게 합리적이고 자기결정적이 됩니다. 즉, 상상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생각하고,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생명입니다. 헤겔은 그러한 자기의식적 생명을 "정신."( Geist )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성 또는 이념은 자기의식적 정신의 형태를 취할 때 완전히 자기결정적이고 합리적이 됩니다. 헤겔의 관점에서 이것은 인간 존재의 출현과 함께 발생합니다.헤겔에게 인간은 따라서 자연의 우연이 아닙니다.그들은 이성 그 자체입니다. 자연에 내재된 이성으로서 생명을 얻고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또는 다른 행성에 존재할 수 있는 다른 유한한 합리적 존재)을 넘어서는 헤겔의 우주에는 자기의식적 이성이 없습니다.
종교에서—무엇보다도 기독교에서—영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이성과 자기 자신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이념이 자의식적 영이 되는 과정은 이미지와 은유로 “신”이 인간 안에 거주하는 “성령”이 되는 과정으로 표현 됩니다. 더욱이 이 과정은 우리가 믿음 과 신뢰를 두는 과정입니다 . 그것은 순전히 개념적 이해라기보다는 느낌과 믿음의 대상입니다.
헤겔에게 예술은 또한 영혼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자기 이해를 순수한 개념이나 신앙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이 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만든 사물을 통해 표현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종교와 다릅니다. 돌 , 나무, 색상, 소리 또는 단어로 만들어진 그러한 사물은 영혼의 자유를 청중에게 보이거나 들을 수 있게 합니다. 헤겔의 관점에서 자유 정신의 이러한 감각적 표현은 아름다움을 구성합니다 . 따라서 헤겔에게 예술의 목적은 자유의 진정한 특성이 감각적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사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2). 예술과 이상화
헤겔에게 예술은 본질적으로 비유적입니다. 이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의 목적이 자유로운 정신을 표현하고 구현하는 것이고 , 이는 인간의 이미지를 통해 가장 적절하게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술의 역할은 우리가 일상 활동에서 종종 간과하는 우리 자신과 자유에 대한 진실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술의 역할은 자유의 진정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또는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예술은 일상 생활의 우연성 없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정신의 자유를 보여줌으로써 이 역할을 완수합니다 . 즉, 예술은 최상의 경우 우리에게 일상 생활의 지나치게 익숙한 종속성과 지루함이 아니라 자유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헤겔은 인간(과 신)의 자유에 대한 이 이상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성하며,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 조각품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상화 작업은 (현대 패션 사진처럼) 삶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행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따라서 이상화는 인간(과 신)의 진정한 성격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수행됩니다. 역설적인 점은 예술이 인간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통해 (그리고 실제로 그림에서는 외부 현실의 환상을 통해) 진실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3). 헤겔의 체계적 미학 또는 예술철학
헤겔의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이상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 또는 진정한 아름다움, 2) 역사에서 아름다움이 취하는 다양한 형태, 3) 아름다움이 마주치는 다양한 예술. 먼저 헤겔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3).1 이상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
헤겔은 예술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술은 가르치고, 교화하고, 자극하고, 장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예술의 적절하고 가장 독특한 기능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정신의 자유에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술의 요점은 "현실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우연성을 모방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하고 인간적인 자유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 자유에 대한 이러한 감각적 표현은 헤겔이 "이상" 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헤겔이 로마 사본이나 석고 주조물에서만 거의 독점적으로 알았을 고대 그리스 조각은 그가 순수하거나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움의 개념을 고갈시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 이고 발전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 드라마, 특히 비극에서 이것을 발견합니다. 그 드라마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은 갈등으로 이어지는 행동을 취하고 마침내 해결에 이릅니다(때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에서처럼 폭력적으로, 때로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3 부작 에서처럼 평화롭게. 그리스 조각에 표현된 신들은 그들의 신체적 모양이 그들의 영적 자유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신체적 연약함이나 의존성의 표시로 훼손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주요 영웅과 여걸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사소한 인간의 약점이나 열정이 아니라 윤리적 관심 또는 "파토스"(안티고네의 경우처럼 가족에 대한 보살핌이나 크레온의 경우처럼 국가 복지에 대한 관심)에 의해 알려지고 활력을 얻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이 영웅들은 추상적 미덕의 우화적 표현이 아니라 상상력, 성격, 자유 의지를 가진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윤리적 삶 의 한 측면에 대한 열정이며 , 신에 의해 지원되고 촉진되는 측면입니다.
그리스 조각에서 발견되는 순수한 아름다움과 그리스 드라마에서 발견되는 보다 구체적인 아름다움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실제로 두 가지 미묘하게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움은 이러한 다른 형태를 취하는데, 순수한 조각적 아름다움은 예술의 정점이기는 하지만 어떤 추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자유의 감각적 표현이므로 예를 들어 이집트 조각에서 결여된 구체성, 활력, 인간성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에서 예시된 것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은 공간적 , 신체적 형태에 잠긴 영적 자유이기 때문에 상상력과 언어로 활력을 얻는 시간 속의 행동의 보다 구체적인 역동성이 부족합니다 . 이것이 순수한 아름다움에 어떤 "추상성"(그리고 실제로는 차가움)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의 역할이 진정한 자유 에 감각적 표현을 주는 것이라면 추상성을 넘어 구체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넘어 드라마의 보다 구체적이고 진정한 인간적 아름다움 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 따라서 이 두 가지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예술의 가장 적절한 대상을 구성하며, 함께 헤겔이 예술 자체의 "중심"( Mittelpunkt )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합니다.
(3).2 예술의 특정 형태
고전 예술은 본래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고향인 반면, 낭만주의 예술은 헤겔이 "내면의 아름다움"( Schönheit der Innigkeit )이라고 부르는 것의 고향이거나 Knox가 번역한 대로 "깊은 감정의 아름다움"의 고향입니다.반면에 상징 예술은 진정한 아름다움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나쁜 예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헤겔은 상징 예술이 종종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적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상징 예술은 신성과 인간 정신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직 없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합니다.따라서 그것이 생산하는 예술적 모양은 부족합니다.그 이유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신에 대한 개념, 즉 무엇보다도 종교에 포함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3.2.1 상징 예술
헤겔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신성한 힘, 즉 선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이 신성을 자연 자체의 한 측면, 즉 빛과 동일시합니다. 빛은 별도의 신이나 선을 상징하거나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로아스터교에서 (헤겔이 이해하는 대로) 빛 은 선(善)이고 신(神) 입니다 ( 미학 , 1: 325). 따라서 빛은 모든 것의 본질이며 모든 식물과 동물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 빛이 오르무즈드(또는 아후라 마즈다)로 의인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신과 달리 오르무즈드는 자유롭고 자의식적인 주체가 아닙니다. 그는(또는 그것) 빛 자체의 형태로 선이며, 따라서 태양, 별, 불과 같은 모든 빛의 근원에 존재합니다.
힌두 예술은 신이 존재한다고 상상되는 자연적 형태를 확장, 과장, 왜곡함으로써 영적(또는 신성한) 것과 그저 자연스러운 것의 차이를 표시합니다. 따라서 신은 동물이나 인간의 순수한 자연스러운 형태로 묘사되지 않고 동물이나 인간의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형태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시바는 팔이 많고 브라흐마는 얼굴이 네 개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죽음이 영혼의 독립성이 보존되는 주요 영역이라는 사실은 영혼 불멸 교리가 이집트인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또한 헤겔이 피라미드를 이집트 상징 예술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보는 이유도 설명합니다. 피라미드는 그 안에 그것과 별개의 것, 즉 시체를 숨기는 창조된 모양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독립적이지만 여전히 진정한 정신의 자유와 생명이 부족한 내면의 영역을 가리키지만 그 자체로 드러내거나 표현하지는 않는 이집트 상징 의 완벽한 이미지 역할을 합니다. ( 미학 , 1: 356).
위에서 언급했듯이 피라미드는 이집트인의 상징적 예술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은 단지 상징적으로 죽은 자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정신에서 진정한 내면을 찾을 수 있다는 초기적이지만 아직 발달되지 않은 인식을 증명합니다. 헤겔은 인간 정신이 동물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출현을 가장 잘 묘사한 이미지는 물론 스핑크스(사자의 몸과 인간의 머리를 가짐)입니다. 인간의 형태는 또한 호루스(인간의 몸과 매의 머리를 가짐)와 같은 신의 이미지에서 동물의 형태와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미지는 완전한 의미에서 예술을 구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인간 존재의 형태로 자유로운 정신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내면의 진정한 성격이 시야에서 숨겨진(그리고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신비로운) 내면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단순한 상징일 뿐입니다.
유대인의 숭고한 시에서 신은 초월적이고 " 자유로운 영적 주체" 로 표현됩니다 .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신을 섬기고 찬양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신과 부정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동양의 범신론"의 숭고한 시에서 신은 다시 초월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유대교와 대조적으로 신과 유한한 사물은 서로에 대해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물은 신에 의해 영과 생명으로 주입됩니다. 따라서 시인의 사물과의 관계는 그의 자유로운 정신이 주변의 자연적인 사물에 반영되는 관계입니다.
3.2.2 고전 예술
헤겔은 예술 이전의 웅장함이나 우아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은 본래의 예술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본래의 예술은 고전 예술, 즉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발견됩니다.
헤겔은 고전 예술이 정신의 자유를 완벽하게 감각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 개념을 충족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고전 예술, 특히 고대 그리스 조각(과 드라마)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신들이 "절대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고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상이 있습니다."
그리스 예술과 아름다움은 그리스 종교와 신화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 종교 자체도 신에게 확실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합니다 .
헤겔이 지적했듯이, (헤로도투스를 따라), 그리스인들에게 신을 준 사람은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였으며, 신에 대한 그리스인의 이해는 주로 조각과 드라마에서(특유하게 신학적 글에서가 아니라) 발전되고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종교는 헤겔이 현상학 에서 "예술 종교"라고 부른 형태를 취했습니다 .게다가 헤겔의 관점에서 그리스 예술은 그리스 종교에 담긴 정신의 자유를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달성했습니다.
그리스 조각과 연극은 탁월한 아름다움을 이루었지만, 그러한 예술은 정신의 가장 깊은 자유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의 신적 자유와 인간적 자유에 대한 개념에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종교는 신이 신체와 감각적 삶과 완전히 하나가 된 자유로운 개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미적 표현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여전히 자연에 잠겨 있는 자유로운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이 자연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물러나 순수한 자기 인식의 내면이 될 때 더 깊은 자유를 얻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그러한 정신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에서 표현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순수한 자기 인식의 정신이자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여 그들도 그러한 순수한 정신과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독교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예술, 즉 낭만주의 예술이 등장했습니다. 헤겔은 "낭만주의"라는 용어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독일 낭만주의 예술(그 중 많은 이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음)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나타난 예술의 전통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3.2.3 낭만주의 예술
낭만주의 예술은 고전 예술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자유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거나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이 드러내는 자유는 예술 자체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과 철학에서 가장 높은 표현과 표현을 찾는 심오한 내적 자유입니다. 따라서 고전 예술과 달리 낭만주의 예술은 예술 너머에 진정한 고향이 있는 정신의 자유를 표현합니다. 고전 예술이 정신과 생명으로 완전히 채워진 인간의 몸에 비유될 수 있다면, 낭만주의 예술은 내면의 정신과 개성을 드러내는 인간의 얼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은 실제로 내면의 정신을 드러내 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닮은 상징적 예술과 다릅니다.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에서 그리스도를 그리스 신이나 영웅의 이상화된 몸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핵심적인 것은 그의 환원 불가능한 인간성과 필멸성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낭만주의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고전적 이상과 결별하고 실제 인간의 연약함, 고통, 고난을 그리스도(그리고 종교적 순교자)의 이미지에 통합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예술은 고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추악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정신적 아름다움은 정신과 육체가 완벽하게 융합된 고전적 아름다움만큼 완벽하게 아름답 지 않다 . 하지만 영적인 아름다움은 고전적인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심오한 정신적 내적 자유 의 산물이며, 그것을 드러내 기 때문에 그리스 신들의 비교적 차가운 조각상보다 훨씬 더 쉽게 우리를 감동시키고 사로잡습니다.
헤겔이 밝힌 낭만주의 예술의 두 번째 근본적 형태는 그가 자유 정신의 세속적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것들은 그리스 비극의 영웅과 여걸이 보여준 윤리적 미덕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자유의 필수적인 제도에 대한 헌신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낭만주의 영웅의 형식적 미덕입니다. 즉, 이것들은 종종 우연한 선택이나 열정에 근거한 자유로운 개인의 대상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헌신을 포함합니다.
3.2.4 예술의 "종말“
헤겔이 묘사한 대로 낭만주의 예술의 발전은 예술의 세속화와 인간화의 증가를 수반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중세와 르네상스(고대 그리스에서처럼)에서 예술은 종교와 긴밀하게 연관되었습니다. 예술의 기능은 대체로 신성을 가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으로 종교는 내면으로 돌아서서 예술의 아이콘과 이미지가 아닌 믿음 속에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그 결과 헤겔은 종교 개혁 이후에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예술 작품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 VPK , 6). 더욱이 예술 자체가 종교와의 긴밀한 유대에서 벗어나 완전히 세속화되도록 허용되었습니다. 헤겔은 "개신교에게만 중요한 것은 삶의 산문에서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고 종교적 연관성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유효하게 만들고 제한 없는 자유 속에서 발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 미학 , 1: 598).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이유로 현대의 예술은 더 이상 우리의 가장 높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이전 문화와 문명에서 주었던 만족감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합니다. 예술은 우리의 종교적 삶 에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신의 본질(그리고 그리스에서처럼 우리의 근본적인 윤리적 의무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냈을 때 우리의 가장 높은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종교 개혁 이후 세계에서 예술은 종교에 대한 예속에서 해방되었습니다(또는 스스로를 해방했습니다). 그 결과, "최고의 소명으로 여겨지는 예술은 우리에게 과거의 일이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 미학 , 1:11).
헤겔은 이러한 작품에서 화가는 단순히 포도, 꽃 또는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우리는 이미 자연에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가는 오히려 사물의 -종종 덧없는- "생명"( Lebendigkeit )을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금속의 광택, 촛불 아래서 빛나는 포도송이, 사라지는 달이나 태양의 모습, 미소, 빠르게 지나가는 감정의 표현"( 미학 , 1: 599). 실제로 화가는 종종 금, 은, 벨벳 또는 모피의 색상의 생동감 있는 놀이로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헤겔은 이러한 작품에서 우리가 단순한 사물의 묘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객관적인 음악, 색상의 울림을 만난다고 지적합니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신적 또는 인간의 자유와 삶에 대한 감각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일상적인 사물이나 인간 활동을 산문적이고 자연스럽게 묘사한 것에 불과한 그림은 진정한 예술에 미치지 못하고 예술을 종식시키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예술가는 사물에 "삶의 충만함"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묘사를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 바꿉니다. 헤겔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자유, "편안함" 및 "만족"에 대한 감각과 그들 자신의 넘치는 주관적 기술을 표현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예술가의 그림은 그리스 예술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부족할 수 있지만 일상적인 현대 생활의 미묘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훌륭하게 보여줍니다.
헤겔은 현대 유머 작품에서 주관성의 훨씬 더 노골적인 표현을 발견합니다 . 그러한 재치 있고 아이러니하며 유머러스한 주관성(지금은 "무정부주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음)은 사물을 가지고 놀거나 "놀고", 자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왜곡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그리고 "저자가 자신과 주제를 모두 희생하는 주관적 표현, 견해, 태도의 교차 운동"에서 나타납니다( 미학 , 1: 601). 헤겔은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탐 샌디 (1759) 와 같은 " 진정한 유머" 작품이 "실질적인 것을 우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사소함은 [따라서] 깊이에 대한 최고의 아이디어를 정확하게 제공합니다". ( 미학 , 1: 602). 대조적으로 다른 작품에서 - 헤겔의 동시대 작가인 장 폴 리히터의 작품과 같이 -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객관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물들의 바로크적 집합"과 "자신의 주관적 상상 속에서만 관련된 주제들의 가장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뒤섞임"일 뿐입니다. (미학 , 1: 601). 그러한 작품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객관적 표현을 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주관성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현실 속에서 확고한 형태를 얻으려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 미학 , 1: 601).
4. 결론
헤겔의 미학은 그의 죽음 이후 하이데거, 아도르노, 가다머와 같은 철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관심의 대부분은 예술의 "종말"에 대한 그의 가정된 이론에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헤겔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예술의 과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의 문제라는 주장에 있습니다. 헤겔에게 아름다움은 단순히 형식적인 조화나 우아함의 문제가 아니라 돌, 색상, 소리 또는 영적 자유와 삶 의 감각적 표현입니다 . 그러한 아름다움은 고전적, 낭만주의적 기간과 다양한 개별 예술에서 미묘하게 다른 형태를 띱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현대성에서도 예술의 목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헤겔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규범적이며, 현대에 진정한 예술로 간주될 수 있는 것에 대한 특정한 제한을 부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보수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헤겔은 예술이 장식적일 수 있고, 도덕적, 정치적 목표를 증진할 수 있으며, 인간 소외의 심층을 탐구하거나 단순히 일상 생활의 산문적 세부 사항을 기록할 수 있으며, 상당한 예술성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려는 아름다움을 주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하는 예술은 우리에게 자유의 미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적 삶의 중심적인 차원을 박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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