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y.mofat.go.kr%2Fupload%2F20131011101325957_TORGO2LH.jpg)
2013년 10월 현재 나는 중국 베이징에 있다. 과거 해외생활의 기억들은 점점 흐릿해져가고 그 엷어진 공간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경험이 채워가고 있지만, 한 가지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새롭다. 약 6년 9개월 전(2007년 1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의 기억이다.
“그대로 비행합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천둥과 번개로 비행기가 요동치기를 10여분, 주(州)정부 고위인사와 나는 비행기를 아부자(나이지리아 수도)로 회항시킬지 아니면 계속 비행할지를 고심한 끝에, 결국 목적지를 향해 그대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반군과 어렵게 협상해 놓은 우리 근로자 인계인수 시점을 지금에 와서 늦출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서였다.
자그마한 20인승 전세기에 승객이라곤 고위인사와 나, 그리고 스튜어디스 한명과 무장 경호원 셋 등 총 6명뿐이었지만, 나이지리아 조종사는 어차피 자신의 생명도 걸려있는 터라, 계속 가라는 지시에 극도로 긴장한 모습을 내비쳤다. 나이지리아에서 얼마나 자주 비행기 사고가 나는 지를 감안하면 지극히 당연한 긴장이었다.
베테랑 조종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속수무책으로 밀려드는 두려움에 목이 바짝 바짝 타들어 왔다. 안 그래도 5살짜리 아들놈이 하필 이 순간에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있어 온통 마음이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당시 하나뿐인 자식인 아들놈과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2년간의 나이지리아 참사관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복귀하기 한 달 전인 2007년 1월 10일 새벽(현지시각) 발생한 ‘나이지리아 반군에 의한 대우건설 근로자 9명 납치 사건’은, 이렇게 1월 12일 저녁(현지시각) 나이지리아 정부가 특별히 제공한 전세기를 통해 반군으로부터 근로자들을 인수하는 절차가 진행되면서, 해결의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치 겨울에 따뜻한 봄을 기다리듯 한 달 후의 귀국을 고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 ‘최후임무’ 수행에 대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몇 시간 어디 근처에 갔다 온다고 했을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나왔다.
비행기 안에서 기도와 함께 지그시 눈을 감자, 2년간의 나이지리아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알고 지냈던 많은 나이지리아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그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이 8살 소년 선데이(Sunday)였다.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우리 아들 걱정을 하다가, 우리 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나이지리아 소년에게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옮겨간 것이었다.
일요일에 태어났다고 해서 선데이다. 과거 영국 식민지여서 그런지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자기네 원래 이름과는 별도로 영어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데이도 그런 경우였다. 8살이라는 나이는 주위에서 그 정도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지, 본인에게 확인해본 것은 아니었다. 영양상태가 별로 안 좋아 8살 정도로 보이는 것이고 실제로는 더 나이가 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선데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5년 가을 어느 날 앙상한 체격의 이 아이가 옷이나 신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나무통 같은 것을 들고 우리 대사관에 우물물을 얻으러 왔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우리 가족(아내와 아들)과 함께 수도 아부자에 ‘1인 공관(한국인 한사람만 근무하는 공관)’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외교활동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사관 신축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공회사와 공사재료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문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회사 고용원 하나가, 자기를 제외한 다른 고용원들이 자꾸 우리 대사관 안에 있는 우물물을 빼돌려 팔고 있다고 하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 고용원은 어차피 물이 빼돌려지고 있는데, 그날 찾아온 선데이 같은 아이에게 왜 물을 나눠 주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있었다. 추측건대 둘 사이가 먼 친척 쯤 되는 모양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동안 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지던 우리 대사관내 우물물에 대한 음성적인 거래가 그날 찾아온 선데이로 인해 들통이 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한 물이고, 말라리아 등 각종 풍토병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깨끗한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 1억 7천만 명에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이었던 나이지리아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사실 깨끗한 물이 원유보다 더 귀했었다.
내가 다가가자 선데이의 검고 맑은 눈망울에 눈물 몇 방울이 고이고 코를 훌쩍거린다. 대사관 건설 현장에 있던 나이지리아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선데이의 아버지는 나이지리아 최대 상업도시인 라고스에 돈 벌러 가서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되었고, 대사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마을에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엄마는 최근 장티푸스에 걸려 거동이 불편하다는 설명도 들었다.
결국 나는 매일 대사관 업무가 끝날 즈음인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 한 시간 동안 2통 정도의 물을 줄 수 있다고 선데이와 손가락을 걸었다. 선데이를 돌려보내면서, 급할 때 먹으라고 해열제와 항생제 몇 알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선데이와 약속한 매일 오후 5시가 가까워 오면 대사관 앞에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기 시작했고, 우물에서 물을 퍼서 이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대사관 경비원들의 주된 임무의 하나가 되었다.
선데이가 처음 찾아온 날 소란을 피웠던 그 경비회사 고용원은, 선데이가 이제 마을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한 기특한 소년가장으로 대접받는다고 했다. 그 후 몇 주쯤 지나서인가 장티푸스에서 다 나은듯한 엄마와 함께 물을 얻으러 온 선데이가 멀리서 나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착륙하자, 나는 기도와 함께 빠져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 며칠간 서울 외교부 본부와 통화하랴, 언론들 상대하랴 거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어디 기대기만 하면 잠이 드는 몸 상태였다. 몇 분 남짓 잠들었지만 몸은 훨씬 개운해졌다.
갑작스런 기상악화에 따라 20인승 전세기는 결국 항로를 바꾸어 당초 착륙예정 공항이 아닌 다른 임시공항에 착륙하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근로자들은 갑자기 접선 공항이 바뀌자 일이 혹시 잘못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다소간 불안했다고 한다.
나에게 우리 근로자들이 인계되고, 전세기는 이들을 싣고 다시 아부자로 돌아와 3일간의 구출작전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협조 하에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내가 주정부에 대한 연결 통로로서 연락해왔던 나이지리아 외교부의 한 간부는 나이지리아 인질 역사상 가장 빠른 석방기록이라는, 듣기에 조금 민망한 칭찬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부터 나를 형제(my brother) 아니면 친구(my friend)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근로자들과 함께 공관에 돌아온 시간이 밤 11시(현지시각)가 넘었다. 피곤함이 일시에 몰려왔다. 다행히 내 아들은 아빠가 말도 없이 사라진 사이 열이 많이 내렸다고 했다. 모든 것이 감사한 순간이었다.
나이지리아 생활 2년은 나에게 영원히 떨칠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각 중국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내 머릿속의 떨쳐지지 않는 기억으로 아프리카를 느낀다. 그래서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는 나에게 늘 현재와 과거의 복합으로 다가온다.
감내하기 힘든 고난 속에 살고 있지만 누구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8살 선데이의 눈물고인 눈, 말라리아에 걸려 며칠 동안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퀭하던 내 아들놈의 눈, 그리고 20인승 비행기 안에서 나 스스로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과 같은 장면들은 흉터가 크게 남아버린 상처와 같은 기억들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가듯, 주기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럴 때면 이유는 모르겠으나 쓰라림과 안도감이 가슴속에서 범벅이 되어 올라온다.
아! 이제는 셋이 된 우리 아이들 데리고 나이지리아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다면 14살 또는 15살 청년이 되어 있을 선데이를 꼭 찾아보고 싶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y.mofat.go.kr%2Fupload%2F20131011101310990_DVXKSJN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