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로부터 많이 변질되어 있는 듯 싶다.
사랑은 라디오에서 주의성 없이 흘러나오는 유행가들 속에서, 심지어 항간에 재미로 읽히는 통속적인 소설들 속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주제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 근원으로부터 유래되어 오는 사랑과는 사뭇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사랑의 개념에 대해서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진정한 사랑은 영의 눈을 뜬 사람만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힘겹고 벅찬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기를 두려워하여 종교라는 이름아래 사랑으로부터 도피를 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종교를 가지면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위안 속에 살 수 있고, 또 종교라는 글귀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자신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사랑을 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은 에고(자아)를 버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를 버리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까봐, 그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곧 근원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안에 꽃피어나려면 에고(자아)를 치워버려야 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욕망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자기가 준 만큼 받고 싶은, 자기가 쏟은 노력만큼 기대하는, 자신이 베푼 만큼 소유하려는 욕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런 동기도 없이, 심지어 감사를 요구하는 것조차 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며, 자기가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 그냥 행복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자기의 사랑을 받아준 상대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사랑, 다시 준만큼 되돌려 받으려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감추어진 아름답지 못한 욕망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짧은 이야기책 속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한 소년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준, 그래서 아주 행복했던 나무에 대하여 그리고 있다.
나무는 늘 자기 그늘 밑에 와서 노는 소년을 사랑했다. 그리고 소년도 그 나무를 사랑했다. 나무는 소년과 함께 숨바꼭질도 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소년을 재워주기도 하고, 또 자기의 나뭇잎과 사과 열매를 주며 즐거워하였다. 소년이 점점 자라나 나이를 먹게 되자 나무를 찾아오는 일이 뜸하게 되어 나무는 외로웠다. 어느날 찾아온 소년은 함께 놀자는 나무에게 자기는 나무하고 노는 것보다 더 신나게 놀고 싶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니 나무에게 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무는 자기의 사과를 소년에게 다 주어 가져가게 했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긴 외로움끝에 다시 찾아온 소년을 보고 기뻐하는 나무에게 소년은 결혼을 하면 살 집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래서 나무는 자기의 나무가지들을 다 베어가 집을 짓도록 했다.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소년을 보고싶은 외로움을 참아낸 나무에게 다시 찾아 온 소년은, 타고 어디론가 떠날 배가 필요하다고 했고, 나무는 자기의 줄기(몸체)까지 다 잘라 배를 만들게 해주었다. 소년이 배를 타고 멀리 떠나버리자, 나무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행복했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다. 노인이 되고 지친 소년이 찾아오자 나무는 너무 기뻤다. 다 주고 잘라내어 사과도, 그네를 메어줄 가지도, 타고 놀 줄기(몸체)도 없어진 밑둥만 남은 늙은 나무였지만 그러나 아직도 사랑하는 소년을 위해 무엇인가 더 주고 싶어하는 나무는, “이제 내게 필요한 건 별로 없어.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소년에게 자신의 밑둥을 내주어 쉬게 해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정말 감동적이고 귀여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 짧은 이야기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었음을 행복해하는 나무에게서 진정한 사랑, 정말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형편없는 죄인들에게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퍼부어주시는 근원적인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 외에 이 세상 어디에서 이런 사랑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부모의 사랑도 사실 따지고 보면 많은 욕망과 기대로 점철된 사랑인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너무 크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유한한 인간이 미쳐 깨달을 수 없는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인간들은 그 사랑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온통 수놓았던 그 사랑을 명상해보라!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옮기신 고난의 발자욱, 말구유에서 갈바리까지 걸어가신 피묻은 발자욱 속에 점철된 사랑을...
배반할 가룟 유다를 아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간원하는 사랑으로 발을 씻기시던 예수님, 자신을 저주하며 욕하는 베드로를 동정어린 눈으로 온유하게 바라보시던 예수님, 치욕적인 죄를 거듭지며 방탕한 마리아를 용서하며 격려하시던 예수님... 40년 동안 만나를 먹여 보호하고 키워주었건만,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메시야가 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건만, 자신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배은망덕한 유대나라를 차마 버리시지 못하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우시던 예수님, 자신의 손에 못을 박는 로마 군인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손을 펼쳐주시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도 없이, “만일 내가 죽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죄로 죽어가는 이 인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 무서운 고통과 절망을 감수한 채 심장이 터져 숨을 거두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바라지 않는 사랑은 비범한 사랑
평범한 사랑은 일종의 구걸이다. 그런 사랑은 내게 조금만 더 달라고 조른다. 그러나 비범한 사랑은 나에게서 더
많이 가져가라고 말한다. 사랑은 베풀 때 진실이다. 하지만 받으려고 할 때는 거짓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줄 때 상대방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 하는지, 또는 반응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감사하다는 말조차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로 하여금 좋은 사랑을 나누어 가질 기회를 허용한 상대방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사랑의 에너지를 함께 나누어 가진 상대방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주려고 다가갔을 때 상대방이 거부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진정한 사랑,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다. 주고 베풀어서 행복한 사랑이다. 채워주고 나누어서 기쁜 사랑이다. 그것은 특별하고 비범한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러한 사랑을 하라는 분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하늘에 근원을 둔 사랑이 우리 마음에 흘러넘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라! 그리고 느껴보라! 오늘도 그러한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무한한 사랑의 빛줄기가 쏟아지고 있음을...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저는 자주 다음과 같은 염려들을 많이 듣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의 성공과 출세의 방법대로 운영되어 가고 있다고...
우리는 실재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영광을 더 많이 바라고 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다시 돌아 보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을 때에 과연 무엇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는지를 다시 재삼 확인하고 지나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통속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인양 착각하는 경향이 생겨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방향으로 가면서도 하늘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났습니다. 자기의 뜻과 자기의 마음대로 살면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시 확인해 보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도 시대의 선조들은 고사하고라도 최근 1950년대, 60년대에 살던 한 신앙의 선조의 가르침과 믿음을 살펴 보는 내용으로 이번 호를 꾸며 보았습니다. 그 분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현대 교회가 얼마나 정도에서부터 멀리 떠나와 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번 호가 독자들께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 가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 드립니다.
3.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요한복음 17:19)
한 어머니가 임시운전 면허증을 발급 받아 운전을 몹시 해보고 싶어 하는 십대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자꾸 한번 운전을 해 보겠다고 어머니를 졸랐으므로, 그 성가심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그녀는 자기 아들에게 운전대를 넘겨주면서, “너 내가 운전하는 것을 이 때까지 많이 지켜봐 왔으니 어떤식으로 운전해야 하는지 알지?” 라고 자기 아들에게 다짐을 받듯 물었다. “예, 알고 말구요, 엄마!” 그 소년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차를 몰아 길로 들어선 후,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있는 자기 아들을 지켜보면서 이 어머니는 아주 뜻밖이란 듯이 흐뭇해 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빨간 신호등에 정지했을 때, 그녀는 자기 아들의 운전 솜씨를 칭찬해 주었다. 그 다음이었다. 이제 그들이 탄 자동차가 아주 번잡한 교차로를 향해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 교차로의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곧 바뀌어 질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전에 아들이 갑자기 차를 가속해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짐과 동시에 그 교차로를 통과해 버렸다. 이러한 이 소년의 운전 행위는 맞은 편 길에 서있던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총과 더불어 불만의 경적들 및 손짓들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저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워!” 어머니는 너무 놀란 나머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자기 아들에게 명했다. 차가
주차된 후,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음성으로, “네가 엄마가 운전하는 것을 봐서 어떻게 운전해야 할지 안다고 말했지 않았니” 라고 꾸짖듯이
말했다.
“물론이죠, 엄마, 난 엄마가 운전하는 걸 잘 지켜 봤어요!”
“그렇지 않은것 같다. 신호등 색깔에 대해 다시 한번 복습해
보자. 빨간색 신호등은 무엇을 뜻하니?”
“뭐긴 뭐예요, 엄마. 정지를 뜻하죠. 그건 너무 바보같은 질문 아니에요?”
“잠자코
대답이나 해. 난 좀 전에 죽는줄 알았어. 너 나와 같이 앞으로 차를 계속 운전할려면 내 묻는 것에 대답해. 알았어?”
“예...
알았어요.”
“파란색 신호등은 뭘 뜻해?”
“가라는 신호예요.”
“그럼 노란색으로 신호등이 바뀌면 어떻게 해야
되지?” 어머니는 의미있는 눈으로 자기 아들의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빨간색으로 바뀌기 전에 지나갈 수 있도록 빨리 차를
몰아야죠!”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이처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 경험이 당신에게는 없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이 가진 것 이상을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자기 평가에 있어서 당신은 철저하게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당신의 현 상태에 대해
낙담하거나 절망감을 주고자 함이 아니고, 당신이 지금까지 시도해 왔던 방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 해결책을 위해 당신 자신을 준비 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당신이 영위해온 삶과 신앙 경험들을 당신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원치 않는다면, 당신은 이제 일어날 필요가 있는 변화들을
검토하여 그 혁신적인 변화가 당신에게서 먼저 시작되도록 해야 될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나처럼 어려움을 겪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처했던 곤경에 대해 참으로 많이 하나님께 불평을 하곤 했었다. “주여, 이 두 아이들을 순종하도록 하는데 실패만 연거퍼 합니다.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난제여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라고 낙담하며 포기했을 때, 절망의 구덩이는 이런 나를 쌍수로 환영하는 듯 했고, 그러면 난 잠시 그런 상태에서 신세 타령을 하며 슬픔에 빠져있곤 하였다. 그런 후 제 정신이 좀 들어와 이런 처량한 상태에 싫증이 나면 또 하나님께, “주님, 이런 구덩이에 빠져있는 것이 싫습니다. 좀 건져 주세요!” 라며 눈물로 소리치곤 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쌜리야, 너 정말 거기서 빠져 나오고 싶니?” 라는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의 귀에
들려왔다.
“무슨 말이세요? 전 정말 이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길 원한단 말이예요.”
“그래? 어제도 쌜리 너는 나에게 네가
빠져있던 구덩이에서 꺼내 달라고 요청했었지. 그런데 그 때 내가 손을 내밀었지만, 넌 내 손을 잡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어. 나는 그런
상황으로부터 정말 널 구해줄 수 있단다. 네 요청을 내가 혹시나 잘못 알아들었니?”
나는 그 때의 사건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 날은 내
마음이 절망감으로 가득차서 낙망하여 기도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내가 빠져있던 슬픈 감정의 구덩이로부터 탈출해 보려고 혼자 발버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그 구덩이의 벽은 너무나 미끄러웠고, 너무 깊었으며, 내 힘은 쇠잔하여 그것들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하였다. 나는 혼자의 힘으로 햇빛이
비치는 그 구덩이 끝까지 거의 올라갔다간 곧 발을 헛디디어 힘을 잃고 바닥까지 떨어져 버리곤 했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또
그러한 노력이 얼마간은 효력을 발휘하는것 같았지만, 결국엔 다시 나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져 그 깜깜한 자기
연민의 구덩이로 다시 빠져버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절망에 빠진 나는 예수님께 구해달라고 소리치며 울었고, 그 때 내 마음의 눈에 하나님의 손이 내게로 뻗쳐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손을 무척 잡고 싶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를 하나님의 그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같은 존재를 구해줄 수 있다고 감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내가 그 손을 잡을 자격도 없다고 자책하며 얼굴을 돌려 외면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 나의 추한 생각과 느낌에 시달리며 계속 그 구덩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상을 하면서, “왜 내가 그 때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 마음에 떠 올랐으며, “그 손을 잡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지” 라는 대답도 스스로 하였다.
이런 나를 보시고 주님께서는 내 생각을 계속 지도하시며 다시금 물었다. “네 느낌을 따르려니, 아니면 내 말을
믿으려니?”
“그야 물론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죠! 하지만 제가 가진 느낌들이 저의 진짜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쌜리야,
느낌들에 의존하면 안된다. 사단은 종종 그의 거짓스러운 생각들을 네 마음에 주입하여 놓고 네 감정을 부추기곤 한단다. 그렇게 그릇된 생각과
감정을 뒤섞어 놓아, 그것들이 주체할 수 없는 영향으로 네게 임해 사단의 뜻대로 행동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거란다. 이런 방법으로 사단은 너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끌어 가곤 하는데, 이 때까지 네가 이런 올무에 빠졌던 거야. 내 말은 믿을 수 있단다. 네 느낌 대신 내 말을 택해 보지
않으련?”
갑자기 내 속에 한가닥 희망이 솟아오름을 느끼게 되었다! “내 마음 속에 생기는 느낌들을 들을 필요가 없단 말이지? 이게 사실이라면, 날 쇠잔시키는 잡념들과 감정들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말이야. 내가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고, 그러면 그 분은 능하셔서 이러한 나쁜 잡념들과 절망적인 느낌의 구렁텅이로부터 날 구해 주실 수 있어!” 이런 생각이 굳어지면서, 난 하나님의 손을 붙잡았고, 그러자 그 분은 그 깜깜하고 끔직한 구덩이로 부터 나를 끌어내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로 내 발을 안착시켜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자랄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깨끗이 씻으실 수 없이 큰 악이나 죄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과 용서하심이 있고 성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그분의 품안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없는 정도의 죄악은
없다. 이 사실을 깨닫았을 때, 나에겐 갑자기 소망이 있게 되었다.
“내 느낌들에 의존한 필요가 없어! 나를 맥빠지게 만드는 생각과
감정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에 그것들을 따라가면 않돼. 예수님을 믿자! 그 분은 내가 이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아!” 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내 마음속을 덮고 있던 지긋지긋한 검은 구름들이 걷히며 한가닥의 햇빛이 스며듬을
보게 되었고, 나를 휘감고 있던 무겁고 짙은 어둠이 떠나감을 또한 느끼게 되었다. 나를 억누르고 있던 사단의 세력이 그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시 나의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들이 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고, 그 때 난 다시 “주님, 어찌하면
되나요? 제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아요!” 라고 외치며 매달렸다.
“쌜리야, 네 기분에 신경쓰지 말아라. 네 생각을 바로잡도록 한번
노력해 보자. 지금까지 네가 올바르게 자녀를 양육해온 경우들을 한번 생각해 보렴. 네 두 아이들을 성실하게 지도하여 갖게한 훌륭한 습관들을 한번
생각해 보려므나.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오면서 그 절망감에서 벗어 나오기 바란다.”
이렇게 내 생각을 바꾸기란 무척 힘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못나고 실패한 부모인가 하는 생각을 안주시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평생토록 그렇게 길러온 습관이었으니까. 그런 똑같은 부정적인 형태의 생각들은 늘 계속해서 올라와 자꾸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 때마다 그 곳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랬기에,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과거의 생각들과는 다른 방법, 곧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가지고자 나의 전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늘날 부모들에게 부과된 숙제 중에 가장 큰 것은, 우리의 자녀들의 잘못된 습관과 사고와 감정과 반응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그들을 올바른 습관과 생각, 감정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이 임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바라는 모습들이 먼저 우리 자신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부모된 우리를 먼저 거룩하게
하시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를 잘못된 습관과 사고방식에서 건져주셔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며, 그렇게 하실 것이고, 그들의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과 협력하며 하나님께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모든
부모들에게 거룩한 지혜를 주실 것이다.
나의 아들 엔드류가 6살이었을 때, 어느 날은 너무 말을 안들어서 그를 몇대 때리고 훈계를
한 뒤에 울음을 그치라고 그의 방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15분이 지나도 그의 울음은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집 주위를 한바퀴 돌고 장작을 날라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아무 것도 그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없었다. 내 아들은 계속 우는
것이었다.
“엔드류, 왜 그래? 왜 계속 울지? 너는 네 할 일을 다 잘했고, 이제는 엄마가 더 이상 야단칠 일도
없는데...” “나...는...엉,엉...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요!...” ”오, 주님, 내 아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합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않으니...” 내가 마음 속으로 기도하자,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쌜리, 내가 너를 어떻게 절망과 낙담에서
건져내었지?”)
“맞아, 사단이 그에게 거짓 생각을 불어넣고 있는것이 틀림이 없어! 쟤가 계속 우는 것을 보니까 그 생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 엔드류가 무슨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찾아내는것이 필요한 것 같아!”
갑자기 이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엔드류,
네 마음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엄마, 내가 얼마나 나쁜 아이이고, 바보같은 애인지를... 흑흑,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착한 애가 되고 싶은데, 그게 안되요...”
(“쌜리, 절망의 구덩이와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나올 수 있는지를
아이에게 설명해 주렴. 내가 너와 함께 하마!”) 주님께서 다시 나를 격려해 주셨다.
“엔드류, 그 생각은 사단에게서 온 거짓말이야. 너는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단다! 그것은 사단이 너를 실망시켜서 너를 절망의 구덩이로 던져 넣으려는 거야. 엔드류, 지금 하나님은 너를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시려고 손을 뻗치고 계시단다. 너는 그냥 하나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돼.”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크게 웃었고, 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그 뜻은 나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기도하렴, 엔드류. 그 안좋은 생각을 그분께 드려라. 그것이 그분의 손을 잡는
거야!”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을 꼭 감고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나의 좋지 않은 생각을 가져 가세요. 그리고 더 좋은 생각을 저에게 주세요. 그리고 울지 않게 해주시고
착한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그리고는 아이는 우리가 늘 하라고 가르친 대로 가만히 앉아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래,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니? 네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지?” “내 생각에 하나님께서 나가서 꽃을 꺾으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얼마가 지난 후, 엔드류는 눈물 대신 미소를 짓는 얼굴로 라일락 꽃을 한다발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엔드류,
어떻게 된거니?”기뻐서 묻는 내게, “엄마, 하나님께 내 울음을 가져가시도록 기도하고, 엄마가 시킨 대로 하나님의 손을 잡았지요! 하나님이 제가
좋아하는 꽃을 즐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니까 눈물도 없어지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자, 엄마, 여기 꽃...”
자신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의 감정으로까지 진행된다. 나의 경험을 아들과 나누었을 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엔드류에게 거짓된 생각에
귀를 기울이려는 경향이 생기곤 했으나, 그 때마다 우리는 같은 방법을 사용했고, 아이는 자신의 옳지 않은 생각을 예수님께 드리는 일을 점점 더
잘 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일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무 자주 나의 모본처럼 내 아들이 절망의 구덩이로 빠지는 것을 보았고, 이것은 나로 내가
밟았던 경험들을 다시 상기하게 했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게 하셨는가 하는 나의 체험을 토대로 나의 아들을
잘 가르칠 수가 있었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우리 모든 부모들이 하늘의 능력과 지성적으로 협력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지에 대해 배웠다.
부모들은 누구나 평소에 자기가 무엇을 하는 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일어날 때는 부모 자신이 자기의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았는 지에 대한 경험이 없을 때이다. 만일 부모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떻게 역사하셨는 지에 대한 경험이 없이 아이들을 교육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만 문자적으로 책에 쓰여진 것만을 가르치는 죽은 교육이 된다. 만일 부모된 우리들이 변화되기 위하여 하나님께 협력하고 굴복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되도록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많은 부모들이 교육에 실패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하고 말하고, 옳은 일을 행하라고 말하지만,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체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이론만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잘못된 감정과 생각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면, 우리는 그 체험을 곧바로 아이에게
나눌 수 있다.
짜증을 잘 내던 부모가 친절한 부모로 변하여 아이를 인내로 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아이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시키는 것은 없다. 우리가 체험하고 아는 것을 우리의 자녀들과 나누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완전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체험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이 일이 아주 작은 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서 실패했던
부분을 고치기 시작하는 첫 계단인 것이다. 자녀를 잘 양육하려면 부모가 먼저 변해야 한다. 변화는 항상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4.색으로 영양을 먹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먹는 과일과 채소와 식품들에 다양한 영양소들을 넣어 놓으셨다. 뿐만
아니라, 미의 애호가이신 하나님께서는 보기에도 아름답게 모든 식물들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들을 넣어 주셨다.
신선하고 빛깔 고운 채소와 과일을 골고루 섭취하다 보면 몸도 건강해지고 질병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섭취하고 있는 식물들에는 어떤 영양과 효능이 있는지 알아보자.
1. 비타민의 보고 오렌지 & 옐로우(Orange & Yellow)
과일과 채소의 노란색, 황적색은 “케로티노이드(Carotenoids)” 색소로 체내에 들어가 비타민 A로 전환되어 산화, 노화방지,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당근, 고구마 등에 들어있는 “베타 케로틴(Beta-carotene)”은 유해 산소의 해로운 작용을 막아 암, 동맥경화 등 성인병 예방과 노화억제 등에 효과적이다.
<귤과 오렌지>
귤과 오렌지의 특유한 향기는 귤속에 들어 있는 당분, 유기산, 아미노산,
무기질, 비타민 등의 여러 성분이 복잡하게 얽혀서 생기는 것이다. 귤과 오렌지가 피로회복과 피부미용에 좋은 이유는 비타민A와 C가 많기
때문이고, 이것들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당분과 구연산 때문이다.
* 비타민 C ; 잇몸이나 혈관을 튼튼하게 해주고 상처를 빨리 낫게하며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방지할 뿐 아니라
피로를 회복시켜 준다. 또 피부와 점막을 튼튼히 해주고 추위에 견딜수 있게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여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막아주며 감기 예방에도
뚜렷한 효과가 있다. 비타민 C는 발암 물질 형성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며, 피로 회복, 깨끗하고 탄력있는 피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렌지쥬스를 많이 마시면 대장암에 덜 걸린다는 동물실험 결과가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암연구협회 연례학회에 발표되었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모리스 베닌크 박사팀은 쥐들을 두 무리로 나눠 대장암 세포를 주입한 뒤 28주 동안 한쪽엔 증류수, 한쪽엔 오렌지쥬스를 주로 먹인
결과 오렌지쥬스를 먹은 쥐의 암덩이가 다른 쪽에 비해 22% 작았다고 밝혔다.
* 구연산 ; 체내에서 에너지 대사를 활발하게 해주고
내장운동을 부드럽게 하며 피로회복이나 스태미나 증진에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 비타민 P ; 특히 귤속에는 헤스피리딘이라는
비타민 P가 들어 있는데, 비타민 P는 모세혈관의 투과성을 억제하고 취약성을 회복시키기 때문에 동맥경화와 고혈압 예방에 효과가 있고 폐출혈,
동상, 치질을 치료하는 약리작용을 가지고 있다.
<호박>
늙은 호박은 산후 회복에 효과적이며, 동짓날에 호박을 먹으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이는 호박 속에 많은 비타민 A와 비타민 C, 비타민 B2의 효과 때문이다. 호박에는 황색을 나타내는 천연 색소인
“케로티노이드(Carotenoids)”계 화합물이 다량 존재한다. 케로티노이드계 색소에는 “케로틴”, “리코펜”, “루틴”등의 성분이
존재하며, 특히 비타민 A의 효력을 나타내는 “베타 케로틴(Beta-carotene)”과 “잔토필(Xanthophyll)”을 함유하고 있다.
매우 안전한 물질로 알려진 베타 케로틴은 두 개의 비타민 A 분자가 결합한 구조로, 분해되면 비타민 A가 된다. 따라서 혈액 속에서 들어가
필요로 할 때마다 베타 케로틴이 필요한 만큼의 비타민 A로 변환된다. 베타 케로틴은 과잉 섭취해도 무해하다.
<고구마>
고구마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칼륨 성분이 특히 많다. 그런데 칼륨 성분을 많이 먹으면
나트륨과 경쟁적으로 작용하여 몸 밖으로 나트륨이 많이 빠져 나가게 된다. 노란색이 진한 고구마에는 비타민 A의 전구체인 케로틴이 많이 들어있다.
고구마에는 섬유질 뿐 아니라 수지(樹脂, 식물에서 나오는 자연 유출물이 교화된 것) 성분이 들어 있어 변의 배설을 촉진시킨다. 생고구마를 잘라
보면 하얀 진액이 나오는데 이것이 수지배당체인 “얄라핀”성분이다. 이 성분이 있어 고구마를 먹으면 피부가 좋아지는 것이다. 고구마가 암, 특히
폐암을 예방한다는 보고가 있다. 1986년 미국 뉴저지 주의 남성을 대상으로 한 어느 연구에서 식사와 폐암의 관계가 추적되었다. 폐암에 걸린
남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을 비교해서 어떤 식품을 어떤 빈도로 먹는가를 조사했다. 그 결과 폐암을 가장 잘 예방하는 식품으로 뽑힌 것은 진한
적황색의 야채 즉 고구마, 호박, 당근이었다.
<당근>
우리의 눈은 일생에 세 번 정도 위기를 맞게 되는데 대체로 세 살,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인 열 살 전후라고 한다. 이 시기에 시력 보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눈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식품을 먹어야 한다. 우리 몸에서 시력과
가장 관계가 깊은 장기는 간장이고, 간장에 영양을 공급해 시력을 보호하는 영양소는 비타민 A이다. 당근에는 비타민 A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비타민 A는 눈 망막의 간상 세포에 존재하는 “시홍”이라는 자색의 감광 물질의 구성 성분이 된다. 시홍은 어두침침한 곳에서의 시각과 관계있는
물질로 비타민 A 섭취량이 부족하면 시홍의 생성량이 점차 감소되어 야맹증이 된다. 또 상피세포나 점막이 변성되어 각화가 진행된다.
2. 항산화 기능이 탁월한 그린(Green)
녹색 채소에 들어있는 푸른색 색소인 엽록소는 상처를 치료하고 세포를 부활시키며 항알레르기, 혈액 정화작용을 한다. “클로로필(Chlorophyll)”은 녹색을 대표하는 색소로 암의 예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콜레스테롤과 혈압을 낮추어 고혈압 및 동맥경화 등 성인병 예방에 큰 효과가 있다. 일본 후쿠오카현 보건환경연구소의 모리타박사는 녹차의 식이섬유소와 엽록소가 환경 호르몬 중 가장 치명적인 다이옥신의 흡수를 억제하고 배설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엽록소는 유해활성 산소를 제거하는 항산화 기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노화를 방지한다.
<아스파라거스>
죽순이 동양에서 먹는 순 채소라면, 아스파라거스는 서양에서 주로 먹는 순 채소로,
고대부터 그 뿌리와 순이 이뇨제와 진정제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200년경부터 그리스에서 이용했는데 당시에는 약용으로만 이용했다고 한다. “귀족의
채소”라는 별칭으로 불린 아스파라거스는 19세기에 프랑스 왕실에서는 아스파라거스만으로 식사 코스를 준비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왕실과
귀족층의 사랑을 받았던 채소이다. 아스라파거스에 들어있는 “아스파라긴”은 콩팥의 기능을 돕고 요산의 배출을 촉진시키며 신장이나 요산 축적에 의한
신경통, 류마티즘, 통풍 등에 좋다.
<쑥>
쑥에는 무기질과 비타민이 많다. 특히 비타민 A가 많아 쑥나물 한 접시(약 80g)만
먹어도 하루에 필요한 양을 공급할 수 있다. 우리 몸 속에 비타민 A가 부족하게 되면 체내에 공존하고 있는 세균에 대한 저항이 약해져 쉽게
질병에 감염되므로 비타민 A의 섭취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칼슘과 철분도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쌀밥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의 식생활로 인한 체질의
산성화를 방지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쑥을 섞어 빚은 떡을 자주 먹은 것은 고운 빛깔과 향미 뿐 아니라 산성 체질화를 중화하기
위한 조상의 지혜였다.
<시금치>
시금치는 아프가니스탄 주변이 원산지로 이란, 페르시아 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재배됐다.
「식료본초」에는 “시금치”는 오장에 이롭고 주독을 푼다”고 되어 있으며, 「본초강목」에도 “시금치는 혈액을 통하게 하고 독이 막힌 것을 열어
준다”고 되어 있다. 시금치에는 비타민이 많은데 줄기보다는 잎사귀에 많다. 시금치 100g당 카로틴은 2,500-6,700㎍으로 녹색이 짙을수록
영양이 높다. 이렇게 케로티노이드가 많이 함유된 진한 녹색 채소를 많이 먹는 사람은 모든 종류의 암 발병률이 낮게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시금치에 함유된 무기질은 칼슘 36-42㎎, 철 2.5-4.2㎎으로 이는 어린이와 성인 남자의 하루 철 필요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상추>
상추는 품종도 많고, 형태도 여러가지이므로 성분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체내에서 나트륨을
배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칼륨이 많이 들어 있고, 프로비타민 A와 비타민 E도 비교적 많다.
<깻잎>
영양적인 면에서 깻잎은 다른 야채보다 우수하다. 칼슘이 많기로 유명한 시금치와 비교해
보았을 때 깻잎에는 시금치의 다섯배나되는 칼슘이 들어있고 철분도 시금치만큼 많이 들어있다. 또 비타민 A와 C가 매우 풍부하게 들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깻잎에는 비타민, 인, 칼슘 등이 풍부해 노화 방지에 효과적이다
<부추>
옛부터 부추를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고 감기에 잘 안 걸릴 뿐만 아니라 설사나 복통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또 평상시에 계속 먹으면 중풍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부추는 정장작용을 하며 철분이 많아 혈액을 정상화하고 세포에
활력을 준다. 영양가도 높고 케로틴, 비타민 B1, B2, C등도 풍부하다. 부추를 꾸준히 먹으면 위장기능이 좋아지고 피부도 고와지는 등 온몸의
대사를 활발하게 하며 스태미나 증진에도 좋다.
3. 콜레스테롤 낮추고 심장병 예방하는 화이트(White)
백색, 담황색 색소는 플라보노이드 계열의 “안토크산틴(Anthoxanthins)” 색소이다. 안토크산틴은 구조에 따라 “플라바논”, “플라보놀”, “이소플라본” 등이 있다.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이소플라본은 중년 여성이 섭취할 때 안면 홍조 등 폐경이 시작될 때의 초기 증상을 완화한다. 또한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심장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무>
옛부터 무를 많이 먹으면 속병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에 각종 소화 효소가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기 때문. 전분을 분해하는” 다이아스타제(Diastase)”가 많고, 단백질 분해 효소인 “프로테아제(Protease)”,
지방 분해 효소인 “리파제(Lipase)”도 소량 함유되어 있다. 무에는 비타민 C가 10~30㎎이나 들어 있는데 윗부분에 더 많다. 특히 무
껍질에는 속보다 비타민 C가 2.5배나 더 들어 있으므로 깨끗이 씻어서 껍질째 먹는 것이 좋다.
<콩나물>
싱겁게 키가 큰 사람을 “콩나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말 콩나물을 먹으면 키가 클까?
콩나물을 먹어 키가 크는 것은 아니나 콩나물에 함유된 여러 영양소가 성장을 돕는 것은 사실이다. 콩 자체에는 들어 있지 않은 비타민 C는 콩이
발아해 콩나물이 되면 생성되는데, 콩나물 무침 한 접시(약 200g)에는 성인 1일 필요량 절반 가량의 비타민 C가 들어 있다. 콩나물에는
아미노산인 아스파라긴산이 들어 있다.
<양배추>
양배추는 브로콜리와 같은 십자형 꽃잎을 가진 평지과 식물로, 브로콜리 못지 않은
항암효과가 있다. 양배추에 들어있는 “설포라판”, “인돌”, “디티올리온”이라는 화합물은 암을 유발하는 화학 물질에 노출되었을 때 발암물질을
비롯한 독소를 파괴하는 천연물질을 효과적으로 활동하게 하여 암 발병율을 낮춘다. 또 양배추의 잎에는 항궤양 성분인 비타민 U가 많아 위염,
위궤양 환자들의 치료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점막의 강화와 재생을 돕는 비타민 U와 비타민 K를 함유하고 있어 자연 치유력을 향상시키는
장점도 있다. 또 양배추는 혈액을 맑게 하고 몸의 저항력을 높이며, 주근깨, 여드름 기타 피부병 등에도 좋다. 양배추를 삶으면 이같은 항암효과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따라서 양배추를 먹을 때는 생 것으로 먹는 것이 더 좋다.
<양파>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감기에 걸렸을 때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구운 양파를
하나 먹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양파는 서양에서 여러 세기 동안 감기약으로 이용되어 왔다. 양파에는 “쿼세틴(Quercetin)”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 물질은 비타민 C의 효능을 높이고, 모세혈관의 증강작용을 하므로 고혈압을 예방할 수 있다.
<감자>
“감자를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식물성 식품이면서 필수 아미노산인
“라이신(L-lysine)”이 동물성 식품과 맞먹을 정도로 들어 있기 때문. 감자에는 항암, 항바이러스 성분이 들어 있는데 특히 날감자에는
바이러스와 발암성 물질을 중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프로테아제”라는 억제물질이 다량 들어있다. 비타민 C는 품종이나 저장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00g중 15~40mg 정도 들어 있다. 채소와 달리 감자에 들어 있는 비타민 C는 열에 의한 손실율이 낮다. 감자를 가열하면 표면에서
전분이 풀과 같은 상태가 되어 세포중의 비타민 C가 녹아 나오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배추>
십자화과에 속하는 2년생 초본식물로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저온성 채소이다. 배추에는
회분, 칼슘, 철, 칼륨, 비타민이 들어 있어서 비타민과 무기질 공급원으로 우수하다. 배추의 크기는 중간 크기가 적당하며, 배추속은 연한
백색이고 겉은 연녹색인 것이 맛있다. 그리고 들어보았을 때 속이 꽉 차 묵직하고 속잎의 맛이 고소한 것이 좋다.
* 하나님께서는 채소와 과일만 먹어도 될 정도로 많은 영양소들을 식물에 넣어 주셨다. 우리의 식단을 다시 살펴서 이 모든 영양소들을 잘 섭취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자.
5.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1부-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1
요즈음 기독교계는 세상과 적당히 보조를 맞추어 살도록 부추기는 평안한 복음들로 가득차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평안한 복음을 믿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모든 것과 호흡이 잘 맞아 돌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은 세상이나 주위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충돌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살며, 날마다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열렬한 신앙과 스스로를 살피는 경건함 속에서 살아 갈 것이다.
A.W.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같은 목사님이 계셨던 것은 기독교계에 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다. 토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깊이 있는 말씀의 이해와 박식한 신학적 이해를 눈물의 기도로 반죽하여 개혁의 메세지로 전할 때에 많은 크리스챤들의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써만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다. 그는 평생 교회와 크리스챤의 삶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권의 명저들을 저술했다. 그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라는 복음주의 교단의 목사였다.
그는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교회의 자본화”와, 그리스도인의 가야 할 길인 성화대신 평안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오염된 신앙, 명예는 추구하지만 십자가는 부인하는 가짜 신앙,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을 기획하지만 성령이 메마른 교회, 신자 수의 증가를 위한 비지네스적인 영업법을 도입한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 체험은 있지만 신학이 없는 신앙과 죽은 정통만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감격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한 현 시대의 신앙의 허상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정직하게 파헤친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보자. - 편집실 -
1.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 철학 및 그 밖의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것들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역설적이며, 기독교의 신앙 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역설이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신앙이 필요 없다. 신앙은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다.
십자가는 “자연인”,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완전히 대립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철학은 자연인의 사고와
정면 충돌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언했다(고전 1:18 참조).
그리스도인의 역설, 하나
그리스도인의 역설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믿지만 전보다 더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 땅에서 활동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앉아 있다.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듭난 후에는 더 이상 이 땅이 고향이 아님을 믿는다. 공중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땅에 내려오면 서툴고 보기 흉한
쏙독새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자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살아가는 방법들과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들 중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안전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며,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어버린다. 만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 낮아지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낮아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면 이미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강할 때가 가장 약하다.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부유해지면 그 능력이 사라진다.
그리스도인의 역설, 둘
남에게 가장 많이 주면 자신이 가장 많이 소유하게 되고, 가장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가장 적은 것이 남는다. 가장 낮아졌다고 느낄 때 가장 높이 있으며, 자신의 죄를 가장 많이 깨달을 때 가장 죄가 적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 가장 지혜로우며, 자신이 가장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믿을 때 가장 무지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이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장 멀리 가는 것이다.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으며, 슬픔 중에도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지만, 장차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기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갖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망했다고 느끼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죄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지만,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알고는 괴로워한다.
그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을 가장 사랑한다. 자신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분과 친구처럼 대화한다. 그는 자신이 본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치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에게는 가장 보배로운 존재인것을 감사한다.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존재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비관주의자이며, 동시에 낙관주의자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는 비관주의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영광의 주님에게 쏟아진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적인 소망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낙관주의자이다. 십자가가 온 세상에 유죄선고를 내린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우주에서의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궁극적인 승리를 기다린다. 그렇다!
이토록 그리스도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참으로 놀라운 존재이다!
험한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렇다. 분명히 단점이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성도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신자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온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냐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 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삶은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2. 진짜는 솜사탕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생사의 문제
이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는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이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의 세 가지 답을 내 놓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이다.
그리스도 영접은 만병통치약?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르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한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 비유를 들어보자.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
“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한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린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른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람을 안고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바람을 받으며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람이
불지 않는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비신자를 구원하겠다는 우리의 결의가 최근에 현대의 세일즈맨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교회에 들여와 사용하는 죄를 범하게 한 것 같다. 세일즈맨들은 상품의 좋은 점들만 이야기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처럼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이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사업이 번창하게 해 주시고,
가정을 지켜 주시고, 언제나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첫 찬바람(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시련이나 어려움)이 몰아치면 그들은 떨면서 카운슬러에게 찾아가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해 줄 지를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진리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복음서에 보면 그분은
진리의 전모를 제시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엄격한 진리에 너무나 부담을 느껴 돌아설 때, 따라가서 장미빛
약속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을 아셨다. 또한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아셨다.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에 몰아치는 바람을 역시 느낄 수 밖에 없다.
진짜 신앙이야? 가짜 신앙이냐?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이다. 소위 “쌀 크리스챤”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크리스챤”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는가? 그분은 죄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신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바람이 싫고, 산허리의 양지 바른 곳이 좋다”라는 확신만 있을 뿐이다.
2부-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2
3. 진짜는 주님의 “일” 보다 “주님“에 우선순위를 둔다.
하늘을 향하는 사고
사고하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다. 사고하지 않는 삶은 그림자 같은 삶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생각들은 사고의 결과로 생긴 것들이며, 우리의 생각들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르게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사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고 인도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리스도의 반응과 동일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한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삶이 달콤하게 변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한다. 프랑소와 마라발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하나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겨우 보답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의 사고는 먼저 하나님께 갔다가, 그분에게서 다시 그분의 피조물로 나아간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하늘을 향하는 사고를 해야 한다. 우리 마음이 성화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사고들을 주관하셔야 한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시대와 다양한 교리적 강조점들을 초월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진지한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주 오랜 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려면 우선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떠나서 그분을 찾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성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확신하기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활동주의의 희생자?
그리스도인은 안타깝게도 잘못 이해된 “활동주의”의 희생자들이다. 누군가 표현했듯이, 소위 “일(WORK)의 복음”이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밀어냈다.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중에 종종 우리는 “일의 주님”과의 접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을 탈진시킨다. 자신들의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은 주간과 야간의 여러 집회들과 행사들을 적어놓은 달력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목회자와 교인들이 잘못된 철학의 인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줄 뿐이다.
만일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죄인을 구원하고 신자를 온전케 한다면, 그것은 큰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관찰해 본 결과, 나는 “현재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 중 많은 것들, 아니 대부분의 것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이
땅위에서 진정으로 실현하는 데 어떤 면으로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독과 침묵의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활동들이 재편되어야 한다.
우리의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들이 다 중지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그분은 당신의 마음 안에 거하신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여라.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이다.
4.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한다
참된 영성의 척도
영성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다 서로 다르다.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또 어떤 모임에서는 열심있고 활기에 찬 사람, 또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영성있고
영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열렬한 간증, 빈번한 기도, 큰 찬양이 영성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 자체는 영성도
아니고, 영성의 증거도 아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 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욕구들은 언제나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욕구들로,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만큼 강력하다.
* 첫째/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욕구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갈망” 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 둘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한다.
* 셋째/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 넷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욕구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한다.
* 다섯째/ 의로운 삶에 대한 욕구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산다.
* 여섯째/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 일곱째/ 시간을 초월하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다. 신앙에 의해서 세상의 풍조와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그는 마치 이미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운다. 이런 사람은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무료 교환
기독교의 교리의 뿌리는 “대속의 교리”이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진리는 진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죄가 의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르다. 그분은 기존의 것들을 꿰매어서 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신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 하신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가장 강한 상태에 있는 가장 순수한 성도조차 그의 회심 전과 마찬가지로 약하다. 회심을 통해서 일어난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강함“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들어온 것일
뿐이다.
5.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세상을 살다보면 참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각(판단)과 행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민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혼미함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수단들은 기도, 신앙, 꾸준한 성경말씀의 묵상, 순종, 겸손, 진지한 사색, 성령님의 조명이다.
올바른 기도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신앙, 또 깨우침과 지식을 주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또한 겸손은 아주 중요하며, 교만하면 진리를 떠나기가 쉽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많은 진리가 저장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은 진지하고 사려깊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당연시 한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다. 우리는 결코 그분 없이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즉 “자아인식”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들을 잘 모르며, 또 자신의 영적 상태도 잘 모른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도덕적 및 영적 상태를 드러내실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마 7:1~5), 심지어 자신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4:3 참조). 그러나 성령님과 협력하여 우리 스스로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의 자기 발견을 위해 제시한 질문들로 자신을 살펴 보라. 이 질문은 당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인지를 말해 줄 것이다.
1.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2.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의 은밀한 보물” 주위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각들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보물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마 6:21 참조).
3. 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우리가 자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4.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자신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5.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찾아가는 곳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말해준다.
6.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7.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유머감각과 경솔한 웃음은 다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경박한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3부-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1
1. 가짜는 인스턴트이다
인스턴트 기독교의 보급
인스턴트 기독교는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이 인스턴트 기독교의 이론적 기초는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한 두가지 신앙” 의 행위로써 다 할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우리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라는 사상이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과거의 문제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미래를 보장해 준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주 편안한 양심으로 최소한(?)의 절제력만 발휘하여 자유롭게 육신의 세련된 욕망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어떤 설교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성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서 성도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오류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오류는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한 번의 신앙의 행위로 다 끝났다?
한 가지 신앙의 행위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것이 성취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신앙의 행위 다음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스턴트 기독교는 한 번의 신앙의 행위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의 영적 전진을 갈망하는 욕구를 억압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생명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며, 성장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가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처럼 정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영양분과 운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깊은 우정이 형성되려면 그 두 존재가 한 번 만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구원의 모든 것을 한두 가지 체험에 담으려는 “인스턴트 기독교”옹호자들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발전의 법칙”을 부당하게 무시한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생활 속에서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들은 영적 훈련을 받고 올바른 신앙 습관을 형성하고 세상과 마귀와 육신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진리를 무시한다. 최초의 신앙의 행위에 부당하게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의 영적인 발전을 기대하지 않고 자기 만족에 빠져 정체상태에 머물게 되며, 이런 현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실망을 하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번의 신앙 행위로 축복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깨어서 싸우고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내세를 기다리면서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2~14).
2.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세월이 약?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결과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물을 본질
그대로 거의 통찰하지 못한다. 초점을 잃고 모든 대상을 바라보는 “윤리적 난시”상태에 빠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치판단이 왜곡되어 있다.
우리가 끈질기게 집착하는 한 가지 잘못된 개념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된다”라는
착각 속에 빠져 “세월이 약”이라는 말에 의지한다. 시간에 대한 이런 개념들이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들을 시간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오해들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 그가 언젠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시간” 이 아니고 “변화” 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변화!
기독교의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하나님의 종 바울이 된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었다. 그 변화를 이루신
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리스도이셨다. 젊었을 때 충동적이고 고집 센 사람이 노년에 모세나 야곱처럼 변화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변화를 이루신 것이다.
많은
죄인들은 구원의 날을 미루면서, 언제까지나 시간이 자기의 편이기를 막연히 바란다. 그러나 그가 실상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든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
이 말씀에서 “변화” 를 나타내는 단어들에 주목하라. “찾으라, 부르라, 버리라, 돌아오라”, 이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죄인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변화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은 그가 수행해야 할 행동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또한 “긍휼히 여기시리라, 용서하시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루시는 변화를 말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죄인은 스스로 변해야 하고, 또한 변화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요 3:3~7 참조). 다시 말해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도 베드로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속받은 사람에게 이 최초의 변화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은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항상 전진하는 변화들의 연속이다.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도록 성령님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변화이다.
3.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십자가와 징계의 차이점
“십자가를 지는 것”과 “징계를 당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다르다. 징계는 그것을 당하는 사람의 동의
없이 그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는 본인의 동의 없이 부과될 수 없다. 주님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분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분을 십자가의 길로 몰아넣은 것은 그분의
사랑이었다. “징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사랑의 매를 대실 때, 그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으신다. 신자는 징계를 자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 찾아오는 십자가는 없다. 반면 징계는 원하지 않는데도 찾아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지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여 따를 때 그에게 닥치는
고난을 의미한다. “순종의 길”에는 십자가가 서 있다.
십자가가 “순종의 길” 에서 발견된다면, 징계는 “불순종의 길”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온전히 순종하는 자녀를 결코 징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매를 맞아 아플 때 우리는 우리가 잠시 옳은 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야 한다. 반면 십자가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옳은 길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십자가와 징계의 구별 방법
우리는 십자가와 징계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내 생각에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그것이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닥친 것인지를 구별하면 된다.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복된 고난이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위해 고난을 선택할 때 그 고난이 복되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비난이 “근거가 있는” 비난이라면 우리의 고난은 복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히 당할 징계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십자가”라고 믿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의 고통에 대해서는 기뻐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 고난 중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고난”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징계의 고통처럼 우리를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닥치는 고난도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느라고 당하는 고난도 아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며,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람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고난이다. 그러나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이런 제 3의 고난을 선한 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써 그들은 역경을 친구로 만들었고, 정신적 고통을 선생으로 삼아서 깊은 영적 진리들을 깨달았다. 우리도 그들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4. 가짜는 행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율법주의자의 착각
인간의 마음은 본래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이성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은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은혜가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의 본질은 “자기 속죄” 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는 스스로에게 벌을 부과함으로써, 회한의 감정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피해를 배상함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받으려고 애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은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번 범한 죄를 자기의 노력으로 없앨 수 있다는 착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우리는 금식이나
고행으로 우리가 속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배웠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과거의 죄에 대하여 계속 후회하면서 자신을 괴롭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이단이다.
과거의 죄에 대하여 계속 후회하면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개신교도의 신종의 고행이다.
만성적인 회한을 경계하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경건한 슬픔”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후 7:10 참조).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죄를 범한 후 참회개에 이를 정도로 강한 슬픔을 느껴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의 감정을 계속 느껴서 결국 그것이 만성적인 회한이 되는 것은 옳지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회한(후회)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못한 일종의 “좌절된 회개”이다. 일단 영혼이 모든 죄로부터 돌이켜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면, 더 이상 회한이 필요 없다.
죄에 대한 회한이 없는 것은 죄를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죄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사고나 행위도 죄의 치명적인 결과를 조금도 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다. 이 무서운 원수에게서 구원받은 영혼은 후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평안과 끝없는 감사의 감정을 느낀다.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늘 행복감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살아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용서의 조건으로 어떤 감정적 고행을 요구하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불안감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갈 것이다.
“후회”는 단지 자애, 즉 “자기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세운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깊이 실망한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가 “좀 더 선한(훌륭한) 자신”을 배신한 행위였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심지어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신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죄 때문에 생기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체면이
손상된 것을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는 계속 자신에게 분노하며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려고 한다. 그가 자신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방법은 빈번히
하나님께 나아가서 분노 중에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결국 그는 만성적인 회한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만성적인 회한은 깊은
회개의 증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자애의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완전한 그리스도의 과거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에 앉혀졌기 때문이다.
5. 가짜는 신조를 무시한다
신조 무용론의 경계
신조를 깎아내리고 체험을 참 기독교의 유일한 척도로 추켜올리는 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완전히 유행이 되어버렸다. 물론 나 자신도 신조 무용론자들에게 공감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죽은 신조”만 붙들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듯이, 우리의 신조 또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실상을 말하자면, 신조란 그리스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 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이 곧 우리의 신조이다.
지성이 있는 곳에 신조가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장 고상한 사역이라고 말들한다. 그러나 전도는 전도자가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사랑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지식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효과적인 설교는 지적인 내용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공식적인 신조 없이 예배 드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한다),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지식 없이 만족할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바로 이 지식이 우리의 신조인 것이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 없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우리는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해야 한다. 진리는 명문화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명문화 한 것이 곧 신조이다.
어떤 의미에서 참 그리스도인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풍성한 진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4부-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2
6. 가짜는 신학을 경시한다
신학 연구의 유익
우리에게 가장 많은 유익을 주는 중요한 연구는 신학 연구이다. 신학이 지극히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의 계시이다. 기독교의 계시의 권위
있는 대답을 외면하고 다른 곳에서 답을 찾다가 아무 답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현대인들이 영감된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는 것이나 알아야 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미래의 문제인데 사람들이 막대한 시간과 돈을 과거의 비밀들을
캐는 데 쏟아 붓는 것은 참으로 아리러니컬한 일이다. 인류학자가 발견할 수 있는 것들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짧은 과거에 범한 죄들을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가, 지금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그리고 미래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된 임재 안으로
영원히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아무리 무해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나의 적이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을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신학이다.
사실과 진리의 차이
그러나 신학적 진리가 사변에 그쳐서는 안된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 전체가 성경과 신학의 진리를 소화하고 흡수할 때까지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 아무런 효과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중요한 요소이며, 우리 주 예수님의 도덕적 교훈의 핵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이 진리가 되는 순간
언제 신학적 사실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진리” 가 되는가? 그것은 “순종이 시작될 때”이다.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헌신하겠다고 동의할 때, 진리는 조명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한다. 로버트슨(1863~1934. 미국의 신학자로서 신약 헬라어의 권위자)은 그의 책 <신약 원어 대 해설>에서 “우리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뜻을 행하려는 의지를 구별해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평균적인 복음주의적 성경학자들은 이 해석이 너무 혁명적이라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무시한다.
오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는 항상 진리에 대한 순종이 있었다. 죽은 교회는 진리에 복종하지 않고 단지 진리의 껍질만을 붙든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교회는 즉시 영적인 능력을 부여받는 복을 받는다. 우리가 진리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전까지는 진리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14세기에 살았던 성 그레고리(13세기 말~1346. 희랍 정교회의 수도사, 신학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단지 독서와 학습을 통해 계명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는 사람과 같다. 왜냐하면 진리를 정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진리에 참여한 사람, 즉 삶을 통해서 진리를 맛본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참여하지 않은 삶, 즉 진리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인간적 지혜로 그것을 왜곡시키게 된다”라고 했다.
영적 조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영적 진리도 깨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조명이 없이는 신학적 진리도 단지 한낱 지식이나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 조명이 없이 신학을 공부하면 소위 “죽은 정통”이 된다. 부흥의 본질은 정통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의 영적인 생활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부흥사들의 유일한 목적은 정통적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삶을 살지 않는 교회들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교리들의 내적인 의미가 갑자기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깨달아진다면, 그 사람에게서 부흥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7. 가짜는 감정이 성화되는 것을 등한히 여긴다
감정없이 의지의 행동도 없다
드레버(James Drever, 1873~1950. 영국의 심리학자)는 그의 <심리학 사전>에서 “감정”을 이렇게 정의 한다. “감정은 마음이 차분한 상태에 있지 않고 강한 느낌에 이끌려서 특정한 행동으로 기울어지는 상태이다” 우리는 감정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주어진 우리의 정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없다면 온전한 인간의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런 사람은 기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음은 지성과 감정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감정과 의지의 올바른 관계를 제시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니라”(마 14:14).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 예수님의 동정심을 자극했고,
동정심에 이끌린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심리 작용은 지성에서 감정으로, 다시 감정에서 의지로 진행된 것이다. 언제나 감정은
지식(인식)과 행동 사이에 놓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심상(마음 속의 이미지)” 이 머릿 속에 생기지 않는다면, 마음 속에
동정의 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동정의 감정이 의지에게 가서 충돌하여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긍휼의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져 있다. 심상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동정이든 사랑이든 두려움이든 욕망이든 슬픔이든 간에, 감정이 없다면 의지의 행동도
없다.
하나님은 진리가 우리를 도덕적 행위로 나아가도록 움직이게 만드셨다. 정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마음 속에서 심상으로 변화시켜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바로 관념이다. 관념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다시 감정은 의지가 진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감동시킨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심리 작용의 과정이다. 죄가 들어와서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악에 대한 동정심
죄 때문에 우리의 심리적 작용의 세 요소들, 즉 진리와 감정과 행동 중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마음은 종종 거짓에 치우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생긴 감정은 의지를 악한 행동으로 몰아 넣는다. 잘못된 것 또는 금지된
것을 깊이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우리 마음에는 악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이 생긴다.
이것에 대한 안타까운 예는 목욕하는 밧세바를
다윗이 오래 쳐다 본 것이다. 다윗은 그가 보는 것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죄를 지음으로 죽는 날까지 죄의 비극적
결과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보고 느끼고 행동했다. 그로부터 수세기 후에 그의 주님도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 보고 느끼고 행동하셨다. 다윗과
예수님의 도덕적 차이는 감정적 차이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감정적 차이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 대상의 차이에 기인한다. 다윗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고,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대중을 보았다. 전자는 죄로, 후자는 긍휼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진리-감정-행동” 이라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려 스스로를 강퍅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말해준다. 이런 사람들은 빛을 완전히
회피하거나 아니면 빛에 노출될 때 완고하게 저항하여 불순종한다. 이 세상의 육신적 쾌락들을 너무 오랫동안 응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왠지 그것들에
대해 동정의 감정을 갖게 되고, 결국 그런 감정은 세속적인 행위를 낳게 된다. 또 계속적으로 진리를 접하면서도 그 진리가 불러일으키는 충동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소홀히 하는 상태를 지속시키면 성령님은 근심하시다가 결국 침묵하시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을 모두
봉쇄하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흐르는 강을 막으면 강물은 다른 곳으로 흘러서 논과 밭을
파괴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억압한다면, 그 감정은 다른 곳으로 뚫고 나와서 삶을 망치고 저주하고
파괴할 것이다.
감정의 성화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감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감정이 경박해서는 안된다. 일상의 안일함을 기뻐하거나 구차한 평안을
즐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의 기쁨에는 고난의 연단을 기뻐하는 성숙함도 있고, 십자가의 기쁨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기 위해서 당신을 택하셨다면, 어느 누구보다 더 엄격하고 힘든 훈련과 고난을 당신에게 부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당신을 영화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힘든 훈련과 고난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좀 더 강한 신앙의 용사”로 만들기 시작하셨다면
하나님은, 흔히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기독교 선생들이 제시하는 하나님처럼 당신에게 부드럽게 대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가공되지 않은 볼품없는
대리석을 깎아서 아름다운 조각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는 잔인하리만큼 무지막지한 연장들을 사용한다.
당신을 하나님의 지고한 은혜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의 마음에서 제거하실 것이다. 당신이 믿는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서 떠날
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들이 있었던 곳에는 잿더미만 남을 것이다. “성결하게 만드는 가난의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가난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면 길거리의 노숙자들은 벌써 성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우리에게서 모든 것들을
빼앗아감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깊은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에 집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지 못하게 하신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해를 당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평안과 기쁨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성숙한 단계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 당신의 어떤 것들을 희생시키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제까지
당신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재미있게 만들었던 즐거움들을 희생시키신다. 성령님이 당신을 세심하게 다루실 때 당신의 삶은 메마르고 딱딱하고 심지어
당신에게 어느 정도 부담스러운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전에 당신이 즐겼던 내적인 재미와 달콤함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미소가
당신의 눈에서 감추어져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은 신앙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길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과 신앙의 본질이 의지에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때 당신은 사도가 말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쁨” 을 주는 것이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천천히 익어가는 신앙의 열매라는 것을 배운다.
당신이 어떤 때는 영적인 기쁨을 느끼고 또 어떤 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참 자녀로서의 당신의 지위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마도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전혀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데도 이상하게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평안과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밤의 사역”의 능력
각자에게 이런 “영혼의 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는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기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압력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밤을
얼마나 견질 수 있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때가 되면 압력을 완화시키신다. 아침 별의 반가운 불빛을 통해서, 다음에는 좀 더 풍부한 아침 햇살을
통해서 압력을 완화시키신다.
그때 당신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발견하고,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당신은 이 세상의 어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될 것인데, 그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기쁨 없이도 신앙이 당신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 때, 밤의 사역 - 정결하게 만들고, 세상에 초연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들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현재 당신에게 문제가 되는 삶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만드는 - 의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쁨도 할 수 없는 일을 때로는 고통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 고통은 이 땅의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폭로하고, 당신의 마음을 천국의 평안에 대한 갈망으로 채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외로움
Aiden. W. Tozer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외로움은 이 죗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 하나님과 함께한
노정(路程)은 거듭나지 않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로부터도 그를 자주 분리시키곤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심취된 자신의 몰두와 염원 및 갈망함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들과의 교제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 중에서도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공감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에, 그는 혼자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이해를 향한 채워지지 못한 구약 선지자들의 갈망은 때때로 항변적인 하소연으로 표출되기도 했으며, 우리의 구주께서도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내적 경험 속에서 성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속으로 들어간 체험을 한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의 최고 대상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들이 없기에, 주위에서
진행되는 시끄러운 종교적 간담가운데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다른 그 무엇에 몰두해 있는 듯이 보이곤 한다.
그리고 이런 인상 때문에
그는 재미없고 지나치게 심각한 사람으로 평을 받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피하게 되며 점점 그와 그가 속한 사회 사이에는 간격이 더 넓게 벌어지게
된다.
이런 중에 그는 옷깃에서나마 몰약(沒藥) 과 침향(沈香) 및 상아 궁정의 계피(桂皮) 냄새를 풍기는 친구들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그 옛날 마리아처럼 이 모든 경험을 그의 가슴 속에 담고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에게 자신을 내던지게 만드는데, 인간적인 교제를 발견하지 못한 그의 무력함은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곳에서 찾지 못한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5부-가짜는 영적 균형감이 없다!
도덕적 이중성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위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은 흔하게 듣는 것이다.
종교 사상가들은 이런 불균형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처방을 내렸는데, 공자는 “중용” 을 가르쳤고, 석가는 금욕주의와 육신의 안락을 피할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침”과 “부족함”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잡는 것이 덕스러운 생활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도 이런 도덕적 불균형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리는 처방은 “새 철학”이 아니라 “새 생명”이다. 기독교의 이상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종종 더 곤고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끌고 가려는 힘과 그를 죄로 끌고 가려는 힘이 자기 안에 병존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육신적으로는 아담의 자녀요 흙의 아들이다. 이런 도덕적 이중성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러나 참그리스도인의 안에는 하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그를 성장시키려고 활동하신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육신과 싸우려고 할 때, 그의 전투는 때때로 그로 하여금 극단적인 것들을 행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신자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성령님의 활동은 무의식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에 순종하여 협력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양 극단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되려다가 비참하게 실패한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뒷짐지고 기다린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언급한 불균형이다. 우리의 도덕적 반응이 없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고 자기 절제의 훈련을 하고 하나님의 목적들을 인정하여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발전은 없다.
영적인 기형의 상태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영적인 기형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몇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담대해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스럽게 될 수 있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에게 이 두가지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분이 그분의 적들과 대립할 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나타났다.
둘째, 우리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 않는
균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발견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리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 말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도 사랑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벧전 4:8 참조).
셋째, 깨어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오류와 싸우다 보니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는 경향이 있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이단을 좇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도록 유혹하다가 실패할 때 사탄은 우리가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도록 부추긴다.
넷째, 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울해질 수 있다.
성도들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침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기쁨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다섯째, 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양심의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질 수 있다.
우선
사탄은 신자의 양심을 파괴하여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 실패할 때 그는 반대적인 전술을 써서 신자의 양심을
병들게 한다. 이것은 신자가 양심적으로 너무 예민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까봐 늘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신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들의 수를 줄여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을 “경건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끝 맺는 말
당신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만난 자신만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고, 또 그분의 진리와 그 진리를 체험적으로 사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도?... 그리고 그 충만한 경험으로 인한 평안이 마음에 넘치고 있는가? 이 경험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 줄 수 없으며, 이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가짜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번 호 신앙 기사들을 통하여 다시 한번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진짜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