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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張禧嬪)의 실제얼굴?
1대 장희빈에는 영화배우"김지미"주연
2대 張禧嬪에는 이미 故人이된 영화배우"남정임이 주연
3대 "張禧濱"에는 텔런트"윤여정"주연 4대 "張禧嬪"에는 텔런트"이미숙"주연
상감마마와 하룻밤" 張禧濱... 상감마마~ 기다리는 "張禧嬪....
5대 張禧濱에 텔런트"전인화 주연.. 6대 "張禧嬪"에는 텔런트"정선경"주연... 7대 "張禧嬪"에는 영화배우"김혜수"주연..
장희빈 중전 "인현왕후 사진을 향해...화살을.. 그...화살은 "장희빈 "자신에게 쏜 화살이였다.
숙종[ 발음 : [-쫑]
형태분석 : [
1661(현종 2)~ 1720(숙종 46). 조선의 제19대 왕(1674~1720 재위). 개요재위기간 동안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한편으로는 대동법의 확대 실시, 양전의 시행, 호패법의 실시, 군제의 정비 등을 통해 양난 이후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재정립해나가려는 정책을 시도했다.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 즉위 및 정국동향현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초비(初妃)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8월 즉위했다. 숙종 초기 집권층이었던 남인은 병권의 장악과 서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어,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숙종은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외척을 기용하는 한편 서인을 재등용하고자 했다. 1680년(숙종 6) 복선군(福善君)과 탁남의 영수인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 등이 역모했다는 고변이 있자 이를 계기로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그러나 서인계열은 남인의 숙청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가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남인은 이후 정국을 이끌면서 1694년에는 서인이 인현왕후 복위를 도모하려 했다는 고변을 하고 옥사를 일으켰다(→ 색인 : 갑술옥사).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비한 것을 후회한다는 전지(傳旨)를 내려 소론정권을 성립하게 하고 남인의 다수를 명의죄인(名儀罪人)이라 하여 중앙정계에서 몰아냈다(甲戌換局). 그뒤 정국은 서인 내의 노론·소론 사이에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벌어지면서 노론 일당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노론·소론 당쟁의 핵심은 희빈 장씨의 처벌문제 및 장씨 소생의 세자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였다. 숙종은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1717년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숙종 재위기간중의 남인·서인, 노론·소론의 당쟁은 조선 중기 이래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쌓여온 모순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당파간의 견제와 대립을 이용하여 양 난 이래 손상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숙종의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쟁의 밑바탕에는 양 난 이후의 국가재조(國家再造) 방향을 둘러싼 대립이 가로놓여 있었다. 즉 정통주자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정치운영의 주체를 양반사대부에 두며 당시의 지배적 경제제도인 지주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개선을 통해 봉건체제의 모순을 수습하려는 입장과, 고전유학의 범주에서 주자학 비판의 근거를 찾고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소농경제를 안정시키려는 입장 사이의 대립이었다. 숙종 때의 당쟁은 전자의 주장을 전개한 노론 계열이 정국을 점차 장악해가는 과정이었다. 사회경제 정책먼저 방납(放納 : 토산물의 貢出)의 폐단을 막고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 1608년(선조 41)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실시된 이래 강원도와 충청도·전라도로 확대된 대동법의 적용범위를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에까지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전정(田政) 부문에서는 광해군 때부터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해서 강원도와 삼남지방에까지 확대하여 서북지방 일부를 제외한 전국에 걸쳐 양전을 마무리지음으로써 국가재정 수입의 안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고 당시 민폐의 대상이었던 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강구했으나 양반층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자 그 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여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함으로써 1필에서 3~4필의 심한 차이를 보이던 양정(良丁) 1명의 군포부담을 2필로 균일화했다. 또한 호패법(戶牌法)의 실시를 강행하여 유민(流民)과 도피자를 방지함과 동시에 전국의 양정 수를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봉건질서의 안정·강화를 도모했다. 아울러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맞추어 상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鑄錢)을 본격화하여 6차례에 걸쳐 상평청·호조·공조 및 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전라·경상 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통용하게 했다. 이와 같이 숙종대에 이루어진 제반 제도의 정비와 운영상의 개선은 양 난 이후 문란해진 국가 재정구조를 개선하고 일반농민층의 부담을 부세제도의 면에서 경감시킴으로써 심화되어가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봉건지배체제를 안정화하려는 것이었다. 국방·외교 정책 및 기타 치적숙종은 즉위한 다음해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완공하고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여 변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종래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군제의 개편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자성(慈城)의 2진을 개척하여 옛 영토의 회복운동을 벌였으며, 청과의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에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청과 협상하여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함으로써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일본과는 1682, 1711년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왜은(倭銀) 사용조례를 확정지어 왜관무역(倭館貿易)을 정비하는 한편, 막부(幕府)로부터 왜인의 울릉도 출입금지를 보장받기도 했다. 이밖에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端宗)으로 묘호를 올렸으며,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던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왕실의 충역관계(忠逆關係)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명분의리론이 크게 성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명의 은공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존명의리와 북벌론의 기치 아래 사회기강을 단속하는 작업이 행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선원록 璿源錄〉·〈대명집례 大明集禮〉 등이 간행되고, 〈대전속록 大典續錄〉·〈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군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이다.
悲運의 "인현왕후"조선 19대 임금 숙종대왕의.. 繼妃(계비)로서 후궁인 "장희빈의질투와 시기로 廢庶人(폐서인)이되다..복귀된지 8년만에 3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다 서울" 서오능에있는 大嬪墓(대빈묘) 장희빈무덤.. 장희빈 오빠.. 장희제 무덤 장희빈의 오빠 "장희제"의무덤 동생인 "장회빈"을 등에 업고 . 벼락출세하다..인현왕후 페서인 시키려 하는데 크나큰 공을 쌓타.. 장희빈 사약받은후 "장희제"도 사형당해 ..草野에 묻히다.... 우리나라 연속 "史劇 "의 단골메뉴" 중에 으뜸인 "장희빈"그녀는 누구인가? 조선 19대 숙종대왕의 後宮으로 어려서 宮에들어가 나인신분에서 숙종의 총 애를 받아 승은을 입다!숙원에서 왕세자(윤)후일 20대 임금인 경종)탄생.. 인현왕후가 "廢庶人(폐서인)되고 세자 책봉과 함께 王妃가되다.. 인현왕후 복위되자 "嬪(빈)으로 밀려남..惡行 끝에 지아비인 숙종에게 死約(사약)을 받고 죽다.. 그후..숙종임금께서는 嬪(빈)이 妃로 승격되는 것을 으로 "禁(금) "했다 ...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 민중들 입에서 입으로.. 장다리는 "張嬉嬪(장희빈)"이고 미나리는 "인현왕후"를 빗덴 말 로서..조선 팔도를 오르~내리다~ 영화배우중에 "장희빈 "역활을 해야 비로서 인기인 반열에 오른다는 말이 있다. 1대~~.....이어질 장희빈역활 기대한바 큽니다... 조선 왕조 역사기록에 왕세자를 낳은 여인이 사약받고 죽은 사람은,9대임금 성종계비 폐비윤씨(연산군 ) 생모와 .. 20대 경종임금 생모"장희빈 "두사람뿐이다.. 흐르고 있는 "장희빈"노래는 故, 원로가수인 "황금심"노래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장희빈이 지은 "罪"의 이름은 ? 下剋上(하극상)이였다.. 하극상이란?. 계급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 예의나 규율을 무시하고 윗 사람을 꺽고 오름을 말함...故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중앙정보부장관이던 "김재규"가대통령을 "銃"으로 살해한것같은... 장희빈 / 황금심 (원곡) 李瑞求 作詞 全吾承 作曲
1.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 고이던 그 날 밤이 차마 그려 치마폭에 목메는가
2.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버림받는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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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 10일)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이자 왕비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전하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첩실인 윤씨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서,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린다
옥정이 몸을 의탁하고 있던 종숙부인 장현(張炫)이 경신환국에 휘말려 죽은 이후 가세가 기울자, 장옥정은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여 남인들의 후견자 자의대비(장렬왕후, 인조의 계비)를 웃전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장옥정은 인경왕후 김씨와 사별한 20세의 청년 숙종과 연을 맺고 정인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의 대표 격으로,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는 남인이 입궁시킨 장희빈을 싫어해 궁에서 쫓아내었다. 이에 자의대비가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에게 부탁해 갈 곳이 없는 신세는 면하였다.
1683년 현렬왕대비(명성왕후)가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설득하여 장옥정을 재입궐시킨다. 장옥정이 남인이라는 것을 아는 서인들은 장옥정의 삼촌 장현을 비난하면서까지 격렬히 반대했지만, 숙종은 장옥정을 내명부 종 4품 숙원의 후궁으로 봉하여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창경궁의 취선당(就善堂)을 처소로 내주었다.
남인인 숙원 장씨는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대립하였는데, 인현왕후는 기본적으로 장 숙원을 후덕한 성품으로 감쌌으나 교만한 숙원의 훈계를 위해 회초리를 드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1688년 당시 소의(昭儀 ; 내명부 정2품)였던 장옥정은 드디어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장남 ‘윤’(昀)을 낳았고, 이 왕자가 후에 조선 왕조 제20대 왕 경종(景宗)에 오르게 된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소의 장씨의 품계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키고 아들인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 당시 집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과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년) 정월에 원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봉했다.
한편, 서인 세력은 남인인 희빈의 아들이 원자, 나아가 세자가 되었을 때의 후일을 염려해, 책봉을 극렬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러나 이러한 서인들의 반대는 오히려 서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던 숙종의 진노를 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니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분노하자,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에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케 하였으나 중로 정읍(井邑)으로 이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 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치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로써 경신대출척 이후 밀려난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이 정권 교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곧, 환국의 여파로, 이해 음력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얼마 후, 중전 장씨의 아들인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장비(張妃)의 부모인 장형(張炯)과 윤씨, 장형의 정실 고씨는 각각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되었고, 장비(張妃)의 오빠인 장희재는 포도대장, 총융사, 한성부 좌윤 등 고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김만중이 자신이 폐비 사건의 옳지 못함을 깨우치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읽고 결국 폐비 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은 다시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결국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장옥정의 부모인 장형과 윤씨·고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호를 박탈당했다. 희빈의 처소 또한 대조전이 아닌, 과거에 사용하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겨졌다.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희빈이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신당을 왕에게 고하였고, 마침내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씨가 죽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이 일로 장희재는 처형되었고, 취선당의 궁인(宮人)·무녀(巫女)등도 참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巫蠱-獄, 여기서 무고란 무술 (巫術)이나 방술 따위로 남을 저주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이라 하는데, 이때에 희빈의 처우에 대해 관대하게 처우하자는 당시 영의정인 최석정은 부처되고, 같은 이유로 남구만·유상헌(柳尙憲)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장희빈이 사사된 때는 1701년 음력 10월 10일의 일로, 향년 43세였다. 그러나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과의 장희빈의 죽음 묘사가 달라서 (연려실기술이나 인현왕후전에는 사사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숙종실록에는 자진했다고 씌여져 있다) 장희빈이 사사되었는지, 자진했는지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하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왕의 생모이고 이미 5년간 중전의 자리에 있었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있었으나 경종이 연산군의 전철을 밟을 것이 염려가 되었고 또한 숙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죄인인 그녀에 대한 발언을 일체 금지하였으며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엄명을 내렸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없었다.
무덤은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60년대 도시화개발로 옮겨졌다. 그녀의 사당은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이며, 궁정동 칠궁 경내에 존재하고 있다. 대빈궁은 왕가에서만 사용하는 원형 기둥 등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위(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한때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조사석과 내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녀는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만 기록되어 있고, 아버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희빈 장씨가 어릴 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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