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 선생 묘지명(圃隱鄭先生墓誌銘)
포은(圃隱) 선생이 돌아가시고 2백여 년이 지난 뒤에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문을 지어 무덤 앞에 세웠다. 그 후 70년 뒤에 후학 삼주(三州) 이재(李縡)가 또 감히 묘지(墓誌)를 짓는다. 묘지는 다음과 같다.
아! 하늘이 우리 동방을 보살펴주신 지 오래이니, 은(殷)나라 태사기자(箕子)가 봉해진 이후로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그러나 고려에 이르러 8백여 년간 중화와 오랑캐의 큰 분한(分限)에 어둡고 불교의 찌꺼기에 빠져서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에 거의 이르고 말았다. 혼란이 극도에 이르면 응당 다스려지는 법인데 이에 앞서 길을 열어줌이 있다. 이에 우리 선생을 도타이 세상에 내어 우리나라 문명의 시운(時運)을 열었으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선생의 휘는 몽주(夢周)이다. 정씨(鄭氏)는 연일(延日)에서 나왔으니, 지주사(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이다. 조부 휘 유(裕)와 부친 휘 운관(云瓘)이 모두 높은 관직에 추증되었으니 선생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정축년(1337, 충숙왕 6) 12월 무자일(戊子日)에 영천(永川) 우항리(愚巷里)에서 태어났다. 모친 이씨(李氏)가 특이한 꿈을 여러 번 꾸었는데, 출생함에 어깨 위에 북두칠성처럼 배열된 검은 점 7개가 있었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당시 상기(喪紀)가 크게 무너졌는데 선생은 홀로 유속(流俗)과 다르게 행하였고 시묘살이하면서 슬픔을 다하였다.
정유년(1357, 공민왕 6), 진사시에 제3명(第三名)으로 합격하였다.
경자년(1360), 삼장(三塲)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임인년(1362),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계묘년(1363), 낭장 겸 합문지후(郞將兼閤門祇候)가 되었다.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화주(和州 영흥(永興))에서 여진(女眞)을 정벌하였다. 갑진년(1364),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수찬과 전농시 승(典農寺丞)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365), 모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상 때와 다름없이 시묘살이하였다. 이 일이 알려서 정려(旌閭)되었다.
정미년(1367),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에 제수되었다. 전쟁 이후로 학교가 황폐했는데 이때에 새로 성균관을 지어 목은(牧隱) 이색(李穡) 공에게 대사성을 겸하게 하였다.
선생은 이숭인(李崇仁) 공, 김구용(金九容) 공, 박상충(朴尙衷) 공과 함께 관직(館職)을 맡았는데, 상사(庠舍)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강설(講說)할 때면 선생의 강설이 뛰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였으니 여러 유자(儒者)들이 미칠 수 없었다.
당시 동방에 들어왔던 경서(經書)로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뿐이었는데, 이후 운봉 호씨(雲峰胡氏)의 《사서통전(四書通典)》을 얻으니 선생이 논한 바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목은이 자주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이치에 맞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달가는 선생의 자(字)이다.
무신년(1368), 명(明)나라가 개국하자 선생은 명나라로 귀부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임자년(1372), 성균관 사성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조회하였다. 귀국길에 바다 가운데 허산(許山)에 이르렀을 때 태풍을 만나 상사(上使)는 익사하고 선생은 간신히 살아남아 13일 동안 말다래를 뜯어 먹으며 연명하였다. 황제가 이를 듣고는 배를 갖추어 돌려보내어 후하게 구휼하고 이어 조유(詔諭)하기를,
“고려는 경사(京師)와 만여 리나 떨어져 있으니 예전처럼 3년에 1번 조빙(朝聘)하는 예를 따르고, 방물(方物)은 토산품을 보내는 정도로 그치라. 고려 자제들의 입학도 허락한다.”
하였다. 이는 특별한 은혜이니, 실로 선생이 잘 전대(專對)한 덕분이었다.
갑인년(1374), 경상도 안렴사에 제수되었다.
을묘년(1375, 우왕 1), 예문 직제학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전에 김의(金義)가 제멋대로 명나라 사신을 죽였는데도 조정에서 문책하지 않고 딴마음을 품더니, 마침 원(元)나라 사신이 오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 등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하였다. 선생이 개연한 심정으로 동지들과 함께 상소하여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지 말고 전적으로 명나라를 섬기라고 청하였다. 이로 인해 이인임에게 모함당하여 언양(彥陽)에 유배되었다가 2년이 지나 풀려났다.
정사년(1377), 왜구의 잇단 침략으로 바닷가 지역이 소란하였다.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으나 사신이 구금되는 지경에 이르자 선생이 마침내 명에 따라 빙문(聘問)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선생은 어떠한 기미도 드러내지 않았고, 도착해서는 고금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극력 진술하였다. 이에 왜추(倭酋)가 경복(敬服)하고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돌아올 때에는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세 섬에 더 이상의 침략을 금지시켰다.
기미년(1379), 전공(典工)ㆍ예의(禮儀)ㆍ전법(典法)의 판서, 진현관(進賢館)ㆍ예문관(藝文館)의 제학에 제수되었다.
경신년(1380), 판도 판서(版圖判書), 밀직(密直)ㆍ보문각(寶文閣)의 제학에 제수되었다.
신유년(1381),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384),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당시 국가에 흔단(釁端)이 많아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를 출동하여 세공(歲貢)을 늘려 정하고자 하였고, 5년간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신을 매질하고 유배하였다.
이때에 절사(節使)를 보내야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 회피하는 바람에 최후로 선생에게 사신의 임무가 맡겨졌다. 선생이 명을 듣고는 집에서 묵지 않고 바로 출발하여 갑절로 길을 달려 절일(節日)에 맞추어 표문(表文)을 올리니, 황제가 칭찬하고서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병인년(1386), 다시 명나라 경사(京師)에 가서 관복의 제도를 청하였다. 이듬해에 돌아와 비로소 백관의 관복을 의논하여 정하고 오랑캐의 제도를 모두 혁파하였다. 무진년(1388), 삼사좌사(三司左使),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제수되었다.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기를 아뢰었다.
기사년(1389),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390, 공양왕 2),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하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해졌다. 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맞이하여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자 선생이 경연에서 진언하기를,
“유자(儒者)의 학문은 모두 일상생활 속의 일이요, 음식이나 남녀 관계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욕망이라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습니다. 요순(堯舜)의 도(道)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일상생활 속에서 그 바름을 얻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저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 친척을 버리고 남녀 관계를 끊고서 암혈(巖穴)에 홀로 앉아 풀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고 나무뿌리를 캐어 먹으며 관공(觀空)ㆍ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평상의 도이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여 기일(忌日)에 승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시제(時祭) 때는 지전(紙錢)만 놓았는데, 선생이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청하니, 예속(禮俗)이 다시 일어났다.
임신년(1392) 2월,《대명률(大明律)》이 전해지자, 선생이 본조의 법령을 취하여 참작하여 새로운 법을 만들어 올렸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의 공덕이 날로 성대하여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귀부하였는데, 유독 선생은 빼앗을 수 없는 굳센 절개가 있어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심복 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해 제거하게 하여 그 세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당시 조야(朝野)가 두려움에 떨고 아침저녁 사이에 화(禍)가 임박하였다. 어떤 산승(山僧)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선생에게 주었다.
강남 땅 만 리에 들꽃이 피었으니 / 江南萬里野花發(강남만리야화발)
어느 곳인들 봄바람 부는 좋은 산이 없으랴 / 何處春風無好山(하처춘풍무호산)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사양하기를, “아, 늦었도다, 늦었도다!”라고 하였다.
4월 4일에 큰 거리를 지나가다가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조영규(趙英珪)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선생이 세상을 떠남에 고려가 마침내 망하였다.
아! 선생의 충절은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툰다고 할 수 있으나 선생에게 있어서는 단지 하나의 절개일 뿐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오직 의리(義理)가 중요한데,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 유교와 불교의 분별이 선생에게서 판가름이 났으니, 지금까지 수천 리 우리나라 백성이 오랑캐와 금수가 되는 데서 면할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선생의 학문은 주서 길재(吉再)에게 전해졌다. 또 세 사람을 거쳐 한훤당(寒暄堂)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을 얻어 정암(靜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렀으니,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 된 것이 어찌 참으로 옳지 않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선생은 처음에 해풍군(海豐郡)에 안장되었다. 이후 영락(永樂) 병술년(1406, 태종6)에 용인(龍仁) 모현촌(慕賢村) 문수산(文秀山) 진좌(辰坐)의 언덕으로 이장하고, 부인 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 이씨(慶州李氏)를 합장하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종성(宗誠)과 종본(宗本)이고, 사위는 성익지(成翼之)와 이장득(李長得)이다. 후손은 매우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어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선생의 무덤이니 / 斯惟先生之藏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 / 與天地而久長
성대한 덕과 큰 업적을 / 盛德大業
무궁토록 밝게 보이노라 / 昭眎無疆
[脚註]
[주01] 포은 …… 묘지 :
이 글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묘지이다. 정몽주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이다.
[주02] 우암(尤菴) …… 세웠다 :
한국문집총간 113집에 수록된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4에 〈포은 정 선생 신도비명(圃隱鄭先生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주03] 삼장(三塲) :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말한다.
[주04] 관공(觀空) :
진공(眞空)을 관조(觀照)하여 진리를 깨달음을 말한다.
[주05] 적멸(寂滅) :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고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한 이상 세계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