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의 포은 정몽주선생 생가 중창
자양 가는 길에 방조이신 포은선생의 복원된 생가를 찾아갔다.
수년전에는 포은선생의 ‘호자리’비를 답사한 기억이 났다.
명현의 생가를 복원하여 오늘의 사람들에게 충효사상을 고취하는 자리가 되게 한
영천시의 시책이 돋보였다.
영천시는 포은 정몽주(1337~1392)선생의 충효사상을 재조명하고 역사문화 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해 2013년부터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조성한 포은 생가는 4천990㎡ 부지에 안채와 사랑채, 부엌채, 영당 등이 들어섰다. 그밖에 대문채 포은 시비와 동상, 소공원, 관리사 등이 건축되었다.
포은 선생은 외가인 현재 영천시 우항리인'울목마을’ 에서 1337년에 태어나 성장하여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뒤 모친과 부친의 상에 3년간씩 시묘살이를 해 효의 표상이 됐다.
1362년 예문관 검열로 관직에 첫 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이후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하며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개성 선죽교에서 순절해 충의 상징이 됐다.
포은샌생과 우리파와의 관계는 영일정씨 시조공이신 형양공 부터 11世에 내려와 8파로 나누었는데 포은(11世)선생이 1파(문충공파)요 우리가 2파 문예(11世)(생원공파)이다. 고려 때 7世 林(판도판서) 아드님 인수, 인언(8世) 형제분에서 1파와 2파로 갈리었다. 송간(松磵)(휘 仁彦8世)공, 판서(휘 光厚9世)공이 포은선생과 동시대이므로 포은선생과 같이 관직에 재직하셨기애 순절 후에 화를 피해 영천으로 은입하셨다.
영천 임고서원 창건도 노촌공(휘 윤양15世)께서 김맹산 노소암, 등과 퇴계선생의 자문을 받아 현 생가에서 북쪽으로 좀 떨어진 부래산에 창건하셨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임고서원도 호수공(16世)께서 향리의 여러분과 힘을 합해 현 위치로 복원하셨다.
포은 선생의 지극한 효성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세운 유허비 효자리(孝子里)가 포은 생가에서 700 여m 떨어진 곳에 남아있다.
1.포은선생의 생가 안내

마을 어귀에 우뚝 서있는 포은 정몽주선생 생가 표지석

생가 전경

포은선생탄생지 표석

포은선생 생가 안내판

포은선생 소개시설
2.포은선생의 동상과 영정


탄생지 앞에 서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상

영정각에 모셔진 포은선생의 영정
3.포은선생의 생가의 각 채의 모습들

대문채

영정각


여러 채의 생가의 모습

사랑채 존양당(存養堂)

안채

부엌채


실내 가구들
4.여러 부속 시설들

우물과 장독대

디딜방아

짚으로 만든 생활 용품들

소 마구간
5.포은선생의 시비(詩碑)들












첫댓글 상세하게 영상을 잘 담았습니다,
포은생가의 우항동임을 입증하는 자료가되여 방손들이 알아야할 내용입니다,
1파 문충공파와 2파 생원공파의 설명을 상세하게 알수있서 좋은자료가 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포은선생 생가를 깨끗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중창했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지금은 새건물이라 실감이 나지않겠지만 몇 백년 후에는 역사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지요
이제 다시는 포항시에서 시비를 걸지 않겠지요
숙부님 덕분에 좋은 자료 잘보았습니다.
나중에 저도한번 들려보겠습니다.
포은 선생 생가를 영천시 예산으로 중창되어 반갑군요
제가 도매시장을 운영할때 용인 묘현면의 일파 종친들이 참외농사를 지어 판매하러
저희도매시장을 찾아 오셔서 대접을 해 드리고 제가 묘현면에 가서 대접받기도 한 기억이 납니다
언잰가 한번 들려볼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