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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0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은 발!
본문 : 에베소서 6장 15절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공동번역>
신앙생활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신앙은 결코 고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후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승천하신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장 12절,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들을 이제 ‘작은 예수’가 된 ‘그리스도인’이 행함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고, 배우고, 본 바를 ‘행함’으로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장 37절, 새번역>
승천하시기 전에 위대한 명령을 위임하시면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마태복음 28장 19절, 새번역>
그리고 이 땅에서 마지막 말씀을 남기실 때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사도행전 1장 8절, 새번역>
신앙은 결코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운동(Movement)’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처럼 ‘행전’ 이란 이름이 붙어야만 신앙은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을 담당할 직접적인 부위인 ‘발’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믿는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이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발’이라는 신체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리띠와 가슴막이 다음으로 그 발에 신발을 신어야 하는 순서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뜨거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믿음도 마음도 사실상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발에 신발을 신고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이사야 52장 7절, 새번역>
보아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 평화를 알리는 사람이 산을 넘어서 달려온다. <나훔 1장 15절A, 새번역>
바로 이 ‘발’의 순서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발에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라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발을 왜 신는지 아십니까?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오래 걷기 위해서입니다. 맨발로 걸을 때보다 신발을 신고 걸으면 더 오래,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신발이 발의 완충장치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둘째,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길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밟더라도 씻을 필요가 없이 신발만 벗으면 됩니다. 신발이 대신 밟아 주는 것입니다.
셋째, 갈 수 없는 길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맨발로는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신발이 발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평화의 복음’이라는 신발도 마찬가지 이유로 신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라는 이미지는 말씀 드린 것처럼 로마 군인들에게서 힌트를 얻은 것 인대 로마 군인들도 분명히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당대에 가장 강력했던 로마 군대는 그 신발을 신고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오래 걷고, 멀리 걸었으며, 피로 물든 바닥을 헤치고 나갔으며, 갈 수 없는 길을 정복했습니다. 그런 로마 군대가 신었던 신발을 ‘칼리가’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단단하다’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과 같이 생긴 칼리가는 튼튼한 가죽으로 만든 샌들 형태였으며, 발목을 감는 형태로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닥에는 쇠징을 박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액체로 된 지역을 지나갈 때는 미끄러지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발을 신고 그들은 결국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이루고 당대에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 군대가 신었던 신발 ‘칼리가’ 보다 더 뛰어난 신발을 신고 전 세계로 발길을 향하던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고, 바울이었고, 예수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믿는 교인들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신었던 신발의 이름이 ‘평화의 복음’이란 신발입니다. 이 신발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는 신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품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이란 신발을 신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평화의 복음이란 신을 신고 전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에베소서의 수신지역 에베소에서 오래, 더 멀리 가야 하는 바울의 눈물이 담긴 고백이야말로 이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에베소교회의 사람들에게는 이 에베소서 6장 15절이 와 닿았을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했던 이 고백은 참으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 새번역>
그리고 그 사도행전의 역사는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벌써 2000년이란 시간이 넘도록 계속해서 지속되어져 오고 있습니다. 중간 중간 믿음만이 너무도 강조되어 지고 행함이 사라졌을 때, 평화의 복음의 신을 벗었을 때는 암흑기도 물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요즘이 그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역사는 지금까지 오래오래, 그리고 더 멀리멀리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평화의 복음이란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 되어져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신발을 결코 벗지 않을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존재가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를 통하여 복음이 더 오래, 더 멀리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평화의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더러움들을 넘을 수 있는 신발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합니다. ‘사랑’을 반대하고, ‘희생’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며, 희생하며,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온갖 더러운 함정들을 던져두곤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더러움을 넘어 설 수 있는 신발이 바로 평화의 복음의 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0장 36절, 새번역>
평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담이 허물어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방해와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전하신 평화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으로 그 평화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5절A, 공동번역>
누군가 우리를 정죄한다고 하여도, 죄책감이 자꾸만 우리를 짓눌러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려고 할 때마다 평화의 복음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 새번역>
이러니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들은 가는 길에 더러움이 묻더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겨 주셔서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찬양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난 원수의 어떠한 공격에도 더 이상 넘어지지 않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이렇게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셋째로,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게 해 주는 신발입니다. 이 신발을 신지 않는다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케이트화를 신으면 걸을 수 없었던 얼음 위를 걸어갈 수 있듯이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해 있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하시는 땅으로 떠나는 믿음의 결정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서 머나먼 땅 조선까지 오셨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이곳 조선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지 않아도 될 땅이었습니다. 억지로 가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닙니다. 도착했어도 미래가 없을만큼 암흑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은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그 많은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나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도무지 갈 수 없는 길 같았던 그 길을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은 이들이 걸어감으로 따라 걷는 이들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님들의 마음을 닮아 백범김구 선생님 역시 그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고 도무지 보이지 않고 갈 수 없었을 것 같은 ‘독립’으로 가는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그런 백범김구 선생님의 기도와 행함대로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란 새로운 길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2023년, 벌써 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갈 수 없는 길을 모두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없었다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신을 신고 평화의 길을 만들 차례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 다 함께 이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었으면 좋겠습니다. 준비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발에 넣고 신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방법과 능력과 지식이란 신발을 신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을 때에야 굳게 서서, 평화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발이지만 갑옷이며, 전신갑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준비이면서 가장 중요한 준비였던 진리의 허리띠와 정의의 가슴막이가 무용지물이 아닌 ‘유용지물’이 될 수 있도록 ‘움직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맨발로는 오래 걸을 수 없습니다.
맨발로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맨발로는 더러운 것들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맨발로는 갈 수 없는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더 오래 걷기 위해, 더 멀리 가기 위해 이 신을 함께 신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더러운 것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기 위해 이 신을 함께 신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더 이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그 길, 믿음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가기 위하여 이 신을 함께 신지 않으시겠습니까?
자. 이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가리고,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읍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장 23절, 개역개정>
결단 찬양 - 그 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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