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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2 - 십자군 레반트의 아코성을 프랑스와 영국왕의 참여로 함락하다!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하로렌 공작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
왕국을 건국하는등 레반트에 5개의 기독교왕국이 세워진후........ 45년만인 1144년에
기독교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 모술의 태수 장기에게 점령되자 유럽은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3세 독일왕이 이끄는 2차 십자군이 일어났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2차 십자군이 실패한지 40년만인 1187년 7월 히틴의 뿔 전투 패배로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살라딘에게 점령당하자 성지를 탈환을 위해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니 프랑스와 영국에 독일왕이 참전한 사상 최고, 최대의
군대는 레반트로 진격해서 1189년 부터 1192년 까지 3년 동안 전쟁을 하기에 이릅니다.
지중해 레반트에는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및 티레(티루스) 만 남았는데 살라딘은 티레를
공략하기로 하는데 이 도시는 1차 십자군때도 1124년 베네치아 해군의 지원으로
마지막에야 간신히 차지한 난공불락의 요새인데다가 예루살렘성의 발리앙 이벨린에
템플기사단과 요한기사단에 주인공 몬페라토 후작이 결연한 심정으로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몬페라토가는 1574년에 몬페라토 공국으로 성장해 950년에 베렌가리오가 세운 서 리구리아
변경백국의 일부였으나 몬페라토 지역은 사위 알레라모를 위한 변경백이 되었으며 후손인
코라도 1세는 제3차 십자군의 주요 참여자 중 한 명으로 1191년부터 몬페라토 변경백
이었고 1190년 11월 24일 결혼을 통해 죽기 며칠전 1192년에 예루살렘왕으로 선출됐습니다.
1187년 말에 티루스에 나타난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사십대 후반으로 제노바 서북쪽 몬페라토
후작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프랑스왕이나 독일왕과 인척관계였으며 여기저기 전투에
참가하다 보니 2차례나 포로생활을 했고 비잔틴제국에 갔다가 하틴전투 기독교군의 대패를
듣고는 예루살렘을 방어하려 달려가다가 배가 역풍을 만나는 바람에 예루살렘성이 함락됩니다.
아코와 야파까지 이슬람 수중에 들어가니 어쩔수 없이 레반트에 3곳만 남은 기독교 요새 티루스로
오는데 그는 살라딘에게 패한 경험이 없으니 열등감이 없는지라 자연히 티루스의 지도자로 부상
하니 티루스에 모인 십자군은 그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고 독일황제의 군대가 남하하기 전에 빨리
도시를 손에넣고 싶었던 살라딘은 하틴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코라도의 아버지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티루스 육지쪽을 방어하는 성벽 앞에 노인이 된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가 끌려나왔는데 “그리스도
교인이 티루스에 계속 사는 것을 허락할테니 성문을 열라, 그렇지 않으면 몬페라토 후작을
죽이겠다” 는 것이라.... 이에 아들 코라도는 “어떤 조건에도 티루스를 절대 넘기지 않겠다, 아버지
를 죽이면 우리 가문도 순교자 를 갖게 될 것이다” 라? 그러고는 석궁을 들어 아버지를 향해 쏩니다!
이에 놀란 살라딘은 진영으로 돌아와 늙은 몬페라토 후작을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는데, “요즘 자식들은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고 불평했다나요? 하기사 살라딘 그도 젊었을 때는 아버지 누레딘에게
거역하고 했으니 나이든 살라딘이 신뢰한건 성년이 된 두 아들이 아니라 아우 알 아딜과 조카 타키 앗딘
이라니 그도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살라딘은 늙은 몬페라도 후작을 석방해 티루스로 돌려보냅니다!
결국 살라딘은 티루스(티레) 공격을 단념하고 물러나는데 하틴 전투 당시 포로로 잡았던 예루살렘왕 기
드 뤼지냥도 석방합니다? 장점이라고는 잘 생긴 외모뿐이고 전투 지휘능력은 바닥인 남자를 풀어준
것은 그가 돌아감으로써 그리스도교 진영의 분열을 노린 것인데... 코라도는 지배권을 기 드 뤼지냥
따위에게 줄 생각이 없었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채 몇달동안 성밖에 방치하는 굴욕을 안겨줍니다.
살라딘은 요한기사단이 지키고 있던 “크락 데 슈발리에” 요새도 공략을 시도했다 단념한 적은 있지만
외로운 요새와 십자군이 도착해 상륙할수 잇는 항구도시를 공략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그의 불패
신화에 금이 가게된 사건이니 살라딘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십자군 기세는 크게 오릅니다!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할 생각이었으니 그럼 다시 왕위에 오를 사람은 기 드 뤼지냥
임에도 왕이 갈곳이 없어 난처한 지경에 빠지자, 발리앙 이벨린은 티루스에서 50km 남쪽에
있는 지금은 이슬람 수중에 떨어진 아코(아크레)를 탈환할 생각이 있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의
하는데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국왕과 티레의 영주와의 다툼에 크게 놀랐습니다.
상황을 모르던 그들은 모두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들었으니... 피사에서 온 십자군들이 기 드 뤼지냥
을 따를 것을 맹세하자 기 드 뤼지냥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군대에 발리앙은 무론 템플기사단과
요한기사단을 합쳐 아크레를 공격하는데 피사와 제노바의 해군까지 참가해 기사 7백명과
병사 9천명에 달했음에도 아크레의 수비군은 십자군의 몇 배인지라 공격은 무의미해 보였습니다.
기 드 뤼지냥은 전군을 이끌고 아코성에 도착한게 1189년 8월 28일로 사흘후 시작된 공격은 이후
무려 2년을 끌게되는데.....아코 육지쪽을 에워싸듯 반우너형으로 포진한 그리스도군은 십자를
크게 새겨넣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살라딘은 자기가 살려서 풀어준 예루살렘왕 기 드 뤼지냥
이 설마 자신의 성을 공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 싶습니다? 은헤를 원수로 갚는 것이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엉망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대성공이니 기 드 뤼지냥의 아크레 공격은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부하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이교도에 맞서는 위대한 십자군 기사의 이미지
를 얻었고 감동받은 십자군들이 앞다투어 기에게 합류하면서 코라도는 1190년에는 왕으로
인정했으며...... 10월 7일 독일 십자군 잔여세력 까지 기 합류하면서 기의 군대는 대군이 됩니다.
그해 가을 시빌라 여왕과 두 딸이 모두 사망하면서 기 드 뤼지냥은 왕위를 잃었으니 이제 남은
왕족은 토론의 험프리와 결혼한 이자벨 공주뿐이었는데 코라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자벨을 유혹하여 이혼시키고 1190년 11월 24일 아내로 삼고 예루살렘의 왕위를 요구합니다.
이 시기에 브레멘과 뤼베크에서 온 독일 상인들은 예루살렘 독일 성 마리아 병원을 세웠고,
이것이 수도회로 성장했는데.... 이후 클레멘스 3세 교황의 승인을 얻어 1198년
에는 요한기사단 처럼 군사 조직으로 변모하는데....... 이들을 튜튼기사단이라고 부릅니다.
잉글랜드는 1,2차 십자군에는 국가 단위가 아닌 영주들이 개인자격으로만 참가했는데 12세기
전반까지 영국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제 영국을 통일하고
프랑스내 절반까지를 영국령으로 장악한 헨리 2세는 거국적으로 십자군에 참가
하기 위해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살라딘세” 라는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게 됩니다!
헨리 2세는 프랑스 앙주백작으로 이혼한 프랑스왕비 엘레오노르와 1151년에 결혼한 이후 외조부인
영국왕 헨리 1세가 죽자 1153년 영국으로 쳐들어가 스티븐왕을 제압하고 점령해서 플랜태저넷
왕조를 세웠으니.... 잉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의 앙주백작, 노르망디공작, 엘레오노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와인산지 아키텐과 가스코뉴에 푸아티에등 엄청난 영토를 소유한 군주였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189년 부활절에 출병하고자 했으나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가 부왕이 후계자로 자신이 아닌 동생 존을 앉히려는 걸 알고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편을 들어 휴전 협정을 깨고 헨리를 공격했고 전투 패배 이틀 후인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가 사망하고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로 즉위하니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입니다.
33세의 리처드는 키가 2m에 위엄있는 풍채 근엄한 용모를 지녔으며 대담무쌍한 성격과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휘어잡았고 야전 사령관으로서 괴물같이 강했고 지휘관으로서도 우수하며 전략적인
판단력도 합리적이었으니 리처드는 왕자 시절에 헨리 2세의 명령을 어기고 십자가의 서약을 한
바가 있는데다가 아버지가 살라딘세를 거두어 놓았으니 국왕이 된 그의 앞길을 막을 것은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십자군의 주력이었으니 25세의 필리프 2세는 정치감각이 뛰어났고 우수한 지휘관이자 교활하긴
했으나 리처드에 비하면 형식상 리처드의 주군이긴 했지만 영향력이 부족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봉신인
리처드 보다 동원한 병력과 자금도 적었는데 리처드가 프랑스 내에서는 제후국 군주라 하더라도 아키텐
과 노르망디는 프랑스와 별개 공국이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상관없는 독립국이기에 꿇릴것도 없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훗날 프랑스인들이 고대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프랑스식 발음인.....
“오귀스트(존엄왕)” 라는 존칭을 붙여 주었는데 그는 왕위에 오른후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해
우군이 된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와 힘을 합쳐 상파뉴 백작을 무찌르고 1년 후에는 영국왕
헨리 2세의 도움을 받아 처가인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를 쳐부수는등 왕권강화를 위해 애썼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일국가 즉 중앙집권제 통일국가가 아닌 제후들이 국왕 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가졌던 봉건제국가였기 때문인데.... 플랑드르백작을 무찌른 6년후 필리프는 반란을
일으킨 영국 리처드 왕자와 손을 잡고는 헨리 2세 군대와 싸우는 것이니 프랑스내에 있는 영국왕의
영지 중에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함인데.... 리처드가 너무 크게 이겨버렸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 이전에 헨리 2세와 프랑스 남부 포도주의 산지 아키텐의 상속녀로 프랑스 왕비 였다가
이혼하고 3년 후에는 영국왕이 되는 헨리와 결혼한 엘레오노르 때문에 프랑스 영토에
문제가 생겼고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리처드가 상속받은 프랑스내 영지들은 힘으로
라도 빼앗아야 할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영토확장과 왕권강화가 목적이니 크리스찬으로 2차 십자군을 주도한 아버지 루이 7세와
다른지라 궂이 3차 십자군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으나 프랑스 꾸민들이 반발할 것이고 로마 교황청
이 분노할 것인데... 경쟁자인 영국왕 리처드와 상파뉴백작, 플랑드르 백작, 부르고뉴공작도 참가하니
휴전이 성립될 것이고 저들중 누구라도 죽으면 그 영토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보고 십자군에 참가합니다.
1190년 7월 4일 프랑스왕 필리프와 영국왕 리처드는 2차십자군시 부왕 루이7세가 출정식을 열었던
프랑스 동북부 베즐레에서 출병하는데.... 하필 시골의 외진 마을을 택한 이유는 베즐레 수도원
Vézelay Abbey 이 있으니 아버지 루이 7세 처럼 바로 "막달라 마리아" 에게 의지하기 위함 입니다.
부르고뉴지방의 베즐레 수도원은 성지 순례지로 언덕 위에 있으니..... 9세기에 해적 노르만
바이킹을 피해 내륙의 험준한 언덕에 세워졌으며 서기 860년에 비엔 백작 제라르 드
루시용이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 일부분을 가져와 봉안 했으며 9세기에 남쪽에서 이슬람
무어인 의 침입이 있었고 서쪽에서는 노르만 바이킹 의 침입으로 교회가 불타기도 했습니다.
1050년에 Abhot geoffrey 가 제단밑에 막달라 마리아 유해가 묻혀있다고 주장해 세상에 알려지니
1058년 로마 교황청의 인정을 받아 중요한 성지 순례의 장소 가 되었으며 1104년 수도원이
완공되었으니 수도사 성 베르나르 는 1146년 이 교회에서 2차 십자군 원정을 설교 했으며
1166년 토머스 베켓은 설교중 영국왕 헨리2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고 명성이 높아졌던 것입니다!
1190년 7월 4일 두 왕의 군대는 베즐레를 출발했으니 로렌강을 따라 지중해에 이르자 필리프는
제노바에서 함대와 식량을 확보한 후에 따로 출발했지만 리처드는 자신의 함대가 포르투갈
에서 이슬람 교도들과 싸우는 것을 마르세이유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다 지쳐 마르세이유
에서 직접 함대를 구해서는....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이동해 자신의 함대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프랑스왕인 필리프 2세가 자국인 마르세유에서 함대를 구하지 못하고 멀리 동쪽으로 행군해서는 남의
나라 제노바에 가서 함대를 구한 것은 프랑스왕의 힘이 프랑스 남부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데...
프랑스 남부는 인접한 서쪽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공작 영국왕 리차드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컸기 때문
인데 그 외에도 지중해를 건넘에 있어 제노바 함대가 프랑스 함대보다 훨씬 더 우수한 탓도 있었습니다.
이때 리처드의 영국선단은 북해와 도버해협을 오가는데 적합한 바이킹에서 유래한... “스넥카스”
형태의 배로 튼튼해 무거운 범선이라 해상 전투에서는 쓸모가 없었지만 레반트와 예루살렘성
을 공격하기 위한 “조립식 투석기와 공성탑에 둥글게 깍은 돌포탄”을 운반하는데는 더 유리
했기 때문으로 보는데 실제 1,2차 십자군이 저걸 현지에서 만드느라 무진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새 국왕 탕크레드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싸움
이 붙었으니 시칠리아의 전 국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의 여동생 조안이었는데
리처드는 그녀가 시칠리아로 가져간 지참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이 싸움에
끼어드니 탕크레드는 이를 지체했고 분노한 리처드는 10월 4일에 우선 메시나를 점령합니다.
필리프 2세가 출발 전에 모든 공로를 반으로 나누자고 한 서약을 들먹이며 상속분의 반을
요구하는데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제3자가 남의 재산 분쟁에 나타나서는 내놔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는데 탕크레드는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지참금을 돌려주었는데
필리프의 지참금 분할 요구에 리처드는 조안의 몫을 챙겨줘야 한다며 3분의 1을 주었습니다.
리처드와 잉글랜드군은 메시나인과 불화를 일삼았고 메시나인들의 지지를 받던 필리프 2세가
그들의 편에 서자 귀족들까지 나서 둘을 화해 시켜야만 했는데 그후 리처드가 먼저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라와 일방적으로 파혼하고,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 약혼
하자.....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와 리처드 사이를 이간질할 간계를 꾸몄지만 곧 탄로납니다.
이 일로 필리프 2세는 파혼 배상금 1만 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하고 두 왕은 아델라의
지참금이었던 벡셍과 지조르에 관한 협약을 맺었으니 1191년 3월 30일에 필리프
2세는 아크레로 출항했고 리처드는 자신의 함대가 도착하자 4월 10일에 출항합니다.
아크레에 도착한 필리프 2세는 티레 영주 코라도와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놓고 다투는걸 보고
필리프 2세는 대부분의 영주들의 지지를 받던 코라도의 편을 들었고 바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성전 무기를 조립하며 공격 준비를 끝마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렸습니다.
한편 리처드는 폭풍우를 만나 20척이 넘는 배들을 잃었는데 난파한 사람들을 키프로스의 지배자
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억류하고 재물을 빼았았으니 이사키오스는 용케 난파를 피한 조안
과 베렝가리아도 포로로 잡으려고 했지만 현명한 여인들은 이사키오스의 상륙 요구를 거부합니다.
분기탱천한 리처드가 함대를 이끌고 자신의 재물과 사람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듣지않자
리처드는 키프로스군을 격파하고 이사키오스를 배신한 영주들과 합세해 키프로스를 삽시간
에 점령하자 이사키오스는 쇠고랑을 채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리처드는 약속을
지켜 그에게 은고랑을 채웠다나요? 이후 키프로스 는 400년간 서유럽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리처드는 키프로스가 전략 요충지라는 것을 깨닫고 3차 십자군 원정 내내 키프로스에서 물자를
공급받고 무거운 세금을 물렸으며 키프로스에서 기 드 뤼지냥왕의 방문을 맞이하니 기 드
뤼지냥은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 전에 푸아투에서 쫓아낸 사람이 리처드였는데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와 필리프 2세가 콘라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도 리처드는 기를 지원하기로 합니다.
살라딘은 하틴전투에서 포롤로 잡은 예루살렘왕 기 드 뤼지냥을 살려서 풀어주었는데 티루스
성주 코라도가 입성을 거부하자 발리앙 이벨린의 제안을 받은 뤼지냥은 오갈데 없는
몸이라 기사 7백명과 보병 9천명으로 1189년 8월말에 아코성을 공격하는데 2년을 끌게
되는 공성전에...... 이후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들은 자연히 아코성 공격대열에 합세합니다.
유럽에서 온 십자군 중에서 1진은 덴마크와 네델란드, 스코틀랜드와 벨기에 출신들 1만으로... 도중에
스페인에 상륙해 이슬람 무어인과 싸우다가 오느라 5천이었으며 2진은 아벤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북부 병사들로 아코에서는 말레데타문 앞에 진을 쳤으니 나중에 총사령관 역할을 하게 되며 제3진은
보베 주교가 인솔하는 프랑스, 영국, 플랑드르및 독일 기사들로 템플기사단 진영 옆에 진채를 세웁니다.
그러자 티루스 영주인 몬페라토의 코라도 후작도 전투 개시 1개월 후인 9월에 티루스
주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을 이끌고 아코(아크레) 탈환전에 참가하는데 이는 십자군
에게 티루스로 부터의 보급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비로소 살라딘도 전투에 참여
하는데 독일과 영국에 프랑스오아들의 군대도 곧 레반트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아코는 오직 남쪽에 항구가 열려있으니 피사와 제노바 및 베네치아의 선단도 남항으로 진입을
시도하지만 이슬람 수비군은 항구 입구에 굵은 쇠사슬을 드리우고는 기독교 함대의 진입을
저지하는데 2년전 하틴전투때 기독교군이 충진한 곳이 아코이니 십자군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건설한 항구를 공격하느라 총력전을 펼치니 이슬람측 보급선의 진입을 차단하는데는 성공합니다.
보급이 어려운 것은 물론 통신도 힘드니 이슬람측이 쓰는 전서구 비둘기는 산이나 들은 멀리 날아가지만
적과 아군이 피터지게 싸우는 전장 바다위를 나는데는 능숙하지 못하니..... 사람이 작은 배로 기독교
함대의 눈을 피해 접근해서는 바다를 헤엄쳐서 왕래할 수밖에 없으니 물자 보급은 점점 더 힘들어 집니다.
프랑스왕 필리프는 1191년 4월 20일 아코에 도착했는데 비해 영국왕 리차드는 1191년 6월 8일
이슬람 범선을 나포하면서 들어왔는데.... “키가 크고 외모가 우아하다, 머리칼과수염은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이고 눈은 깊은 푸른색, 두팔은 늘름하고 길어서 허리에서 무거운 장검을
휘드르며 돌격하기에 적합하다, 균형잡힌 육체에 큰 키 사람들 위에 설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리처드와 필리프는 상륙한후 병에 걸려 살라딘과의 탐색전을 벌이는데 둘은 병으로 고생
하면서도 꿋꿋하게 전투를 지휘했으며 6월 7일 리처드는 이슬람 수송선을 침몰시켜
천 명이나 되는 이슬람 지원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고 7월 3일 필리프는 땅굴을
파고 투석기와 공성차를 이용하여 집요하게 아크레 성벽을 공격해 커다란 균열을 냅니다.
십자군은 아크레성벽을 향해 투석기를 쏘았지만 둘글게 다듬지 않은 돌 포탄은 바람의 저항
으로 사거리가 짧은게 흠이었는데 리차드는 배에서 내린 투석기를 조립해 둥글게 다듬은
돌 포탄을 아코 성문을 겨냥해 쏘니 성안에는 혼란이 벌어지는데 그는 자신의 도착을
알릴겸 십자군을 재차 포위하고 있는 외고가 살라딘의 진영을 향해서도 포탄을 날립니다.
십자군을 지휘하게 된 리처드는 이슬람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군으로 뤼지냥의 동생과 요한기사단 및
아벤백작에게 맡기고 아코성 공격군으로 맹공으로 유명한 템플기사단, 플랑드르 백작을 비롯 전군을
투입해 맹공하니 보급이 끊긴 아코성에서 살라딘에게 항복을 허락해달라고 하자 “ 수하에 있는 자들
이 더이상 방어할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경우 그들의 항복을 허락하는 것도 술탄의 책무중에 하나다” 라!
리처드는 하나, 아코성에 잡힌 기독교도는 석방하라 둘, 살라딘군에 잡힌 2천명의 기사와 5백명 포로
를 석방하라 셋, 살라딘 휘하 태수들이 붙잡은 기독교 포로들을 석방하라 넷, 아코성의 이슬람교도
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소지품난 챙겨 나가라 다섯, 술탄은 몸값으로 2만 탈란트에 해당하는 금화를
지불하라 여섯, 지불될때 까지 2,700명의 아코성 이슬람교도들을 억류한다, 일곱, 한달간 말미를 준다.
7월 12일 두 왕은 5년전 빼앗긴 레반트의 요충지인 아크레성을 2년간의 전투 끝에 함락시켰는데 도시
를 점령한 후 두 왕은 대립을 계속했으니 필리프는 키프로스의 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리처드
는 그럴거면 원정기간 필리프가 상속받은 영지도 반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한편 물에 빠져 죽은 독일황제의 차남이 병사한후 오스트리아영주 레오폴드 5세도 잠깐이나마 아크레
성채에 자신의 깃발을 올렸는데 두 왕은 이를 오만한 행위로 보았으니..... 두 왕의 동의로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이 내려졌는데 리처드의 부하들은 그의 깃발을 훼손하여 모욕을 주었고 격분한
레오폴드는 병력을 수습해 귀국길에 올랐고 보복할 기회를 노렸으니 훗날 리처드를 체포하게 됩니다.
필리프는 아크레 함락 직후 병을 이유로 돌아가겠다고 폭탄 선언을 하는데.... 그의 최대 관심사
는 프랑스내 왕령을 확대하는 것이니 먼저 플랑드르백작은 전사했고 상파뉴백작은 리처드
에게 심취했으니 귀국할리 없고, 리처드왕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전 까지는 귀국할 수도
없으며 부르고뉴 공작에게는..... 프랑스 병사들의 지휘를 맡김으로써 귀국할 수 없게 만듭니다.
리처드 왕을 필두로 프랑스 귀족들과 십자군 영주들까지 만류했지만 그는 리처드의 부재 기간
프랑스 내 리처드의 영지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서약서에 서명했지만 귀국
하자말자 곧 거짓말로 드러나는데... 필리프는 돌아가기 전에 예루살렘의 왕위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리처드와 상의하여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대신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로 한 것이니 필리프는 코라도의 티루스를 거쳐 제노바 배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갔는데 중도에
로마교황을 만나 해명했으며.... 부르고뉴 공작은 기병 수백명에 보병 수천명에 달하는 프랑스
십자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십자군을 지휘할 자금이 부족 했습니다.
필리프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저리 급하게 귀국한 것은 프랑스내에 있는 리처드의 앙주등
영토도 욕심이 났지만 십자군에 참가한 플랑드르의 백작이 십자군 원정 도중 급사할 것을
우려했던 점 등을 보아 아크레에서 사망한 플랑드르의 백작이 남긴 프랑스의 영지에 대한
욕심이 컸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중세에는 제후들이 왕보다 더 넓은 영지를 가졌으니 빼앗아야!
리처드가 자금을 떠맡았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을 다 통솔하게 되는데 리처드는 필리프가 떠나자마자
그가 코라도에게 양도한 전리품과 수비대 포로들을 빼앗았고..... 코라도는 이 처사에 화가 나서 마음
대로 하라면서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라는 권유에 응하지 않고 티루스(티레)에 머물게 됩니다.
필리프외에 전장을 이탈한건 리처드에게 모욕당한 오스트리아공작 레오폴트니 리처드의 지휘 아래
싸우기는 싫었던 모양인데 하지만 그는 병사들은 남겼으니 이들 독일 기사들은 “튜튼 기사단” 의
핵심이 되는데 이유중에 하나는 레오폴트가 돈은 남기지 않았으니 전비를 내줄 사람이 없는지라
종교기사단을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유럽 여러나라에서 인력과 돈을 원조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라딘은 예수 십자가와 1천명의 기독교도 포로를 반환하고 20만 디나르의 몸값을 내는 조건으로
리처드가 사로잡은 수비대 2,700명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고 리처드는 이를 수락했지만 살라딘은
예정된 날짜까지 돈을 주지 않았고 화가 난 리처드는 살라딘이 보는 앞에서 포로들을 학살하자
살라딘도 분노해 8월 27일 케사리아에서 사로잡은 십자군 포로를 여자를 제외하곤 모두 처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