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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쌀쌀하지만 파란가을하늘이 생각나는 좋은 아침입니다.
연말이 다가오니 다들 바빠지시는 것 같습니다.
게시판만 봐도 그 기운(?)이 느껴지지요. ^^
아침에 제 이메일로 온 장영주에 대한 글이 왔길래 이 곳에도 옮겨 봅니다.
영화개봉하면 영화배우들이 이 프로그램, 저프로그램 기웃거리며 영화홍보 하는 것처럼
다분히 음반홍보성이 짙지만 장영주에 대한 근황과 음악관 등 읽을거리가 있네요.
그럼 따뜻한 차와 함께 좋은 하루의 문을 여시길 바랍니다.
맨얼굴의 '사계'로 돌아온 장영주를 만나다
- 예스24(http://www.yes24.com) 글 / 류화선
무대 위의 서 있는 장영주는 당당하다. 열정적이면서도 범접하기 힘든 차가움이 전신을 감싸고 있다. 바이올린을 켜는 그녀는 단단하게 뿌리내린 거목처럼 무대 한가운데 솟아 있었다. 무대 밖에서 본 장영주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여자로 보였다. 의외로 몸매는 가냘프고, 목소리는 귀여웠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짧은 손톱, 화장한 얼굴과 달리 거칠어 보이기까지 하는 손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다웠다.
장영주는 아홉 살 때 첫 앨범 『데뷔』를 낸 후 지금까지 매년 한 장 이상의 앨범을 꾸준해 냈다. 정통 클래식에서 『Phantasia』와 같은 크로스오버 앨범까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 장영주의 열여덟 번째 앨범 『사계』는 처음으로 녹음한 바로크 앨범이었고, 처음으로 지휘자 없이 연주한 앨범이기도 하기에 여러모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오늘 오전에 ‘무릎팍 도사’ 녹화를 했다고 들었다. 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처음이 아닌가?
옛날에 ‘서세원쇼’ 나간 후로는 처음이다.
어땠나?
깜짝 놀랐다. 나는 여기 살지 않으니까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몰랐다. 굉장히 이것저것 물어보더라. 춤도 췄다.(웃음) 내가 나온다고 로고송을 클래식으로 했다. 한국말에 자신이 없어서 출연을 처음엔 고민했다.
한국말 굉장히 잘하는데.
아니다. 한자어는 잘 모른다. 그래서 한국어 인터뷰 힘들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으니까 영어가 편하다. 부모님과 한국말을 하니까 의사소통에는 불편이 없는 정도다. 한국 관습 같은 것도 잘 몰라서 ‘이건 왜 그래야 돼?’라고 물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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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를 레코딩한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어땠나?
오르페우스와 같이 연주한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오르페우스는 굉장히 결속력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팀이다. 프로페셔널하고. 레코딩하기 전에 투어를 같이해서 단원들하고 친해지고 편해졌다.
전체적인 리드는 장영주 씨가 맡았다고 들었다.
내 첫 리더 작업이다. 리더이긴 하지만 오르페우스 멤버들과 모두 상의해서 곡을 레코딩했다. 나를 비롯한 모든 멤버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말한다. 다른 오케스트라는 리허설만 몇 번 하는데, 오르페우스는 굉장히 이야기를 많이 한다. 좋은 공부가 되었다.
‘사계’같이 대중적인 곡을 레코딩하는 건 부담스러운 점도 분명히 있을 텐데. 더 이상 새로운 사계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같은 건 없었나?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해석으로 연주를 한다. 비발디가 쓴 소네트를 꼼꼼히 읽고 오르페우스 단원들과 의논하면서 곡을 레코딩했다. 비발디가 쓴 스코어 그대로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전체적으로 담백한 느낌이다. 특히, 2악장에 신경을 썼다. 사계의 2악장은 무척 아름답다.
많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다. 특히 좋아하는 오케스트라는 어딘가?
베를린 필. 최고다. 베를린 필은 젊다. 단원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도 있다. 연주만 잘하면 국적이든 나이든 상관없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그에 비해 빈 필은 공연을 보면 알겠지만 머리가 하얀 분들이 많다. 빈 필의 단원 중에는 라스트 네임(last name)이 같은 사람이 많다.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연주한다.
그렇지만 역시 필라델피아 필하모닉에 특별한 애정이 있다. 데뷔는 뉴욕에서 했지만 필라델피아는 바로 집 앞에 있는 오케스트라라 연습할 때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온다. 필라델피아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관객이나 단원들 중에 아는 사람이 많다. 정겹다. 처음 운전을 가르쳐준 오빠가 아직도 단원으로 있다. 언젠가 연주를 마치고 사인을 하는데 ‘사라가 태어날 때 내가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의사분이 있어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엄마가 보시고 옆에서 맞다고 하시더라.(웃음) 필라델피아와 연주하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
공연 스케줄은 어떻게 잡혀 있나?
미국와 유럽이 오십 대 오십으로 보면 된다. 지리상으로 보면 유럽과 아시아는 그리 멀지 않은데 오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한국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힘들더라도 꼭 오려고 한다. 내게는 참 소중한 무대다. 한국에서의 공연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공연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다르다. 별일이 없을 때는 보통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연습한다. 연주 여행을 다닐 때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 시간씩 몇십 분씩 계속 연습한다.
연습을 즐기는 타입인가?
아니. 연주가는 운동선수와 똑같다. 연습은 연주를 위해 꼭 필요한 프로세스다. 굉장히 프라이빗한 부분이기도 하고. 무대에 올라가 연주하는 걸 즐긴다. 대가도 연습을 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장영주 씨에게 아무도 천재라고 하지 않는다. 천재라는 소리를 안 듣게 되니 기분이 어떤가?
시원하다. 그런데 이런 걸 자꾸 물어보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 것 같다. 천재 출신 장영주인 셈인가?(웃음) 천재라는 수식어가 나쁜 라벨은 아닌데, 어쨌든 라벨은 라벨이지 않나? 어릴 때 데뷔를 하고, 앨범을 내서 아직도 그때의 ‘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좋은 음악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재’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연주의 퀄리티 말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 번도 내 나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연주했던 분들과는 지금도 함께 연주하는데, 내가 아홉 살 때나 스무 살 때나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분들에게 나는 그저 ‘사라’다. 그래서 편했다. 좋은 것도 많았다. 어려서부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과 어울리다 보니 지나치게 조숙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나이 또래의 정신연령과 비슷해진 것 같다.
그래도 어릴 땐 성인 연주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게 힘들 때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오히려 스트레스 같은 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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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곡에 도전할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나?
나는 새로운 곡에 도전할 때 다른 사람의 연주는 절대 안 듣는다. 일단 곡 전체 구석구석 읽는다. 그런 후에 인스퍼레이션, 영감이 떠오르는데, 그 영감을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다.
『Phantasia(오페라의 유령 환상곡)』 같은 크로스오버 앨범도 있지만 지금까지 정통 클래식을 줄곧 고집해왔다.
크로스오버 앨범은 그전부터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기획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거절했다. 『Phantasia』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워낙 좋아했고, 기획도 마음에 들어 듣는 순간 ‘OK, 저 할게요.’라고 했던 경우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정통 클래식이 좋다. 정통 클래식은 음악적으로 솔직한 것 같다. 꾸밈없이. 내가 배운 것도 정통 클래식 연주였다.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내가 제일 편하고 연주하면서 즐기는 레퍼토리다.
세계 곳곳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니 참 좋겠다.
그렇지 않다. 세계 곳곳으로 다니지만 그곳을 즐길 만한 시간은 없다. 연주 장소에 도착해 2~3회 리허설 하고, 저녁에 연주하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나는 일정이 많다. 한국에서도 그런 적이 많아서 친구와 친척들을 연주회가 끝나고 밤늦게 볼 때가 많다. 마일리지만 엄청 쌓인다.(웃음) 마일리지 재벌이다.
오페라 가수들은 한곳에 한 달 이상씩 머무르면서 공연을 하니까 부엌 딸린 아파트를 빌려서 요리도 하고 사람들 만나서 술도 마시고 도시도 여행하는 게 가능하다. 솔리스트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페라 가수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공연 일정이 정말 살인적이다.
쉬지 못하는 타입이다. 이미 2~3년의 공연 일정이 다 잡혀 있고, 레코딩은 그것보다 더 나중의 것까지 잡혀 있다. 연주가들 중에는 공연 전 2~3일 정도 적응기간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차라리 그 시간(적응기간)에 다른 연주 일정을 잡는 걸 더 선호한다. 연주가들은 보통 여름에 쉬는데, 나는 아스펜(아스펜 국제음악제)에 가느라 여름에도 안 쉰다. 아스펜에는 매년 빠지지 않고 간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쉴 예정이다. 동생(첼리스트 장영진)도 여름에 보고 못 봤다. 1년에 8개월에서 10개월은 항상 외국에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지금껏 슬럼프라는 게 없다. 정확히 말하면 슬럼프가 생길 틈이 없다. 하루하루의 기복, 그러니까 오늘 연주한 것 중에 이건 싫었다, 저건 그랬다 정도는 있지만.
매년 쉬는 것도 포기하고 아스펜에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실내악을 할 수 있다. 내 공연 일정을 보면 알겠지만 실내악보다는 독주, 협주를 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아스펜에 가면 협주를 하는 조건으로 실내악을 할 수 있다. 나는 실내악에 애정과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실내악 공연을 많이 할 수 없어 아쉽다.
연주 여행 중에 힘든 일은 없나?
독주회의 경우 피아니스트랑 단둘이서 한 달에 20일 이상 연주할 때가 있다. 나도 인간이고 피아니스트도 인간이다.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좋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악화되어 싸우고 연주가 끝날 때쯤 마음이 풀릴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와 감정이 안 좋으면 연주도 잘 안 나온다. 신기하게 연주에 다 나온다. 그럴 때 힘이 든다.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는 협주는 어떤가? 지휘자와 곡 해석 차이로 싸울 때도 있나?
당연히 있다. 나는 자기 의견이 강한 편이다.
음악 해석으로 싸운다니 듣기에는 퍽 로맨틱하다.
실제로는 절대 절대 안 그렇다. 얼마나 불편할 수 있는데…. 예전에 사이먼 래틀과 시벨리우스를 연주했는데 나와 전혀 다른 방식을 원했다. 그래서 두 번째 리허설부터 그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던 적이 있었다.
사이먼 래틀은 어떤 지휘자인가?
굉장히 열려있다. 아이디어가 많고, 에너지가 많고, 자기 의견이 강하고.
둘이 많이 닮은 것 같다.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자기 의견이 강하다는 점이 특히 닮았다.
그런 타입들은 만나면 잘 싸울 것 같은데….
사이먼 래틀과는 싸운 적은 없다. 사이먼 래틀과 녹음한 앨범은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앨범이다. 의견이 강한 사람과 일을 하면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거나 서로 설득시키기 위해 굉장히 긴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있긴 하다.
사이먼 래틀 뿐만 아니라 얀손스, 도밍고 등 유명한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를 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나?
다들 무척 재미있고 천재적인 분들이다. 사실 이분들이 진짜 천재다. 이분들은 나를 항상 나를 대등한 음악적 파트너로 대해주셨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도밍고와 『Fire & Ice: 카르멘 환상곡』을 녹음할 때. 도밍고는 녹음을 하다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코멘트를 하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웃음)
마스터클래스도 몇 번 했는데, 가르치는 일은 어떤가?
정말 힘들었다. 가르치는 일은 또 다른 아트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될 소질이 없어 보인다.
가끔 본인의 옛날 레코딩을 듣는가?
절대 안 듣는다. 누가 틀어 놓으면 도망간다.
옛날에 녹음했던 곡을 다시 레코딩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 예를 들어,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것.
욕심은 있다. 언젠가 다시 내고 싶다. 그렇지만 아직 녹음 안 한 곡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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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비발디: 사계』)은 첫 바로크 음악을 레코딩한 것 같은데… 앞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갈 예정인가? 아직 바흐나 베토벤 레코딩은 없는 걸로 아는데.
베토벤은 공연에서는 가끔 연주한다. 바흐는 언젠가는 하겠지. 아주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나이가 많이 먹은 후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지금 내고 싶은 앨범은 브루흐다. 아직 브루흐를 안 냈다는 걸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
독립했나?
부모님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다. 1년에 8개월 이상을 밖에 있어서 독립을 해도 별 의미가 없다.(웃음) 일 년 중 백 일을 비행기에서 잔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하는 한국 음식 냄새가 난다. 그때 ‘아, 집에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 내가 제일 한국 사람 같다. 한국 음식 냄새를 맡고 그리움이 느껴질 때. 그런데 김장김치는 잘 못 먹는다. 떡볶이나 냉면, 오이소박이를 잘 먹는다.
일 년의 대부분을 외국에 있어야 하는데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나?
뭐든 잘 먹는다. 연주자들 중에서는 불쌍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지금까지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
스케줄 관리를 혼자서 한 지 오래됐다고 하던데.
꽤 오래됐다. 처음 할 때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스케줄을 잡았지?’라고 싶을 정도로 무리하게 일정을 짜서 고생한 적도 많았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다 내가 알아서 하길 바라셨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파이낸싱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한 해 얼마를 벌고, 어떻게 투자하고, 돈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래도 아직 잘 모른다. 복잡하기도 해서 대충만 알고 있다. 쓰는 건 잘한다.(웃음)
처음 데뷔했을 때는 연주하면 돈을 받는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도 얼마를 버는지 잘 모른다. 돈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돈 때문에 연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돈에 구애되기 시작하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음악적으로도 제약을 받는다.
지금 음악 하는 사람으로 제일 고민하는 건 뭔가?
밸런스 잡는 것. 지금은 주로 솔로로 활동하는데 나는 실내악처럼 팀으로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데 시간이 없다. 챔버 뮤직 너무 하고 싶다. 지금의 정통 클래식 레퍼토리 말고도 현대곡(현대 작곡가들이 작곡한 협주곡)도 연주하고 싶다. 이런저런 하고 싶은 것들의 밸런스를 잡는 것을 제일 고민한다.
모델로 삼는 음악가가 있는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그분의 레코딩을 정말 좋아한다. 생긴 건 씨름선수 같은데 그분이 내는 소리는 정말 아름답다. 그분의 브람스, 그분의 쇼스타코비치. 무척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