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보병장교의 교육요람 육군보병학교
"무등산 정운높이 모인 건아들/ 배움의 한결같이 미덕을 닦아
찬란한 미래의 꿈 성좌와 같이/ 을지문덕 그 정신 길이 받들어
겨레의 방패되리 우리 후보생/ 아~아~ 그이름 불멸의 후보생
우리들 있음으로 조국은 번영하리/ 영광 있으라" (후보생가)
보무도 당당히 이른아침 상무대 정문을 나서는 학과출장 행열, "나를따르라"는
'솔선수범, 진두지휘'의 뜻을 키웠던 곳 육군보병학교, 53년의 시공을 넘어 오늘
육군보병학교 탐방길에 나섰다.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되어 다이아몬드 하나를 어깨에 붙이는 순간
나는 오직 대한민국의 간성으로서 군인정신과 진충보국 일념으로 오직 애국의
소임을 다 하기위해 심신을 연단하고 닦아낸 바로 그 유서 깊고 자랑스런 육군
보병학교!
나의 젊은 청춘은 푸른빛에 숨기고 땀과 인내로 점철된 열정은 오직 조국 수호에
있었다.
잿빛 하늘이 푸른빛에 그을린 내 젊은 날의 청춘을 위로해주듯 안개는 발 뿌리에
채였고 아침잠에서 깨어나듯 보무도 당당한 함성이 조각해놓은 듯 그 모습 육군
보병학교의 정문을 지나 본청 앞에 이르는 동안 유동병력 단 한명도 없는 고요한
교정에서 면학의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본관에 도착, 대기하고 있던 안내장교(소령)가 유일한 유동 장교로서 반갑게 마중해
주었다.
갑종 간부양성의 요람 광주 육군보명학교는 1950년 1월 1기 배출을 시작으로
1969년 8월 230기까지 4만 5천 424명의 육군 간성을 배출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중추적 지휘 통솔의 근간과 역량을 발휘 해 왔다.
특히, 개교 초기 6.25남침 전쟁발발로 적 남침을 저지하기위해 최전방 일선에서
"나를 따르라~"는 진두지휘 정신으로 무장한 초급장교들은 백병전과 육탄전으로
적과 맞서 싸워 조국을 지킨 육군간성을 길러낸 유서 깊은 교육도장이다.
2004년 상무정신(무예를 중히 여겨 숭상함) 상징의 하나로 갑종간부 호국 탑이 제막
되었고 광주 시 상무 동 상무대에서 1995년 이전 하여 새로운 둥지를 튼 이 곳이
바로 전남 장성이다.
월남의 자유수호를 위해 참전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용감무쌍한 기상과 전투기술
을 세계에 떨친 주역 또한 갑종장교의 주된 역할이었으며 월남전선의 주 보급로
19번 도로를 뚫고 638고지를 점령 확보 하기까지 월남 정규군과의 처절한 혈투,
'안케패스작전'에서 육군보병학교가 길러낸 막내 230기 이무표중위와 고 임동춘
대위가 세운 태극무공의 명예로운 훈장이 웅변 해 주고있다.
6.25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해 1,660명이 전사했고, 태극-인헌 등 무공훈장
수훈자가 5,342명에 이르고 있음은 "나를 따르라"는 육군보병학교의 교훈의 전통과 올 곧은
명예를 닦아내고 지키고 이뤄 낸 것이다.
지휘관이 갖추고 닦아야 할 '리더십 연구및 강의'를 담당(초, 고군반)했던 나는 직업
군인(소령) 으로서 명예와 보람과 긍지의 시절이기도 하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펼치는 '위워 솔져스'(2002년)영화에서의 '할 무어'가 "내가
맨 먼저 적진을 밟을 것이고 맨 마지막, 적진에서 나올 것이다."라는 선언을
전설적으로 지켜 낸 것처럼...
지휘관으로서 자질과 근성을 닦고 실천할 수 있는 지휘관 양성-배출의 소명
의식이 충만했던 때였다.
가깝게는 상무대 백일사격장에서부터 멀게는 장성 도하훈련장까지 20여개소의
주요 교육 훈련장을 관리, 점검하며 최정예 간성을 길러내는 육군 장교 교육의
요람으로서의 손색없는 최적 훈련장으로 가꾸고 관리 유지하기 위해 현장으로
분주히 뛰어 다니며 영일이 없었던 그 시절, 전용으로 이용 하던 모터 사이클
굉음이 아련히 들려오는 듯 했다.
한편, 교정 정면에 우뚝 선 새로운 결의와 다짐의 육군보병학교 상징탑 앞에는...
갑종간부 회장명의의 헌화 한 폭이 몇 날 며칠을 지났는지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비 바람에 젖고 스쳐간 흔적을 담은채 비스듬히 누워 있음을 보는 순간, 후배가
끊겨버린 육군보병학교 위상을 맞닥뜨리는 것 같아 마음 허전하고 씁쓸했다.
헌화 할 꽃 한송이 준비하지 못한 내 자신이 후회 되었다.
강당에 들어가 학교소개(영상)를 받고 동춘관을 돌아 탐방하는 동안 이내 마음이
가라안질 않았다.
내 생애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을 조국에 헌신 하기위해 갈고 닦아낸 심신의
도장인데...
조국 대한민국 국방의 발자국을 최선봉에서 열고 닦으며 앞으로 앞으로 오직
정진 해온 보무당당한 걸음만을 계속해온 유서 깊은 전통의 육군보병학교가
아니던가?
역전의 전쟁영웅 40명이 방문한 이날의 육군보병학교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교육도장이라지만 그 적막감은 바로 끊겨 버린 후배양성의 터전이라는 감각에
황량한 광야 같은 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낮선 건물처럼, 왜 그리도 썰렁함이
절여오는 것 이었을까?
수 십 년의 시공 저 너머로 내려놓은 백묵 한 토막, 빛 바랜 흑판 한 자락만 벽에
걸리고 후배 장교들만 모여 준다면 언제라도 진충보국으로 써내려간 내 인생여정
여정에 담고 새겨온 가슴 활짝열고 한 마디 한 구절 절절이 풀어내 주고 싶건만,
층마다 굳게 닫힌 창은 손 길 내밀 기미 보이지않고 뿌연 아침안개 스크린 뒤에
가려진 채 적막함이 흐르고 있음을 섭 해 하노라.
무등산 준령을 넘나들며 4주간의 유격 정규과정을 훈련할때의 진하고 매서운
인간한계극복의 격렬하고 치열한 인내와 끈기, 그리고 도전과 성취의 장벽을
넘고 또 넘어 과정 휘나레의 순서 로프에 몸 매달고 산중턱에서 호수로 내달려
푸른 물결에 내 자신을 내 던지며 4주간의 누적되고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낼때의 그 장쾌함이 자꾸만 몸에 전율되어 오는듯 하였다.
이 유격과정을 거쳐 임관한뒤 다시 보병학교 OAC(고등 군사반 5기)과정에 입교
하게 되는데 2군사령관 한신장군께서 특명한 청년 장교들의 체력이 곧 전투력의
필수 라며 유격정규과정을 추가하는 방침에 따라 훈련 일반과정을 4주 단축하는
대신 정규 유격 4주 과정이 추가되어 또다시 유격과정 4주 훈련을 거쳐야 했다.
나는 그때 한신장군에 대한 반감도 가졌지만 진정한 대한민국의 군인다운군인
임을 알게 되면서 관심을 두었다.
초급장교들은 항상 야전교범 (FM 7-10)을 휴대하고 능숙한 초급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장병들을 잘먹이고 잘입히고 잘재우는 장병 제일주의의 지휘방침을 펼쳤다.
만연한 군내부의 부정부패 척결을 실천했으며 헬기타고 순시하며 불시 부대방문
현장확인(주로취사장)주의로 전력 증진에 힘썼다.
6.25남침 전쟁시에는 '가장 전투를 잘 하는 연대장'으로 꼽혔다.
국가 위기를 바로잡겠다는 신념하나로 어떤 인격비하, 어떤 어려움도 극복했던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 있다면 우리대한민국 국군에는 한신장군이 있다고 생각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며 올곧은 충성스런 군인의 길을 걸으셨던 그분이 전역하고
나서 세인의 관심이 멀어졌지만 가전제품 사업을 크게 일으킨 수하의 부하 한
사람이 청렴, 근검한 성격에 가전제품을 비치하지 못하였으리라고 생각하고
세탁기 냉장고 테레비전을 차에 싣고 물어물어 한신장군 거처를 찾아 간곳은
봉천동 달동네 언덕배기에 허름하고 작은 집에서 살고 있더라는것 (그것도 사위
가 마련해 주었다)
싣고 갔던 가전제품은 하역도 못한채 다시 싣고 돌아왔다는 후문이다.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 국군, 제2 제3의 한신장군은 어찌 하여 찾기조차 어려운
것일까?
탐방을 마치고 귀향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저만치에 서 있는 군용버스의 낡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시동을 건채 대기 중인 군용버스 뒷바퀴의 차체 상당부분이 심하게 낡고 삭아
녹이 슨 상태를...
어찌 하여 육군간성교육에 지원되는 차량 상태가 이 정도란 말인가?
비 까 번쩍거리는 관광버스들은 어디를 가나 지천을 잘도 누비고 다니는데...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아! 슬프다.
2019. 5.4./ 5. 28/ 7. 17/ 9. 29 수정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유성지회
선양위원 김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