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과 ‘그리스도 능동순종’을 부정하는
‘톰 라이트 새 관점 내용’으로
‘톰 라이트 새 관점 구원론’과 싸우시는 서철원 목사님
朴埰同 (2019.03.14. 23:38)
알미니안 신학 아류로서 이른바 “새 관점” 구원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행위(생명)언약 개념과 그리스도께서 능동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의 전가 개념’을 부정합니다. 물론, 새 관점 구원론과 싸우시는 서철원 목사님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행위(생명)언약 개념과 그리스도께서 능동순종으로 얻으신 의의 전가 개념’을 부정하십니다. ‘아담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영화로운 상태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주장을 {하나님의 구속경륜}에서 부정하시며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아담을 만드셨다.’고 주장하십니다. 그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 됨”입니다. 서철원 목사님께서 새 관점 구원론이 주장하는 내용으로 새 관점 구원론과 싸우시는 ‘참으로 기이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광주: 성문당, 1989)’ 17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성에 도달한 존재가 아니고, 자기가 도달해야 할 길 시작에 서 있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존재로 창조됐음으로 행위언약을 체결해 하늘의 그리스도에게 인양하려고 하셨다고 이해하는 전통적 언약 사상은 성경 계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 아니고, 영생은 하나님 백성으로 그분 법대로 사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봐야 옳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심으로 자기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왕이 되셔서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들 봉사를 받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특별조물로 곧 하나님 복사물로 지으셨다.
다음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서울 에클레시아북스 2016)’ 22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 만드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가 돼, 그들 자신의 예배와 찬양을 통해 세계 전체의 예배와 찬양을 집약해야 했다. 이것은 “행위언약”이 아니라 ‘소명’언약(covenant of vocation)이다.
다음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351쪽~353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파이퍼 문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계승자 중 일부를 (절대 전부는 아니다) 추종해, 예수의 완전한 순종(십자가상의 죽음과 같은 ‘수동순종’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능동순종’)이 이러한 안전의 기초라는 전제를 통해 이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예수는 ‘율법을 성취해서’, 율법에 기초를 둔 ‘의’의 보고를 쌓아 올렸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의’가 없으며, 쌓아 놓은 법적인 공로도 없고, 선한 행실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쌓아 올린 보고로 피할 수 있다. 내가 파이퍼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런 설명은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그 순종이 예수의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암시, 더구나 모세의 율법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로마서 5장에서 살펴봤듯이 예수의 ‘순종’(빌립보서 2장 8절을 상호 참조하는 로마서 5장 19절)이 반영하는 실제는 이사야서 종의 ‘순종’과 일치하는 예수의 죽음이란 성취다. 율법은 그 단계에서는 단역배우가 돼(롬 5:20), 전체 과정에 새로운 굴곡을 더하기는 해도, ‘능동순종’(예수의 이 순종에 힘입어 의가 쟁취된다고 생각된다.)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중략)…
따라서 예수는 ‘율법에 순종했으며’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의’를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생각이 내가 속한 전통을 포함해 그 아무리 경건한 개혁주의 전통 주장이라 해도, 명백한 범주 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