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조명 1/김이랑
뜨개질/한경희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했다.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갇혀 온 방을 떠다닌다. 내 유년의 엄마가 햇빛 드는 창가 쪽에 앉아 뜨개질을 할 때도 그랬다.
먼지는 엄마 손끝에서 머리까지 이리저리 부유했다. 엄마는 해가 떨어질 때가 돼서야 숙인 고개를 들었다. 뜨개질을 멈추면 엄마 주변에 갇혀있던 먼지도 풀려났다.
책상 후미진 곳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무늬가 새겨진다. 그 무늬에는 어떤 과거가 갇혔을까. 밤사이 풀려난 먼지는 내 낙서 위에 고요로 덮였다.
그는 목이 유난히 길고 추워 보였다. 나에게 여섯 살 때 헤어진 엄마 이야기를 했다. 내 손으로 감쌀 수 없는 그의 목에 꼭 맞는 목도리를 뜨기로 했다. 내가 뜬 목도리가 그의 목을 데워줄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훈훈해졌다. 절로 손이 빨라졌다.
벌집무늬는 난해하다.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무늬가 흐트러진다. 틀린 코를 풀어 다시 바늘대에 끼우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코를 마무리했다. 목도리를 내 앞자락에 펼쳐보았다.
엄마는 뜨개질 도중에 간간이 나를 불렀다. 미완의 뜨개옷을 내 가슴에 대어보며 길이를 가늠했다. 한 코로 시작한 스웨터는 날마다 옷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내가 백 점을 맞아 온 날이었다.
“아이고, 우리 딸 잘했네. 일주일만 기다려.”
엄마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엄마는 계획한 일주일을 다 채우지 않았다. 이틀 먼저 내 옷은 완성되었다. 내게 새 스웨터를 입히며 함박웃음을 거두지 못하던 엄마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엄마를 생각하다 벌집무늬가 흐트러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불러 세우고 싶다. 목도리로 그의 목을 폭 감싸고 싶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다. ‘넌 참 좋은 내 친구야.’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감은 눈 속에서만 또렷한 그다. 눈을 뜨면 이내 사라지는 그.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보았다. 길이는 짧고 폭이 너무 넓다. 거울 앞의 내가 목에 깁스를 한 것 같다. 좀 더 따뜻하라고 두 겹으로 떴더니 너무 뻣뻣했다. 마감한 코를 죄다 풀어 되감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늦가을이 되면 집안을 거두는 일 외에는 늘 뜨개질이었다. 내 옷을 뜨는 엄마 주변을 나는 기분 좋게 맴돌았다. 헐렁한 옷 대신 날선 맵시의 스웨터를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엄마는 항상 조금 큰 새 옷을 사왔다. 키가 클 것을 예비해서다. 하지만 뜨개옷만은 내 몸에 꼭 맞게 떴다. 뜨개옷은 되풀어서 다시 짤 수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한 해 동안 자란만큼 내 뜨개옷은 작아져 있었다. 엄마는 작아진 스웨터를 풀어 실뭉치로 감았다. 라면발 같은 실을 끓는 주전자 뚜껑에 끼워 주둥이로 뽑아냈다. 스팀을 받은 털실은 다시 살아 곧게 펴진다. 실뭉치를 풀어주는 건 내 몫이었다.
꽈배기 무늬 유행이 벌집무늬로 바뀌면 내 스웨터는 또 풀렸다. 유행에 쳐진 털옷은 입어 본 적이 없다.
실을 펴는 주전자의 뜨거운 김은 엄마의 가슴에 고인 한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굽이굽이 마음속에 쌓인 한숨은 무엇으로 곧게 펼까.
다시 떴던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그냥 심심해서 떠 봤어. 실뭉치가 굴러 다니 길래……”
그의 덤덤한 표정이 맹꽁이 같다. 그래도 나는 추운 날 항시 그의 목에 감겨있기를, 그리고 잠시라도 내 생각을 하며 목에 두르기를 바랐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목도리 올올에 담았다면 거짓일까.
그날 전화선을 타고 온 그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무섭도록 쿵쾅 찧었다. 그가 긴 여행을 갔다 온 후 처음으로 넘어 온 전화 목소리였다. 즐거운 긴장이 몰려와 내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반가운 김에 내 응답이 떨렸나보다.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들었니?”
“아니 그냥. 저…….”
“아, 그래.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그 친구 전화번호 바뀌었더라. 네가 친하니 알 것 같아서……”
“……으응……”
내 심장은 이내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의 새 번호를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며칠 후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사람이 ‘고백을 했다.’고 설레는 목소리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눈에는 뭍사람들 속에서 그만 보였다. 그가 나에게 건넨 말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다가왔었다. 나는 내 마음의 방 속에 그의 말들을 꽁꽁 가두고 수시로 꺼내어 들었다.
그를 알고부터 무의미했던 내 삶에는 생기가 돌았었다. 의미가 커질수록 그의 방도 커져갔다. 그 방에 푸른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넘실대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때부터였다. 그리움이란 당의정이 내 입 속에 들어온 것은. 달달한 맛에 빠져들었다가 그 쓰디쓴 약의 속살에 치를 떨곤 했다. 다시 뱉고 싶었지만 이미 내 속은 달고 쓴 맛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전화 이후로도 나를 보면 그전과 똑같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내 속의 모든 것들을 금방 비우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는데…….
나는 대바늘이 아닌 코바늘로 자동차 방석을 뜨기로 했다. 엄마에게 일부러 복잡한 무늬를 부탁했던 내 마음을 그는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너무 어려운 무늬였다. 1분 1초라도 설사 그게 그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뜬 만큼 다시 풀어야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 한 줄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늬는 흩어졌다. 생각의 조그만 포말은 파도가 되어 어느새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자동인형처럼 코를 떴다. 절정에 이른 파도가 힘을 다하여 사구(砂丘)를 밀쳐 내고는 바다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또 내 손에는 엉망으로 뒤틀려버린 무늬만 남아 있었다.
방석을 다 완성하기까지 나는 수 없이 풀고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해가 져도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엄마의 뜨게 무늬는 사정없이 흩어졌다. 아빠는 술 속이 좋지 않았다. 술을 마신 날은 집안이 시끄러웠다. 엄마는 돌부처처럼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날의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뜨개질만 하였다. 한숨소리에 실을 엮었다.
엄마는 뜨개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뜨개질을 했다는 걸 나는 방석을 뜨면서 깨달았다. 털실과 바늘대와 손놀림의 반복, 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면 스웨터고 방석이고 무늬는 엉망이 된다.
코와 그 옆의 코가 맞닿아 무늬가 되기까지 나는 실을 짜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짜고 있었다. 점점 머릿속은 비워지고 그에 대한 감정이 다 정리될 때쯤 내 생각의 너비만큼 큰 방석이 완성되었다.
나는 방석을 그의 차에 깔아주었다. 비로소 그를 향한 내 마음도 실려 보냈다. 그에게 방석을 준 후 열네 번의 봄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에게 줬던 방석이 낡기도 전에 그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방안의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걸려 끝없이 떠돈다. 이리저리 부유하다 언제든 내 속에 들어와 뿌옇게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뜨개바늘을 잡을 것이다.
작품 조명
수필은 시와 소설의 가운데 영역에 있다. 때로는 시적 세계에 한쪽 발을 담그고 소설의 형식을 걸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문장으로 보면 15매 단편소설 같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내면의 변화가 ‘뜨개질’이라는 알레고리를 중심으로 잘 짜여진 수필이다.
뜨개질하는 어머니와 어머니 속을 태우는 아버지, 나와 내 속을 태우는 그, 두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작품을 직조한다. 뜨개질은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이다. 작가는 단락을 뭉치지 않고 풀어놓았다. 그래서 전개가 느슨하다. 이를 보완하려 했는지 짧은 문장이 많다. 이러한 구성이 의도되었다면, 작가는 뛰어난 조직력을 가지고 있다.
동사 ‘뜨다’는 행위이다. ‘질’은 그 행위를 하는 모든 몸짓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뜨개질’이 가진 동사와 형용사와 부사가 결합한 한 편의 동영상이다. 행위 곳곳에서 내면이 우러난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루지 못한 꿈이든, 누구나 과거의 무늬를 풀어 새로운 무늬를 짠다. 그 과정은 아프기도 지난하기도 한데, 머릿속에서 잡다한 상념이 먼지처럼 부유하는 시간이다.
화자는 그에 대한 마음을 풀어 목도리를 짠다. 목도리를 그에게 전했으나 그는 화자의 마음을 모르고 화자 친구의 전화번호를 묻는다. 어느 날 화자는 친구에게 그가 고백을 했다는 말을 듣는다. 화자는 그 상실감을 풀어 방석을 짠다. 수 없이 무늬를 뜨고 풀며 화자도 엄마처럼 뜨개질로 머릿속의 생각을 비워낸다. 화자는 방석을 그의 차에 깔아준다. 그는 차에 탈 때마다 '내 생각의 너비만큼 큰 방석'을 깔고 앉을 것이다. 사뿐히 즈려앉고 가시옵소서일까?
뭉쳐진 실을 풀어 마음의 단면을 짜는데, 뜨개질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그 멍울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나오는 ‘잡념’이다. 그러므로 책상 후미진 곳에 쌓인 먼지는 퇴적된 잡념이다. 단순한 동작을 수 없이 반복하는 뜨개질은 행위로 보면 직물을 짜는 동작이지만, 화자에게는 내면에 뭉쳐진 멍울(생각)을 풀어내는 작업이며 잡념을 털어내고 잘 정돈된 무늬를 그리는 내면수행이다. ‘무늬’는 ‘마음의 무늬’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 다른 생각에 빠지면 무늬가 틀어진다. 화자가 직조한 의식의 단면이 스웨터와 방석으로 나타나는데, 그 결말은 슬프기도 후련하기도 하다.
미시적으로 보면 문장의 의미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곳이 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문학성, 작품성, 독창성에 높은 점수를 줘도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