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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시절 그추억 스크랩 실화 겁외사[성철스님의 생가]
실천747 추천 0 조회 15 09.10.20 04:4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성철스님의 생가 겁외사(劫外寺)

소재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세워진 겁외사(劫外寺)는 진리를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스님의
생애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겁외사라는 이름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
하고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스님이 말년에 잠시 머무르시던 부산 거처에 손수 붙여놓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복원된 성철스님의 생가를 외호하기 위해 건립된 겁외사는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다르다.
일주문이 따로 없고 누각을 통하여 겁외사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겁외사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스님들이 정진하는 심검당(尋劍堂). 요사채가 있고 성철스님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겁외사 뒤편에는 율은고거(栗隱古居)라는 이름으로 생가를 재현 했다. 율은고거는 전체적으로 기년관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유물전시관인포영당(泡影堂),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齎), 안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성철스님은 이곳 율은고거 안채가 자리한 곳에서  1912년 음력 2월 19일에 7남매의 장남으로 이영주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이상언이시고 모친은 강상봉이시다.
스님의 집안은 지리산 자락 인근에서 제법 큰 부잣집이었다. 부친이 집안 살림을 잘 키워 사방 1km 이내
에서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지낼정도 였으며, 경호강을 바라보며 대나무 숲을 옆에 끼고 있는 생가 일대
에서 온갖 수확이 많았다고 한다.그러므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성철스님이 태어난 집은 초라한
초가집이 아니라 기와집이다.

성철스님이 태어난 단성은 예로부터 남강(南江)과 양천(陽川) 두 강이 백마산(白馬山), 적벽산(赤碧山),
엄혜산(嚴惠山) 세 산과 어우러져 삼산이수(三山二水)라고 할 정도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묵곡리는 바로 단성의 세 산 가운데 하나인 엄혜산을 뒤로 하고 앞쪽에는 경호강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으로 예로부터 조용한 마을이라하여 묵실이라고 하였다.
겁외사 앞으로 흐르는 경호강은 성철스님이 어릴적 초등학교에 가기위해 나이 많은 급우의 등에 업혀
건너던 강이다.

                          
                            그림 / 김호석

성철스님의 속명은 영주(英柱)이고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차통감(資治通鑑)까지 배운 뒤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영원에서 영원으로(From Eternity to Eternity)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철학, 의학
문학 등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그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한 노스님이 건네 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밝은 햇불을 만난 것처럼
홀연히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깨달았다. 그 길로 지리산 대원사로 가서 서장(書狀)을 읽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무(無)자 화두를 들고 불철주야 정진을 하였다. 정진 40일 만에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였다.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백련암에 주석을 하고 있던 하동산(河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듣도(受戒得度)하고, 이듬해 봄 범어사에서 운봉(雲峰)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4년만인 29세 때,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칠통(漆桶)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시를 ?고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이었다. 그 뒤 여러 선원에서 안거하면서 익히지 않은 음식을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長座不臥)로 고행을 정진하였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였다. 이 결사는 한국불교의 종풍을 바로 세우고 옛 총림의 법도를 되살리는 일로서,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형식과 질서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통영 안정사 골짜기에 초가삼간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고 머물렀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드는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3천배를 시키고, 누구든 스스로 기도하고, 참회하고,
그 공덕을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쳤다. 

1955년 해인사 초대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망을 두르고 절문 밖을 일절 나오질 않았다. 성철불교라고 하는 독보적인 불교 이론과 실천논리가 이때에 확립되었다.
10여 년 동구불출을 마치고 1965년 김용사에서 최초의 대중법문을 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취임하고, 그 해 가을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사부대중을 위해 하루에 두 시간씩 법문을 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이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 종지는 돈오돈수임을 천명하고 현대 물리학 이론을 통해
불생불멸의 진리를 밝히는 대법석이었다. 
18년 동안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무르며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여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다.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총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종단에 안정을 가져
왔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삭발득도하고 성철이라는 법명을 받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하라는 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세수 82세, 법랍 58년이었다.   
      
                                                                   - 성철스님의 생가 책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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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0.20 07:41

    첫댓글 나무 관세음 보살~~~

  • 09.10.20 12:3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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