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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강화 101코스 제2부
하우고개-하우약수터-건평리다목적회관-
이건창묘입구-건평항-천상병귀천공원-노구산-
장지포-삼흥천-강화함상공원-강화파출소
20241009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곳곳에 숨어있는 고려시대의 역사 문화를 찾으며 강화의 마을과 논밭을 거니는 코스
2)관광포인트
- 고려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묘 '강화 가릉'
- 불음도, 아차도, 주문도행 선박이 운행되는 '외포항'
3)여행정보(주의사항)
- 시점 :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156-5 곤능버스정류소 옆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에서 지선 48번 버스 이용, 곤능 버스정류소 하차
- 종점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547-73 강화파출소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31, 37번 버스 이용, 외포리 하차 도보 100m
- 외포항에서는 해산물과 젓갈을 판매하고 있으며 젓갈 수산시장이 있음
- 길이 13.3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
- 주요경로 : 곤릉버스정류소 4.9Km 가릉 2.7Km 정제두묘 2.4Km 건평항 3.3Km 외포항
2.'귀천'의 노을빛 손짓하는 건평포구 하늘
제2부 : 하우고개 삼거리에서 남은 101코스 탐방을 이어간다. 삼거리 바로 아래에 강화나들길에서 조성한 하우약수터&쉼터가 있는데 탐방객의 이용이 많지 않고 강화나들길에서 관리하지 않아서 쓸모없게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로운 영혼들과 들길', '달빛 동화마을' 등의 문구가 적힌 벽화는 퇴색되고 지저분하여 강화나들길 탐방의 새로운 상상력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 하우약수터에서 풍경이 막혀 있는 길을 따라 건평리 들녘과 바다 그리고 석모도 해명산 풍경이 활짝 열리는 곳으로 나왔다. 여기에 자유로운 영혼과 들길, 바다가 있다. 쓸모없는 인공물과 닫혀 있는 길에서 벗어난 이 풍경은 무한한 해방과 자유를 준다. 아름다움이란 표현이 아니라 이런 감각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젖는다.
서해랑길은 동쪽의 양도면 삼흥리와 서쪽의 양도면 건평리를 가르는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이어진다. 바다에 접한 건평리 지역은 바다와 들녘 풍경을 아우르고, 삼흥리 지역은 오롯이 들녘의 황금빛이 물결치며 푸르게 솟은 진강산을 자랑한다. 두 지역을 경계하는 길을 걸어 건평리 양지마을로 들어갔다. 건평리(乾坪里)는 마을 터가 건조한 들이 있는 지역이라서 이 지명이 유래했으며, 건평리 전체를 건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1906년 봄 한 필의 말에 의지해 강화도를 탐방한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건평리를 지나며 이 지역을 이렇게 읊었다. "名是乾坪卽水坪(명시건평즉수평) 이름은 건평(마른들)이지만 물이 많은 수평인가?/ 滿堰春波灌稻粳(만언춘파관도갱) 논둑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 대기가 좋구나./ 且畊且讀諸君子(차경차독제군자) 밭 갈면서 책 읽는 이 모두가 군자이니/ 聊得斯中一味淸(료득사중일미청) 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 고재형(高在亨)의 '심도기행(沁都紀行)'(1906)에서 '건평동(乾坪洞)'. 건평동 지명은 마른들이라고 하지만, 수로에 물이 넘쳐나는 모습에 감탄하며 이 마을의 책 읽는 사람들의 맑은 기운을 칭송하였다. 건평동의 풍요함이 넘치는 물과 책 읽는 사람들을 통해 잘 표현되었다.
건평리다목적회관&양지부락노인회 건물을 거쳐 포도농원을 지나 낮은 언덕을 오르면 건평감리교회 앞에 이건창 묘 가는 길이 있다. 교회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묘까지 거리를 물었으나 잘 모른다고 한다. 너무 멀 것 같다는 생각에 서해랑길을 따라 그냥 통과하였는데, 알고 보니 강화나들길은 이건창 묘를 거쳐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해랑길은 강화 양명학파의 맥을 이으며 조선말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이건창의 묘를 왜 그냥 통과하게 했을까? 이건창 묘를 들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을날 그가 읊은 오언절구 '국화'를 음미해 본다. "誰道黃菊澹(수도황국담) 노란 국화꽃 담박하다 누가 말했나?/ 黃花澹更濃(황화담갱농) 노란 국화꽃 담박한 듯 더욱 짙다네./ 怕人愁寂寞(파인수적막) 근심 잠겨 적막할까 염려가 되어/ 故故發秋冬(고고발추동) 일부러 가을 겨울 골라 피었지." -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국화(菊花)' 근심과 적막의 계절 가을과 겨울은 시대의 풍상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를 이겨내기 위해 노란 황국화는 피어난다는 것인데, 이는 이건창의 마음을 표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개화를 반대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斥洋斥倭主義)로 일관한 것일까?
건평삼거리로 내려왔다. 건평삼거리에는 이건창 묘와 건평돈대 가는 길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건평삼거리에서 북쪽에 나즈막한 산이 노고산으로도 불리는 노구산으로, 노구산 서쪽에 건평돈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2017년 3월 불랑기 모포 1문이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다. 화포 ‘불랑기(佛狼機)'는 "16세기 이후 조선군의 주요 화포이다. 16세기 유럽에서 전해진 서양식 화포의 일종으로 포문으로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통 화포와 달리 현대식 화포처럼 포 뒤에서 장전을 하는 후장식 화포다. 불랑기는 포신인 모포(母砲)와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로 분리되어 있는데, 모포 뒷부분에 자포를 삽입한 뒤 불씨를 점화해 발사한다. 보통 1개의 모포에 5개의 자포가 세트를 이루면서 빠른 속도로 연사가 가능한 것이 불랑기의 특징이다."라고 한다. 이 불랑기가 실전 배치 장소에서 국내 최초로 확인된 것은 건평돈대라고 한다. 건평삼거리에서 노구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건평돈대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탐방은 뒷날을 기약했다.
건평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건평포구 해안으로 나가면 강화나들길 공원에, 가곡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진강산 벌대총 이야기' 게시판, '벌대총 발굽자국' 모형물, 어린왕장 조형물, 건평항 사진 이야기 게시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우리의 대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강화출신의 작사가 한상억과 작곡가 최영섭이 만든 불후의 명곡이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는 서해랑길 최종 코스인 103코스가 끝나는 강화통일전망대에도 멋지게 조성되어 있어 북녘을 바라보며 이 가곡을 부르게 될 것이다. 벌대총(伐大驄)은 '대국 청나라를 정벌하는 총마(驄馬)'를 뜻하는 것으로, 효종의 북벌을 염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명마이다. 그 벌대총의 발굽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는 진강산의 바위를 기(氣)바위라 이르는데, 그 발굽자국 모형물이 건평 해안에 조성되어 있다. 건평항 사진이야기는 강화의 숨겨진 사진 명소가 건평항으로, 천상병 시인이 '귀천의' 시상을 떠오르게 한 건평항의 하늘을 감상하고 사진에 담아 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강화나들길 공원 위쪽 천상병귀천공원에,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시인의 '귀천(歸天)' 시비와 천상병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다. 그의 고통 많은 삶이 '귀천(歸天)' 시 한 편으로 승화되는 것 같다. 천상병 조각상 왼쪽 어깨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천상병 시인의 시 '새'가 날아올라 노래한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천상병의 '새' 전문. 천상병 시인의 달관한 태도가 새의 울음 속에 울음을 자아낸다. 그 울음이 저녁노을처럼 건평항 바다 저편 하늘에 불게 물드는 듯하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千祥炳, 1930~1993)의 '귀천(歸天)' 전문
천상병귀천공원에서 길동무와 함께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건평포구와 천상병 얘기를 나누었다. 굽이치고 서글프고 또 벅차오르고 평온해지고, 가을 오후의 햇살이 건평포구 앞바다에 물결치며 웃음짓고 울음짓는다. 나그네처럼 살다가 사라지는 것, 서해랑길 탐방처럼 그렇게 탐방객으로 살아가는 것, 그럼, 떠나야지. 해안서로를 따라 떠난다. 남쪽으로 마니산 산줄기와 선수포구, 장곶돈대를 가늠하고, 바다 건너 서쪽 석모도의 해명산 산줄기와 석모도 앞 대섬을 거느리고 죽음의 목적지로 향한다. 장지포와 삼흥천을 지나면 양도면 해안의 북쪽 끝 지역인 인산리, 동쪽으로는 진강산과 덕정산이 길손의 반려자나 되는 듯 애정의 눈빛을 보낸다. 내가면 외포리로 넘어오면 북쪽의 덕산과 국수산이 마치 삶과 죽음의 끝처럼 길손을 반긴다. 강화함상공원이 지척에 있고, 서쪽에는 석모도 해명산 산줄기가 바닷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반짝이고, 외포리 해안의 은빛 갈대꽃이 바람에 눈부시게 부서지며 산줄기 그림자에 포개진다. 그 풍경은 삶과 죽음이 합일하는 장엄한 모습이다. 길손 또한 서해랑길 101코스의 종점에서 환희하며 스러질 것이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5.1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13분(휴식시간 포함)
하우고개 삼거리에서 강화남로와 작별하고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양도면 삼흥리 지역을 통과한다.
하일리에서 삼흥리로 넘어오는 하우고개 아래에 강화나들길 쉼터와 하우약수터가 조성되어 있지만 음용수로 사용할 수 없다.
하우약수터 앞에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한시 '霞逸洞(하일동)'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霞峴西南谷谷幽(하현서남곡곡유)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
山中宰相古今留(산중재상고금류)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
二公宅址三公墓(아공택지삼공묘) 두 정승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 있어
云是江州第一區(운시강주제일구) 이곳을 강화도의 '제일구(第一區)'라고 부른다네.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1906)에서 '霞逸洞(하일동)'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주)지엠솔루션 정담을 지나간다.
서해랑길은 건평로155번길을 계속 따라간다. 바다 건너편 석모도에 해발 320m 해명산(海明山)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건평로155번길은 건평리(왼쪽)와 삼흥리(오른쪽)의 경계를 이룬다.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위쪽 언독으로 올라간다. 건평로155번길은 계속 건평리와 삼흥리의 경계를 이룬다.
중앙 뒤에 진강산이 솟아 있고, 오른쪽 움푹 파인 곳이 강화남로의 하우고개이다. 하우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왔다.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이곳으로 걸어와 뒤돌아본다. 오른쪽 양도면 건평리 언덕에 펜션 건물들이 보인다.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전원주택과 펜션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건평로155번길 언덕에서 뒤돌아보면 걸어온 길이 한눈에 보인다. 왼쪽 뒤에 진강산이 솟아 있고, 중앙에 움푹 파인 강화남로의 하우고개에서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이곳으로 올라왔다.
건평로155번길을 따라 왼쪽에 펜션이 있고 오른쪽에 전원주택 있는 언덕을 넘어간다.
양도면 건평리 들녘이 펼쳐지고, 바다 건너 중앙에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 어류정항, 맨 오른쪽에 석모도의 해명산, 맨 왼쪽에 강화군 화도면 내리 장곶돈대가 가늠된다.
앞에는 양도면 건평리 들녘, 바다 건너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이며, 해명산이 우뚝하다. 앞의 산에 이건창 묘가 있다.
건평로155번길을 따라가며 왼쪽의 노구산과 중앙 뒤의 덕산을 어림한다.
산 언덕에 예쁘장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예가 펜션인 듯.
오른쪽 뒤 언덕을 넘어 건평로155번길을 따라왔다. 맨 왼쪽 언덕의 건물은 예가 펜션인 듯.
건평로155번길에서 왼쪽 건평로173번길을 따라 양지마을을 통과한다. 중앙에 노구산, 오른쪽 뒤에 덕산을 가늠한다.
이 마을 터가 건조한 들이 있는 지역이라 건평리(乾坪里)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이라 하여 건평리라 칭한다. 건평리 전체를 건들이라고도 한다. - 인천광역시사
건평로155번길에서 건평로173번길로 들어왔다. 오른쪽 뒤의 건물은 예가펜션인 듯.
건평로173번길을 따라 양도면 건평리 양지마을을 지나간다. 오른쪽 창고 뒤에 건평리다목적회관이 있다
건평리다목적회관&양지부락노인회 표지판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은 건평리 양지마을인 듯.
건평리(乾坪里)는 서쪽으로 바로 서해와 접해 있는 어촌 마을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끝말, 배나들이, 윗건들 마을이 있다. 끝말 마을은 건들 서쪽 끝에 있는 마을이며, 배나들이 마을은 배가 드나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윗건들 마을은 건들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 두산백과
건평로173번길을 따라 건평리 양지마을을 지난다. 중앙에 노구산, 오른쪽 뒤에 덕산(德山)이 보인다.
건평리 양지마을의 비닐하우스 포도농원을 지나간다. 왼쪽 건평교회 뒤에 노구산, 중앙 뒤에 덕산이 보인다.
건평리 언덕에 건평감리교회가 자리한다.
건평감리교회 앞 언덕에서 건평로173번길을 따라온 건평리 양지마을을 뒤돌아본다. 왼쪽 뒤에 잔강산이 솟아 있다.
건평교회 앞 건평로173번길에 이건창 묘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강화 양명학파의 학통을 잇는 이건창의 묘에 가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앞에 노고산이라고도 불리는 해발 104.9m 노구산이 있다.
이건창 묘(李建昌墓) : 조선 후기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영재(寧齋)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이건창은 병인양요 때 순국한 충정공 이시원의 손자로 1852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재(寧齋),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으로 1867년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름을 떨쳤고, 24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문제학, 함흥부의 안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재야에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1898년 6월 18일 47세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혔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당의통략(黨議通略」, 「독역수기(讀易隨記」 등이 있다. - 설명안내판
이건창(李建昌)의 문필은 송대(宋代)의 대가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이며 대시인인 김택영이 우리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최후의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대(全代)를 통해 몇 안 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건창 묘 입구에서 내려와 북쪽을 바라보면 윗건들 들녘이 펼쳐지고 윗건들 마을이 자리한다.
건평로173번길을 따라 해안서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이건창 묘를 들르면 왼쪽 건물 위쪽에서 건평로173번길로 내려오는 듯. 바다 건너 석모도에 해명산이 솟아 있다.
건평로173번길을 따라 '해안서로'로 나왔다. 건평교회에서 이건창 묘를 오르면 건평로173번길 언덕으로 내려오는 것 같다.
'해안서로'로 나왔다. 왼쪽 앞 해안은 건평항, 오른쪽은 해안서로의 건평삼거리, 바다 건너는 석모도 해명산이다.
해안서로는 강화도 서쪽 해안의 도로명이며, 해안서로 동쪽 방향을 바라본다. 도로 오른쪽 해안에 건평항이 있다.
오른쪽 건평로가 해안서로와 만나는 건평삼거리에서 건평로 횡단보도를 건넌 뒤 다시 해안서로 횡단보도를 건너, 해안서로 왼쪽 해안으로 건너간다. 건평로 건너편 노구산에 건평돈대가 있다.
건평삼거리 해안서로 횡단보도를 건너 해안 쪽으로 넘어와서 걸어온 건평로173번길을 뒤돌아본다. 오른쪽 언덕 위에 이건창 묘가 있을 것이며 해안서로 건너편 마을은 건평리 배나들이 마을인 듯.
왼쪽 해안에 강화나들길공원이 있으며, 바다 건너편 석모도에 해명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해안서로를 따라 북진한다.
건평삼거리 도로표지판과 건평항 횟집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 건평항 양도어판장이 있고, 그 뒤 언덕에 이건창 묘가 있을 것이다.
건평항 양도어판장과 횟집들, 언덕 위의 이건창 묘, 맨 오른쪽 뒤에 화도면 마니산이 확인된다.
앞에는 양도면 건평리 건평항, 왼쪽 뒤에 화도면 마니산과 중앙 오른쪽에 상봉, 그 아래 후포항과 선수선착장이 가늠된다.
중앙 왼쪽에 상봉, 그 아래 왼쪽에 후포항, 그 오른쪽에 선수선착장, 산줄기 오른쪽 끝에 장곶돈대, 바다 맨 뒤에 작은 섬 옹진군 동만도와 서만도를 가늠한다. 맨 오른쪽에 석모도 어류정항, 그 뒤의 섬은 주문도일 것이다.
건평리 해안에 강화나들길 공원이 조성되고, 강화나들길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진강산 벌대총 이야기 설명안내판이 강화나들길 공원에 세워져 있다. 벌대총 발굽자국이 있는 바위를 기(氣)바위라 이르는 듯.
6년 동안의 임진왜란이 끝난 후 청나라가 조선을 신하국으로 삼으려 하자 조선은 임진왜란 때 신세를 진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려 사양하였고 이에 청나라는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조선은 다시 전쟁에 휘말린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전쟁은 한 달여 만에 끝나고 결국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었고 이때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고 조공을 바치며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게 된다. 이후 왕에 오른 효종은 항상 청나라를 못마땅히 여기며 북침의 야욕을 품고 그에게 필요한 명마를 강화도 진강산의 진강목장에서 길렀다. 그 중 효종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진강목장의 '벌대총(伐大驄)'이다. 효종은 강화유수에게 특별히 엄명을 내린다. "벌대총'을 기름지게 잘 먹여서 필요할 때에 나한테 올려 보내라" 벌대총은 목장의 문만 열어 놓으면 삽시간에 궁에 달려가 효종을 맞이하곤 했다고 한다.
고려말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한반도에는 북방의 기마민족과 대적할 수 있는 말들을 제주도와 강화도 진강산의 진강목장에서 길러냈다. 당시 경기 우도에는 진강목장 외에도 길상목장·북일목장·신도목장·매도목장 등 5곳에서 1500여 필의 말을 사육했으며 강화는 목장으로서 유일한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국 직후부터 마장의 축조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마장은 국가를 적으로부터 방비하기 위하여 말의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태종은 "강화의 땅으로 온전히 목장을 만들 수 있다면 제주 못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고히 강화의 마장 축조에 적극적이었으며 효중 역시 목장을 확장하고 "태조께서 타시던 팔준마 중 한 마리가 이곳 진강목장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진강목장은 양도면 삼흥리·하일리·조산리·도장리·길정리 전역에 걸쳐 진강산을 중심으로 축조되었으며 말의 물을 먹이던 용정(龍井), 말이 죽으면 묻었던 용팡골, 용마가 났다는 용천(龍川)등이 지명으로 전해지며 진강산 정상의 큰 바위에는 아직도 벌대총의 말 발굽 자국이 선명하게 전설로 남아 있다.
진강산 정상에 벌대총 발굽자국이 있는 기(氣)바위가 있는데, 발굽자국 모형물을 강화나들길 공원에 조성했으며, 그 옆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어린왕자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강화나들길 공원에 어린왕자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그 옆에는 기(氣)바위 모형물이 있다.
어린왕자 조형물 옆에 강화의 숨겨진 사진명소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다 건너 중앙에 석모도 해명산이 솟아 있고, 석모도 왼쪽 끝에 어류정항, 그 왼쪽 뒤의 섬은 주문도일 것이다.
건평포구(건평항)는 강화의 숨겨진 사진명소로, 천상병 시인에게 '귀천'의 시상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천상병의 하늘이 머문 건평포구 : 천상병 시인의 대표 시 '귀천'의 시상을 떠올리게 한 건평포구의 하늘을 보며 시인의 감성에 공감해 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건평항 중천에 떠있는 하늘빛 속살과 맞닿아 있는 시인의 '귀천'은 우리 삶의 여정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한다. 천상병 시인이 말한 하늘, 그리고 우리가 보는 건평의 하늘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잔잔한 노을빛 건평의 하늘을 보며 천재 시인의 '귀천'을 찍어보자. (사진 촬영 : 국제선사진영상센터)
강화나들길 공원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에는 '그리운 금강산'의 악보와 노랫말 표석이 붙어 있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기단에는 '그리운 금강산' 작사가와 작곡가의 약력이 붙어 있다. 두 분 모두 강화군 출신이다.
강화나들길 공원 옆의 천상병귀천공원에는 '귀천' 시비와 '새가 되어 하늘로 돌아간 천상병'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다.
새가 되어 하늘로 돌아간 천상병 : 평생 가난과 시대와의 불화로 고통스러웠을 인생에도 불구하고 '소풍 와서 즐겁게 놀다가 하늘로 돌아간다.'는 그의 마음을 마치 동토의 겨울을 이겨내고 활짝 핀 꽃처럼 천진하게 웃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어깨에 앉아있는 새는 시인이 지향하던 자유정신과 그의 처녀 시집인 <새>를 상징한다. 2017년. 조각가 박상희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歸天)' 시비 뒷면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과 건평항 설명글과 귀천공원 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1.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과 건평항 - 장인성(시인)
경남 마산이 고향인 천상병 시인은 늘 고향바다를 그리워했으나 여비가 없어 가질 못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드나들며 향수를 달래곤 했다. 어느 날, 건평 나루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끄적인 것을 동행했던 고향친구 박재삼 시인에게 건네준 메모가 '귀천(歸天)'이라는 작품이었다. 천상병은 1967년 소위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의 옥고를 겪고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하여 4년여를 떠돌이로 보내다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행방이 묘연한 천상병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박재심이 '귀천'을 천상병의 유작(遺作)으로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천상병의 처녀시집인 <새>가 유고 시집 형태로 출판되었는데,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집이 만들어진 예는 세상에 없는 일이다.
2.귀천공원 조성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국민애송시로 자리한 '귀천(歸天)'의 창작무대인 건평항 언덕에 천상병 시인의 동상과 시비를 조성하고 '천상병귀천공원'이라 한 것은 이곳의 바다와 노을빛을 사랑한 시인의 맑은 문학정신과 강화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도록 기리고 보전하기 위함이다. 2017년 강화군. 기획 : 강화군 수산녹지과/ 조각 및 시비 : 박상희/ 글씨 : 천상병 육필
마니산이 있는 곳은 예전에는 강화도 본섬과 떨어져 있는 가고도였다고 한다. 왼쪽에 마니산, 중앙 오른쪽에 상봉이 있다.
왼쪽에 상봉, 그 왼쪽 아래에 후포항, 그 오른쪽에 선수선착장, 그 오른쪽 끝에 장곶돈대가 있다. 장곶돈대 뒤의 섬은 장봉도일 것이다. 바다 중앙에 동만도와 서만도, 오른쪽 석모도의 어류정항 왼쪽 뒤의 섬은 주문도라고 가늠한다.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강태공들이 낚시를 즐긴다.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산줄기가 이어지고, 맨 왼쪽 석모도의 어류정항, 그 왼쪽 뒤의 섬은 주문도라고 가늠한다.
해안서로 옆 건평리 해안에 천상병귀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천상병귀천공원은 강화나들길 공원 위쪽에 자리한다.
건평포구 앞바다가 펼쳐지고, 왼쪽 화도면 장화리 장곶돈대와 오른쪽 석모도 삼산면 매음리 어류정항 사이로 옹진군 동만도와 서만도가 가늠되며, 장곶돈대 뒤의 섬은 옹진군 장봉도인 듯.
오른쪽 노구산에 건평돈대가 있다고 하는데, 그냥 지나쳐 간다. 2017년 4월 25일 건평돈대에서 조선시대 대표 화포인 ‘불랑기포(佛狼機砲)'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주력 화포인 불랑기포는 16세기 유럽에서 전해진 서양식 화포로, 대포의 포문(砲門)으로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통 화포와 달리 현대식 화포처럼 포 뒤에서 장전을 하는 대포라고 한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8호 건평돈대(乾坪墩臺) :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설치하는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함경·황해·강원 3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여 명을 동원해 80일 동안 쌓은 48개의 돈대 중 하나로 정포보(井浦堡)에 속했다. 석모리 앞바다를 향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가로 36m, 세로 26m의 직사각형 돈대이다. 성안에는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 4문이 갖추어져 있고, 돈대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덧쌓은 낮은 담장을 두른 흔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설명안내판
해안서로 서쪽보도를 따라간다. 왼쪽에 석모도 낙가산, 바다에 대섬, 중앙에 국수산, 맨 뒤에 석모도의 상주산이 보인다.
석모도 왼쪽에 해명산, 중앙에 낙가산, 그 오른쪽에 상봉산, 바다 오른쪽에 동그란 대섬, 그 뒤에 석모대교, 맨 오른쪽 맨 뒤에 상주산이 보인다.
중앙에 해명산, 맨 오른쪽에 낙가산, 왼쪽 끝에 어류정항, 맨 왼쪽에 등간이 보인다.
왼쪽에 강화군 화도면 상봉, 그 왼쪽 아래는 후포항, 그 오른쪽은 선수선착장, 상봉 산줄기 오른쪽 끝에 장곶돈대, 그 뒤에 옹진군장봉도, 그 오른쪽에 동만도와 서만도, 그 오른쪽 앞에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의 남단 어류정항, 그 왼쪽에 등간이 있다.
강화군 화도면의 산줄기를 뒤돌아본다. 왼쪽의 마니산에서 오른쪽의 상봉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의 해명산(왼쪽)과 오른쪽 낙가산과 상왕산, 맨 오른쪽에 대섬을 확인한다.
왼쪽에 대섬, 그 오른쪽 뒤에 석모대교, 중앙에 국수산이 있으며, 바로 앞에는 글램조이 글램핑장이 있다.
해안서로 서쪽보도를 따라서 글램조이 글램핑장 앞을 지나간다.
장지포에서 조망한다. 왼쪽에 대섬, 중앙에 석모대교, 그 오른쪽에 국수산, 오른쪽에 내가면 외포리마을이 자리한다.
장지포에서 내가면 외포리 지역을 조망한다. 덕산 아래에 외포리 마을이 자리하고 왼쪽 뒤에 국수산이 솟아 있다. 외포리 해안 중앙에 함상공원, 그 왼쪽에 외포리 선착장, 그 왼쪽 구릉에 망양돈대와 항몽유허비가 있다.
양도면 건평리 해안서로 삼흥천 수문을 지나며 혈구산 산줄기와 양도면 인산리 들녘을 조망한다.
삼흥천은 양도면 건평리와 인산리를 경계하는 듯. 인산리 들녘 너머 오른쪽에 진강산, 중앙에 덕정산, 왼쪽에 계암산이 보인다.
장지포에서 바다 건너 석모도 해명산과 오른쪽의 낙가산을 조망한다. 맨 오른쪽은 삼산면 석포리 대섬이다.
앞에는 양도면 인산리 들녘이 펼쳐지고 중앙에 진강산, 그 왼쪽에 덕정산(德政山), 맨 왼쪽에 계암산이 보인다. 고려 초에 강주현이라 하여 이곳 인산리 황곡에 현 읍을 두었고, 낙인동과 퇴모산에서 인산리라 명명하였다.
인산리(仁山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리(里)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남서쪽에 작은 산이 솟아 있다. 자연마을은 능미, 별밭, 양지왕방 마을이 있다. 능미 마을은 능이 있었다 해서 능미 마을이라 불리며, 별밭 마을은 황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왕방 마을은 왕방이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호박골 마을은 호박이 잘 되는 마을이라 해서 명명되었다. - 두산백과
양도면 인산리 해안서로 남쪽보도를 따라간다. 왼쪽 맨 뒤의 산봉은 낙조봉, 오른쪽 앞은 혈구산 산줄기라 어림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에서 내가면 외포리로 넘어간다. 해안서로 건너편에 내가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내가면(內可面)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중서부에 위치하는 면이다. 동쪽으로 고려산(436m)을 경계로 강화읍에 접하고 서남쪽으로 바다 건너 삼산면과 접한다. 면의 중앙에 고려 저수지가 있다. 면사무소는 고천리에 소재한다. 『여지도서』에서 내가면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1872년지방지도』에 '내가면'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면의 동쪽은 고려산과 혈구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 지역이며 서쪽은 해안과 연접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면의 서남쪽에 위치한 외포항은 교동, 삼산, 서도의 입 · 출항지로서 여객선과 화물선이 운항되고 있다. 고천리 · 오상리 · 외포리 등 5개의 법정리를 관할한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양도면 건평리 장지포 해안과 인산리 삼흥천 수문을 거쳐 내가면 외포리로 넘어와 양도면 지역을 뒤돌아본다.
내가면 외포리 해안에 왕새우양식장에서 수차가 돌아간다. 앞에 대섬, 그 오른쪽 뒤에 석모도 낙가산, 그 오른쪽에 상봉산, 중앙에 석모대교, 맨 오른쪽에 국수산이 솟아 있다.
외포리 해안의 억새풀꽃 너머로 대섬, 그 왼쪽 뒤에 해명산, 대섬 오른쪽 뒤에 낙가산, 맨 오른쪽에 상봉산이 어림된다.
경인북부수협 아라곳간이 앞에 보이며, 그 뒤에는 망산이라고도 불리는 덕산, 왼쪽 뒤에 내가면 황청리 국수산이 보인다.
해안서로 동쪽 내가면 외포리에 경인북부수협 수산물유통센터와 그 오른쪽에 아라곳간이 있다.
외포리 선착장 아래에 2024년 4월에 개장한 강화함상공원이 조성되었다.
강화함상공원은 1985년 취역이래 34년간 우리 바다를 지켜오다 2019년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퇴역함정 <마산함>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재생하여 2024년 4월에 개장했습니다. 마산함은 1960톤급 한국형 호위함(길이 102m, 높이 27.8m, 폭 11.5m)으로 1984년 10월 진수되어 1985년 7월 취역한 함정입니다. 국산 호위함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였으며 림팩(RIMPAC) 훈련에도 참여했고 해군 최우수 포술함으로 선정되어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는 등 맹활약하다 2019년 퇴역했습니다. 군함 내부공간에는 함장실, 조타실, 전투정보실, 통신센터, 76mm 상비탄약고 등을 재현했고 전함 외부공간에는 76mm 함포 2문, 30mm 함포 4문, 하푼 미사일, 청상어 어뢰, 미스트랄발사대 등을 전시하여 군함의 위용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강화함상공원을 방문하면 군함에서 해군의 생활과 각종 전투장비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강화군 문화관광
강화파츨소로 가면서 강화함상공원을 뒤돌아본다. 왼쪽 뒤에 진강산, 중앙 맨 뒤에 마니산이 보인다.
ㅁ전시내용 : 내부공간 : 함장실, 조타실, 전투정보실, 통신센터, 76mm 상비탄약고 등/ 외부공간 : 76mm 함포 2문, 30mm 함포 4문, 하푼 미사일, 청상어 어뢰, 미스트랄발사대 등 ㅁ관람료 : ·어린이(개인 : 1,000원, 단체 : 700원) ·청소년 · 군인(개인 : 2,000원, 단체 : 1,400원) ·어른(19세이상 69세 이하 : 개인 3,000원, 단체 2,000원) ·노인(50% 감면, 70세 이상) - 강화군 문화관광
인천해양경찰서 강화파출소 건물이 앞에 있다. 강화파출소 입구 옆에 서해랑길 안내도와 10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다.
강화도 남쪽을 다시 바라본다. 앞에 노구산, 왼쪽에 진강산, 중앙 뒤에 마니산, 오른쪽에 상봉이 보인다.
인천해양경찰서 강화파출소 건물 옆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가로등 기둥에 10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강화파출소 옆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있고, 그 앞 가로등 기둥에 10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으며, 중앙 맨 뒤 구릉에 망양돈대가 있다. 외포리(外浦里)는 바깥쪽 포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외포리라 부른다고 한다.
외포리(外浦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리(里)이다. 남쪽으로 바로 서해와 접해 있는 반농반어촌 마을이다.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골말, 넘말, 마루테기 마을이 있다. 골말 마을은 대정 북쪽 골짜기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넘말 마을은 정포 위쪽 등성이 너머에 있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마루테기 마을은 정포의 위쪽 마루터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 두산백과
서해랑길 101코스는 전체 거리 13.4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이다.
서해랑길 101코스를 탐방한 결과, 전체 탐방 거리 15.1km, 전체 소요 시간 4시간 13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101·102코스 안내도 앞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10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102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함께 서해랑길 101코스 탐방 완주를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