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50.7cm 불과하지만 출토지 확실, 기년명 지닌 고려 소종 모본으로 평가
장생사 종.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고려 11세기 범종 가운데 출토지가 확실하면서도 기년명을 지닌 양식적으로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높이는 50.7cm.
고려시대 범종의 새로운 변화 가운데 하나가 통일신라에 비해 종의 규모가 작아지기 시작하는 점이다. 물론 1010년에 만들어진 천흥사종이나 일본 스미요신진자(住吉神社) 범종과 같이 1m가 넘는 대종의 제작도 이루어졌지만 11세기 중엽 경부터 고려 범종은 규모가 축소화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은 크기의 소종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용도가 변화됨에 따른 것으로 추측되는데, 주로 야외에 걸고 치던 종각용 종이 점차 전각 내부로 들어오거나 작은 규모의 법회에 사용코자 그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13세기에 들어오면 소종의 제작은 더욱 늘어나 큰 종보다 작은 종의 제작이 크게 늘어났고 지금 현존하는 소종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려시대 소종에 관해서는 그 크기에 대해 논의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필자에 의해 고려시대 소종(小鍾)이란 명문이 남아 있는 범종의 크기를 조사해 본 결과 고려시대의 소종은 용뉴의 높이를 포함한 50cm 후반까지의 종이 이에 해당됨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소종으로 기록된 범종의 크기는 35~50cm 사이 종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많았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태안2년 장생사명 범종은 총 높이 50.7cm로서 이러한 고려시대 소종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종은 1969년 7월 전남 여천군(麗川郡) 쌍봉면(雙峰面) 여산리(麗山里)에서 출토된 고려 범종으로서 여기에 대한 간략한 글이 <고고미술(考古美術)>에 소개된 바 있다. (이영락(李永樂), '태안2년명 고려동종과 소종 1구'(太安二年銘 高麗銅鍾과 小鍾 1口), 고고미술<考古美術>109호, 한국미술사학회, 1971.3, pp.1-3)
우선 용뉴는 가늘고 긴 역 U자형의 목을 구부린 용두가 입 안에 문 둥근 보주로 천판과 연결되어 있다. 용두의 얼굴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모습으로서 목에는 비늘과 갈기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천흥사종(1010)과 청녕4년 명종(1058)의 용두가 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본 모습과 달리 오히려 통일신라 범종의 양식을 계승한 점에서 복고적 경향을 보인다. 이런 모습의 용뉴는 앞서 소개한 후쿠오카시의 쇼우텐지(承天寺) 종(1065)에 보였던 용뉴 양식으로서 크기만 조금 다를 뿐 형태도 매우 흡사해 주목된다. 용뉴 뒤에 붙은 가늘고 긴 음통에는 대나무형의 마디로 구획해 연화문을 장식했지만 문양은 비교적 단순하다. 천판의 외연을 돌아가며 쇼우텐지 종에도 보였던 복판복엽伏瓣複葉)의 연판문을 촘촘히 장식하였는데 문양은 주조가 잘 되지 못하였는지 뚜렷하지 않다.
장생사 종 용뉴와 음통.
종신은 위가 좁고 배 부분이 살짝 부풀었고 다시 하대 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다가 급격히 직선화됨으로써 둔중한 느낌을 준다. 종신의 상대에는 굴곡진 넝쿨의 당초문과 군데군데 넓은 잎을 지닌 연화문이 시문되었는데, 잎의 내부에 직선과 격자를 사용한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꾸몄다. 이에 반해 하대에도 비슷한 형식의 연화 당초문을 시문하였지만 상대보다 훨씬 유려하고 율동감 있게 처리되었다.
상대 아래 붙은 네 방향의 연곽대에는 굴곡진 당초문을 장식하였고 연곽 내부에는 국화 형태로 표현된 화문 위에 2중의 원문을 장식한 연뢰(蓮蕾)를 도드라짐 없이 납작한 형태로 9개씩 배치하였다. 그리고 종신의 연곽과 연곽 사이의 한쪽 부분의 하대 아래쪽에 붙여 긴 장방형 명문곽을 두고 그 안에 '성수천장(聖壽天長)'이란 4글자의 발원문을 양각명으로 새겼다. 대체로 명문에 쓰이는 이러한 문구가 별도의 명문곽에 독립돼 따로 쓰인 것이 특이하며 명문곽의 하단에는 연화문을 장식하여 위패 모양으로 장식한 점을 볼 수 있다. 이 명문곽 바로 아래에는 종신에 비해 너무 크게 표현된 원형의 당좌가 하대에 치우쳐 배치되었다. 당좌는 중첩된 국화형의 자방 바깥을 나뭇잎과 같이 촘촘한 사선문으로 장식한 6엽의 중판 연판문으로 장식하였고 그 원형 외곽을 연주문 띠로 두른 모습이다.
또한 한쪽 면 연곽대 아래로 방형의 명문구를 별도로 만들어 이곳에는 종을 주조한 다음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4행 36자의 음각 명문을 새겼다.
'長生寺金鍾重五十斤, 棟梁寺主重職OO漢, 京戊□正春元施納, 十六斤太安二年十二月日'의 내용을 풀이해 보면 '장생사(長生寺)의 금종(金鍾)으로 50근의 중량을 들여 동량은 장생사의 주지(重職)인 O이며, 한경술(漢京戊), 정춘원(正春元) 등이 16근을 시납해 태안 2년 13월에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장생사 종 음각 명문.
장생사에 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9권에 '재경기도남양(금입수원군)절명산(在京畿道南陽(今入水原郡)絶命山)' 이란 구절이 유일하게 보이지만 이 종이 전라도 여천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이 곳에 있던 절은 조선전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종(金鍾)이란 명칭 역시 앞서 청녕4년 명종과 마찬가지로 실제 금을 사용하였다기보다 종의 미사여구로 짐작된다. 마지막 줄의 태안(太安)은 요(遼)의 연호로서 그 2년은 고려 선종(宣宗) 3년인 1086년에 해당된다.
이처럼 이 명문구 부분은 양각으로 새겨진 '성수천장(聖壽天長)'의 발원문과 달리 종을 제작할 당시에는 명문구의 자리만 배치하고 여백으로 남겨둔 뒤 종이 다 완성한 후 음각으로 새기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러한 명문 제작 방법은 이후 제작된 고려 범종 가운데 소종에서 즐겨 채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장생사종은 고려 소종의 중요한 모본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이 명문구의 왼쪽의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면과 그 반대편으로 동일한 모습을 지닌 보살좌상이 매우 크게 부조되었다. 보관을 쓰고 두광을 갖춘 보살상은 머리 위로 유려하게 굴곡진 천의를 날리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합장을 한 자세를 취하였고 무릎을 꿇고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 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 보살상으로서 유연한 천의와 절도 있는 자세, 보살상의 생동감 넘친 얼굴과 장신구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면서 섬세하다. 이처럼 장생사 범종은 청녕4년명 종과 마찬가지로 지하에서 출토되었지만 큰 손상 없이 상태가 양호하면서 명문을 잘 간직한 11세기 고려 범종의 중요한 편년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장생사종 종신에 새겨진 보살좌상. 유연한 천의와 절도 있는 자세, 보살상의 생동감 넘친 얼굴과 장신구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면서 섬세하다. ▶ 여음(餘音) 이 범종은 총고가 50cm에 불과한 소종이란 이유인지 몰라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듯 아직까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최근 이보다 조금 뒤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진주 삼선암(三仙庵) 범종은 그 자체에 명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려 범종의 출토 사례가 희귀하다는 점에서 보물 1698호로 지정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장생사 종은 명문 뿐 아니라 종신 부조 보살상의 빼어난 아름다움에서 이 시기 다른 범종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수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런 점에서 하루빨리 그에 걸맞는 지정 문화재로의 승격이 필요하리라 본다.
[불교신문3341호/2017년11월1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