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개황
1. 위 치 - 북위 34도-38도 사이(우리나라 중부이남 지방과 동일한 위도상에 위치) - 북으로 하북성, 서로 하남성, 남으로 안휘성 및 강소성과 인접
2. 면 적 - 15.7만㎢ (중국 전체면적의 1.6%) - 한국(북한제외)의 1.5배 크기
3. 인 구('98) - 8,838만명(중국 총인구의 7.2%, 하남성에 이어 2위) - 인구밀도 564명/㎢ (직할시제외 전국 1위)
4. 지 형 - 평원 55%, 산지 및 구능지 28.7%, 하천 및 호수 8.5% 기타 7.8%
5. 기 후 - 년평균 기온 11∼14℃(한국과 유사하나 혹한과 혹서가 비교적 없는 편이며 강우량은 한국의 3분의 2정도임)
6. 행정구역 - 14개 시, 33개 현급시, 3개 지구(44개 구, 62개 현, 2,383개 향진)
7. 주요도시 - 제남(省都), 청도, 치박, 유방, 연대, 위해, 제녕, 임기, 덕주
□ 경제개황
1. GDP('99) : RMB7,662억(약 USD 923억) - 98년 대비 10.1% 증가 - 광동, 강소성에 이어 중국 제 3위, 농업생산 제 1위, 수산물생산 제 1위 - 1인당 GDP : 약 USD 1,056(중국 제 9위) - 대외교역액('99) : USD 182.7억 (98년 대비 9.9% 증가) - 최대 수출 대상국 : 일본(USD 36.32억 수출) - 최대 수입 대상국 : 한국(USD 26.70억 수입)
2. 외국인 투자 - 진출 기업수 : 21,935개사(허가 기준) - 투자액 : USD 309억(계약), USD 173.4억(실제 투자)
3. 주요산업
[농수산업] - 중국 북방지역의 주식 작물인 소맥, 면화, 땅콩의 중국 최대산지(농업생산량 전국 1위) - 사과(전국 1위), 배, 포도(전국 2위), 복숭아등 과수 재배농업 발달 - 산동성 수광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채소재배단지 - 3천㎞의 해안선 및 근해의 양식 가능 해수면적이 넓어 수산업 생산량 전국 1위
[공 업] - 석유, 천연가스, 철, 구리, 금, 석탄, 소금등 기초자원이 풍부하며 석유화학공업 발달 - 중형 화물자동차, 공작기계, 대형압력기, 주조기계, 선반용 부품, 재료 시험기, 중소형 트렉터, 피스톤, 밸브 등을 생산하는 기계공업 발달 - 면화, 양모, 합성사를 이용한 방직공업 발달 - 역내에 중국내 굴지의 가전 메이커인 하이얼, 하이센스, 오크마등 대형 가전 업체 및 부품 메이커 산재
[사회간접자본시설] - 도로 58,800㎞, 철도 2,739㎞ - 제남, 청도, 연대등 3개 국제공항을 포함, 9개 공항 보유 - 항구 26개, 연간 물동량은 1.2억톤 - 광케이블 통신, 데이터 전송등 통신 기술이 발전, 보급되어 있으며, 전화 보급율은 100명당 6.9대임. - 독립된 전기망을 보유, 전기발전용량은 1,650만kw, '97년도 전기발전량은 840억kw에 달함.
[黃島 경제기술개발구] - 교주만 서안의 신 개발지역을 경제기술개발지역으로 설정, 이를 위한 순환고속도로(85km)를 95년말 완공하였고 컨테이너 부두를 건설중임. - 전자공업, 해양생물학, 경공업, 식품, 방직, 의류 및 화학공업 집중 육성 - 주요 기술합작분야는 전자, 기기, 방직, 경공업, 고무, 풀라스틱, 화공, 기계, 건축자재 등임.
구분 |
개소 |
소재지 |
경제기술개발구 고신기술산업개발구
보세구 관광휴양구 산둥반도 경제개방구 |
3 9
1 1 1 |
청도, 연대, 위해의 특정지구 제남, 위해, 청도, 유방, 치박, 연대, 자장, 제녕, 임의의 특정지구 청도 경제기술개발구(황도) 청도 노산구(석노인) 청도, 연대, 위해, 유방, 치박, 일조, 제남, 동영의 8개시 전지역 |
□ 우리나라와의 관계
1. 수출입 현황
(단위: 억USD)
년도 |
대한국 수출 |
대한국 수입 |
무역수지 |
'96 |
14.7 |
25.7 |
- 11 |
'97 |
18.3 |
25.7 |
- 7.4 |
'98 |
12.4 |
22.7 |
- 10.3 |
'99 |
15.8 |
26.7 |
- 10.9 |
※ 자료출처 : 산동성 통계 연감
2. 투자 현황(산동성 통계 기준)
[투자기업수] - 허가기준 : 2,868개 - 실제가동 : 약 1,500개 추정
[투 자 액] - 허가기준 : USD 40.7억 - 실제투자 : USD 27.7억 - 국내 투자신고절차를 거치지 않은 소규모 직접 투자건수가 많은 것으로 추정
[주요특징] - 한국은 연간 실제 투자액 기준으로 홍콩을 제외하면 산동성내 최대 투자국임 - 섬유, 의복, 전자, 기계, 가죽, 신발, 완구, 식료품등 노동집약형 산업에 주로 진출 - 중소제조업에 주로 진출(USD 1,000만 미만이 99%) - 청도, 위해, 연대등 연해지역에 집중(약 90%) - 원자재를 수입, 완제품을 생산 수출하는 가공무역 위주(수출중계지 역할) - 투자형태별로는 합자보다는 독자투자의 비중이 6:4정도로 높아 중국측 합자파트너를 이용한 내수시장 진출등 합자진출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
3. 한국 산동성간 자매결연 현황 - 산동성 - 경상남도 : '93. 9. 8 - 제남시 - 수원시 : '93.10.27 - 청도시 - 대구시 : '93.12. 4 - 연대시 - 군산시 : '94.11. 3 - 유방시 - 안양시 : '95. 5. 8 - 위해시 - 여수시 : '94. 3 - 내주시(연대시 산하 위성도시) - 북제주군 : '95.12 - 교남시(청도시 산하 위성도시) - 경산시 : '96.6 - 평도시(청도시 산하 위성도시) - 서울 구로구 : '95.5 - 교주시(청도시 산하 위성도시) - 부산시 북구 : '94.11 - 청도시 북구(청도시 산하 행정구역) - 광주시 서구 : '95.6 - 해양시(연대시 산하 위성도시) - 부산시 강서구 : '96 - 청도시 노산구(청도시 산하 행정구역) - 서울 서초구 : '98.8
4. 아국업체 진출 - 99년망 현재 허가기준 555개 업체가 진출(실제투자액 7.6억불)
5. 아국인 현황 - 투자업체 및 상사 주재원과 동 가족 약 2,000여명 - 유학생 약 30여명
6. 정기항로
[항공노선] - 서울/청도 : 대한항공 주7회, 중국민항 주 7회 - 부산/청도 : 중국민항 주2회 - 서울/연대 : 아시아나항공 주4회, 동방항공 주3회
[해운] - 인천/청도 : 정기여객선, 주2회 - 인천/청도 : 정기 콘테이너선, 월3회 - 부산/청도 : 정기 콘테이너선, 월3회 - 연대/부산 : 정기 여객선 주1회 - 연대/군산 : 정기 여객선 주1회 - 연대/인천:정기여객선 주1회
산동 반도 〔山東〕半島 중국 산동성 동부에 뻗어 나온 반도. 길이는 약 350km이고, 최대 너비는 약 130km이다. 황해와 보하이만을 갈라 놓는 반도로 대체로 구릉성 산지가 많고, 남쪽 해안은 따뜻하나 북쪽 해안은 추위가 심하다. 연안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어장이며,청도,위해 등의 항구가 있다. 농산물로는 밀, 목화, 담배 등이 많이 나고, 석탄, 철 등의 지하 자원도 풍부하다.
산동성은 한반도와 인연이 많은 곳인데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사람이며 한국인들이 먹는 중국음식 가운데도 산동음식이 많다. 또한 산동성에 있는 태산은 한국인들이 시조를 통해 접했던 지역으로 한 번쯤은 구경할 만한 곳이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청도맥주를 원산지에서 맛볼 수 있다.
청도(靑島)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중국사람들은 단연 청도(靑島)맥주라고 답할 것이다.그 만큼 청도는 중국 최대의 맥주 생산지이다. 청도란 이름에 생소한 사람도 있을지는 몰라도 청도는 한국인 기업체가 가장 많이 상주해 있는 중국 내의 최대 공업국 중의 하나로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청도는 옛부터 이른 새벽에 닭이 울면 그 닭의 울음 소리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있다.이러한 청도는 산동성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 항구도시이며 공업도시이다. 그렇다고 삭막한 공업도시를 연상하고 청도의 시내를 방문한다면 그 아름다움에 반할 것이다. 또한 청도는 아름다운 해양 휴양지로서 전세계 관광객이 붐비는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시내에 즐비한 독일식 붉은 서구풍 건축은 1898년 독일 조차지로서 개화한 뒤에 세워진 것이지만 현재는 완전히 중국인의 생활 속에 융해되어 청도를 대표할 만큼의 모습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향수를 즐길려는 독일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이러한 청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개관
동남쪽으로 황해와 접해 있는 산동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북위 35°36' -37°09', 동경 119。30' - 121。) 청도는 위도상 우리 나라 남부 지방과 비슷하며 시차는 1시간 늦다. 항구도시인 청도는 중국 동부 연해의 중요한 경제 중심 도시이자 오랜 역사와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절경의 관광도시이다. 인구는 대략 690만 정도이며 7개의 구와 5개의 현급시로 구성되어 있다. 청도는 온대 기후에 속하고 연평균 기온은 12.2。C, 연평균 강우량은 775.6mm이며 가장 더운 8월은 평균기온이 25。C, 가장 추은 1월은 평균기온이 1.3。C인 천체적으로 춥지 않고 살기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하자만 여름에는 물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역사
청도는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청도의 대문구문화(大文口文化)나 용산문화(龍山文化), 동구문화(洞丘文化)를 통하여 중화민족의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동주시대(기원전 770 ~기원전 256년)에는 제국(濟國)의 통치하에 있었고, 그때 당시 산동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인당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으로 알려진 태시황(太始皇)은 중국을 통일한 후(기원전 221년) 일찍이 세 번에 걸쳐 지금 청도의 랑아산에 오른 적이 있다고 전해지며, 태(泰)나라의 서보조씨(徐福曺氏)도 함대를 거느리고 랑아사에서 기항하여 동쪽의 고조선(古朝鮮)과 일본에 가기도 했다고 전하여 진다. 한 (漢)나라 때에는 한무제가 지금의 청도시의 불기산 교문궁(不基山 交門宮)에서 제사를 비롯한 제천의식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唐),송,명,청나라 시기의 도교사원과 암자 등이 청도시 곳곳에 퍼져 있어 문화적 중심지로 청도가 태동해 왔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청도는 청나라 말기 이후부터 번화한 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1891년 6월14일(청무제 17년),청나라는 주요 병력을 청도로 이동 주둔하게 함으로써 청도는 해양 방위의 요충지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때부터 청도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1897년11월,독일이 청도를 강점하여 청도는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당시 독일은 자국의 선교사 두 명이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청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청도를 점령한 독일군의 속셈은 극동지역에 독일 해군의 전진기지를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독일군이 청도에 진주하면서 그 전까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에 현대식 도시가 세워졌다. 항구시설이 갖추어지고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자연히 상업지구가 형성되었다.
독일군의 주둔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청도와 제남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11월에는 일본이 독일 치하의 청도를 차지 하였으나 1920년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5.4운동으로 청도를 되찾게 되어 1929년에는 국민당. 정부가 청도를 관할 특별시에 편입시켰다. 1938년 1월 , 일본이 다시 청도를 점령하였으나 1945년 국민당 정부가 디시 이를 차지하여 관리함과 동시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되었다. 1949년 6월2일에 이르러서야 청도는 비로서 중국에서 말하는 완전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역사는 청도에서 수많은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국가제도의 각양각색의 건축물을 남겨 놓았다. 20세기 2,30년대의 수많은 저명한 문인들이 청도에 운집해 있었을 정도로 청도는 상해 다음으로가는 유명한 신문학 운동의 도시로서 중국의 신문학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후와 여행시기
청도를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여름이다. 청도의 여름바다는 더위에 지친 몸의 피로를 씻어내는데 아주 적합하다.청도의 바닷물은 여름에도 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내려오는 한류의 영향으로 차가운 편이다. 수영을 즐기기에 좋은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이며 이때는 청도 시내와 해변이 피서객들로 크게 붐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바다 안개가 짙게 끼는 경우가 자주 있느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안개가 낀다.
교통편
비행기 서울에서는 매일 대한항공과 에어차이나를 이용한 직항편이 있다. 국내선으로는 북경,상해,광주,대련,서안 등에서도 매일 운항하고 있다. 맥주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미리미리 예약과 예약확인이 필요하다.
배 인천 - 청도간에 훼리가 인기리에 운항되고 있다. 초호화 훼리로 18시간 정도 타면 청도에 도착한다. 매주 2회씩 운항하는 훼리를 타고 청도로 들어갈 때에는 한국에서 비자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선상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체류기간은 한달이다.
열차 북경에서 13시간정도 걸린다. 산동성의 제남을 경유한다.
장거리 버스 산동성 여행은 중국에서 비교적 짧은 코스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열차보다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여 주요도시를 들리며 중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 청도라는 명칭의 유래
바다를 끼고 있는 노산에서 나는 광천수로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를 갖고 있는 물의 도시 청도,분명 물이 풍부한 도시이긴 하지만 분명 섬이 아닌 산동반도에 자리잡은 중국 대륙의 일부분인 이 지역에 왜 하필이면 청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청도 서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소청도라는 조그마한 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작은 섬에서 청도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곳 섬이 아주 푸르러 사람들은 이곳을 푸른섬이라는 뜻의 청도라고 불렀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가 전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재미난 설화로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 명칭의 유래를 찾아 볼 수도 있다. 이 섬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하늘에 사는 선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서로 이루어 질수 없는 비밀스런 사랑에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신의 분노를 사게되고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선녀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선녀가 죽은 이후에 선녀가 살아 생전에 님을 기다리며 연주하던 비금소리가 이 섬 주위에서 들리곤 하여 사람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비금의 섬이라는의미로 금도라고 불렀다.그런데 이 금이라는 발음이 중국어로 청이라는 소리와 거의 비슷하여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청도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처럼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은 아직도 젊은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청도의 해수욕장
청도에는 바람 따라 날리는 고운 백사장 따라 넘실 대는 파도 속에 끝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해변이 자랑거리 중의 하나이다. 청도도에는 모두 7개의 해변이 있는데 특히 HUIQUAN BATHING BEACHE는 800m의 길이를 자랑하는 청도 최대의 해변이다. 청도시는 중국에서 유명한 해변 휴양지로 그명성이 높은데 그 대표적인 청도시의해수욕장인 제 1해수욕장에는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로 붐빈다. 특히 공산당 간부의 휴가지로 이용되는 제 3 해수욕장이 최근에야 공개되었지만 아직도 여름이면 해수욕장을 지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이곳 제 3 해수욕장은 모택동이 집회를 가진 곳으로도 유명하며 장개석도 이곳에서 한달 간 머물렀다고 한다.
제일해수욕장
청도 여행에서 해수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시즌에는 해변은 해수욕객들로 붐빈다. 해가 진뒤에도 서늘한 시간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들어찬다. 청도에서 청도 맥주를 한 손에 들고 파도소리를 들으면 석양를 즐기는 것도 괜챦은 관광일 것 같다. 6번 버스가 해수욕장으로 간다.
라오샹산
각종 기이한 절벽과 산줄기가 급경사의 계곡을 따라 굽이 치고 있어 이곳 사람들은 신이 사는 신성한 장소라고 줄곧 믿어 왔다. 장구한 중국역사 속의 황제들도 영생의 불로초를 얻기 위해 이 라오상산에 사람들을 보내며 그 신비로운 기를 얻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 역사속에서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산이기도 하다.
해산박물관
수족관과 표본진열관으로 나뉘어져 있다.돌고래나 상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족관이지만 수조의 물이 맑고 깨끗해서 느낌이 좋다 가족나들이로 성황을 이루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룬다. 6번,26번 버스를 타고 중산공원까지 가면 된다.(개방시간 :오전8시 ~ 오후 5시)
중산공원
원래는 한마을 이었다니까 여간 넓지 않은 공원이다. 원래는 수목이 울창하고 특히 봄에는 700수나 되는 벚꽃이 아름답다. 동물원이 근처에 있다. 6번버스 이용 영산시로부터 동쪽으로 40Km가 떨어진 교외에 솟아있다. 바다에 면하고 있으며 단애절벽의 험한 산이다..주봉,영정은 표고, 1,133m 예로부터 중국 유교의 명산의 하나로 꼽으며 [신선이 사는곳]이라 일러왔다.일반 여행은 태청궁까지 버스로 간다. 상청궁, 용담 폭포등 도보로 팔수하까지 약 2시간의 등산이다. 팔수하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오후 4시쯤 시내로 돌아온다. 장거리 버스를 이용할 경우 역에서 5번 버스를 타면 장거리 버스터미널로 갈 수 있다. 그밖에도 시내의 주요 호텔에서는 단체 관광버스가 출발하므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시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생략하는 것이 괜챦을 듯 하다.
청도의 맥주축제
맥주 축제가 생기게 된 이래 1903년 중국 최초의 맥주가 탄생한 청도 맥주의 명성과 지방 관광 활성화를 위해 199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열리고 있다. 청도는 독일의 식민지로 오랜세월동안 있었기에 맥주 가공기법이 뛰어나 지역 특산물로 개발하게 된 것이다.축제기간동안 청도는 매년 30개의 맥주 회사와 50만명의 사람들이 이 축제에 참가하는데 이 축제는 세계적으로 청도를 알리는 계기와 더불어 경제와 무역 증진과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이 축제 기간동안 대규모의 예술 축제와 불꽂놀이, 퍼레이드,그리고 중국 전통 민속 공연,맥주 마시기 경연대회가 개최된다.청도에서 열리는 맥주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맥주 마시기 경연대회가 꼽힐 것이다. 청도의 맥주 축제는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티발과 거의 흡사한데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기간 내내 페이팅이나 각종 스포츠를 즐기다가 결전의 날이 다가오면 일렬로 서서 마시기 시합을 한다. 이 경연 대회는 누가 빨리 호흡 조절을 하며 잘마시는가를 평가 기준으로 하며 우승자는 축제기간 최고의 영예를 얻게된다.맥주축제는 석노인국가여행도기구에서 열리는데 1991년에 결성된 이후 해마다 7월8일부터 2주간 각종 스포츠와 이벤트가 풍성하게 엮어져 청도 여름의 최대 축제라는 명성을 굳혀가고 있다.
관광어드바이스
청도는 관광지가 아닌 휴양지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잠시 들린다면 모를까 여행만으로 가기에는 좋은 곳은 아니다. 한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매일 있으므로 여름에 다른곳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잠시 들려 해수욕을 하고 귀국하면 어떨까한다. 본인이 96년에 백두산,북경을 거쳐 청도에서 하루 머물며 해수욕을 하였는데 중국의 다른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제남(齊南)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은 황하의 남쪽, 태산의 북서쪽에 있으며 물이 풍부한 인구 약 140만의 대도시이자 철도의 요충 이기도 하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에는 낙읍(落邑)이라 불렀고, 제나라 서울로서 번영했었다. 한대에 들어와서는 제수 남쪽에 위치한데서 제남이라 고쳐 불렀으며 물이 풍부한 곳이라 또다른 이름으로서 천성(泉城)이라고도 불린다.
대명호(大明湖)
구성의 북쪽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대명호는 시내의 많은 샘물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시민의 쉼터로 되어 있다. 주위 약 5㎞의 호수에서는 뱃놀이도 가능하고 호반에는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시인이 술을 나누며 시를 읊었다고 하는 역하정(歷下亭)과 북겁각(北 閣)이 있고, 구곡정과 창랑정 등도 만들어져 있다. 청나라의 한 시인은 '사면의 연꽃에 삼면의 버들이요, 한성의 산색에 반성의 호수로다' 라고 묘사했으며, 마르코폴로는 '원림 아름다움에 마음 즐겁고 산과 호수의 경치에 눈 쉴 여유 없다' 고 극찬 하였다.
훅호천공원(黑虎泉公園)
제남의 샘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며 세 개의 호랑이 머리 모양이 새겨진 샘구멍에서 밤낮으로 물이 뿜어 나온다. 물도 좋지만 주변을 운하처럼 다듬어 가로수를 세우고 아치형 다리를 올려 노젓는 배를 띄운 것이 한 폭의 그림같다. 짧은 거리지만 마치 이탈리아의 수상도시를 지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며 상인의 호객행위가 없어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천불산(天佛山)
제남에서 동남쪽으로 2.5㎞ 거리에 있으며 높이는 284m에 불과하지만 울창한 숲과 화초가 일구어낸 자연미와 정자·누각 등의 인공미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답다. 천불산이라는 이름은 수나라 때에 산의 암벽에 많은 불상을 새기고 천불사를 세웠기 때문이다. 경내에 있는 '용천동(龍泉洞)'은 명나라 때에 판 것이고 동굴의 조각은 북위시대의 것이다. 산에 올라서면 멀리는 유유하게 흐르는 황하, 가까이는 시가 전체가 바라다 보인다.
표돌천공원
제남에 있는 72개의 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샘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녹수라고 이름하여 옛날부터 천하 제일의 샘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송나라 때 세워진 녹원당의 남쪽에 있는 것은 지금도 매초 1600ℓ의 샘물이 솟아나온다. 표돌천을 중심으로 동전의 뜸과 가라앉음으로 점을 치기도 하는 수옥천과 그 외의 마포천 등 16개의 샘과 명·청 때의 고건축, 화랑 등이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대명호의 막막함과는 대조적으로 아기자기한 공원의 모습과 맑고 깨끗한 샘물이 매우 평화롭게 보인다.
황하(黃河)
제남에서 북으로 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황하를 볼 수 있다. 강 양쪽에는 볼 것 없는 제방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지만 그 흐름은 글자 그대로 황색 탁류의 웅대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강둑 사이의 폭은 약 500m 전후이고 아주 많은 곳은 1㎞ 가량이나 된다. 전체 길이 2.4㎞가 되는 황하대교(黃河大橋)가 1982년에 완공되어 강줄기에 걸쳐 있고, 다른 쪽에 부교도 설치되어 있다.
곡부(曲阜)
춘추시대에는 노(魯)나라의 도성이었으며 세계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의고향이다. 유적인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등이 있으므로 유교대한 관심이 있는 여행자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주민은 대부분 관광수입에 의존하여 살고 있으며, 조그만 도시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두르면 저녁까지는 다 돌아볼 수 있다.
공묘(孔廟)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사당을 세운 곳이다. 그후 역대의 황제가 기부나 희사를 계속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고, 북경의 고궁(故宮), 태산의 대묘(岱廟)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남북의 길이가 약 1㎞ 남짓하며, 면적은 약 22만㎡로서 전체 건물의 방의 개수가 466개에 이른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제 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28개의 돌기둥 가운데 정면의 10개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은 듯한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대성전의 바로 뒤에 있는 숙전은 북송 때 창건한 것이며, 청대에 개축한 것이다. 공자의 부인 올관씨(兀官氏)를 모시고 있다. 숙전의 바로 뒤에는 공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성적전(聖迹殿)이 세워져 있는데 이 안에는 공자일생을 소개하는 석각화 120장 외에도 공자화상이 모여있으며 그 중의 하나인 '공자행교상'은 진대의 화가인 고개자(顧愾子)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공부(孔府)
공부는 1038년에 세워져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으로 공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으로 서로에는 객실, 동로에는 공씨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에는 전반부의 관공서와 후반부의 주택으로 나뉘어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16만㎡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당시 공씨 가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공림(孔林)
공자와 역대 자손이 묻힌 묘소로 담장 둘레만 7.25㎞로 세계 최대의 씨족묘지이다. 얼핏 보면 거대한 숲처럼 보이고 들어서면 옛날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입구의 대문(지성림방 : 至聖林坊)에서 이림문(二林門)으로 이르는 길에 늘어선 떡갈나무 숲은 그 모양이나 울창함이 관광객을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 이 떡갈나무 숲을 빠져나가면 이림문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수수교(洙水橋)가 있다. 수수교의 북쪽에 있는 향전(享殿)은 공자 축제시에 향단을 설치하는 곳으로 그 후방에는 공자의 분묘가 있다.
안묘(顔廟)
공자의 애제자 중 하나인 안회(顔回)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사원으로 한(漢)나라의 고조가 노나라에 들러 공자의 제사를 지낼 때에 창건하였다. 그후 개축과 확장을 계속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태산(泰山)
중국 오 (五岳)의 첫 번째인 태산은 고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한 신성한 산이며, 해발 약 1,545m로 산동성 구릉에서도 최고로 높은 산으로 산동성 동부·제남시·태안 등 3개 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천하제일의 산으로 칭송받아 오듯이 자연경 은 물론이고 신앙의 산으로도 추앙받아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돌비석 등의 옛유적과 종묘 등이 있어 볼 만한 것이 많다. 태산은 한국인 눈에 싱거운 산이지도 모르지만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음미한다면 그 역사의 깊 를 느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대묘(岱廟)
태안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지 않고 광장에서 3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리를 건너면 대묘가 있다. 이 곳은 북경의 고궁, 곡부(曲阜)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로, 역대 황제들이 봉선(封禪)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송나라 때 건축했다고 전해지는 본전인 천황전(天皇殿) 내부에는 가로 62m, 세로 3.3m의 거대한 벽화가 있으며, 경내에는 약 2천년 전 한무제가 심었다는 측백나무가 있는데, 앞에 한백(漢柏) 이라는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오대부송(五大夫松)
중천문에서 계속 계단을 따라 오르다보면 운보교(雲步橋)가 나오며 이 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올라가면 오송정(五松亭)이 나오는데, 이곳에 오대부송이 있다. 진시황이 봉선을 지내기 위해 산을 오르다가 큰 비를 만나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고 한다. 그 후 진시황은 24작위 중 9번째 작위인 오대부를 소나무에게 내려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있는 소나무는 청나라 때 보식된 것이라고 한다.
석도(石島)
석도는 조용하고 조그만 어촌이라 중국인도 잘 모르는 곳이지만 여행자가 쉬어 가기에는 좋은 곳이다. 석도에서 볼 만한 것으로는 법화원(法華院), 항구, 바닷가로 시내와 주변을 걸어서 둘러보아도 반나절이면 된다. 법화원은 신라장군 장보고가 세운 사찰터에 재건되었으며 주변에는 장보고의 중국진출을 기념하는 탑이 세워져 있다. 석도항은 바로 장보고의 무역선이 출입하는 곳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인이 모여 살던 신라방 적산촌이 있었다. 석도는 예전에는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집도 새롭게 지어지고 길닦이는 등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잘 사는 마을로 바뀌고 있다.
추현(鄒縣)
곡부에서 20㎞ 정도 떨어진 추현은 인구 20만명의 도시로 맹자가 자랐던 곳이다. 공자의 그것과 비교해서는 작은 규모이지만 추현에는 맹묘(孟廟)와 맹부(孟府)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나라히 있다. 맹묘 경내에는 각 시대의 석상이나 고종(古鍾)도 있다. 위해(威海)산동반도의 북단에 위치하 이곳은 일찍 위해위(威海衛)라고 했으며 청조 정부의 해군 북대양함대의 군항이 있던 곳으로 알려졌다. 볼거리로는 항구에서 2㎞쯤 앞바다에 떠있는 섬으로 기복이 풍부한 아름다운 풍경으로 알려져 있는 유공도(劉公島)와 시가지 중앙부 내고산(奈 山) 동산 허리에 있는 누각으로 여기에서 보는 황하의 일출은 8경의 하나로 꼽는 환취루(環翠鏤), 영국으로부터 위해위 반환을 기념해서 1931년에 세워진 탑인 수회위해위(收回威海衛) 기념탑 등을 들 수 있다.
산동성은 한반도와 인연이 많은 곳으로 현재 한국에 들어온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사람이며 한국인들이 먹는 중국음식 가운데도 산동 음식이 많다. 또한 태산은 한국인들이 시조를 통해 접했던 지역으로 한번쯤은 구경할 만한 곳이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청도 맥주를 원산지에서 맛볼 수 있다. 지리적 위치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동쪽은 바다로서 한반도 서해안을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은 내륙지방과 맞닿아 있어 반도와 내륙이 반반씩 자리잡고 있고, 동쪽의 반도부분은 황해와 발해 만 사이에 돌출된 형상이다. 총 면적은 약 15.67만2km로서 중국 체 면적의 1.6%를 점하고 있으며, 남한의 대략 1.5배에 달한다. 지형은 복잡한 편이며, 산지와 구릉은 해발 200~300m로 대체로 낮은 편이나, 1,000m 이상의 산도 있으며 , 그 중 유명한 태산은 1,545m이다. 산동성은 하천과 호수가 많은 지역으로 길이가 100km 이상인 강이 18개로서 내륙 운수가 발달되어 있다. 토지구성은 평지 면적이 55%, 산지 20%, 구릉 15%, 습지 10%로 농업이 발달되어 전 성인인구의 8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산동성의 기후는 난온대 계절풍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이 분명하다. 봄은 건조한 편이며 바람이 심하고 여름에는 고온 다습하고 가을에는 맑은 날이 많은 편이며 겨울에는 한냉 건조하여 한국과 비슷한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11~14도, 강우량은 330~950mm 이다. 산동성 성도인 제남은 연평균 기온 14.8도, 강우량 550.5mm, 일조시간 2,527 시간이다.
산동음식 산동요리의 시발점은 춘추전국시대이며 남북조에와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元, 明, 淸 삼대 왕조를 거치는 동안 군중에 의해 인정 받아 한 유파를 이루기에 이른다. 가축, 해산물, 야채등의 재료로 폭(爆: 끓는 물, 기름에 살짝 데치다), 류(뜨거운 용기에 기름을 붓고, 기름이 뜨거워 졌을 때 재료를 넗고 볶은 다음 전분소스를 붓고 계속 저으면서 볶는 것을 말함), 배(약한불로 오래도록 푹 삶다), 고(불에 굽다), 과(鍋:누룽지), 발사(拔絲:마, 연뿌리, 사과 등에 뜨거운 엿, 설탕을 묻혀 만든 요리), 밀즙(蜜汁: 꿀을 발라 만드는 요리)등의 조리방법을 즐겨 사용하며, 주로 간장, 파, 마늘 등의 재료를 넣어 양념을 하고, 맑은 국이나 포타즈(우유를 넣고 만든 스프의 일종)를 사용하므로 맛이 아주 뛰어나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배원각포오, 총소해삼(蔥燒海蔘), 내탕포채, 길상건패(吉祥乾貝) 밀즙이구(蜜汁梨球), 청탕류엽연채(淸湯柳葉燕菜) 초두부뇌(炒豆腐腦), 해미진주순, 민대하 등이 있으며, 모양이 자유롭고, 우아하며, 응용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남 (濟南)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은 황하의 남쪽, 태산의 북서쪽에 있으며 물이 풍부한 인구 약 140만의 대도시이자 철도의 요충이기도 하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에는 낙읍(落邑)이라 불렀고, 제나라 수도로서 번영했었다. 한대에 들어와서는 제수 남쪽에 위치한데서 제남이라 불렀으며 물이 풍부한 곳이라 또 다른 이름은 천성(泉城)이라고도 불린다
대명호 (大明湖)
구성의 북쪽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대명호는 시내의 많은 샘물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시민의 쉼터가 되어 있다. 주위 약 5km의 호수에서는 뱃놀이도 가능하고 호반에는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시인이 술을 나누며 시를 읋었다고 하는 역하정(歷下亭)과 북겁각(北迲閣)이 있고, 구곡정과 창랑정등도 만들어져 있다. 청나라의 한 시인은 '사면의 연꽃에 삼면의 버들이요, 한 성의 산색에 반성의 호수로다'라고 묘사했으며, 마르코폴로는 '원림 아름다움에 마음 즐겁고 산과 호수의 경치에 눈 쉴 여유 없다'고 극찬하였다.
천불산 (千佛山)
제남에서 동남쪽으로 2.5km 거리에 있으며 높이는 284m에 불과하지만 울창한 숲과 화초가 일구어낸 자연미와 정자누각 등의 인공미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답다. 천불산이라는 이름은 수나라 때에 산의 암벽에 많은 불상을 새기고 천불사를 세웠기 때문이다. 경내에 있는 '용천동(龍泉洞)'은 명나라 때에 판 것이고 동굴의 조각은 북위시대의 것이다. 산에 올라서면 멀리는 유유하게 흐르는 황하, 가까이는 시가 전체가 바라다 보인다.
황 하 (黃河)
제남에서 북으로 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황하를 볼 수 있다. 강 양쪽에는 볼 것 없는 제방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지만 그 흐름은 글자 그대로 황색 탁류의 웅대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강둑 사이의 폭은 약 500m 전후이고 아주 많은 곳은 1km 가량이나 된다. 전체 길이 2.4km 가 되는 황하대교 (黃河大橋)가 1982년에 완공되어 강줄기에 걸쳐 있고, 다른 쪽에 부교도 설치되어 있다.
태산 (泰山)
중국 오악(五岳)의 첫번째인 태산은 고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한 신성한 산이며, 해발 약 1,545m로 산동성 구릉에서도 최고로 높은 산으로 산동성 동부/제남시.태안 등 3개의 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천하제일의 산으로 칭송받아 오듯이 자연경은 물론이고 신앙의 산으로도 추앙받아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돌비석 등의 옛 유적과 종묘 등이 있어 볼 만한 것이 많다. 태산은 한국인 눈에 싱거운 산일지도 모르지만 이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음미한다면 그 역사의 깊이를 느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청 도(靑島)
중국 여행 중에 맥주 한 잔을 마신다면 청도 맥주를 기억할 것이다. 청도는 맥주로 더 알려진 곳으로 산동성 동부에 위치하며 성도인 제남에 이어 산동성 제2의 도시이다. 산동성의 공업 중심지이자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데다 문화유물과 고적이 매우 많다. 인근에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휴양지로서도 각광 받고 있다. 1899년 독일의 조계지로 삼았던 곳이라서 지금도 독일 풍의 건물을 볼 수 있다. 청도는 산동성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해양성 기후로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도 가장 더울 때가 o25c 정도여 서 휴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특히 여름바다는 더위에 지친 몸의 피로를 씻어내는데 아주 적합하다. 수영을 즐기기에 좋은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이며 이 때는 청도 시내와 해변이 피서객들로 크게 붐빈다. 청도시의 관광여건의 개선과 관광영역의 확대에 따라 관광시장은 날로 번영하고 있다. 1995년 관광객이 850만명, 그 중 외국관광객이 17만 3000명이다. 관광업 외화획득액은 9000만 달러이다.
곡부 (曲阜)
춘추시대에는 노(魯)나라의 도성이었으며 세계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의 고향이다. 유적인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등이 있으므로 유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여행자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주민은 대부분 관광수입에 의존하여 살고 있으며, 조그만 도시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두르면 저녁까지는 다 돌아볼 수 있다.
공 묘 (孔廟)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사당을 세운 곳이다. 그 후 역대의 황제가 기부나 희사를 계속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고, 북경의 고궁(故宮), 태산의 대묘(岱廟)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남북의 길이가 약 1km 남짓하며, 면적은 약 22만2m로서 전체 건물의 방의 개수가 466개 이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제 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28개의 돌기둥 가운데 정면의 10개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은 듯한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공 부 (孔 府)
공부는 1038년에 세워져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으로 공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으로 서로에는 객실, 통로에는 공씨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에는 전반부의 관공서와 후반부의 주택으로 나뉘어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18만2m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당시 공씨 가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공 림(孔 林)
공자와 역대 자손이 묻힌 묘소로 담장 둘레만 7.25km로 세계 최대의 씨족묘지이다. 언뜻 보면 거대한 숲처럼 보이고 들어서면 옛날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입구의 대문(지성림방: 至聖林坊)에서 이림문(二林門)으로 이르는 길에 늘어선 떡갈나무 숲은 그 모양이나 울창함이 관광객을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 이 떡갈나무 숲을 빠져나가면 이림문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수수교(洙水橋)가 있다. 수수교의 북쪽에 있는 향전(享殿)은 공자 축제시에 향단을 설치하는 곳으로 그 후방에는 공자의 분묘가 있다.
산동성은 한반도와 인연이 많은 곳인데 현재 한국에 들어온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사람이며 한국인들이 먹는 중국음식 가운데도 산동음식이 많다. 또한 태산은 한국인들 이 시조를 통해 접했던 지역으로 한 번쯤은 구경할 만한 곳이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청도맥주를 원산지에서 맛볼 수 있다. 지리적 위치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동쪽 은 바다로서 한반도 서해안을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은 내륙지방과 맞닿아 있어 반도와 내륙이 반반씩 자리잡고 있고, 동쪽의 반도부분은 황해와 발해 만 사이에 돌출된 형상이다. 총 면적은 약 15.67만㎢로서 중국 체 면적의 1.6%를 점하고 있으며, 남한의 대략 1.5배에 달한다. 지형은 복잡한 편이며, 산지와 구릉은 해발 200∼300m로 대체로 낮은 편이 나, 1,000m 이상의 산도 있으며, 그중 유명한 태산은 1,545m이다. 산동성은 하천과 호수가 많은 지역으로 길이가 100㎞ 이상인 강이 18개로서 내륙운수가 발달되어 있다. 토지구성은 평지면적이 55%, 산지 20%, 구릉 15%, 습지 10%로 농업이 발달되어 전 성인인구의 8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산동성의 기후는 난온대 계절풍 기후에 속 며 사계절이 분명하다. 봄은 건조한 편이며 바람이 심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가을에는 맑은 날이 많은 편이며 겨울에는 한냉건조하여 한국과 비슷한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은 11∼14℃, 강우량은 550∼950㎜이다. 산동성 성도인 제남은 연평균기온 14.8℃, 강우량 550.5㎜, 일조시간 2,527 시간이다.
산동 반도 〔山東〕半島 중국 산동성 동부에 뻗어 나온 반도. 길이는 약 350km이고, 최대 너비는 약 130km이다. 황해와 보하이만을 갈라 놓는 반도로 대체로 구릉성 산지가 많고, 남쪽 해안은 따뜻하나 북쪽 해안은 추위가 심하다. 연안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어장이며,청도,위해 등의 항구가 있다. 농산물로는 밀, 목화, 담배 등이 많이 나고, 석탄, 철 등의 지하 자원도 풍부하다. 산동성은 한반도와 인연이 많은 곳인데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사람이며 한국인들이 먹는 중국음식 가운데도 산동음식이 많다. 또한 산동성에 있는 태산은 한국인들이 시조를 통해 접했던 지역으로 한 번쯤은 구경할 만한 곳이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청도맥주를 원산지에서 맛볼 수 있다
동쪽으로 뻗어 나온 커다란 산동 반도를 사이에 두고 바다는 발해(渤海)만과 황해로 나뉜다. 산동 지방은 바다와 어우러져 있고 녹음이 짙은 땅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쪽 지방의 내륙부를 키운 진시황은 기원전 219년에 지부산(芝 山)과 낭사산(琅邪山)에 가서 진의 덕망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웠다. 다음해에도 진시황은 지부와 낭사를 두루 돌아보았다.
진시황은 재위 37년, 곧 기원전 210년에 죽었는데 그의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산동이었다. 낭사에서 지부에 이르러 그곳에서 큰 물고기를 사살한 뒤 병을 얻어 갑자기 서쪽으로 돌아가던 중 하북성의 모래언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진시황이 맨 처음 낭사에 왔을 때 서복(徐福)이라는 방사가 글을 올려 "바닷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어 그 이름이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이라 하며, 신선이 이곳에 삽니다. 불로장생하는 풀이 이곳에 있으니 이것을 구하러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보내……"라고 했던 것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방사(方士)란 신선의 술법을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런 사람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이 바닷속의 삼신산에 있다고 했으니 오래 살고 싶었던 진시황은 서복의 말대로 동남동녀 수천 명을 모았다. 이때는 인간이 주된 생산력이던 시대였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초를 찾기 위해 진시황이 돈을 아낌없이 썼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배를 만드는 비용만 해도 엄청났으리라. 그렇지만 9년이 지나도 서복은 불로장생의 약초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는 진시황에게 추궁당할 것이두려워 "봉래산의 약초는 손에 넣을 수 있지만 항상 큰 물고기가 있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부디 활을 잘 쏘는 명인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고 아뢰었다. 진시황은 스스로 연발 활을 가지고 해상에 나가 지부에서 거대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진시황은 그 일이 있은 바로 뒤에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다.
서복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사기』는 그 뒤 서보겡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진시황이 스스로 거대한 물고기를 퇴치했기 때문에 서복은 봉래산으로 출발해야만 했을 것이다.
三 孔
산동성의 명승지 가운데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곳이 곡부(曲阜)의 삼공(三孔)과 태산(泰山)이다. 삼공이란 공묘(孔廟 공사를 모신 묘), 공부(孔府 공자의 집), 공림(孔林 공자 가족의 묘소)을 가리킨다. 공자라고 하면 먼저 『논어』를 떠올리게 된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유교의 영향을 받은 모든 지역에서 공자는 교양의 원천이라 일컬어진다. 해외에 나가 있는 화교들도 자주 공묘를 찾아오는데 이들에게는 이곳이 말하자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우선 공묘에는 엄숙하고 중후한 분위기가 감돈다. 공자가 죽은지 1년 뒤에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묘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지만 전한(前漢)시대에 유교가 국교가 된 뒤에 역대의 제왕이 점차 규모를 크게늘렸다. 현재 공묘의 건물은 대부분 명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오래 된 것이 규문각(奎文閣)으로 1018년에 창건되어, 1191년에 중건되었다. 처음에는 장서루(藏書樓)라 불렸는데 중건되었을 때 규문각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공묘의 본전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이다. 1103년에 창건되었으며, 1499년에 보수하면서 기둥의 지름은 80㎝, 높이는 5.7m나 된다. 여행을 즐기던 청의 건륭제가 이곳을 찾아온 적이 있는데 그때 예비검사를 나왔던 신하가 이곳 토지 관리인에게 돌기둥을 붉게 칠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황제가 사는 북경의 자금성 주건조물인 태화전의 기둥에도 용을 새긴 조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성전 앞에 '행단(杏亶)'은 원래 대성전의 흔적이라고 한다. 공자가 쉬고 그의 제자들이 독서를 했던 곳이라는 일화가 『장자』에 나와 있다. 그것에 덧붙여서 후세 사람들이 살구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어서 행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의 저명한 서화가였던 당회영(黨懷英)이 현판을 써서 달아놓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규문각과 대성전 사이에 13비정(十三碑亭)이 있다.
열세 개 정자 안에 있는 비석은 53개나 된다. 가장 오래 된 것이 719년때의 것으로 비석 옆면에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1308년 9월 황제(무제)와 그의 누이가 이곳을 찾아왔다고 씌어 있는 비석이 있다. 사실 공묘는 옛날에는 여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원 황제의 누이는 여성으로 공묘를 방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열세 개 비정 가운데 청대 때의 것이 아홉 좌, 금과 원의 것이 각각 두 좌가 있다. 명대의 비정은 다른 곳 즉 규문각의 남쪽에 있다. 다른 시대의 건물들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서로 다른 시대의 품격이 어딘가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공묘 안에는 여기저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석이 서 있다. 정자 안에 있는 것도 있고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도 있다. 잘 보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비석도 있다. 문화혁면 중에 북경에서 온 홍위병이 넘어뜨린 것을 나중에 고쳐 놓은 것도 여럿 있다.
그때 두 조각 난 것을 시멘트로 붙여놓은 것이다. 마음 아픈 상처라 할 수 있다. 비석이라면 공묘의 동무(東 )와 서무(西 )가 유명한데 이곳에 가면 고대비석박물관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오 래 된 비석이 즐비하다. 한위육조(漢魏六朝)의 비석만 해도 20세기가 넘는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기원전 56년6월4일 세워졌다고 기록된 비석도 있다. 비석을 둘러보다 보면 모든 서체, 원이 만들었던 비실용적인 파스파문자나 만주문자까지 찾아볼 수 있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동서 양쪽 무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공묘의 동쪽에 이웃해 있는 것이 공부다. 공자의 자손들이 살았던 저택으로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명청대에 지어졌다. 전한의 원제 시대에 공자의 13대후손인 공패(孔覇)가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지면서 식읍 800호와 황금 200근과 집터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황제가 준 집터가 점차 넓어져서 지금의 공부가 되었다.
공부는 중로(中路), 동로(東路), 서로(西路) 세 부분으로 나뉜다. 역대 왕조가 공자의 자손을 제후로 봉했기 때문에 공부에서도 삼당육청(三堂六廳)을 두어야만 했다. 1055년에 공자의 46대 자손인 공종원(孔宗愿)이 연성공(衍聖公)으로 봉해지면서 이곳은 연성공부라 불리게 되었다. 삼당 즉 대당(大堂), 이당(二堂), 삼당(三堂)은 역대 연성공의 집무실이다. 육청은 중앙의 육부를 축소한 것이며, 그 사무실들이 중로에 있다.
동로에는 가묘(家廟), 모은당(慕恩堂), 일관당(一貫堂) 따위 건물이 있다. 청의 건륭제는 황녀를 72대 연성공이었던 공헌배(孔憲培)에게 시집을 보냈다. 황족의 여성이 한족 남성에게 시집가는 것은 매우 드문일이었던 청대에도 공자의 집안은 예외였던 듯하다. 건륭제의 황녀를 위해 만들었던 것이 모은당이다. 일관당은 연성공의 처가 쪽 가족을 위한 거주지였다. 중로가 공식적인 장소였던데 비해 동로는 개인적인 사생활의 장소였으며, 서로는 응접실과 교양의 장소였다. 현재 이 서로는 여행자들이 묵어갈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공 림
공림은 곡부성 북쪽에 있다. 1㎞ 정도 숲길이 끝나는 곳에 '지성림(至聖林)'이라는 현판이 걸린 공림의 대문이 있다. 그 안에는 비석이 숲을 이루듯이 서 있기 때문에 공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자의 묘는 공림의 거의 한가운데 있다. 공자의 묘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 씌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공자의 아들이었던 공리(孔鯉)의 묘가 있다. 공자의 묘 앞에는 그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묘가 있다. 이와 같은 묘의 배치는 아들을 데리고 손자까지 안아주는 모습을 나타낸다. 공자의 묘 맞은편 왼쪽 구석에 자공(子貢)의 묘가 홀로 서 있는데 자공은 공자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보냇던 인물로 혈연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공자 묘에서는 송대의 석인(石人) 한 쌍이 서 있는 곳이 입구에 해당된다. 그 바깥에는 자공이 심은 나무가 서 있다. 대규모로 제사를 지낼 때는 묘 앞에서가 아니라 향전(香殿)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향전 앞에도 석인이나 문표(文豹) 따위가 만들어져 있다. 이곳의 석인은 명대의 것이고, 문표나 망주(望柱)는 송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족의 묘가 이코록 오랜 세월 동안 보존되고 더구나 규모가 커진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은 또한 근대사의 유적으로서 해방전쟁시대 중국의 군사지도자였던 주덕(朱德)총사령관이 공자묘의 향전에서 중요한 군사회의를 열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만 할 것이다.
태 산
공자의 마을이라 할 만한 곡부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정도 가면 태안(泰安)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중국의 성스러운 산인 태산으로 가보도록 하자.
태산은 '오악(五岳)의 으뜸'이라고 하며 역대의 황제들은 이곳에서 국가적인 행사 가운데 가장 장엄한 의식이었던 봉선(封禪)을 올렸다. 봉선은 황제가 태평세계의 실현을 신에게 보고하는 의식이다. 황제라고 누구든지 태산에서 봉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덕이 있는 황제만이 이를 허락받았다.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태산의 정상에서 흙을 돋우어 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봉'이고, 태산의 기슭인 소산(小山)에서 땅을 물리친 산천(山川)을 모시는 것이 '선'이라 한다. 태산은 대산(岱山)이라고도 쓰며, 그 산 아래에 옛날 봉선 의식을 거행하던 '대묘(岱墓)'라는 곳이 있다. 대묘의 문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화혁명에 처했을 때 묘 담당자들이 냉정하고 현명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묘의 본전은 거대한 천황전(天 殿)으로 이것은 자금성의 태화전, 공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의 3대 궁전이다. 묘 안에는 동정(銅亭)이 있다. 동으로 만들어진 정자는 중국에도 다섯 개밖에 없다고 한다. 대묘의 동정은 원래 태산의 남천문(南天門)에 있었던 것이다. 명대 말기에 이자성군이 왔을 때 이것을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착각하고 산에서 가지고 내려왔는데, 이것이 사실은 금도금으로 내부는 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곳에 두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음력 3월28일에 태산묘 모임이 열리는데 거의 축제와 같다. 내가 태산에 도착한 5월11일이 마침 음력으로 그날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번잡스러웠다. 일반인들은 '묘회'라고 하는데 관청의 간판에는 '태성춘계물자교류대회'라고 적혀 있었다. 연극 공연장에서는 『수호전』 74회에 나오는 씨름 시합을 공연했다. 양산박 호걸의 하나인 연청이 격천주라는 씨름선수를 내리쳐 큰 소동이 일어나는 대목이다. 지도에 표시된 태산의 높이는 1524m인데 주변에 그다지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한층 더 눈에 띈다.
이 정도 산이라면 정상까지 산길이 대부분 구불구불 굴곡이 심하게 마련인데 태산은 그렇지가 않다. 기슭에서 정상까지 쏜살같이 돌계단이 이어져있다. 같이 갔던 사람에게 헤아려보도록 했더니 정상 긑어인 빈관까지 7천 개가 넘는 계단이 있었다. 걷는 데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올라간 뒤에는 잠시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태산 속에는 수많은 건축물이 있다.
중천문(中天門)에서 옥황정(玉皇頂 태산의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오대부송(五大夫松)이라는 명소가 있다. '오대부'란 진대의 관직 이름으로 소나무에게 그 직위를 주었던 것이다. 그 유래가 재미있어서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하자.
진시황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3년 뒤에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식의 절차도 잘 알 수 없었고, 유교 학자에게 물어보아도 그 설이 여러 가지였다. 진시황은 유교학자를 내쫓고 자신의 방법대로 진행하기로 하고는 산 정상에 이르러 비석을 세우고 봉선 의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때 도중에 폭풍우가 불어 진시황은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진시황은 그 소나무에게 오대부 직위를 내렸다고 한다. 쫓겨난 유학자들은 진시황이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럴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비방했다고 『사기』는 밝힌다. 진시황이 봉선을 치르고 12년 뒤에 진은 멸망했다. 유학자들 가운데는 "진시황이 태산에서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해 실제로 봉선을 지낼 수 없었다"는 말을 퍼뜨린 자도 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태산의 신은 여자를 지켜주는 신이라고 해서 '낭낭묘(娘娘廟)'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런 탓인지 나이 든 부인들이 이 산을 많이 찾아간다. 확실히 태산에 오르면 건강에는 좋을 것이다. 어쩌다 전족(옛날 중국에서 어릴때부터 여자들의 발을 헝겊으로 감아 크지 못하도록 한 풍습)을 한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돌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노동절이나 국경일에는 이곳에서 때때로 단체 등산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태산은 인민의 건강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도교의 총본산지이기 때문이리라.
산동 제남
산동성의 수도는 제남(濟南)시다. 제남 시는 경호선(京濩線)과 교제선(膠濟線)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쪽은 태산을 거치고 북쪽은 황하에 이르는 지형이다. 인구가 3백만을 넘는 대도시이지만, '천도'(泉都)라는 별명이 붙은 것처럼 경치가 아주 뛰어나기도 하다.
또 '제남 72호(湖)'라는 말도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실제로는 백 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호수는 버드나무 경치가 아름다운 대명호(大明湖)이다. 대명호는 제남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맑은 호수 위에 유람선이나 보트가 떠 있고 호숫가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유람선을 타면 호수 안에 있는 섬으로 갈 수 있다. 그 섬에는 호심정(湖心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일명 역하정(歷下亭)이라고도 한다. 호수에서 가까운 산의 이름이 역산이라 그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호심정에는 두보의 시에서 따온 족자가 걸려 있다. 두보는 젊었을 때 산동 주변에 자주 찾아왔다. 관직도 없이 방랑하던 시절 이였다. 아버지인 두한(杜閑)이 연주에서 관리로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지내던 때다. 『신당서 (新唐書)』의「두보전」에는 "젊었을 때 가난했지만 스스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월제조(吳越薺趙)사이에 손님이 되어…… " 라고 적혀 있다. 두보는 젊음에 몸을 맡기고 방랑생활을 했는데 25세부터 29세에 걸쳐 해마다 산동으로 여행을 왔다. 34세, 35세 때에도 연주에 왔으며, 그때는 이백과 함께였다. 방랑시절경험을 바탕으로 만년의 두보가 만들어졌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호반의 북극각은 원대에 만들어 졌다. 서화전이나 분재전, 도자기전이 호숫가에 이어진 건물에서 열린다.
대명호에 연꽃이 떠오르고, 호숫가의 버드나무는 너무도 멋지구나!
서화전에 남아 있는 이 시구는 청의 유봉고가 지은 것으로 제남의 서예가 철보가 글씨를 썼다. 제남에는 아직도 풍류의 전통이 남아 있어 유람선 입구에도 제남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글이 걸려 있다.
호숫가 연안에는 근대적인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어서 젊은 사람들이 즐기며 노는 정경을 볼 수 있다. 제남이라는 지명은 '제수(濟水)의 남쪽'이라는 뜻이지만 이 제수는 2000년 정도 전에 수로가 바뀐 탓에 황하로 합쳐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명호에서 흘러 나간 물은 소청하(小淸河)라고 하며 래주만(萊州灣)으로 흘러가는데 이 강의 배편에 따라 제남의 산업경제가 윤택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제남에서 강이라고 하면 황하의 강바닥은 제남 시보다도 약 4m 높다고 한다. 강 연안에 서서 유구한 역사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으리라.
황하의 수량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경관이 바뀐다. 중국인들에게는 황하가 문명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제남 시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중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사문탑(社門塔)이 나온다. 사문탑은 중국에서도 유일하게 1층으로 된 탑이다. 544년 북조 동위(東魏)의 무정(武定)2년에 창건 되였다고 한다. 높이는 15m로 문에 들어서면 탑의 기둥으로 둘러싸고 사면에 불상을 조각해 안치해 놓았다. 사문탑은 유부라는 곳에 있는데 이곳은 그밖에도 천불애(千佛崖), 용호탑(龍虎塔)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의 사면에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고, 약간 인도풍을 띤다. 다만 북쪽 면은 비바람으로 파손이 심해 조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탑인데도 서쪽 면은 산이 병풍 구실을 해주어 자연스럽게 보호한데 비해 북쪽 면은 바람이 정면에서 몰아쳐 파손이 심하다. 당대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불상이나 천왕상 조각도 있으며, 특히 용과 호랑이 조각이 눈에 띄어 용호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불애는 용호탑의 서쪽을 보호해준 산의 벼랑에 약 60미터에 걸쳐 크고 작은 불상이 210개 남짓 조각된 곳이다. 그 가운데 기원을 알 수 있는 것이 46개 있으며 그것으로 미루어 당대 초기의 고적임을 알 수 있다. 현경(顯慶)2년 (657년)이나 3년이라는 기록을 새겨넣은 것이 눈에 띄며, 당 태종 이세민의 딸인 남평(南平)공주의 남편이 아내의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는 내력도 읽을 수 있다. 남평공주의 남편은 류현의(劉玄意)로 이 제주(薺州)의 지방장관을 지냈던 인물이다.
문헌에 따르면 이 주변에 신통사(神通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낭공화상(郎公和尙)이 351년 동진(東晋)의 영화(永和)7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승려 5백 명이 있었다고 하니 매우 큰 절 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5대째에 이 절에 큰불이 나서 소실된 것을 나중에 규모가 작게 재건하기는 했지만 어느새 페사가 되어 청대 말기에 없어졌다.
산동반도 남단에 있는 청도(靑島)는 근대적인 항구로서 지난달 독일의 조차지였던 굴욕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제남 시와 다른 풍경을 지닌 땅으로 '동방의 스위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름답다.
청도는 교주만(膠州灣)의 동남연안에 있으며, 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쥐고 있는 듯한 곳에 있다. 명대 초기에 이곳에 해군 보급기지가 설치 되였다. 주로 왜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군의 위협이 없어지자 해군기지는 철수하고 이곳도 다시 한적한 어촌으로 돌아갔다.
근대에 들어서서 청도는 항구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청도에는 해양학교와 중국과학원의 해양연구소가 있는데 이곳이 중국의 해양학 연구센터로 자리 잡아간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청도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눈을 돌리고 있는 도시라 하겠다
인구 및 면적
인구 8671만명, 면적 156,700㎢, 한족, 회족, 몽고족등이 주요 거주 민족이다. 省會는 제남(濟南)시이다. 야금, 기계, 제조공업이 발달하였다.시내인구 약 160만.청도(靑島)시는 독일의 조계지가 되면서 항구로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사회주의화 이후 경제와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여름철에도 시원해 피서 및 요양지로 각광을 받는다. 시내인구 약 157만.위해(威海)와 연대(煙臺)시는 산동의 중요 항구이자 어업기지이다.
자연환경
산동은 대부분 평원과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부의 태산(泰山)지역이 높고 그 주위로 점점 낮아지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태산은 산동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높이가 1524m이다. 온대계절풍기후지역에 속하며, 겨울과 여름이 비교적 길다. 여름엔 비가 많고, 겨울엔 춥고 건조하다. 봄에는 모래바람이 많이 불고, 가을엔 날씨가 아주 맑다. 강수량은 550∼950정도.산동에서는 품질이 우수한 광물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중 황금과 석고 다이야몬드 생산량은 중국 최고이다. 소금생산도 중국 최고. 양식농업을 중심으로 임업, 목축업, 어업이 고루 발달된 형태를 하고 있다. 밀의 생산량은 하남성과 함께 중국 최고를 다툰다.
볼거리
산동에는 아름다운 산과 물, 그리고 많은 역사유적이 있다. 산동제일의 볼거리는 바로 태산이다. 태산은 오악 중 동악에 해당하며 '五岳之首'라고 불린다. 태안(泰安)역에 하차하여 조금만 들어가면 된다. 밤새 손전등을 비추어 가며 태산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태산의 일출... 온통 구름의 바다위에 우뚝 솟은 섬위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주 멋있다.태산을 보고 나서 남쪽으로 100여km를 가면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 도착한다. 곡부에서 중국 전통 유교를 실 컷 접할 수 있다. 청도, 연대, 위해 등도 중국에서 이름난 피서지이다.
먹거리
중국집 하면 북경반점, 아니면 산동반점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괜히 산동반점 그러면 정통 중국집 같이 들린다. 하지만, 중국에서 산동요리는 별로 인기가 없는듯... 다만 산동지역에서는 우리나라 짜장면과 흡사한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지만 보통 맛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중국에 맥주하면 청도맥주다. 중국에서 제일 맛있는 청도맥주, 알고보니 독일 조계시절 때 맥주 좋아하는 독일사람들이 청도지역에 맥주공장을 많이 차리고 기술을 많이 전수했다고 그런다.
교통
산동의 교통시설은 중국에서도 거의 수준급이다. 제남을 중심으로 동쪽의 주요 항구까지 고속도로가 쫙 놓여져 있고, 일반 국도도 거미줄 처럼 촘촘히 놓여져 있다. 철로도 주요 도시를 다 거치고 있다.
기타
산동을 가보면 우리나라의 안동이 생각 난다. 먹고 자는데 최선을 다하는 중국사람들이지만 산동사람들에게는 뭔가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옛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땅이라 그런지 몰라도 괜히 중국사람답지 않게 체면을 차리는 듯한 모습을 가끔씩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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