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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지(靈地)를 찿아서 -
서산대사길 원통암(圓通庵)
◆ 답사일 : 2024.9.5
서산대사길 끝머리에는 원통암이 있다
서산대사길의 주인공은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서산대사다
그러나 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서산대사의 행적과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또한 현재의 서산대사가 되어보는 호사을 누리게 된다
지리산옛길은 세이암이 있는 신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의신마을에서 끝난다
의신계곡을 끼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계곡 오른쪽은 아스팔트길 차도이고 왼쪽 산비탈 오솔길이 지리산 옛길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길은 세이암에서 시작하여 원통암에서 끝난다
즉 의신마을에서 약 1.3km의 도덕산길을 올라가면 원통암이 나오고 여기가 서산대사길의 종점이다
화개장터와 쌍계사 벚꽃길을 지나면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成佛)했다는 전설을 품은 칠불사(七佛寺) 오르는 길과, 대성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가 최치원이 세속과 이별례를 치른 곳이다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 근처 물은 유리알처럼 맑아 잔잔한 흐름을 이루고 계곡마다 바위를 휘돌아 흐른다.
주변에는 기암과 괴석이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풍치가 선경(仙境)을 이룬다.
세이암이 말해주는 무언의 장열함이여
의신 쪽에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마을 건너편에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절벽 앞 너럭바위 애는 ‘세이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이다
세이암(洗耳巖) 에서 귀를 씻은 최치원(崔致遠)
최치원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유랑 길로 들어서 경주남산, 강주빙산, 합주 청량산, 지리산 쌍계사, 함양과 옥구 부산 해운대 등으로 두루 돌아다녔다.
최치원은 말년에는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 가 승려 현준과 친교를 맺고 지냈다.
그때 가야산 해인사 홍륜동계곡으로 들어가 바위에 새겨 남긴 글이 있다.
그 글이 ‘흐르는 계곡 물에다 귀를 씻고 싶다.’ 라고 하는 ‘세이암(洗耳巖)’이다.
뿐만 아니라 일입청산 갱불환( 一入靑山 更不還 ·내 한번 청산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는 각오의 글 또한 남겼으니 전문은 다음과 같다.
‘贈山僧’ (산승에게 보냄)
僧乎莫道 靑山好 스님들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 하지 마시오.
山好何事 更出山 산이 좋다면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시는가.
試看後日 吾踪跡 두고 보시라. 나의 뒷날 자취를
一入靑山 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결국 최치원 선생은 가야산에 들어가 말년을 보냈다는 이야기 인데 그렀게 되면 지리산 입산설은 허위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전설은 그 나름대로의 깊은 상징성을 품고 있으므로 이곳 세이암도 최치원의 지리산 유적지로 간주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신흥초등학교 옆에 지팡이 꽂아놓고, 쌍계계곡 세이암 바위에 앉아 속세의 더러움을 씻은 후 화개동천의 하늘을 열어 선학을 타고 청학동으로 들어간 겄이다
서산대사길이라 불리기도 하는 지리산 옛길은 의신마을에서 신흥마을까지 총연장 4.2Km의 산길로 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되는 곳이다,
지리산 옛길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숲길의 정취를 만끽하며,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길임이 분명하다.
세이(洗耳)의 전설은 허유 · 소부 [ 許由 · 巢父 ]에서 부터 연유되었다
허유와 소부 두 사람은 모두 중국고대 전설상의 성군 요(堯)시대에 살았다는 고사(高士)이다.
허유는 요제(堯帝)가 자기에게 보위를 물려주려 하자 귀가 더럽혀졌다고 영천(潁川)에서 귀를 씻은 후 기산(箕山)으로 들어가서 은거하였고, 소부는 허유가 귀를 씻은 영천의 물이 더럽혀졌다 하여 몰고 온 소에게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져 온다
최치원도 아마 속세를 미련없이 버리기 위해 귀를 씻고 신선도를 닦기위해 지리산 깊은 골로 숨어 들어가 버렸나 보다
그만큼 세이란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로 여겨진다
처음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이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이요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 半九十) 이다
귀를 씻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는 길은 반 성공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신계곡의 초입에 있는 세이암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 상징성 하나 만으로도 세인의 주목을 끌만한 유적지가 아닐 수 없다
지리산 옛길은 호젓하기만 한데````
지릿산옛길 산행기를 읽어보면 는 다 고만고만 하다
전설의 의자바위가 어떻고저떻고, 계곡 물소리와 함께 하는 숲속의 향기가 어쩌니 하는 평이하고 늘상 듣는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래서 식상한 산행기는 생략하고 지리산 배꼽에 위치한 천하명당이라고 전해지는 원통암 이야기로 넘어 가고자 한다
원통암 가는 길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원통암 가는 길의 들머리는 의신마을이다
의신마을에서 동북쪽으로 40분가량 오르면 닿는 원통암은 서산대사가 출가한 암자로 유명한데, 풍수적으로는 그 자리가 지리산의 배꼽이라고들 한다.
지리산 덕평봉 남쪽 산자락이 지금의 의신마을이다.
나말여초 이곳에 ‘의신사’라는 큰 가람이 있었고, 원통암은 그 산내 암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일대에 선풍이 휘날린 것은 조선 중종 때다.
벽송대사가 마천골에 초막을 지어 정진하니,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대선림(大禪林)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초막이 지금의 벽송사다.
▲덕평능선
원통암도 벽송, 부용, 경성, 숭인, 추월 스님 등 당시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한 마리 학이 구름을 타고 날아등것이 바로 운학(雲鶴, 서산대사 아명)이다
15세에 지리산 유람을 나섰다가 원통암에 들러 숭인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하였다
운학은 휴정(休靜) 스님이 되어 6년 뒤인 1540년 벗을 찾아 남원 나들이 가는 길에 한낮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오도송은 아래와 같다
머리털이 희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髮白非心白)
옛 사람은 일찍이 말했네(古人曾漏洩)
문득 대낮의 닭 울음소리 듣고(今聽一聲鷄)
대장부 할 일을 모두 마쳤네(丈夫能事畢)
홀연히 깨닫고 본래 내 집에 이르니(忽得自家底)
온 세상 사물이 그대로 진리의 세계로세(頭頭只此爾)
천언만어 팔만 금보장경이(萬千金寶藏)
원래는 하나의 빈 종이였네(元是一空紙)
당취의 총본산 의신사와 원통암
서산대사는 당취의 최고 지도자였다
당취(黨聚)라는 말이 있다.
무리 또는 集團(집단)이라는 意味(의미)를 담고 있는 黨聚(당취)에는 '革命的(혁명적)인 뜻'이 담겨있다.
잘못된 政治體制(정치체제)을 바로 잡으려는 스님들의 秘密決死組織(비밀결사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지하비밀 결사(結社)조직을 일컫는 용어다.
당취는 서민들을 착취하는 양반이나 부자·벼슬아치들을 응징하는 조직이었다.
또 하나의 역할은 가짜 승려들을 색출해서 징벌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또는 부역을 피해서 가짜 승려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머리 깎고 승복을 걸치고 깊은 산에 들어와버리면 치외법권 지대에 속한 셈이라 진짜 승려들이 피해를 볼 수 있었다.
이 당취는 아주 비밀스러운 결사조직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고, 이 산봉우리마다 절과 암자가 있었고, 이 산골짜기의 절과 암자를 다니려면 오로지 걸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산악국가였다.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큰 도로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괴나리봇짐을 진 보부상이나 승려들만이 전국 산골짜기에 그물코처럼 연결된 산길들을 자유스럽게 돌아다녔다.
당시 지리산 의신사(義神寺)에 소속된 암자는 31개쯤 있었다고 한다.
그 암자 중의 하나가 원통암(圓通庵)이다.
해발 700m에 있는 원통암은 의신사에서 30~40분쯤 올라가면 나타난다.
청학이 알을 품는다는 청학포란(靑鶴抱卵)의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원통암 뒤의 봉우리가 도덕봉인데, 이 도덕봉의 꼭대기 부분이 바위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이 도덕봉 꼭대기의 바위 부분이 청학의 머리에 해당하고, 도덕봉 양옆의 봉우리 형태가 청학이 적당하게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둥그런 형태의 봉우리 꼭대기에 날카로운 바위가 있으면 매나 독수리, 학으로 간주하고, 바위가 없이 그냥 둥그런 형태면 닭이나 봉황으로 본다.
거기에다가 원통암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너 겹으로 거듭 둘러싸고 있다.
여러 겹으로 둘러쌀수록 좋은 것으로 본다. 두껍다는 이야기이다.
암자 터를 좌우에서 봉우리들이 겹겹이 쌓아줄수록 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고 보존된다.
이러한 명당의 조건을 갖춘 원통암에는 당시에 숭인장로(崇仁長老)가 머물고 있었다.
숭인장로는 서산 이전에 지리산에 모여 있던 지리산 당취의 정신적 지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조 억불정책에 반발하여 가장 먼저 당취를 결성한 세력이 금강산으로 갔고, 그다음에 결성된 세력이 지리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지리산에 모였던 당취 2중대 세력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곳이 바로 의신사 일대였고, 그 의신사의 조실급 비중의 인물이 숭인장로였으며, 숭인장로가 머무르던 곳이 원통암이라는 게 지리산 당취론을 주장하는 조용원 선생의 주장이다.
원통암에서 바라본 산세.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깨달음을 얻은 한 소식에다가 승과급제까지 했으니 서산은 이후로 지리산은 물론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 명산에 흩어져 있던 당취들의 총대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산 휘하에는 당대의 불교계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전해주면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서산 밑에서 배출된 제자들이 임진왜란의 전쟁터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명당 유정, 처영, 영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원통암은 천년을 내려오다 구한말에 불타 사라졌다.
그 뒤 100여 년 방치되었던 것을 1997년 동림 스님이 인법당(人法堂) 하나, 산신각 하나를 세우고 ‘원통암(圓通庵)’ 현판을 달아 이터 터는 다시 암자가 되었다.
원통암이 서산대사의 수도처라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구전되어 올 뿐, 출가처의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오랜 노력 끝에 현 주지인 노옹스님이 <한국불교전서> 8권 조선시대 제월당대사집 상권 p120 ‘청허대사행적’에 실린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 ‘숭인장로에 의하여 원통암에서 삭발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제월당 경헌(1544~1633)은 서산의 제자이고, 숭인장로는 서산의 은사이다.
다행스럽게도 제자가 스승의 행적을 듣고 적어 놓은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 현판에 쓰기를 ‘서산선문(西山禪門)’. 토굴, 암자도 아니고, 선방, 선원도 아니고, 선문은 서산대사의 문중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는 암자의 일주문이라는 뜻이니 그 배포가 참으로 크다 하겠다
“도량이 작아도 말쑥해. 정면에 백운산 세 봉우리가 안산으로 솟아있고, 청학이 날갯짓하며 비상하는 형국이라, 천혜의 명당이요.
서산대사가 출가하고 5백 년이 흘러 내가 완성한 도량이라, 여기는 본사 급 암자요.” 하고는 노옹스님 웃는다.
원통암의 주법당은 인법당이다
원통(圓通)의 이미는 이르지 아니한 데 없이 널리 두루 통달한다, 또는 진여의 이치를 널리 깨닫는 수행을 원통이라고 한다고 한다.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 圓通殿) 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다.
인법당 옆 청허당에는 청허선사 즉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청허의 출가암이요 수행처니 당연히 스님의 영정은 여기에 모셔져야 하는 겄이다
스님의 맑은 눈빛이 지리산의 사마외도를 압도하는듯 하다
산신각에 올라서서 앞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인법당에서 바라보면 대나무가 앞을 가려 갑갑하다
그래서 산신각에 올라 바라보아야 원통암의 풍수적 진면목을 알아차릴 수 있다
화개동천을 사이에 두고 산 꼬리가 굽이친다.
남부능선에서 뻗어 내린 지네능선과 토끼봉 지능 범왕능선이 서로 꼬리를 겹치고 그 뒤로 섬진강 넘어 백운산 능선이 겹쳐진다.
원통암 터를 청학포란(靑鶴抱卵)이라고도 부른다.
청학이 알을 품는 자리이다.
그 뒷산의 바위 봉우리는 청학의 벼슬에 해당한다.
학은 덩치가 있는 새이므로 닭벼슬보다는 큰 벼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덕봉이다.
도덕봉은 청학포란의 벼슬 역할을 하고 있다.
앞산의 허리 잘록한 부분이 ‘내당재’이다.
이 내당재를 넘어가면 또 하나의 고갯마루가 나타나고 그 고개 이름이 ‘외당재’이다.
‘당재’라는 이름은 ‘당취들이 지키던 고개’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의신사를 가장 앞에서 지키는 고개 이름이 내당재이고, 그 너머로 바깥에 있던 방어ㅓㄴ이 외당재인 셈이다.
당취 본부였던 의신사를 이중으로 지키던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개념이었다
첫댓글 카페. 글과사진올린다고 수고많았어요잘보고갑니다~^^♡
서산대사길을 옛자취따라 초암선사께서 걸으셨으니 구름에 달가듯 아주 아름다운 풍경 입니다.
이제는 전문적으로 해설을 하시고 박식하여 너무나 조슴다 감축드립니다
지리산 깊은 계곡 산천이 너무 아름다워
이 길은 몇번이나 걸었지만 그냥 건성으로 지났는데
초암 선생의 해설에 다시 새롭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세이암 여기있네요 참잘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