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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01
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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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한 호텔에서 열린 웨딩 박람회에서 예비 부부가 웨딩드레스를 구경하고 있어요. 요즘엔 연애결혼이 많지만, 우리 조상들은 중매로 상대를 만나 결혼하는게 일반적이었어요. /뉴스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 남녀들은 평생을 함께할 자신의 짝을 찾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엔 여러 결혼 정보 회사가 운영되고 있는데요. 심지어 최근엔 아파트 입주민들끼리의 '결혼 중매 모임'이 만들어져 이슈가 됐어요. 비슷한 경제·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싶어 하는 수요가 반영된 것이죠. 사실 중매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혼인 풍습인데요. 오늘은 과거 사람들의 중매 풍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매란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연을 이루어주는 일이에요. 남녀가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는 일이 많은 지금과 달리, 과거엔 자유로운 연애를 통한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답니다. 고구려 건국 설화에 따르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은 중매를 통하지 않고 혼인했다는 이유 등으로 쫓겨났지요. 하지만 과거 모든 사람이 중매를 통해 혼인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나라 삼국 시대 풍습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남녀 사이 연애를 통한 혼인 사례도 있답니다.
중매혼이 보다 일반화된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13~14세기쯤으로 추정돼요. 이때 고려의 처녀들이 부모를 떠나 원으로 끌려가는 일이 잦았어요.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해 고려 사람들은 딸이 열 살 정도만 되어도 결혼을 시켰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는 연애를 통해 자신의 배우자를 정하는 것이 어렵지요. 그래서 당사자 의견보단 부모의 의사가 반영된 중매혼을 하게 되었죠. 중매혼은 조선에서 더욱 확대된 것으로 알려졌어요. 남녀 간 왕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유교 가치관이 강화되면서 자유 연애는 어려운 일이었죠. 혼인 적령기가 된 남녀는 중매로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매파'라고도 불리는 중매인은 혼인 적령기 자녀가 있는 집안을 찾아다니면서 양쪽 집안을 소개하고 혼인을 성사시켰는데요. 중매인들은 주로 상민 계급이지만 양반 집을 드나들며 이야기를 전해야 했기 때문에 말주변이 좋고 믿음직스러워야 했죠.
과거 중매인은 혼인 과정에서도 많은 일을 했어요. 먼저 중매인은 혼인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어요. 신랑 측은 중매인을 통해 신부 측에 결혼 의사를 묻고, 신부 측에서 허락한다면 중매인은 신랑의 집안 배경, 관직, 성명, 사주 등을 적은 편지를 신부 집에 전달합니다. 그 후 양측은 다시 중매인을 통해 혼인 날짜를 잡았지요. 약혼식을 하는 경우 신랑과 신부 집안을 잘 아는 중매인이 사회를 보기도 했답니다. 서로 잘 아는 두 집안에서 혼인을 하는 경우 직업 중매인 대신 친척이 중매인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중매인이 혼인을 성사시키면 신랑집에서 중매인에게 보답을 했어요. 대부분 옷 한 벌 정도였고, 좋은 신부를 소개한 경우 약간의 금전도 챙겨주었어요. 중매인은 큰 금전적 이익을 기대하고 하는 일은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중매인은 인연을 이어주며 유력 가문과 관계를 유지하고 대외적인 신용을 쌓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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