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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북간도라는 곳
(하얼빈의 멜로디 공원, 특색이 있다. )
중앙대로를 빠져 나온 택시는 송화강변을 따라 달렸다. 돌아서 가는지는 몰라도 도시 한복판을 거치지 않으니 도착은 빨랐다. 조금 전에 만났던 젊은 여인이 일러준 말이 맞았다. 우리는 여유 있게 장춘 행 고속열차에 올랐다. 요동에서 심양을 향할 때 연암이 넒은 평야에 놀라 울음을 울만한 장엄한 곳이라 하였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산이 하나도 없고 넒은 평야에 가끔씩 그늘 막에 바람막이를 해주는 미루나무가 줄을 서 열을 맞출 뿐이다.
집들은 북한 가옥형태도 그렇지만 하나같이 기다랗게 일렬로 지은 집이다. 가운데 부엌이 있으며 양 옆으로 구들장이 놓인 방. 이 구조는 멀리 고구려 때부터 그 기원이 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구들장이 있으며 절구통이 있다. 이는 한족이나 몽고인들은 없는 우리 고유의 습속이다. 간도사람들의 특유 겨울나기이고 사는 풍속이다. 일반적으로 간도(길림성, 요녕성, 훅룡강성, 연해주)라 하면 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말한다.
엄격히 구분 하면 백두산 북쪽 지역을 북간도, 백두산 서쪽 요녕성 지역을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동간도라 한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고 장춘(신경)에 만주국을 세운 뒤부터는 간도는 만주와 북만주로도 불리게 된다. 간도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잇섬으로, 본뜻은 압록강 두만강의 하중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그 의미가 점차 확장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고대부터 북간도는 부여,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순으로 고유의 한반도 영토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는 동간도와 북간도 여러 곳에서 여진족이 유목민으로 흩어져 살았고 조선과 명나라 한족들은 이들을 오랑캐 족이라 부르면서 하급민족으로 천대하였다.
18~19세기 서양에서 제작된 고(古)지도의 대부분은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프랑스 당빌(D’Anville·1737), 독일 하세(Hase·1730), 영국 키친(Kitchin·1745), 이탈리아 상티니(Santini·1778), 오스트리아 몰로(Mollo·1820) 등 당대의 유명 지도제작자들이 만든 지도는 두만강 이북 동간도 지역뿐 아니라 압록강 서북쪽도 조선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조선과 청을 구획하는 울타리였던 이른바 ‘레지(Regis) 선’을 두 나라 국경으로 명기하고 있으며, 동쪽 국경도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근대까지도 간도는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세종대왕 때는 북간도에 살고 있는 오랑캐 족 대부분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켰고 최윤덕과 김종서로 하여금 북간도에 4군 6진을 설치하도록 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여진족들은 스스로 만주족이라 부르며 중원의 귀족 계급으로 편입되면서 살기 좋은 대륙 본토로의 이주 행렬이 이어진다.
이때 북간도에 남은 여진족 대부분이 떠나면서 북간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50여년 후 청나라 강희제 집권기인 1667년,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이북 지역(북간도)과 백두산을 청나라의 발상지라며 신성시하여 봉금령을 선포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산림 벌채 등을 북간도에서 일체 금지시킨다. 이때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었고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 파워에 눌려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청나라 봉금 정책에 따른다.
조선 조정에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백성들의 도강 행위를 금지 시켰고 이를 어기는 자는 도강죄로 처형 시키면서까지 우리 조선의 사대부 위정자들은 청나라 눈치 보기에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여진족은 본디 퉁쿠스족으로 유목과 양치기 등의 수렵을 하며 살았다. 이 때문에 북간도 지역은 200년 가깝게 개간이 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고 또한 청나라의 봉금 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외로운 땅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의 부패와 평안도 홍경래의 난(1811년) 등으로 혼란에 빠졌고 청나라 역시 신하들의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아편전쟁(1839년 ~ 1842년, 1856년 ~ 1860년)과 거듭되는 반란 (태평천국의 난 1851년~1864년)이 일어나 양국이 함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도강에 대한 단속도 느슨해졌다. 이틈을 타 조선의 함경도와 평안도 서북 백성들이 먼저 도강을 시작한다. 봄이면 북간도로 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여 다시 돌아오는 농사. 당시는 이런 형태의 농사를 도둑 농사라고 했다.
그렇게 200여 년 간 버려진 북간도에 농사일로 다시 조선 백성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 己巳대 흉년, 1870년 庚午대 흉년 등 2년 연속으로 흉년이 들자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목숨을 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면서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 때 벌써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의 함경도 평안도 백성들이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철폐 하면서 2년 후 조선도 도강 금지령을 폐지한다. 또한 1885년에는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간도 이주 금지령마저 철폐하면서 많은 조선 백성들이 버려진 기회의 땅 북간도를 찾는 이주 행렬이 절정을 이루었다. 20세기로 접어들어서는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으려는 항일 독립 운동가 등이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 북간도로 숨어들었고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을 승리 하고는 조선을 넘어 대륙 침탈이라는 본성을 드러냈다.
북간도를 장악한 일본 관동군은 다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전 지역을 점령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이를 앞세워 신경(장춘)에 수도를 둔 만주국을 세운다. 이때 간도 인구가 3,000 만에 이르렀고 조선의 인구는 2,000만 쯤 이었는데 북간도(연변)에 생활 터를 잡은 조선의 백성들만도 조선 인구의 10/1 수준인 200만에 가까웠다.
광복 후 북간도에 남은 200여만 조선 백성의 절반 정도는 남쪽이나 북쪽으로 자유롭게 돌아 올수가 있었지만 그간 일구어 논 전답이나 생활 터전 등을 쉽게 버릴 수 없는 조선 백성 100 여만 명은 그대로 북간도에 남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 시인. 투명한 詩語만큼 여린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았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그가 태어난 곳도, 죽은 뒤 유해가 묻힌 곳도 한국 땅은 아니다.
간도로 불렸던 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용정(룽징)시. 1907년, 조선인과 중국인이 평화롭게 살던 용정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 간판을 내걸었다. 일본은 간도 조선인 보호를 구실삼아, 용정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설치해 독립투쟁을 압살하고 동북3성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조선인에게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던 중국은 이후 조선족을 박해하면서 청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일본 앞잡이로 치부하며 학대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바꿨다. 간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싸움 속에서 조선족은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독립에 대한 욕구와 투쟁도 거셌고 “혁명을 하려면 간도로 가라”는 유행어까지 있었다.
항일 독립운동과 혁명 정신은 당시 조선어 문학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시기 간도에서는 일제 침략에 맞서 민족을 구하고 독립하기 위해 나설 것을 호소하는 창가류의 독립군가나 혁명가요가 등장하는 데 소박하고 평범한 언어로 순수하게 쓰여 지금도 읽으면 진솔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다시 떠오르는 윤동주 시인, 그는 옌볜의 명동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자신의 고향을 “남쪽 하늘 저 밑”, “따뜻한 내 고향”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간도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고 흐느끼지만, 북간도를 고향이라고 쓰지 않았다. 시인은 고향을 갈구하지만, 북간도의 자연, 그곳 사람들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윤동주에게 고향은 단순히 향수를 달래거나 제 안위를 편히 할 자리가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자유롭게 합일되는 이상향이지만 식민 지배 하에서는 가질 수 없어 쓰라린 것이었을 테다.
우리는 내심 조선족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짙다. 낮춰본다는 표현이 맞을 성 싶다. 옌볜을 떠나 중국 다른 대도시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조선족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말한다. “우리가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크지만, 그게 한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대하듯 그들 역시도 우리를 좋게만 바라보지 않는다. 피차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윤동주가 간도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듯이 조선족 중장년층 대부분은 실향민 의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증조부모와 그 부모들은 조선 땅에 고향을 두고 간도로 건너왔고, 그 자신들은 고향 옌볜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나간다. “우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어디도 갈 수 없이 변두리에 끼어 살아온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안타까운 현실이다.
민박집 아줌마도 시댁이 이북으로 어쩌지도 못하는 처지이다. 잘나간다고 뽐내지 말고 불쌍하지만 돌보아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 그들의 말 속에서 나는 어쩌지도 못하는 마치 먹던 닭 뼈가 목에 걸린 듯 우울한 오늘의 현실을 맛본다. 장춘에 오는 사이 간도에 대해 긴 생각을 했다. 김 이사가 불쑥 말을 한다. "내 아버지도 왜정시대 때 간도에서 살았어. 큰 형을 데리고 갔었지." 간도는 먼 시간에 묻힌 남의 이야기가 결코 아닌 것이다. 불쑥 떠오르는 나의 글 하나,
저마다의 가는 길, 누가 태어날 곳을 알고 태어나는가. 어찌 생각하면 인생이란 긴 여정이고 여행이다. 강물 흐르듯 쉴 새 없이 시간이 흐른다. 저문 해처럼 나도 저무는가. 저문다하여 끝이 날 여정이 아닌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갈 길이 있다는 것이 이처럼 따스하고 돈독할 줄은 예전 생각하지 못했다. 태초에도 길은 있었다는 말이 꽤 실감이 난다.
하루도 빠짐없이 걷는 길. 우리는 발길 따라 시간 쫓아 뚜벅뚜벅 어디론가 걷는다.예전엔 돌부리에 걸려도 툭툭 털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섰는데 요즘은 힘이 부치는지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다. 걸을수록 느는 것이 삶의 빚이란 생각이다. 누군가 함부로 길을 내지 말라 하였다니 그 뜻을 이제 알 것도 같다. 흡사 삶속에 얽히고설킨 고뇌의 넝쿨을 헤치는 탐험인 양 마냥 두렵기도 한 길.
하지만 가야 할 길이라면 또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 나이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갈 길은 알지도 못하지만 알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갈길은 구만리 길, 늘 멀다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그리로 향해 갔고 내가 또 가고 있다. 어쩌면 가는 길이란 무수한 우연을 늘어트린 막연함으로서 자연스레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지난 시간을 그리며 눈물도 닦고 쉬어 가고 싶기도, 아쉬움에 야속하다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나이 들어 어리석은 바보 되어 자꾸 묻는 독백이 또 지난 길의 미련이 아닌가. 멀고 먼 구만리 길, 언제 가나 했더니 그게 그것이 아니고 무슨 길이 이리 많은가 싶었더니 또 그게 그것이 아니었다. 한때는 여럿 쫄망쫄망 내딛는 발걸음이었는데 정녕 그것도 아니었다.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호젓한 길에 마냥 느릿한 발걸음이고 혼자 걷는 발길이다. 허방다리 안 짚고 이만큼 걸어온 것만으로 한없이 족한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남겨진 족적 없이 내게 남은 것은 아쉬운 청춘이 아닌가. 용렬한 삶의 길에서 삶의 의지가, 용맹이 내게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허망은 늘지만 기나긴 고달픔, 내 삶의 속절을 위해서 회한은 깊숙이 간직할 삶의 절임이지 않을까. 늘 또렷이 갈길을 말하던 별인들 제 뜻을 알기나 하는 걸까. 요즘 들어 찬찬히 바라다보는 밤하늘의 유정이 너무 곱다. 내 길도 저 별처럼 곱다면 알마나 좋을까. 아마 수천 만년 산 별들도 자기 길을 스스로 택하지는 않았으리.
갈래 길, 택한 길이라 하였는데 살다보니 가는 길이 나를 선택한 것만 같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들 고달픈 길을 스스로 걷자 했겠는가. 되돌아가지도 못하면서 나를 끌고 가는 길. 이런 무자비가 이 세상 어디 또 있는가. 아!아! 가는 길은 나의 삶, 애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사정없이 그렇게 끌고만 간다. 그래도 별 도리 없이 가야하는 길. 그간 길 쫓아 시간 따라 하나 배운 것이 있다. 이 나이엔 실수는 더 이상은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고 세상 욕망은 이제는 내 몫이 아니란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나는 겨울 들녘 서걱대는 황량한 고독한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체념이 아니다. 누구도 그러하듯 그렇게 살다 가는 길이란 것을 이제는 조금은 알것 같아서다. 그간 나는 '나를 위해서'라는 현실의 부침과 부질없는 욕망에 기대서 정작 또 다른 내 자신을 정작 돌보지 않았다. 혹여 다가올 새해, 안개 뿌연 새벽길이 트이며 나를 반기는 어린 아이의 미소의 부드럽고 천진난만한 동화라 한다면 이는 가는 길이 내게 준 마지막의 큰 행운이며 삶의 행복 일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