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나폴레옹 시대(4)
4. 나폴레옹 제국의 절정(2)
나폴레옹이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에서 대륙 국가들과 영국의 무역을 일체 금지시킨 칙령을 대륙봉쇄령이라고 한다. 그것은 새로운 대륙 체제(Contrinental system)였다. 나폴레옹의 대륙 지배는 1807년의 틸지트 조약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그러나 유럽 지배는 영국을 항복시키기 전에는 완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국이 건재하는 한 나폴레옹의 대륙 지배도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베를린 칙령은 대륙 지배의 완성과 함께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영국을 경제적으로 항복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영국을 군사적으로 항복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트라팔가르에서 실증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경제적 작전을 쓰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비추어볼 때 원래 나폴레옹 전쟁에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는 면이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군의 진격은 나폴레옹 법전의 진군을 의미하고 나폴레옹은 전제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자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과의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은 일찍이 시민혁명을 실현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의 선구자로서 영국의 산업은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대륙 및 인도 등 해외 식민지로까지 뻗쳐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정치적 지배층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도 나폴레옹을 해방자로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황제가 된 후부터는 오히려 개인적 정복욕과 지배욕에 눈이 어두운 야심가로 밖에는 보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영국과 벌인 전쟁이 대륙전과는 달리 경제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이 대륙의 시장을 상실함으로써 받는 타격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은 영국과 같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공업과 정치 및 전쟁의 구조적인 관련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 타격이 정치와 군사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과거를 회고하면서 남긴 말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업가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생산량이 많아질수록 생산량을 더 높일 것을 생각한다. 가령 노무자 1,000명을 쓰고 있다면 1만 명이라는 수에 이르는 것밖에 꿈꾸지 않는다. 더구나 재신의 야심만이 그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도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공업이 발전하면 조만간 정치에 큰 혼란을 일으켜서 그 나라의 정부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떨어뜨린다.
영국은 이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업이 발전할수록 생산물의 유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력을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영국은 산업화하면 할수록 호전적이 될 운명에 놓여 있다.
나폴레옹은 그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품 시장을 매개로 하여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경제와 정치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동시에 산업이 발전하면 해외시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전쟁이 불가피 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잇다. 그는 이 일반론을 영국 사회에 적용하여 영국의 대륙 침략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만일 자신이 영국과 통상 협정을 맺어 프랑스의 문호를 영국에 개방했더라도 영국은 머지 않아 프랑스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문호도 개방하라고 전쟁을 걸어왔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논리는 영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프랑스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프랑스는 대혁명에 의하여 봉건제도를 철저히 분쇄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본궤도에 올려놓아 산업 부르주아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총재정부와 나폴레옹 체제가 부르주아 사회의 안전보장을 위한 것임은 이미 누차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프랑스의 산업이 발전하여 부르주아의 이익이 증대할수록 그것은 나폴레옹의 정치권력을 더욱 강화해주고 그의 전쟁 정책을 더욱 밀어줄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를 뒷받침해준 것은 프랑스 산업의 발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의 깊은 관계에서 대륙봉쇄를 뒷받침한 두 번째 명분은, 영국 상품을 배척하고 프랑스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무역주의의 경제사상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상품을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밀어내고 다음에는 점령 지역에서 몰아내더니, 드디어는 대륙 전체에서 쓸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은 영국에 대한 전략의 확대와도 병행했지만 프랑스 산업의 발달과도 병행하였다. 프랑스 산업의 발달이 대륙의 상품시장을 그만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륙봉쇄를 가능케 한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군사적 지배의 완성이었다. 아무리 프랑스의 산업 발전이 대륙봉쇄를 요구하더라도 나폴레오잉 군사적으로 대륙을 지배할 수 없었더라면 대륙봉쇄는 감히 구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륙봉쇄의 실효를 거두려면 나폴레옹의 대륙 지배 체제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생겨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 구멍을 통하여 영국 상품이 얼마든지 대륙으로 흘러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칙령은 전문 8조와 본문 11조로 되어 있다. 전문에서, 영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역 상인들마저 전쟁 포로로 하여 정복과 봉쇄를 무제한 감행하고 있으므로 프랑스는 할 수 없이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책임을 영국에 뒤집어싀운 후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1) 대영 열도는 봉쇄 상태에 놓여 있다.
(2) 영국과 일체의 통상 및 교통을 금한다. 따라서 영국의 우편을 취급하지 않는다.
(3) 영국 국적을 가진 자는 누구나, 프랑스의 군대나 동맹국 군대의 점령지에서 발견되면 포로로 하고, 창고의 화물과 재산을 전리품으로 간주한다.
(4) 영국 상품의 매매를 금지하고,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에서 온 모든 선박은 대륙의 어디에도 기항할 수 없고, 그 상품은 전리품으로 간주한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명예에서 비롯되고, 명예는 전승에서 비롯된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의 군사적 승리는 절정에 달하였다. 영국을 타도하려는 그의 거인적인 격투가 대륙봉쇄의 형태로 나타났다. 대륙봉쇄는 나폴레옹의 군사 정복과 그의 경제정책의 통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운명은 이 거대한 계획의 성패 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계획은 어디까지나 대륙의 군사적 지배를 전제 조건으로 하였다. 대륙 지배의 어느 한 군데에라도 구멍이 뚫리면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렇다면 나폴레옹 제국은 과연 대륙봉쇄를 지탱할 수 있는 경제적 통일체로서 성립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폴레옹 제국은 프랑스 제국과 위성국가 및 동맹국의 세 종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개혁된 행정구역은 본래 83도였는데, 전쟁에 의해 정복한 영토를 프랑스에 합병하면서 1806년 현재 프랑스 제국에는 101도가 있었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주네브, 라인 강 좌안, 피에몬트, 제노아 등의 정복지가 그러한 도를 구성하였다. 이 새 도들은 계속 늘어나 1810년에는 130도가 된다. 이것이 프랑스 제국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네덜란드 왕국, 라인 연방, 베스트팔렌 왕국, 스위스 연방,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등의 위성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 위성국가들 바깥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페인 등의 동맹국들이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광대한 나폴레옹 제국이 과연 일치하여 대륙봉쇄에 나설 것인가는 처음부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대륙봉쇄의 모순을 경제적 측면에 한정하여 살펴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모순들이 곧 발견된다.
첫째, 대륙봉쇄는 영국 상품의 배제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프랑스 공업이 독점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거기서 프랑스의 공업은 정부의 각종 특혜에 의하여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공업에 맞수가 될 만한 나라들의 공업, 예컨대 서부 독일의 공업은 오히려 정책적으로 희생당하였다. 그러한 공업 정책은 프랑스의 공업 발전을 위하여 종속국가들을 착취하는 정책이었다. 둘째, 나폴레옹 제국 전체로서 공업과 상업의 이익이 대립하였다. 대륙봉쇄는 공업가에게는 유리했으나 무역상에는 큰 타격이었다. 특히 북해의 함부르크와 단치히,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도시의 상인들이 입은 타격이 매우 컸다. 이런 항구들이 밀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셋째, 나폴레옹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나라들은 경제구조가 저마다 달라서 영국과의 경제 관계도 서로 달랐다. 따라서 대륙봉쇄에 대한 그들의 반응도 모두 같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아직 뒤떨어져 있는 농업 국가들로서 곡물, 목재, 대마와 아마 등을 영국에 수출하고 영국의 공업제품을 수입했는데, 대륙봉쇄는 그들의 농업 생산물의 수출 시장을 죽이고 값싸고 좋은 영국산 공업제품을 사 쓰지 못하게 하였다. 농산물은 체화로 가격이 폭락하고 수입품은 품귀로 가격이 폭등하였다.
요컨대 대륙봉쇄는 그 자체의 모순에 가득 찬 억지였다. 이 억지를 지탱하는 힘은 오로지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었다. 총칼이 순리를 이기지 못함은 만고의 진리이다.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이 억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거기 그의 몰락의 궁극적 원인이 잠복해 있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 연합군의 항복을 받고 틸지트 조약을 맺은 후 귀국한 것은 1807년 7월이었다. 이때의 나폴레옹은 산꼭대기에서 유럽 대륙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날개를 접고 있는 독수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막 정복한 유럽 대륙을 번쩍이는 눈으로 두루 살폈다. 자기 뜻에 어긋나는 자가 있다면 당장 날아가서 덮쳐버릴 테세였다. 대륙봉쇄의 해안선을 살펴볼 때 아직 미진한 데가 있었다. 그것ㅇ느 이베리아 반도였다. 그는 날개를 펴서 이베리아 반도로 향하였다. 1807년 10월 27일,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풍텐블로 비밀조약을 맺고 포르투갈의 분할의 약정하였다. 쥐노(Jean Andoche Junot) 장군이 2만 7,000의 군대를 거느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리스본을 점령하였다(11월 27일).
나폴레옹의 궁극적 목표는 포르투갈만이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 전체였다. 당시 스페인의 정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896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프랑스와 연합하여 싸웠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해군의 주력을 잃었다. 그리고 왕궁 안에서는 카를로스(Karlos)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ia Louisa de Parma,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및 그녀의 애인이며 재상인 고도이(Manuel de Godoy) 사이에 복잡한 음모와 암투가 어지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 어지러운 정치 정황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는 1807년 12월 뒤퐁(Pierre Dupont) 장군에게 4만의 병력을 주어 스페인을 점령하게 하고 1808년 5월에는 형 조세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혔다. 나폴레옹은 새 헌법을 공포하여 스페인의 봉건제를 철폐하였다.
한편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의 기반을 더욱 다지려고 정치적인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1807년 8월 하순에는 토스카나 지방을 점령하여 북쪽의 이탈리아 왕국과 남쪽의 나폴리 왕국을 연결시키고, 이듬해 5월에는 토스카나, 코르시카 섬, 엘바 섬을 프랑스 영토에 편입하였다. 6월에는 자기의 매부이며 주장인 뮈라를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삼고, 로마 교황령을 점령하더니, 이듬해에는 교황령을 프랑스 제국에 병합하였다. 나폴레옹 제국은 이제 그 절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