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박정희가 집권 18년 154일째인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붕어’했다. 그해 12월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유신헌법에 따라 1980년 8월 22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에서 유효표 2524표 중 득표 2524표를 얻어 제11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리고는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연장하고 유권자 수를 2배가량 늘인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든 후 1981년 1월 24일 유효표 5270표의 90.2% 4755표를 얻어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12‧12쿠데타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비호감 또는 반감이 극심했을 것이야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 학생을 불법 연행해 고문 으로 죽이고,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학생의 머리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쏘아 뇌사 상태에 빠뜨렸다가 결국 숨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11월 16일 치를 대통령 간접 선거 후보로 12‧12쿠데타 ‘동지’ 노태우 지명을 예고했다. 국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국에 걸쳐 계속했다. 이에 전두환은 군대를 동원해 민주화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작전명령을 하달했지만 유혈 사태를 우려한 군부 내의 반발이 상당했다. 결국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진행된 1987년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흔히 ‘6월 항쟁’이라 부른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6월 혁명’이 아니라 ‘6월 항쟁’을 선택했을까? 프랑스 사람들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1968년 ‘5월 혁명’을 일으켰다. 영국 사람들은 1640년 ‘청교도 혁명’, 1688년 ‘명예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6월항쟁과 같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은 모두 혁명으로 여길 뿐 항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848년 2월혁명 때 프랑스는 유럽 최초로 보통 선거 제도를 수립했다. 24만 유권자가 940만 명으로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플로베르는 “이것이야말로 민중의 승리다. 노동자와 중산층의 승리다!”라고 《감정 교육》에 썼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들어보자.
“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이여! 이제야 때가 이르렀다.
우리들의 정의를 위해 깃발이 나부낀다.
깃발이 휘날린다. 들어보아라,
산과 들에서 아우성치는 원수의 소리를.
악마처럼 원수들은 피에 굶주렸다.
일어서라, 백성들이여! 칼을 들고 나아가자.
나아가자, 나아가자. 원수를 무찌르자.
조국을 위해 일어선 우리들을 인도하라.
자유, 자유를 위해 우리는 싸운다.
우리는 싸운다. 우리의 깃발 아래로 승리는 온다.
원수를 무찔러 빛나는 승리를 얻자.”
우리와는 뭔가 다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