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서양 미술부분에 있어서 무척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한다면 역시 이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통칭 호쿠사이는 대단히 놀라운 인물상을 보여준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이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풍속화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는 일본의 이미지를 고정화시킨 유명한 인물이지만, 호쿠사이가 1760년부터 1849년까지 생존하며 다양한 그림들을 선보일 당시 그는 그리 유명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서양문화와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던 에도시대의 문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지만, 그러한 결과는 이후의 세대에게 이어질 때까지 알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호쿠사이는 생애 3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가쿠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을 비롯해서 호쿠사이만화(北齋漫畵)와 같은 대표적인 우키요에(浮世繪)를 선보였던 인물입니다. 그의 목표는 삼라만상 모든 것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었고, 덕분에 93번이나 집을 옮기고 30번이나 자신의 호를 고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진 대표적인 호는 ‘春朗’, ‘宗理’, ‘葛飾北齋’, ‘畵狂人’, ‘戴斗’, ‘卍’ 등으로 그가 이렇게 다양한 호를 가지게 된 것은 인기덕분에 늘어난 제자들에게 호를 팔아 수입을 얻었던 것으로 지금은 이해되고 있습니다.
또한 93번이나 이사를 한 것은 물론 자신의 이상대로 모든 사물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하루에 3번이나 이사를 단행한 일도 있다고 하니 상당히 특이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의 이사 편력에는 그림에 집중하다보니 방이 더렵혀지고 너무 더러워져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사를 감행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90세나 되는 장수를 한 것에 비해 식생활이 무척 불규칙했다는 점에서 기력이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사실 호쿠사이가 활약한 ‘우키요에’는 상당히 대중적인(조금 비속적인 부분도 포함해서) 부분에 속하는것으로 당시를 지배한 판화(版畵)나 육필화(肉筆畵)에서도 걸출한 능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키요에와 삽화부분에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마련한 그의 활약은 일본내에서 알아준다 보다 해외에 끼친 영향 때문에 더욱 그 이름을 빛내어 자포니즘(ジャポニズム)이라고 알려진 일본문화 전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본래 수출되던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된 그의 그림이 서양에 알려지면서 그 선명한 발색과 원근법 표현, 음영에 대한 묘사에 대한 인상은 서양미술계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고호(인상파)를 비롯하여, 드비시가 호쿠사이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는 등 놀라운 결과를 유발시켰지만 정작 호쿠사이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호쿠사이만화(北齋漫畵)로 불리는 그림책을 다수 발표하면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대중적으로 다량생산이 가능한 판화부분에 높은 영향력을 미쳐 그림기술이나 서민교육분야에 높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가 주로 활약한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물들을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다색판화를 비롯해서 붓그림을 지칭하는 편이지만 풍속화(風俗畵)라는 일면도 가지고 있어서 고급문화라기보다는 대중적인 팝아트 계열에 속하는 인물과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의 그림이 서양에 수출되는 도자기의 완충재용 종이포장지로 사용된 것이 계기가 되어 서양의 미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당시 일본 에도에서는 손쉽게 볼 수 있었던 그림이 서양에서는 극히 신비로움에 가득 찬 동양문화의 정수(精髓)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경우였고 이후 동서양 미술사의 정리작업을 거쳐서 그의 영향력이 알려지면서 호쿠사이의 이름은 ‘일본’을 대표하는 ‘그림쟁이’로서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단순명쾌한 스타일이라고 해도 그 섬세하면서 잘 꾸며진 터치감은 가히 놀라운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당시 정치 때문에 인쇄문화에 제약이 생기면서 그의 그림이 잘 퍼지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호쿠사이는 그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활약을 펼쳐(몰론 당시기준으로 보면 불법) 대중에게 어필했지만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시기와는 달리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여행을 통한 그림의 다양한 소재를 찾아낸 그는 말년, 활약 후기를 통해서 자신의 관능적인 그림들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수많은 일본미술관에 큰 자취를 남긴 그의 그림들이 완성되었고 이 그림들은 지금도 일본의 찻잔, 상점에 가서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그림으로 남겨져 있어서 지금도 일본을 방문하는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친숙한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우키요에는 기본이 판화이기 때문에 많이 찍어졌고 당시를 대표하는 신문과 같은 곳의 삽화로도 사용되는 등 수많은 활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호쿠사이의 생전, 사후에도 많이 이용되었지만 정작 그가 창작한 3만점이라는 작품 수는 괴인에 가까울 정도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덕분에 무수한 우키요에 작가 중에서 그의 공적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99년도 ‘라이프(LIFE)’에서 선정한 1천년동안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세계의 인물 100명 중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장본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1849년 5월10일, 아사쿠사의 집에서 90세의 나이로 떠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던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대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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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원한 그림 잘 보고 공부 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