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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질곡에서
증언자: 박행삼(남)
생년월일: 1937. 7. 5(당시 나이 43세)
직 업: 교사(현재 교사)
조사일시: 1988.11
대학시절의 4.19
1937년 7월 5일 나는 전남 해남군 화산면 부길리에서 태어났다. 부친께서는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상당히 부유했던 것 같다. 그 시대에 어떻게 해서 부농이란 소리를 들으며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아무튼 어린 시절을 일제 식민지하에서 자라면서 우리 또래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라의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아버님이 독립군자금을 댔다고 일본인 순사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신 적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다 젓가락을 넣고 비틀어대는 등 온갖 고문을 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독립군자금을 주는 것인 줄도 모르고 친구분들이 오셔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주셨던 것이다. 조사결과 아버님이 모르고 한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곧 풀려나셨다.
1945년 해방된 해에 나는 해남 화산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해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아했다. 그렇지만 아주 어릴 때라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국민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을 겪었다. 그 당시 고려대학교를 다니던 형님 한 분이 계셨다. 그 형님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상범으로 해남군 인민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냈다. 이런 형님의 사상으로 인하여 우리 집안은 철저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다 밝힐 수도 없는 형편이고, 나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언젠가 꼭 기록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안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어 화산에 있는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다. 고등공민학교는 지금의 화산중학교로 그때는 그곳을 졸업하면 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한 후 형님을 따라 순천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순천 매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 업하고, 1959년 전남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세살이었으니 나는 내 동기들보다 4살이나 더 먹은 셈이다.
대학교 2학년 때 4.19를 맞았다. 4월 들어 전국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고파 못살겠다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하야와 동시에 풀려났다.
고교교사의 5·18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처음 발령지가 해남중고등학교였다. 나는 그때 교사자격증이 두 개나 되었는데 해남에서는 수학교사로 근무를 했다. 그 다음 발령지가 목포 정명여고였다. 그곳에서 있다가 1967년 문태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대학원 행정학과에 적을 두고 7년 반 정도를 근무했다. 그리고는 1974년 처음으로 광주 대동고교로 발령을 받았다. 대동고등학교는 그때만 해도 평준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형편없는 학교였다. 내가 갔을 때 2학년까지밖에 없 는 신설학교로 애로사항이 많았다. 3회부터 고교평준화가 되면서 추첨에 의해 배정받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때부터는 광주에서 최고의 사립학교를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문태고등학교에서 쌓은 경험으로 학생들이 들어 오자마자 곧바로 장학실을 만들어 우수한 학생 백여 명을 뽑아 따로 교육을 시켰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로 인해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게 교육을 시킨 결과 사관학교에 80여 명이 합격하고, 서울대학교에 20여 명이 합격하는 등 일류고등학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해서 나는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또한 불교학생회를 조직하여 원각사에서 토요일마다 집회를 갖기도 했다. YWCA에는 양서조합이라는 독서회가 있어 건전도서보급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비합법적으로 양서독서회가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차츰차츰 의식이 생기면서 학내에 초점을 맞추고 데모를 시작했다. 화장실 개선 문제부터 시작된 요구사항은 점점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같은 선생이라도 교련선생님 만큼은 정말 미웠다. 학생은 학생이지 군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군대식으로 학생들을 대하고 사정없이 때리는 걸 보면서 선생이 학생을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를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다. 잦은 교련검열 때문에 다른 수업에까지 지장을 주면서 연습을 시키는 걸 보면서 고등학교 교련교육은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련선생에 대한 학생들의 적대적인 감정은 졸업식날만 되면 학생들이 몽둥이로 교련선생 때려 죽인다고 적 나라하게 표출되곤 했다.
대동고등학교에서 만난 선생들 중 뜻이 맞았던 사람은 박석무 선생과 윤광장 선생이다.
1979년 내가 교무주임으로 있을 때였다. 수업시간이 되어서 교실로 가고 있는데 전교 1등하던 아이가 가방을 들고 울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로 수업시간에 가방을 가지고 가느냐고 묻자 그 애가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돈 없는 사람은 공부도 할 수 없습니다."
그 학생은 부모님이 안 계셔서 집안형편이 무척 곤란했는데, 납부금을 못 내자 학교에서 퇴학처리를 했던 것이다. 나는 수업도 하지 않은 채 그 길로 교장실로 쫓아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돈이 없다고 배우는 학생을 퇴학시켜 어린 가슴에 멍이 들게 하는 것이 스승이란 말입니까?"
그 일로 3학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학교측에서는 '윤광장, 박행삼, 박석무 선생이 학생들을 선동하고 배후조종한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침에 조회를 하러 교무실에 들어갔더니 3학년 담임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이 사직해야만 출근하겠다고 했다. 그 소문은 순식간에 학생들 사이에 퍼졌고 이에 분개한 3학년 학생들이 교실문을 걸어 잠그고 담임선생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담임에게 배울 것이 하나도 없고, 그런 담임은 필요없다고 했다. 우리들이 수습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교실에 들어 갔다. 애들이 유리창으로 내다보고 있다가 나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대동고 재직시절 두 번 울었는데 첫번째가 그때였다. 울면서 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직 너희는 배우는 학생들이다. 이러면 너희들만 손해본다." 그것을 빌미로 수업이 끝난 후에 안기부, 보안대, 도교육위원회 장학사, 정보과형사, 그리고 선생님들이 회의를 한답시고 모여 우리 세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60여 명과 세 명의 싸움은 그날 결론을 보지 못한 채 다음날로 미뤄졌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에 18년 장기집권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시켰던 박정희가 죽은 10. 26이 터졌다. 그 큰 사건 앞에서 우리들의 일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18년 동안 억눌리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풀어진 상황 속에서 어쩔 줄 몰랐다. 1980년 서울의 봄,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봄을 만끽했던 사람들은 곳곳에서 그들의 요구조건을 외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불확실한 정치일정, 철폐되지 않는 계엄은 5월 들어 대학생들 시위의 쟁점이었다.
14일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가두진출과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집회는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는 학생들의 구호는 시민들의 많은 공감을 받았다.
15일에도 학생들의 가두진출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질서정연했고 평화적으로 시가행진을 했다.
16일, 횃불행진을 끝으로 19일까지 정국의 추이를 관망한다는 입장으로 학생들은 시위를 자제했다.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일 아침에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날은 일요일이라 집에 있었다. 오후쯤 되어서 우리 동네에도 공수부대들이 학생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다.
19일, 암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했다. 1교시 수업이 있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어떤 학생 하나가 울부짖듯이 말했다.
"선생님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부모 형제가 죽어가는데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므로 선생이라는 입장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던지며 함께 울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 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살아야 합니까?"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의자를 부숴 몽둥이를 만들어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합세하라', '광주시민 학살한 공수부대 때려 죽이자.'
이렇게 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을 돌았다. 교무실에 돌아와 울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학생들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공수부대가 학교 밑에까지 진주해 있고,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여러분들의 심정은 내가 충분히 압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나간다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의 아가리에 거져 몸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도 귀중합니다. 그래도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밟고 가 십시요."
그러면서 나는 교문 앞에 누워버렸다. 학생들은 땅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그렇게 학생들을 달래놓고 학급별로 담임이 연락해 학부모들을 오시게 했다. 학생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집에 왔는데 아무래도 불안해 다음날 해남으로 피신했다.
전남 도교육위원회에서는 20일부터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21일, 무고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죽어가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한 나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광주로 올라오기 위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갔는데 광주까지 차가 가지 못한다고 했다. 어떻게 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서 있는데 몽둥이로 차를 두들기면서 시위대 차량(트럭) 한 대가 해남에 나타났다. 그 차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도 그 차 주위로 갔더니 트럭 위의 어떤 사람이 알은 체 했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고 계셔요. 빨리 차에 타세요." 그는 대동고를 졸업한 제자였다. 그 차를 타고 해남교육청 앞에서 내렸다. 그 곳에서 육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목이 터져라 외치자 교육청 앞에 사람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이미 경찰서는 무기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텅텅 빈 상태였다. 광주로 올라오기 위해 차를 돌리는데 시민들이 음료수와 빵 등을 가져와 차에 실어주었다.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은 우리 차가 지나가자 박수를 쳤다. 해남을 출발하여 얼마쯤 왔을 때 광주방면에서 시민군들이 탄 차를 만나기도 했다. 차에는 무기가 실려 있었고 어떤 차는 기관총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 순간 '동학혁명이 이렇게 일어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길거리에 늘어선 시민들을 향해 '앞서 갑니다. 뒤에 오십시오'를 외치면서 광주로 향했다. 나는 트럭 앞자리에 타고 있었는데 뒤에 탔던 제자가 담요를 하나 주면서 혹시 공수부대가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니 담요로 앞부분을 가리라고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사제지간의 정이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부끄러워 덮지는 않았다.
차가 영암에 도착했을 때였다. 총을 들고 있는데 50대 정도의 남자가 차를 타려고 했다. 그 남자한테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나길래 못 타게 했더니 왜 못 타게 하느냐면서 막무가내로 올라탔다. 할 수없이 차에 태우고 실탄도 없는 총은 학생이나 주라고 했더니 창문을 열고 하늘에다 공포를 쏘아댔다. 그 사람과 같이 나주까지 오는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나주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는 꽤 많은 차가 있었다. 그 사람을 내려주고는 확실한 지휘계통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에 차를 모이게 했다. 차가 모두 73대나 되었다. 각 차에 대표자 한 명씩 뽑으라고 하고는 차에 있는 무기를 종류별로 보고하라고 했다. 거기에는 학교 제자들이 많이 있어 나는 자연스레 지휘자가 되었다. 대표자를 모이게 해서 회의를 했다.
"공수부대가 남평다리에 매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무사히 광주에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우선 염탐을 해야 하니 먼저 가고 싶은 차는 손을 들어라." 그러자 3명이 손을 들었다. 차 세 대를 먼저 보내고 40분 정도 기다리고 있는데 세 차 중 맨 나중에 갔던 차(버스)가 유리창이 모두 박살난 채 다시 돌아왔다. 그 차에는 모두 다섯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유리창에 몸이 걸린 채 죽어 있었다.
먼저 출발한 차들이 남평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총알이 날아왔다는 것이었다. 앞 차 두 대는 쏜살같이 달려갔는데 아마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죽은 사람은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 논에다 입관도 안 시키고 가마니만 깔아 예포를 쏘아준 다음 묻었다.
나주에서 시위차량을 이끌고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광주로 가려해도 중간에 모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날은 나주에서 자기로 했다. 대부분은 나주경찰서에서, 일부는 차 속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22일) 새벽 6시경에 노안방면으로 해서 광주로 가려고 나주를 출발했다. 시민들은 빵과 음료수, 담배 등을 가져다주며 격려해 주었다. 먹고 힘을 내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73대의 차를 이끌고 노안을 거쳐 송정리에 도착했다. 노안과 송정리 사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기중기 한 대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해 있었다. 차들을 멈추고 사람들과 다리 아래로 갔다. 추락한 차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즉사했고, 한 사람은 빠져나왔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차에 끼여 있어서 도저히 우리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차는 아세아자동차에서 빼내온 차라고 했다. 차에 낀 사람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노안국민학교에서 줄다리기 할 때 쓰는 줄을 빌려왔다. 기중기를 묶어 위에서 트럭 세대가 끌었는데 기중기는 끄덕도 하지 않고 밧줄만 끊어져버렸다. 그래도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어 위험을 무릎쓰고 비행장으로 가기로 했다. 두 명의 제자와 나는 수류탄 두 발과 권총과 M1 1정을 들고 승용차를 타고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장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군인들이 착암기로 아스팔트를 뚫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해서였다. 공수부대는 아니었고 20사단이 진주해 있었다.
우리 차가 가자 중령이 차를 세우고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무조건 사단장을 나오라고 했다. 군인들은 우리 차 주위를 둘러싸고 총구를 차를 향해 들이대고 있었다. 공포의 순간이었다. 한참을 중령과 입씨름하고 있는데 대령이 나왔다.
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 차에 무기도 실려 있다고 했다. 헬리콥터에서 줄을 내려 위로 끌어올리면 차가 들려질 것이니 사람도 구하고 무기도 회수해 가라고 하자 대령은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일단 한 사람만 같이 가자고 했다. 제자가 자기가 가겠다면서 수류탄 두 발과 권총을 소지하고 따라나섰다. 가는 도중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하면 총을 쏘기로 하고 대령 차를 타고 갔다. 한 시간이 넘어서야 제자가 왔다. 가지고 갔던 권총이랑 수류탄은 빼앗긴 채였다. 제자가 하는 말이 사단쪽에서도 우리 말을 신뢰하지 못해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이나 수류탄을 보면 정말인 것 같은데, 혹시 비행장을 습격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들끼리 회의를 오래했던 것 같다. 우리에게 헬리콥터를 보내줄테니 대표 다섯 명이 다리에서 흰색천을 돌리라고 했다. 차를 타고 되돌아온 나는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한 후 결과를 보고했다. 대표자 다섯 명을 뽑고 4개조로 조를 편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다리 끝 양옆으로 4개조를 매복시켰다. 막대기를 구한 뒤 메리야스를 찢어 묶고는 다리에 서서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머리 위를 돌고 있던 헬리콥타는 한 시간이 넘게 줄을 내려주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났지만 헬리콥터에서 줄을 내려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사기다 사기' 하면서 총을 쏘고 뛰쳐나왔다.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았다. 총을 쏘자 헬리콥터는 가버렸다.
차를 타고 비행장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바리케이드가 다 완성되어 있었다. 탱크 다섯 대가 있었고, 군인들이 논밭에 잠복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계속 방송을 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곳을 뚫고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다시 송정리로 되돌아왔다.
제헌국회 국회의원을 지내셨던 이성학 장로님께 전화를 했다. 이쪽의 상황보고를 한 뒤 광주에서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자 알아보겠다면서 30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라고 했다. 30분 후에 전화를 했더니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걸어서라도 광주에 가려고 차에서 내렸더니 제자가 위험하다면서 못 가게 말렸다. 73대의 차 중에서 광주로 가겠다는 3대의 차만 남고 나머지는 다른 쪽으로 빠지겠다면서 흩어졌다.
나는 군인들한테 가서 협상을 했다. 3대의 차에 실린 무기를 줄테니 우리들을 무사히 광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대위가(이름이 임동수였다) 자기도 고향이 광주라면서 '국민들을 위해 고생하는 군인들을 죽일 수 있냐'면서 나를 추궁했다. 그 주위에는 시민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 시민이 그 말을 듣고 소리쳤다.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마시오.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얼마나 죽였는지 알기나 하고 그러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총에서 실탄을 모두 빼버렸다. 시민들은 박수를 쳤다.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3대의 차에는 무기가 있었는데 좋은 것은 별로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좋은 총은 미리 경찰서나 파출소에서 다 빼돌렸다고 했다. 무기의 회수와 우리들에 대한 신원파악이 끝났다. 나는 또 가명을 댔다.
우리들은 다섯 대의 지프차에 나누어 타고 광주로 왔다. 가톨릭신학대학 부근에 오니까 도로가 크게 패여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이 군인들과 시민들 사이의 경계선이었던 것 같았다. 건너편에 있던 시민군들이 우리들이 차에서 내려 논두렁 쪽으로 건너가자 와 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
그날은 그냥 집으로 갔다.
23일과 24일은 도청 앞에서 시민들의 궐기대회가 있었다. 십만이 넘는 시민들은 도청에 모여 각자의 울분을 터뜨렸다. 이제 시내는 서서히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시민군들에 의해 자체경비가 되었다. 그때는 수습대책위원회가 생겼는데 그들은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사에 반납할 것을 주장했다. 시민들은 점차 수습 대책위원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궐기대회 중에 공공연히 수습대책위원회를 비판했다.
24일은 궐기대회 도중 비까지 내렸는데 시민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자리를 뜨지 않았다.
25일 오전에 윤광장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현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며 남동성당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 남동성당에는 이성학 장로님, 홍남순 변호사, 조아라 YWCA회장, 박석무, 윤광장 선배 등 많은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전일빌딩 뒤에 있던 YWCA로 장소를 옮겨 대책을 논의했다.
나는 26일부터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검거선풍이 몰아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곳에서 잠을 잤다.
27일 새벽녘에 콩을 볶아대는 듯한 총성을 들으면서 도청이 함락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날이 밝은 후 보니 하룻밤 사이에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시민들은 다시 움츠러들었고 곳곳에는 군인들이 서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내게 닥칠 일들을 불안하게 예감했다.
피신과 연행
28일 일단은 서울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송정리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시내버스가 공단 입구에 이르렀을 때 검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주민등록증을 내라고 했다. 주민등록증을 보더니, "나이 먹었구만." 하면서 통과시켰다. 공단 입구에서 송정리역까지 무려 세 차례에 걸쳐서 검문을 했다. 송정리역 앞은 정말로 살벌했다. 그곳에서 또다시 검문을 했다. 무사히 통과했다고 생각하면서 몇 발짝 걷고 있는데 뒤에서, '너 이리 와'하면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걸렸구나 하면서도 못 들은 척하고 그냥 걸어갔다. 웬일인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서울에 무사히 도착해 처제집으로 갔다. 광주 집은 이미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이모부가 사시는 수원으로 갔다. 그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벽 두 시경에 전화가 왔다. 이모부가 다니는 두산그룹의 과장이었다. 그 과장은 이모부의 광주일고 선배였다. 그 사람이 계엄사에서 전화가 와 내 이모부의 집을 물어보길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시간을 끌기 위해 그전에 살던 집을 가르 쳐주었다고 했다. 그때 이숙이 남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어서 옆방 사람들한테는 아무도 안왔다고 하라고 당부하고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역에 가서 서울 가는 첫차를 탔다. 서울역에 내리니 어디로 갈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용산세무서 직세과장으로 있는 친구집에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자기가 나올테니 집으로 오지 말라면서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친구는 "당한 사람만 당하지 다른 사람은 피해를 보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돈 오만 원을 주었다. '세상인심이 이렇구나'고 생각하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다른 친구들한테는 연락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할수없이 외가집에 갔다. 외가집에서 밥을 먹고 어찌나 잠이 쏟아지던지 한숨 자고는 세 시경에 나왔다.
또다시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 밤늦게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다 어느 버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안내양이 종점이라고 깨우는데 그 시내버스가 막차였다. 버스에 내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절 표시가 보였다. 마침 잘되었다 싶어 하룻밤을 새울 작정을 하고 올라갔는데 절이 현대식 절이었다. 꽤 부유해 보여 차마 하룻밤을 재워달라는 말을 못 하고 절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절 옆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줄기를 타고 무작정 올라갔다. 중간쯤 올라가서 세수를 하고 앉아 있는데 잠이 왔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하는 일을 반복했다. 점심때쯤 시내버스에서 고종사촌 여동생을 만났다. 그 사촌 여동생은 미국사람과 국제결혼을 해서 살고 있었는데 내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 자기 집에 있으라고 했다. 여동생은 미군부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일주일을 그 집에서 지냈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밥을 먹어도 화장실을 못 갔다. 그야말로 똥이 탄다는 말을 실감했다. 비겁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생각으로 광주에 내려왔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대동고등학교로 전화를 했다. 학교로 가겠다고 했더니 계엄사에서 나와서 박석무, 윤광장 선생 책상과 내 책상을 뒤져서 모든 물품을 가져갔다고 했다. 내 책상에는 윤한봉한테서 온 편지가 있었다. 그 당시 저들은 한봉이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터라 내 책상에서 나온 한봉이의 편지는 나와 한봉이가 조직적인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된 것 같았다.
그 일로 윤광장 선생이 꽤나 추궁을 당했다. 별 내용의 편지도 아니고 현대문화 연구소에서 일일찻집을 하니 티켓을 팔아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말이다. 학교에서는 절대로 오면 안된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서울에서의 마음과는 달리 쉽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분간 운암동에 있는 아는 집에서 며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웬 낯선 여자가 방문을 여는 통에 깜짝 놀랐다. 그 여자는 옆집에 살았는데 자기가 정명여고 다닐 때 선생님 같다면서 혹시 박행삼 선생님 아니냐고 물었다. 세상이 정말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서도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풍향동 아는 집으로 옮겼다. 운암동에서 풍향동까지 걸어서 가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풍향동에서는 꽤 오래 있었다. 주인이 여기저기서 바깥 상황을 알아봐주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집에 한번 갔다 와야 되겠다는 생각에 집에 갔다. 마침 집에는 식구들이 아무도 없었다. 막 들어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는데 집 앞에 차가 서는 소리가 들렸다. 예감이 이상해서 담배랑 옷가지를 들고 집안으로 나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벨소리가 나자 2층에 살던 새댁이 문을 열러 내려간 사이 그 집 연탄창고에 숨었다. 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2층 새댁을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신고를 하지 않소?"
"한번도 오지도 않았으며 나는 아저씨 얼굴도 몰라요." 그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내가 급히 서두르다 떨어뜨린 담배가 마루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새댁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연탄창고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아래층 진성이 아빠다."
그때 나도 새댁 얼굴을 처음 봤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새댁은 그때 임신중이었다고 하는데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새댁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계엄사에서 잡으러 오면 잡혀야지 하고 생각했음에도 나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우리 집 위층에 아내의 친구가 경영하는 서강어린이 집으로 옮겨 며칠을 머물렀다. 아무리 아내 친구라지만 남편도 없는 집에서 생활하기란 여간 고역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저들의 각본대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방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큰아들 진성이가 밖에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와서는 '아버지 뭐 하고 계시냐'고 물어봤다. 집에 있냐고 물어봤으면 안 계신다고 대답했을 텐데 뭐 하고 계시냐고 물어보니까 아들이 엉겁결에 방에 누워 계신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들어와서는 나보고 동행하자고 했다. 내가 뭣 때문에 가냐고 했더니 잔소리 말고 가자면서 나를 끌고 보안대로 갔다.
그들은 그 동안의 내 행적에 대해서 쓰라면서 몇 차례 똑같은 일을 반복시켰다. 이미 사건은 마무리 단계인지라 별다르게 조사하지는 않았다. 보안대에서는 나를 서부경찰서로 보냈다. 서부경찰서에서도 자술서를 쓰게 했다. 서부경찰서에서는 박석무 선생하고 같이 다녔냐고 물어봤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안 그랬다고 했다. 양성우 선생을 아느냐고 물어보길래 모른다고 잡아뗐다. 또 자고 다녔던 집에 가서 광주항쟁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다음날 서부경찰서 형사들과 함께 광주고속 편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그들은 내가 진술서에 쓴 집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양성우 선생 집을 찾아갔다. 나는 양 선생을 모를 뿐더러 집도 모른다고 하자 자기들이 집을 찾아서 나를 앞장세우고 갔다. 양선생이 마침 집에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서 눈짓으로 양선생한테 사인을 보냈으나 양선생이 못 알아채고는 박선생이 어쩐 일이냐고 했다. 그러자 뒤따라 오던 형사들이 '양선생을 몰라?' 하면서 나를 윽박질렀다. 형사들은 양선생에게 내가 집에 와서 자고 간 일이 없느냐, 박석무 선생이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내가 양선생 집에 간 일이 없기에 양선생이 그런 일 없다고 해서 그냥 나왔다.
그들은 이번에는 박현채 선생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박현채 선생은 모른다고 하자 '한국농촌 경제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세미나를 할 때 사회를 보지 않았냐고 다그쳤다. 형사들은 또 나를 앞세우고 박현채 선생 댁으로 갔다. 박선생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박선생은 내가 온 적이 없다고 대답하시고는 사모님에게 술을 내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술상을 앞에 놓고 말했다.
"나는 사회안전법에 묶여 있는 사람이오."
그러면서 형사들 고향을 물어봤다. 형사들은 전부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전부 전라도 사람이그만. 나는 요즘 밥을 먹으려면 고향 사람들이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고 있는데, 나만 편히 앉아서 밥 먹고 있다는 죄책감에 밥을 못 먹는다. 고향의 아픔을 저버리는 사람은 민족의 아픔을 저버리는 사람이다."
그런 선생님의 말씀에 형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었다. 선생님 댁을 나와 여관에서 1박을 했다. 형사들도 박선생님에 대해 역시 존경할 만한 분이라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모두 식중독에 걸렸다. 형사들도 피곤했는지 처제집을 대강 확인하고는 광주로 내려왔다. 그들은 내게 보고서를 작성해서 내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박석무 선생, 윤광장 선생 그리고 나까지 아내들에게 강제로 사표를 쓰게 해 사표를 낸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민주교사 실천협의회 공동의장을 맡기까지
그 뒤부터 전일학원에 강사로 나갔다. 1983년까지 이 학원 저 학원 돌아다니면서 학원강사를 했다.
1983년에 발령을 내준다고 하더니 남평중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나는 안 간다고 버텼다. 광주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발령받기 전에는 죽어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저들은 우선 가 있으면 곧바로 광주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김준태 선생은 신북중학교로 정규철 선생은 장성 남중으로 발령을 받았다. 남평중학교에서 6개월을 근무했지만 금방 광주로 발령을 내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근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표를 써서 교장에게 줬더니 교장은 자기는 처리를 할 수 없다면서 교육감한테 가라고 했다. 할수없이 교육감한테 갔더니 교육감도 자기는 권한이 없으니 안기부장한테 가라고 했다. 왜 교사가 사표를 썼는데 안기부장한테 가야 하느냐고 대들었지만 교육감은 할말이 없으니 안기부장한테만 가라고 했다. 막무가내로 사표를 내고 왔더니 8일 후에 사표가 수리됐다는 연락이 왔다. 학교는 그 이후로 나가지 않았다.
대통령선거 때는 평민당 수석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 10월 1일자로 복적처리가 되어 남도예술중학교에 나가고 있다. 다른 선생들에 비해 우리는 호봉이 낮은 편이지만 유족들 보상받은 이후에 우리들의 지난 8년간의 공백기간에 대한 보상을 받기로 했다. 지금은 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고 1970년대 대동고 재직시 조직된 '민주교사회'(김준태, 정규철, 임추섭, 송문재, 정해직, 오정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항상 모임이 끝난 후 삼봉을 쳤기 때문에 삼봉조직이라고 했다)가 모태가 된 '민주교사실천협의회'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
첫댓글 귀한 증언입니다. 박행삼 선생님 안부가 궁금합니다. 죄송한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