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끈을 놓지마
산다는 것은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살다 보면 우여곡절이 많을 수밖에 없고 끈도 오랜 세월을 견디다 보니 어떤 때는 끊어질락 말락 하기도 하지만 원래가 질긴 성질이라 근근히 버텨 낸다. 대다수 사람들은 삶이라는 긴 여정을 버티고 견디는 것은 나름대로 꿈을 실현하고 싶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화려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환경과 분수에 맞게 조촐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촐하다고 하더라도 절실한 꿈과 소박한 꿈이 있다.
어린 자식들만 남겨 두고 떠나는 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눈을 감지 못하고 어머니가 몇 시간을 괴로워하셨다. 임종을 지켜보는 목사님의 찬송가도 소용이 없는 듯하였으나 잠시 후 찡그리던 얼굴을 온화하게 펴시더니 조용히 숨을 멈추셨다. 삶의 끈을 놓는 순간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으신 것 같이 보였다.
살림을 도맡으셨던 어머니가 몹쓸 병을 얻으신 후 교회를 찾아 믿음 생활을 시작했고 주변의 권고로 효험이 있다는 안수기도를 받으러 몇 년간을 정말 열심히 다니셨다. 돌이켜보면 고생으로 얼룩진 생활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리도 생명을 부지하려고 하셨을까. 하기야 어머니인들 죽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셨겠나. 그러나 내가 본 어머니 표정은 죽음 따위보다는 아직 성년이 안 된 벌거숭이 자식들을 삭막한 벌판에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괴로우셨던 것 같았다. 당신이 돈을 벌지 않으면 아무런 생계대책이 없다는 현실이 애처로워서 끝까지 삶의 끈을 놓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셨다. 자식들이 클 때까지 조금만 더 살고픈 절실한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셨던 것 같았다. 이제 와 자식 된 심정으로 어머니가 평생 짊어지셨던 짐을 내려놓고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고통 없는 세계에서 지내시기를 기원한다.
무더위 끝에 뒷 장마인 요즘이다. 동네에 아흔을 전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각각 고물과 파지들을 주워 고물상에 갖다 주고 셈을 쳐서 받는다. 할아버지는 리어커에 고물들을 싣고 다니고 할머니는 손수레에 종이 박스 같은 파지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끌고 다닌다. 두 분이 부부는 아닌데 같이 다니면서 서로 힘을 보태는 것 같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쓰지 못하는 컴퓨터 같은 기계나 읽고 모아둔 신문지를 한 아름씩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드린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인데도 모습이 보였다.
“ 오늘 같은 날은 비도 오는 데 쉬지 그러세요. 연세도 있으신데 돈 벌어서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 치킨 사 먹고 싶어서 그런다오. 가끔 한 조각씩 밖에 못 먹으니까 감질이 납디다. 오늘은 고물이 제법 나왔으니까 한 마리 통째로 사 먹으려고.” 하면서 웃으신다. 곧이어 할머니가.
“ 손녀가 신발이 낡아서 새것으로 사주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유.” 하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은 돈을 사용하려는 용처는 다를망정 두 분은 나름대로 소박한 꿈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노동을 견디고 있다. 그 목적이 삶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꿈을 잃으면 절망하게 되고 삶의 끈을 붙잡고 늘어질 의지도 없어진다. 얼마 전에 성남시 어느 민박집에서 젊은 청년 몇 명이 특별한 이유가 없이 그냥 더 이상 살기가 싫다고 하면서 집단으로 세상을 하직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심심치 않게 자주 일어난다. 아마도 이들은 꿈도 없고 설사 꿈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싸움에 지레 겁을 먹고 삶의 끈을 놓아 버린 것 같다.
물론 이들의 죽음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구차한 일상이 반복되는데 실망하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소각시켜버리겠다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다음의 사후세계를 굳게 믿고 그곳에서 새로운 생을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의지로 삶의 끈을 끊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만인지 아니면 사후세계가 따로 있는지.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보충해주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이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육체와 영혼을 함께 이어놓는 것이 삶의 끈이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이승을 떠나면서 삶의 끈이 끊어져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서 육체는 이승에 남겨놓고 영혼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아니면 상상치 못한 별천지인지 모를 일이다.
이승에서의 삶은 생로병사. 즉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고 이 과정을 하나하나 영혼이 인식하면서 함께 하는 고행이다. 그러므로 아프고 괴로울 때는 잠시 삶의 끈을 놓아서 영혼을 분리해보면 고통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상상이라고 해도 삶의 끈을 놓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인데 자석에다 쇠붙이를 붙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목숨을 떼었다 붙였다 하겠는가. 그런데 인위적으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의학적 기술로 마취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마취 기운이 있는 동안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우를 예로 들어 사후세계를 연상하는 것은 궤변이다. 아무튼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그곳이 어디인지 도달하는 사후세계는 우리가 기도하는 고통 없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일 수도 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체가 있는 육체이므로 상처도 나고 아픔도 있는 것이지 형체가 없는 영혼에게 아픔이 있다면 추상적인 것이지 물리적 고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 능력으로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맹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허무맹랑한 논리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친다. 대체로 이승에서의 삶은 고통이고 사후세계는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이므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천국으로 입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빨리 죽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에서 얻은 재물은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많이 내놓을수록 천국행 기차표의 빠른 순서를 준다고 한다.
1987년도 있었던 다미 선교회의 휴거 소동이나 용인에 있는 오대양 공장에서 교주인 박순자등 32명의 집단 자살 사건 그리고 교주 구 모씨의 천국행기차표 사기 사건 등은 평범한 신도들에게 사후세계를 황당한 논리로 세뇌시켜서 일어난 사이비 종교의 대표적 폐해들이다. 이렇게 신천지로 빨리 들어가고 싶어 죽는 사람들은 어쩌면 우주의 진리를 먼저 깨닫고 용기 내는 선지자의 자긍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그토록 건강하던 친구가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본인은 물론 주변에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그는 암을 치료하기 위하여 암 환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삶의 의지와 용기를 얻기 위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공기 좋은 곳에서 몇 년간 치료와 요양 생활을 하였다. 한동안 생기가 흐르고 병의 고통도 잊는 듯 싶었는데 결국은 마지막을 정리하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아플 때마다 하느님을 찾으며 의지하였으나 육체와 정신적 고통이 너무 심하여 그만 살고 싶다고 하여서 힘들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었다. 그러던 그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 가지 희한한 것은 금년과 같이 장기간 폭염에 시달리며 심신이 지칠 때는 위기를 잘 넘기다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살만하니까 이승에서의 삶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을 보면서 이젠 그동안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한 곳에 가서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그러나 왠지 무책임한 것 같아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가 겪었던 고통의 하루하루를 마치 길 건너서 남의 집 불구경한 듯한 미안함에서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주술이나 미신일 수밖에 없음에도 격려랍시고 어쭙잖은 위로를 하고 그는 그 말이라도 실오라기 잡는 심정으로 믿고 의지 하였을 것 아닌가. 과연 누구를 위한 위로였나, 어쩌면 나혼자 이승에 남겨지는 것이 싫어서 헤어지고 싶지 않은 이기심때문에 괴로워 하는 그를 조금더 붙잡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죄책감이 스친다. 어차피 이렇게 떠날 것이라면 “ 삶의 끈을 놓지 마” 어떻게든 고통을 이겨보라고 한 것이 그를 더 힘들게 하고 헛된 강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