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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은 참 짧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 간은 자주 내려 갔었던 곳인데
사연이 있던 어느 해 부터는 발길이 끊겼습니다.
4개의 계절이 열일곱차례나 흐른
지난 추석에 참으로 오랜 만에 대구의 집을 다시 찾았었습니다.
나름의 변명이야 있겠지만
점점 연세가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은 급해만 가고
그 마음이 이번 음력설에도 저를 대구로 이끌었습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서울에서 동대구까지 기차표를 끊었는데
무궁화열차는 영등포역에도 서고 대구역에도 서기 때문에
굳이 돈도 더 들고 출발점과 도착점을 더 당기고 더 늦춘 선택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정신차리기로 하고.
무궁화열차는 좀 지루하였습니다.
4시간 조금 못 미처 기차는 목적지인 대구역에 섰습니다.
참 설렜던 시간이었습니다.
몰라보게 커진 역사며 화려한 불빛들이 신기했고
동남아 사람들이 떼로 몰려 다니는 것도 이색적이었습니다.
아마 휴일이 길어지는데 고향에 갈 수 없으니
함께 온 고향사람들끼리 모여서 맛난 것도 먹고 이국땅의 명절풍경도
구경하고 싶었을 겁니다.
대구역은 롯데백화점과 붙어 있었습니다.
처음 봤습니다.
1979년부터 살았던 송현동 집은 대구모 주택단지였는데
중심에 있던 고등학교가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서 아파트가 들어 섰고
주택들도 고쳐 지은 곳이 많다보니 집근처 도시철도역에 내리면
어디가 어딘지 헤매게 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더듬어 가며 찾아 갔습니다.
삼촌과 사촌제수씨와 3살짜리 5촌질녀가 오고
동생가족이 오면서 세배도 하고 받고 설차례를 지냈습니다.
아버지께선 다리의 신경이 눌려 거동이 불편하신터라
차례를 모시기가 힘드셔 저한테 대신 주관을 하라셨습니다.
시키시는대로 하면서 차례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외사촌 형님들이 점심때 인사차 다녀 가신 후에
집을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큰 집에 나들이한 조카녀석 상경길 배웅도 할 겸
대구시내 구경도 하고 싶었던 터였습니다.
전체거리는 9킬로미터쯤 될 겁니다.
동대구역에서부터 바로 기록계를 작동하지 않고
파티마병원앞에 와서야 시작하였으니까요.
아직 안동으로 이전하지 않은 경북도청이 경북대학교옆에 그대로 있습니다.
동대구역에서 파티마병원앞을 지나
닭발을 처음 경험한 시장도 엿보고
야화들이 즐비했던 거리가 넓어졌음에 아쉬워하며
경북대학교 정문을 향해 오르며 자주 놀러갔던 음식점들의 흔적을 찾아도 보았습니다.
오르막길의 왼쪽에는
시골내음이 배어 있던 친구가 자주 찾던 막걸리집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걸걸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예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젊은 청춘에 설렜던 적도 여러번이었고
그 곳을 찾던 혈기방장한 놈씨들은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ㅎ
정문까지 다다르면 오른쪽 편으로 골목이 있습니다.
제대하고 나서 어느 핸가 데모가 한창이던 때
당구장 건물 이층의 민속주점에서
막걸리 마시고 나오다가 일행중 한 명이 체육학과 어린 학생하고 시비가 붙었는데
7년이나 선배한테 반말을 해대는 체육학과 후배들이 괘씸해서
그 중에 휴가나온 휴학생으로 보이는 공수부대원을
기습주먹 한 방으로 쓰러 뜨렸습니다.
우리쪽이 7명 정도 되었고 상대편은 3명이어서 숫자믿고 날렸었는데
순식간에 세명으로부터 여섯방쯤 맞았던 것 같습니다.
잠시 휴식하던 전경들이 뜯어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전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을 겁니다.
오른쪽 이마에 혹이 불룩 튀어 나왔었습니다.
건물 지하로 들어가면 "님프"라는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제가 잠깐 공을 들이던 여자 졸업생과 몇 번 갔던 곳이었습니다.
전교조 사태로 대량해고가 생겼고 금세 임용이 되어 제주도로 훌쩍 날아간 파랑새.
그 시절의 낭만대로 편지도 몇 번 주고 받았었지요.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할 상대가 있으면 데리고 갈 정도로
"님프"는 제법 우아한 분위기였습니다.
"아!"
2층의 막걸리집은 첫 선 봤던 아가씨와 이른 저녁에 찾았던 곳이기도 하네요.
선보고 그리로 갔었다는 것은 비밀로 하자 했었던.
키만 조금 더 컸었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욕심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을 비웠는지 자문해보면 글쎄요.... ㅠ
다시 오르막의 왼쪽편으로 건너 옵니다.
나무에 가린 청춘라면집은 서울식당 자리였습니다.
라면이 3백원, 달걀을 풀면 3백5십원이고 지금은 변호사를 하는,
총학생회장 한달정도 하다가 학점미달로 그 자리를 잃은 동기놈은
항상 찬밥을 조금 달라고 해서 따뜻한 밥한공기를 통째로 공짜해먹는 재주가 좋았지요.
마음씨 좋은 그 아주머니는 지금도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데 우연히도
만촌동 어디쯤엔가 무심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창밖 정류장에 서 계시던
그 아주머니가 반갑게 알아보고 인사를 하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쯤되면 제가 고시가 되어서 그 아주머니한테 고맙다고 찾아가서 인사하고 해야
이야기가 되는 건데
공부보단 노는 게 집중도가 높고 질리지가 않았으니......
정문의 모습도 생경합니다. 담장도 사라지고.
수위실 밖에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멕시코 월드컵땐가 1986년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각자의 분야에서 쟁쟁한 친구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불투명한 앞날에
한숨을 술잔에 담아 마시던 새벽시간이 생각납니다.
"진리 긍지 봉사" 탑은 여전합니다.
모양이 남자의 상징을 닮아서 다 이유가 있다고 우리끼리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선배들이 그러는데 이 곳이 여자의 기운이 세서 저 걸 만들어 놓았단다."
뭐 이런 류의 이야기들.
다시 오르막의 왼쪽편에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당구장......
수업빼먹고 짜장면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계산대의 아가씨는 늘 화제의 중심이었지요.
시계도 많이 풀었던 곳입니다.
정문앞 이 층에는 "그림이 있는 나의 자서전"이라고 만화방이 있었습니다.
소설과 잡지, 만화를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볼 수 있었고 오렌지쥬스도 한잔을 주던
500원에 하루 종일 죽칠 수 있었던 곳.
지금은 고인이 된 만화가 박봉성님의 "신의아들"도 여기에서 떼었었습니다.
장윤덕 의사비 주변의 모습은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도시락 먹고 빈 통을 사철나무틈에 끼워 뒀다가 잃어 버린 적이 세 번 쯤 되니
어머니께서 더 이상 싸 줄 도시락 통이 없다고 하소연 하시던 적도 있었습니다.
천원이면 막걸리 한 통에 두부김치를 사다가 열 명이 둘러 앉아 조금씩 맛보던
간이 동문회도 저 곳에서 열렸었고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적이면서도 나한테 생겼으면 하는 사건도 있었던 곳이
바로 저 장윤덕의사비 곁입니다.
정작 장윤덕 의사는 의병으로 충절을 지키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훌륭한 분인데.......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도시락 두 개 싸가지고 와서 잠자던 청운재.
임시 고시원인 셈인데 지방에서 온 친구들의 숙소역할도 한 곳입니다.
저 때문에 시끄러워서 여러 사람이 고시에 떨어졌을 지도 모르는 그 곳.
허름했던 2층 건물이 지금은 법학전문대학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뒷편 공터는 법대 건물에서 다 내려다 보이는 곳인데 어느 해 겨울 눈덮인 뜰에
후배 껴안고 뒹구는 바람에 다른 이들이 혀를 차던 기억도 있네요.
음.......
법대옆 중앙도서관(지금은 박물관) 앞 의자에는 사연이 참 많습니다.
공부하다가 잠시 쉬러 나온 사람들은 쉬면서도 인생철학과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고,
연인과 데이트하는 족속들은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버텼고,
술 취해서 뻗어 있는 사람들은 적당하게 햇볕을 막아주는 그늘이 고마웠을 저 곳.
박물관 언덕에서 바라다 본 본관 우측어깨에
1980년도 초반에 지은 중앙도서관이 보입니다.
그 때는 정말 새 것이었는데.......
본관 지붕너머에 솟은 고층건물자리는 예술대학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저 안에 뭐가 있을까?
화면 우측의 하얀 건물은 사범대학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던 초등친구도 저 곳에 있었고
미팅했던 영어교육과 여학생들이 상큼해서 덩달아 저는 심쿵했던
그 짜릿함도 너무나 생생합니다.
본관왼쪽에는 단감나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겠지요.
청운재에서 슬리퍼 신고 밤에 어슬렁거리며 그 곳으로 가서는
수위아저씨 몰래 신발을 날려 단감을 떨어 뜨리던 기억이 납니다.
슬리퍼 두 쪽 정도 잃어 버렸고
들켜서 도망가다가 걸려서 야단맞고.
중앙도서관 너머에 있는 실습과수원인가에서 배를 훔치던 기억도 납니다.
공부는 도대체 언제 한 거야?
화면중앙의 꽃시계는 명물이었고 하얀 망치처럼 서 있는 시계탑도 멋졌지요.
왼쪽의 칡덩쿨의자는 주로 법대생들의 차지였습니다.
그 왼쪽에는 일청담(연못)이 있습니다.
개구리쉼터 이파리가 가득했던 곳인데 지금은 물이 깨끗하더군요.
일청담.
우측의 의탁자에도 추억이 있네요.
한가한 여학생 둘이 보이길래 함께 배회하던 동기놈과 말을 걸어보니 4학년들인데
아마 진로걱정을 하던 땐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1학년은 스피츠, 2학년은 삽살이 3학년은 세퍼트,4학년은 불독. 뭐 그런 이야기를 하길래
4학년은 미친개라고 반박했더니 기가 막혀서 와장창 웃던 마음씨와 얼굴이 모두 착하던
그 녀들은 윤곽만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어둠이 내리면서 서둘러 교정을 빠져 나왔습니다.
놓친 추억탐방은 다음 기회를 봅니다.
교정의 잊혀지지 않는 봄날 기억이 있습니다.
정문에서 후문으로 이어지는 꽃길이 그 것 입니다.
분홍빛이 감도는 백색 벚꽃아래 샛노란 개나리와 연두색 회양목(사철나무?)이
조화로웠던 이십여년전 봄날의 교정을
다시 걸어 보고 싶습니다.
그 사랑스러웠던 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
학교를 빠져 나온 발길은 옛기억을 따라 밤골목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추억이정표를 찾아 갔습니다.
대로변에 우람하게 서 있던 신도극장, 신성극장은
유명카수들의 "리사이틀"이 열리던 공연형 극장이었지요.
지금은 전국에서 다 사라졌을 그런 곳에 가 보고 싶습니다.
무대가 있어서 제일 앞 좌석에 앚아도 눈이 아프지 않던
신도극장도 헐렸군요.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칠성시장의 흥청거림이 이어지는 곳이었을 겁니다.
닭내장을, 7백원이면 고추장 양념해서 내어 오고
상추와 깻잎을 풍성하게 차려주던 칠성시장을 지나
경명여고앞을 걸었습니다.
버스타고 집으로 가던 길 고등학교 시절 하교길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타면 눈이 반짝이던 그 때 생각에 잠겨도 보면서 말이죠.
십분쯤 걸어 지하도밑을 지나니 대구역이 나타납니다.
어젯밤에 이어 다시 한번 롯데백화점의 화려함에 놀라고
길 건너
교동의 골목을 타고 조금만 걸으면 동아백화점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동아백화점 아가씨들과 미팅한 친구들이 동백아가씨 라고 호칭하던 기억도 있네요.
대로변 골목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때는 횟집이 가득했습니다.
2번째쯤인가 선 본 아가씨와 점심때 소주한잔을 했었지요.
"대낮에 술마시는 사람들은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수줍게 말하면서도
크게 싫어하지 않던 그 아가씨는 지금은 할매가 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대구중심가를 길게 가로지른 차도를 건너 번화가로 가면
대구에서 제일 유명했던 한일극장이 있던 곳에 도달합니다.
지금은 CGV로 바뀌었네요.
화려한 동성로가 시작됩니다.
동성로에서 약속을 하면 열에 아홉은 대구백화점앞이었습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무작정 기다리지요.
"내가 시간을 잘 못 알았나?" ㅎ
대구백화점 뒤에는 1980년 초반만해도 3백원이면 13가지 안주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내주던 주점들이 좁은 골목에 가득했었습니다.
미팅하고 뒷풀이로 그리로 가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먹이기도 했고
입대하기 며칠 전에도 친구들과 그 골목에 어김없이 함께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대학 교정도 그렇고 대구시내를 찬찬히 걸어 볼 때가 있을 겁니다.
지나가 저의 소역사를 더듬어 자세히 추억하고 싶습니다.
그 날 생각에 또 마음이 급해지는
오늘도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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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좋습니다 ^^
고맙습니더ㅡㅡㅡㅎ
열일곱차례나 흐른뒤..너무 하셨네요.
내 아들이라면 파냈슬수도?..너무 한가요?? ㅎ
비추어 40년 시간을 되돌아 보네요,정말 상큼햇던 시간..
추억이..기억이 넘 많으시네요
한방주고 여섯방 받고~~~웃겨서 ㅎㅎㅎ
그 많턴 여학생들을 어디로 놓치시고..^
정말, 넘 좋은시간 갖으셨어요 ^(^
만감이 교차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