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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보전진 격동의 역사 -다음 역사 전문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비포르스
* 먼저 이 글을 보시기 전에 제가 전에 쓴 글인
수메르 왕 '주(Zu)'의 타락과 수메르와 앗시리아의 10년 전쟁의 서막 http://blog.naver.com/b4rs/130031844756
글부터 읽는 것도 좋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에는 신기할 정도로 서로 일치되는 내용이 많다.
그것은 '최초의 반역'에 관한 신화이다.
중국,한국에는 유망(楡罔) 혹은 '주(柱)'가 폭정을 하여 헌원(軒轅 혹은 환인桓因)이 징벌했다 전하며
수메르에는 주(Zu)가 신들에게 반역하여 니누르타(Ninurta)가 징벌했다 전하며
바빌론에는 킨구(Kingu)가 아내 티아마트(Tiamat)와 함께 반역을 하다가
마르두크(Marduk)가 징벌했다 전하며
히타이트에는 쿠마르비(Kumarbi)가 안(An:하나님을 의미)에게 반역하여
테슙(Tesub)이 징벌했다 전하며 일루얀카스(Illuyankas)라는 용이
테슙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고 전한다.
그리스,로마에는 크로노스(Kronos)가 우라노스(Uranus:헬라어로 하나님)에게 반역하여
제우스(Zeus)가 징벌했다 전하며
가나안에는 얌(Yam)이 엘(El:히브리,가나안어로 하나님)에게 반역하여
바알(Baal)이 징벌했다 전한다.
사진 설명:상단은 왼쪽부터 니누르타,마르두크,테슙
하단은 왼쪽부터 황제 헌원,바알,제우스
이런 동일한 반역의 신화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어 그것이 신화나 전설로 변형되어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학자들은 신화나 전설을 하나의 역사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들간의 유사성을 봐야 한다. 중국 신화의 유망 혹은 주(柱)는
신농씨(神農氏)의 아들이자 신농씨 나라의 왕이다.
신농씨는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농사의 신으로 여겨졌다.
크로노스의 뜻에 대해 알렉산더 히슬롭은 '뿔 달린 자'로 해석했다.(두 개의 바빌론 - 앗시리아의 아이)
켈트족의 한 신인 케르눈노스(Cernunnos)는 크로노스와 발음이 비슷하며 게일어로 '뿔이 난 자'를 뜻한다.
유럽에서 이 신을 그린 유물의 그림을 보면 두 뿔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어에서 '시간'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 신농씨로 기억되는 엘람(Elam)은
히브리어에서 '영원'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크로노스의 로마식 이름인 사투르누스(Saturnus)는 '씨앗을 뿌리다'에서 온 것으로
농사의 신을 뜻한다.
(크로노스 역시 농업의 신:브리태니카 백과 '크로노스' 편)
이런 신화들에서 동일하게 나오는 반역자는 수메르 왕 '주(Zu)'를 뜻하며
징벌자는 앗시리아 황제 앗수르(Asshur)를 뜻한다.
노아의 장남되는 '셈'의 장남인 '엘람'의 아들이며 수메르의 왕인 주(Zu)는
가나안의 미녀에게 빠져 정사를 농단하고 백성을 핍박하여 앗시리아의 황제 앗수르(헌원 혹은 환인)는
'주'에게 올바른 길로 돌아가라 권고를 했으나 주가 그 말을 듣지 않으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한국의 기록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신농과 헌원의 전쟁이 10년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당시 엘람,앗수르의 아버지 셈(Shem)은 앗수르에게 하나님을 반역한 '주'를 징계하라고 하며
전권을 위임하였는데. 한국과 중국은 그를 치우(蚩尤)라 기억한다.
치우는 그리스의 제우스(Zeus)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데.
제우스는 하나님을 뜻하는 야웨의 줄임말인 'Jaw'의 변형이며 변형된 단어로 'Deus'가 있다.
제우스는 원래 그리스인들이 믿던 하나님이었으나 후에 변질되어 바람이나 피는 신으로 여겨졌다.
'치우'란 하나님의 징계를 뜻한다.
그런데 치우는 수메르 왕 '주'와 이름이 유사한지라 중국 기록에서는 자주 '주'와 '치우'를
분간못하는 경우가 있다.
중국의 기록들에서 치우는 신농의 후손이라고 기록하는데.
한국의 기록들에선 치우는 신농의 나라를 벌한 임금으로 나온다.
이것은 치우라고 기록되어 전해지는 인물이 한 인물이 아니라 두 인물이 혼동되어 전해내려옴을 뜻한다.
신농의 후손인 치우는 '주'를 뜻하며 신농의 나라를 벌한 임금은 '주'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셈족의 모든 가문 엘람,앗수르,아르박삿,룻,아람에서는 셈을 중심으로 부족장 회의를 열어
새로운 장자권자(長子權者)로 엘람 대신 앗수르를 임명하고 엘람 가문은 앗수르와 연합하여 수메르 징계에 나선다.
그리스에서도 크로노스와 그의 거인족과 제우스의 전쟁을 10년이라 보고 있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 신화에도 영향을 주었는지 트로이 전쟁도 10년이라 전해지고 있다.)
김성일 교수는 수메르와 앗시리아의 10년 전쟁에 관해 10년 동안 전쟁을 치룬게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 10년이었다고 보고 있다.
10년이 지나가고 바야흐로 전쟁은 시작되었는데. 중국 기록에선 그 전쟁의 장소를 '판천(阪泉)'이라
기록한다.
"(헌원씨는) 곰(熊),큰곰(羆).비(貔),휴(貅),추(貙),호랑이(虎)를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황제는 염제(신농)와
판천의 벌판에서 싸워 세 번이나 전투를 한 끝에 마침내 그 뜻을 얻었다."
教 熊 羆 貔 貅 貙 虎 , 以 與 炎 帝 戰 於 阪泉 之 野 . 三 戰 , 然 後 得 其 志
-사기 오제본기(史記 五帝本紀)
판천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수없지만 티그리스 강가 주변에서 싸웠다고 추측된다.
왜냐면 엘람은 메소포타미아 동부의 자그로스 산맥에 살았기에 그들은 디얄라 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디얄라 강을 따라 내려와 앗시리아의 수도 앗수르에서부터 내려온 앗수르 황제와 바그다드 혹은
텔우카이르에서 연합하게 된 앗시리아,엘람 연합군은 그대로 남진하여 수메르의 수도 키쉬(Kish)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수메르 주왕의 군대는 이들의 연합을 저지하기 위해 키쉬에서 출발하여 아마 텔우카이르 앞에서 교전을 치루었을 것이다.
싸움이 3번이나 이어졌다는 걸로 보아 양측 다 전력을 모두 끌어모아 싸움이 상당히 치열했음을
짐작할수있다.
사진 설명:우르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메르 최대 예술 목조품 혹은 그 중 하나로서
우르의 스탠더드(Standard)라 불린다.
폭 46cm 정도의 화판으로서 조개 껍질과 청금석(靑金石)을 상감(象嵌)하여 사회의 온갖 계급의
사람들을 그린 큰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 사진은 우르의 스탠더드의 한 면인데.
전투 중인 병사와 왕(상단 중앙)에게 연행되는 포로들이 그려져 있다.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이 당시 수메르와 앗시리아의 군 체제와 전투 장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살펴서 그 당시 전쟁이
어떻게 치루어졌는지 추정해보자.
수메르군은 기동력이 앗시리아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차(戰車)'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설명:수메르의 전차(우르의 스탠더드)
사진 설명:전차가 사람을 깔고 지나가는 모습.(우르의 스탠더드)
이 당시 수메르의 전차는 '우르의 스탠더드',라가쉬의 '콘돌의 석비'에 묘사된 수메르 전차의 모습이나
키쉬(Kish)의 공동묘지나 우르(Ur)의 왕묘에서 나온 최초의 마차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데.
수메르 전차는 속이 막히고 무거운 네 개의 작은 통바퀴에 당나귀스런 작은 말 네 마리가 끌고 있기에
속도 면에서 기대 이하 였다.(이 시대의 말은 크기가 작았다.)
그리고 이 수메르 전차에는 군인 두 명이 탔는데. 전차에 배치된 투창통에 들은 투창들을 꺼내 한 명이
창들을 던지고 다른 한 명은 열심히 전차를 운전한다.
우르의 스탠더드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차병이든 보병이든 활을 든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당시 활이 원시적이고 아직 합성궁이 개발이 안 된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메르의 전차병은 투창용 창을 던졌다.
사진 설명:수메르 전차(우르의 스탠더드를 보고 구상한 그림)
수메르 전차는 후대의 아카드,이집트,히타이트,앗시리아의 전차보다 그 성능에서 뒤떨어지지만
그 당시에는 놀라운 전투 장비였다.
이 당시에 말은 크기가 작아서 기병은 별 효용이 없었기에 기동력에선 전차가 대세였다.
사진 설명:수메르 전차(우르의 스탠더드를 보고 구상한 그림)
수메르 전차의 주요 성능은, 전차 단독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보병 지원을 받는 축에 속했을 것이고, 전차 하나의 돌파력이 아니라 보병과의 제협동작전을 통해 싸웠을 것이다.
우르의 스탠더드에도 수메르 전차가 꽤 등장하는걸 보면 이 당시 수메르 전차는 전쟁에서 비중있게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메르 유물.
수메르에서 벌어진 축제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하단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메르 전차가 보인다.
사진 설명:이라크 우르크에서 나온 수메르 초기의 그림 문자. 썰매와 초기의
바퀴 달린 수레를 묘사하고 있다. 바퀴의 발명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 가운데 하나다.
수메르 신화에선 독수리 날개 달린 사자인 '주'가 니누르타와 싸울 때 거센 바람으로 니누르타를 공격했다고 한다.
성경에선 병거를 회오리 바람과 독수리로 상징한다.
"보라, 그가 구름같이 올 것이며 그의 병거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니 그의 말들은 독수리들보다 더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이는 우리가 황폐케 됨이라."
-예레미야 4장 13절
'주'의 전차를 한자에서는 走(달릴 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음이 '주'임을 주목하자.
사진 설명:수메르 전차를 그린 수메르의 유물의 조각
사진 설명:우르의 스탠더드에 보이는 수메르의 병사들.
수메르의 갑옷이나 무기를 살펴보면 수메르 군인에서 정예군은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망토에
목 부분이 꽉 조여져 있고 청동 단추들로 많이 장식된 갑옷을 입었다.
청동단추들은 방호성을 높여주며 적군에게 위엄을 보이게 한다.
이 갑옷은 안에 두꺼운 심을 덧대거나 두꺼운 재질로 만들어져 있어 날아오는 주먹의 힘을 흡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청동 투구를 썼으며 청동검을 지니고 있었다.
사진 설명:수메르의 청동 단추 망토 갑옷
사진 설명:수메르의 청동단추 갑옷은 고조선의 갑옷에도 영향을 끼쳤다.
사진은 고조선의 청동단추 갑옷 기병의 복원 그래픽 - 'KBS 역사스페셜 제87회 개천절 특집 1편 - 비밀의 왕국 고조선'
수메르군의 청동검은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칼날 중간부분부터 끝부분까지 살짝 휘어있는데.
잘 휘어지는 구리의 단점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사진 설명:수메르의 청동검
이 검은 잘 베고 찌를 수 있다. 또 수메르 군인은 청동 도끼도 소지했다.
사진 설명:우르의 스탠다드에 보이는 청동 도끼를 든 수메르 병사
동퇴(銅槌)도 있는데. 짤막한 나무 자루 끝에 둥그런 돌이나 둥그런 금속을 매단 몽둥이를 말한다.
동퇴는 빙빙 흔들었다가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쳐서 치명상을 입히는 무기다.
사진 설명:고대 근동에서 쓰인 청동철퇴의 모습.
정예군을 제외한 기타 군인들은 가죽 투구에 털가죽옷을 입고 전투에 임했다.
그 당시의 갑옷,무기 발전에서는 수메르가 어느 나라보다 우위를 지니고 있었던 이유는
수메르인들은 노아 홍수 이후 최초로 문명을 세운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셈의 후손 엘람,앗수르,아르박삿,룻,아람은 셈으로부터 청동제련법을 배웠다.
이 중 엘람의 후손들이 수메르인이다.)
종합해보자면 수메르군의 전투 특징은 기동력과 지금까지의 무기와는 다른 금속 무기에 있다.
사진 설명:首의 금문
사진 설명:首의 금문
사진 설명:自의 금문
한자의 스스로 자(自)와 머리 수(首)의 글자를 보면 두 뿔을 한 사람의 모습임을
알수있는데. '자'의 타이완 발음은 Chu(추)이며 '수'의 타이완 발음은 chhiu(치우)이다.
그리고 胄(투구 주) , 鑄(쇠 부어 만들 주)로 기억하고 있는데. 모두 음이 '주'이다.
수메르 왕 '주'는 이 당시 전차에 타고 두 뿔 달린 황금 혹은 청동 투구를 쓰고 황금검을 쥐고
위엄을 보였을 것이다.
사진 설명:우르의 왕이 쓰던 황금 투구다. 뒤의 상투처럼 보이는 장식이 인상적이다.
사진 설명:황금과 청금석을 재료로 만든 수메르인의 단검과
칼집.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 소장.
그래서 중국 신화에선 치우를 청동 머리에, 두 뿔을 한 자로 여기며 청동을 제련해 무기로 만든 자로 기억한다.
이것은 소머리의 나라인 수메르의 왕임을 뜻한다.
사진 설명:청동 투구를 쓴 이 해골은 이라크 우르의 지하 매장터에서 발견되었다.
무덤까지 왕을 호송한 수많은 시종들 가운데 왕을 호송한 6명의 병사들 중의
하나다. 이 군인은 독약을 마시고 왕과 함께 묻히는 '순장'에 처해졌다.
이로써 기원전 2천년대 중반에 금속 투구가 쓰였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사진 설명:앗시리아의 군인(10년 전쟁보다 더 후의 앗시리아 군인 복장)
아무튼 이런 수메르의 기동력과 보병 협동의 작전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앗시리아 측에서는 여러가지 방법을 세웠는데.
장창방진과 대형 쇠뇌,발석거와 맹수 부대이다.
장창방진(長槍方陣)이란 고대 그리스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다란 장창을 앞으로 향하게 하고
방패를 쥔 병사들이 빽빽히 밀집해있는 형태이다. 이렇게 하면 적들의 칼이 밀집된 방패때문에
들어오기 힘들고 창이 아주 길기에 그대로 전진하면 말 그대로 돌진하는 고슴도치이다.
이 당시에는 방패수 1명 그리고 장창수 1명으로 2인 1조를 이뤘을 것이다.
나중에 말할거지만 기원전 2천년 중반의 수메르의 콘돌의 석비에는
수메르 군인들이 창과 커다란 직사각형의 방패로 밀집 방진을 이루는 모습이 나와있다.
사진 설명:라가쉬의 콘돌의 석비에 새겨진 수메르 군인들의 훌륭한 방진.
(비록 장창은 아니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헌원이 방패와 창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하고
"於是軒轅乃習用干戈(이에 헌원은 방패와 창을 쓰는 법을 익혀)" - 사기 오제본기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선 헌원이 창을 만들었다고 전한다.(무예도보통지 장창부)
사진 설명:방패와 창을 들고 진격하는 앗시리아 군인(앗시리아의 부조)
주나라의 책사 태공망(太公望)이 지은 육도(六韜)를 보면 태공망은 이미 3천년 전에
집단 전투의 요령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했다.
태공망은 군대를 부대 단위로 나누고 그 부대들에도 급을 매기는 집단 전투의 요령을
육도의 견도(犬韜)에 적었다.
앗수르(헌원)는 바로 이런 요령을 알고 집단의 합동적인 전술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장창방진으로
수메르군의 보병을 맞았던 것이다.
길이가 짧은 청동검들은 장창과 방패에 막혀 아무런 효력도 발휘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형 쇠뇌와 발석거를 대량 발사하여 수메르군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수메르 신화에서 니누르타가 화살 혹은 번개(번개같은 화살이라 해도 될 듯)로 '주'를 징벌했다고 전하며
환단고기에선 대형 쇠뇌,발석거를 만들어 신농을 토벌했다 말한다.
사진 설명:니누르타의 화살에 비명을 지르는 주(수메르 혹은 앗수르,바빌론의 인장)
사진 설명:이라크의 님루드 유적(칼라)에서 발굴된 니누르타 왕궁(혹은 신전)에서 출토된 부조.
니누르타가 번개를 들고 '주'를 추격하고 있다.
이 당시에는 아직 활이 원시적인 상태에 있었기에 대형 쇠뇌의 힘에 많이 의존하였다.
사진 설명:주(Zu)와 니누르타의 대결에 관한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 나오는 글자.
니누르타가 주를 격퇴시키는데 쓴 무기다. 화살을 뜻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 당시 헌원(앗수르)이 맹수 부대를 동원해서 신농씨를 격파했다고 말한다.
앗수르는 훈련된 여러 맹수 부대들로 수메르의 전차대와 본대를 혼란시켰을 것이다.
마지막으론 앗수르는 수메르의 전차에는 똑같은 전차로 맞서는 방법을 택했다.
태공망의 육도에선 헌원(앗수르) 때 전차가 있었다 말한다.(호도虎韜)
이 전차는 많은 창을 묶어 전차에 매달아 두고 그 묶은 창이 가로 굴대를 통하여 내밀었다
들어갔다 하는 것으로 적의 전차나 보병의 진입을 막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헌원(軒轅) 이름을 자세히 보면 차(車) 두 개가 있는 것이다.
사진 설명:앗시리아의 전차(10년 전쟁보다 더 후에 나온 것)
아마 밑의 사진같이 앗수르가 발명한 전차는 사람이 밀어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뛰어난 전투 방법들을 고안해낸 사람은 앗수르가 아니라 생각된다.
앗수르는 기록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 현명하고 어진 사람으로 나온다.
과연 현명하고 어질고 신앙이 큰 사람이 이 정도로 전쟁에 관해 박식할 수 있을까?
대개 어진 임금은 전쟁에 관해 모든걸 관할하지 않고 그런 임금을 돕기 위해
책사가 있는 법이다.
기록은 헌원에게 책사가 있었다 하는데. 이름을 풍후(風后)라 기록한다.
풍후나 혹은 풍후의 아버지라 추정되는 풍백(風伯)이 책사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티그리스 강 옆의 드넓은 땅에서 앗시리아와 수메르의 군대는 대결을 하게 되고
3번이나 전투한 결과 수메르의 대패로 끝이 나고 만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메르 초기 전차를 묘사한
수메르 유물.
이 당시 죽은 시체가 얼마나 많았으면 환단고기는 기록하기를
"12 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라고 전한다.
12제후의 나라라 하는 걸로 보아 앗시리아(환국桓國)의 제후가 총 12개라고
환단고기가 기록하는 것을 보면 이 당시 가나안,이집트,초기 히타이트 등이 참전하여
싸운 국제 대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설명:수메르의 인장에 있는 그림을 옮긴 것. 니누르타가 불을 토하는 괴물을
탄 채로 주를 추격하고 있다.
'주'는 대패하여 자신의 도읍인 키쉬(Kish)로 도망쳤을 것이며 환단고기에선 이를 공상(空桑)성이라 적고 있다.
(공상의 상(桑)은 뽕나무란 뜻인데, 수메르 신화에선 '주'를 천둥새로 묘사하며
천둥새는 훌루푸(huluppu)라는 나무에 둥지를 틀며 그 나무는 신령스런 나무라 말하고 있다.
중국 신화에선 동방에 거대한 뽕나무인 부상(扶桑)이 있는데. 태양의 새들이 여기 거주한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 말하길 유망(주)은 공상성 마저 함락 당해 '탁록(탁鹿)'이란 성으로 도망을 쳤다 하며
베트남의 신화에선 유망(주)이 낙읍(洛邑)이란 곳으로 도망을 쳤다 전하는데. 그 곳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이상하게도 '주'가 앗수르에게 죽임당했다고 전하지 않고 그저 죽었다고 전한다.
그저 죽었다는 걸로 보아 이는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거나 자살했음을 암시한다.
(사진 설명:수메르의 인장에 있는 그림. 독수리인간 '주(Zu)'같이 보이는 인물이
어떤 이에게 잡혀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
죽은 이유는 확실히 규명할 수 없지만 '주'가 도망친 곳인 '낙읍'이 어디인지는 수메르의 유물들에서
밝혀낼 수 있다.
수메르에는 '콘돌의 석비'라는 것이 있다. 라가쉬(Lagash)의 기르수(Girsu:현 텔로)에서 발굴된 것으로
기르수는 라가쉬 도시 국가를 이루는 소도시 중의 하나이며 라가쉬의 왕궁이 있는 곳이다.
원래 '라가쉬'라 불렸는데. BC 2100년 우르 제3왕조 시대에(수메르 말기) 가서야 라가쉬라는 명칭 대신
'기르수'라 불렸다.
이 석비는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라가쉬의 왕 에안나툼(Eannatum)이 세운 기념비이고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이웃도시 움마(umma)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와 움마와의 국경선을 그은 것과 움마인들의 조공에 관해
조약을 체결한 내용들을 비석으로 새긴 것인데.
이 시대는 '주'와 앗수르가 싸운 시대로부터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사진 설명:라가쉬의 콘돌의 석비에 새겨진 수메르 군대의 돌격 모습.
하단에선 라가쉬 왕이 전차를 타고 진두지휘하고 있다. 라가쉬 왕의 전차에는 투창이 가득 담긴
투창통이 있다.
이 비석은 움마인들이 라가쉬에 다시 도전하고 경계를 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엄히 경고한다.
"(앞으로 언제라도) 무력으로 땅과 경작지를 차지하려고 니누르타의 경계도랑(과) 난셰의 경계도랑을 건너는
움마 인은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엔릴이 파멸시킬 것이다. 나누르타는 그의 엄청난 그물을 그(움마 왕)에게
던진 뒤 그의 위대한 손(과) 위대한 발로 그를 쓸어버릴 것이다.
그의 도시의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의 도시의 한가운데서 그를 때려죽일 것이다."
사진 설명:라가쉬의 콘돌의 석비에 보이는 니누르타가 주를 사로잡은 모습.
사진 설명:니누르타의 손에 잡혀 발버둥치는 주(라가쉬 콘돌의 석비)
이 비석에는 니누르타가 벌거벗은 불쌍한 포로들을 그물에 가득 담아 포획한 모습이 보이고
니누르타의 힘있는 손에는 천둥새의 모습으로 있는 '주(Zu)' 또한 처량하게 잡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기서 중국 신화에 나오는 '유망(楡罔:주)'을 발견할 수 있다.
유(楡)에서 부수 木을 제외한 兪(유)에는 舟(주)가 들어있는데.(月로 변함) 유망이 '주'임을 암시하며
망(罔)의 뜻은 '그물'이다. 즉 주가 그물로 잡혔다라는 뜻이다.
이로서 낙읍은 라가쉬에 대한 한자 음역(音譯)임을 알 수 있으며 라가쉬는 주왕이 도망쳐서
최후를 마친 성읍이다.
라가쉬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에 있는 성읍이다. 즉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의
맨 하류 지점이며 이라크 남부 바다인 페르시아만이 그 밑에 있다.
수메르 주왕은 막 다른 골목까지 몰린 것이다.
사진 설명:기르수(옛 라가쉬)의 흔적. 현재의 텔로 지역이다.
주왕과 동시대에 살던 길가메쉬 재위 시절에 약 8천명(추정) 정도의
인구가 100에이커 정도의 땅에서 살았다.
사진은 시카고 대학 근동 연구소.)
앗수르는 다른 이름으로 '니누르타'로서 여겨졌는데. 앗수르가 라가쉬 도시에 무혈입성하고
주왕의 죽은 시체를 발견한 이후 이 라가쉬 도시는 니누르타의 도시로 후세인들은 기억하고
항상 니누르타 옆에 '주'의 모습을 그려넣거나 도시의 상징은 천둥새인 '주'로서 여겨졌다.
사진 설명:수메르의 인장에 보이는 니누르타. 니누르타의 밑에는 천둥새 '주(Zu)'가 보인다.
라가쉬의 왕인 구데아(Gudea)는 니누르타를 위해 흰 천둥새 신전 '에닌누'를 지었다.
천둥새 주(Zu)는 이라크 우르 근방 텔 알 우바이드의 수메르 신전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주'가 좌우에 사슴을 거느리고 있다. 이 유물을 통해 '주'의 상징에는 사슴도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탁록이란 말도 사슴 록(鹿)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탁록은 아마 라가쉬를 뜻할 것 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기나긴 10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앗수르는 중국사에서 황제헌원이라는 자애로운 임금으로 기억되므로 그는 '주'의 시체를 고이 묻어주고
그를 위해 슬퍼한 다음 수메르 백성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며 안심하고 생업으로 돌아가라 하고
수메르의 새로운 지도자를 물색하여 올려준 다음 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 새로운 지도자는 길가메쉬(Gilgamesh)로 당시 유명한 사냥꾼으로서 본명은 니므롯(Nimrod)이다.
엔메르카르(Enmerkar)로도 기억되는데. 당시에는 우르크 성주였다.
후에 앗수르와 대립하여 바빌론을 세우는데. 이 자의 바빌론이 아모리족의 바빌론(함무라비)보다
선행되는 초기의 바빌론 제국이었다.
사진 설명: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상. 사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힘센 사냥꾼이란
그의 명성(창세기 10장)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전쟁 후 '주'를 타락으로 몰고간 '엔메바라게시' 혹은 '티아마트'라고 불리는
주왕의 아내의 행방에 관해서 신화는 그녀가 토막이 났다 라고 전해지나
종종 옛날 신화에선 신에게 반역한 자를 토막을 내는게 결말 부분이기에
죽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주'가 살해당했다면 범인은 엔메바라게시일지도 모른다.
이 후 천년이 흘러 은나라 후기 당시 중국의 호남성에 살던 수메르의 후손들은 주왕의 타락을
후세에 알려 기억하게 하기 위해 한 청동솥을 만든다.
지난 1959년 이 청동기가 호남성 장사시(長沙市) 영랑현(寧郞縣) 황재향(黃材鄕)에서
출토됐다. 이곳은 '주'의 후손들이 살던 형산(衡山)의 천주봉(天柱峯)이 있는 지방이다.
이 청동기에는 대화(大禾)라는 금문(金文)이 새겨져 있고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대화정(大禾鼎) 혹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대화인면방정(大禾人面方鼎)
이라 불린다.
사진 설명:대화인면정(大禾人面鼎)
'주'는 한 때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들을 풍족하게 해서 농사에 필수적인 태양으로 상징되었는데.
중국금문학자 낙빈기와 한국금문학자 소남자 김재섭은 '주'는 희화(羲和)로 불렸고 대화(大禾)는 희화를
뜻한다고 말하였다.
사진 설명:대화인면정에 새겨진 금문 '대화(大禾)'
낙빈기는 이 청동기에 새겨진 '대화' 금문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네 활개를 벌리고 우뚝 서 있는 사람 모습과 이삭 맺힌 곡식을 그린 이 그림은 곡식이 알찬 열매를
맺도록 돌보는 큰(大)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신농의 큰 아들인 희화씨를 나타낸 것이다."
(김용길의 '한자로 풀어보는 한국고대신화'(2004, 정신세계사) 93p)
한국금문학자 김용길씨는 자신의 저서 '한자로 풀어보는 한국고대신화(2004, 정신세계사)'에서
희화는 '주'의 이름이며 '해'의 고대말인 '해아'를 한자로 음역한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내가 보기에 희화란 말의 뜻은 희생제사를 지내 하나님과 백성을 화목케했다는 것으로
(羲는 원래 금문,갑골문에서 희생제사를 뜻하나 후에 '숨'으로 대체되었다.)
소와 양을 잡아 바쳐 하나님께 기도하여 백성들을 화목케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주'를 뜻한다.
이 후 기억이 변질되어 희화라는 이름은 태양의 여신 정도로 산해경에서 기억되고 있다.
이 청동기에 새겨진 주왕의 얼굴은 태양의 모습과 비슷하게 둥글다.
그러나 그 모습은 기분 나쁠 정도로 부정적인 모습이다.
모습이 징그러운 이유는 주왕의 타락을 경계로 삼고자 하기 위함일것이다.
사진 설명:대화인면정(大禾人面鼎)
주의 민족인 엘람족은 그 조상 주의 죄 때문에 후손 대에까지 하나님의 벌이 미쳤는지
10년 전쟁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엘람족들을 핍박하고 죽여
엘람족들은 본향인 자그로스 산악지대로 쫓겨갔으며 분을 품고 군사를 키우며 메소포타미아에 복수를
하기 시작한다.
중국에 사는 엘람족의 후손인 강족(羌族 혹은 姜族)들도 은나라 왕들에게 처절한 박해를 당해 생매장되거나
뱀구덩이에 던져지고 은나라의 전차들에게 인간 사냥을 당했다.
강족의 이런 처절한 고난의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주왕의 얼굴을 청동솥에 새기게 하였을 것이고
다시는 주왕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그들은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강족 출신인 태공망은 부모 형제가 모두 은나라의 군사들에게 인간사냥을 당해서
그 복수를 하기 위해 평생을 병법 연구에 보내다가 노인이 되어 주나라의 책사가 되어
수메르 왕 '주'의 전철을 밟아 미녀에 빠져 타락해서 은나라 사람들로부터 '주(紂)'라 불린 제신(帝辛)을
목야(牧野)의 들에서 정벌하게 된다.
그러나 주나라 역시 은나라의 전철을 똑같이 밟아 타락하고 주변 민족들을 핍박하니 그 복수는 허무하였다.
그리고 강족 출신인 여포(呂布)는 이민족이란 이유로 어릴 때 부터 한족(漢族)들에게 차별받아 성정이 포악해져
사람들을 무수히 죽이고 배신하다 자신도 조조에게 죽는다.
제갈공명의 제자 강유(姜維)는 스승의 뜻을 이어 한나라를 재건하려 했으나 결국 뜻을 못이루고 칼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강유의 후손들은 고구려로 이민하고 그 후손 중에 하나가 고구려를 수나라군으로부터 지켜내니
그 이름을 강이식(姜以式)이라 한다.
사진 설명:고구려 오회분에 보이는 신농씨
고구려의 오회분 벽화에는 주의 아버지인 신농씨(엘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대의 한국인들도 신농씨를 한국의 조상으로 여기며 벽화에 그렸던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므로 두번째 아담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첫 사람 아담의 실수를 만회하셨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그래서 한국인들은 예수님을 주(主)여 주(主)여 하고 부른다.
첫번째 주(Zu)는 하나님을 믿다 타락한 죄인이요. 세계 최초의 왕이므로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님은 두번째 주(主)이고 만왕의 왕이시요. 구세주(救世主)이신 것이다.
다음편에선 10년 전쟁 이후 달라진 고대 근동에 대해 논하기로 하고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일보전진 격동의 역사 카페(http://cafe.naver.com/nagwangfal) 부매니저 비포르스(b4rs)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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