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의 길 대구사범 진학 박정희 대통령 만나 동경물리학교 3년만에 졸업한 수재 물리학 서적 다수 집필 금자탑 세워
■국가발전의 길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 건설 공신 사상문제로 수차례 죽을 고비 넘겨
오늘날 60대 연령의 사람들 중에는 중학시절 일송(一松) 김병희(金昞熙) 박사(93)가 쓴 수학책으로 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송 선생이 울산이 낳은 천재로 얼마 전까지도 일산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다.
그는 학창 시절에는 명문교만 입학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5·16혁명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당시 최고위원들 조차도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던 의장실을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박 대통령에게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을 건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일송은 1918년 울산군 동면 일산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약방을 했는데 그는 보성, 남목, 심상소학교 등 초등학교를 여러 번 옮겼다. 그가 이처럼 초등학교를 많이 다닌 것은 진학을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만 해도 동구에는 6년제 초등학교가 없었는데 중학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반드시 6년제 초등학교를 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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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송(一松) 김병희(왼쪽) 선생이 혁명정부 시절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병희 선생은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로 혁명정부시절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을 건의했다. | 그가 4년제인 보성과 남목을 마친 후 6년제인 심상소학교로 다시 간 것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였다. 심상소학교는 방어진에 있었는데 이 학교는 동구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일본 자녀들을 위해 만들어져 한국학생들이 몇 명되지 않았다. 일송은 이 학교 졸업 후 대구사범학교로 갔다. 대구 사범은 입학만 하면 학비와 생활비를 조선총독부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전국 수재들이 모여 경쟁률이 높았다. 그러나 일송은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14살 때 대구사범에 입학했다.
그가 박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 학교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일송보다 나이가 2살 많았지만 박 대통령이 유독 수학을 잘했던 일송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송은 이 학교에 있는 동안 박 대통령과 한방에서 기거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동기들이 졸업 여행으로 금강산에 갔을 때도 둘이 비로봉에서 손을 번쩍 들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을 일송이 지금도 갖고 있다.
당시만 해도 대구 사범을 졸업한 후 교사로 봉직하면 일반 공무원들보다 대우가 좋아 학생들이 졸업 후에는 대부분 교원으로 일했다. 제도적으로도 이 학교를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교사 생활을 2년 이상 하게 되어 있어 일송도 고교 진학 전 잠시 교사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일송이 왜 편안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멀리 일본까지 가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동경물리학교는 물리학에 관심 있는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 학교였다. 일송은 이 학교를 졸업한 후 큐슈(九州)제국대학 이학부로 진학하게 된다. 일본 학제를 아는 사람들은 일송이 큐슈제국대학을 졸업한 것도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동경물리학교를 3년 만에 졸업한 것을 더욱 칭찬한다.
일본 출신의 많은 물리학자를 배출한 동경물리학교는 입학은 쉬운데 반해 졸업이 대단히 까다로워 일본의 수재들도 입학을 두려워하는 학교였다. 이 학교는 3년 동안 학업 후 졸업하지만 입학생 중 3년 만에 졸업하는 학생은 전체 학생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입학 후 5~6년 후 졸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일송은 3년만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동경물리학교를 졸업한 때가 1942년인데 졸업 후 그는 바로 큐슈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쳤다.
그는 큐슈제국대학 입학을 회상하면서 “대학 시험을 쳐놓고 오사카(大坂) 근교인 이타미(伊丹)에 있었는데 김동조(金東祚)가 합격 소식을 듣고 축전을 보내주어 기뻤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 시절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동조는 동향 출신으로 같은 언양 김씨였다. 그리고 큐슈대학은 김동조가 한해 선배가 되어 둘은 나중에 퍽이나 가깝게 지냈다.
일본 생활 중 궁금한 것이 학비 조달을 어떻게 했나 하는 것이다. 그는 대학 공부를 하는 동안 양영회(養英會) 장학금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영회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동생 김연수(金秊洙)가 설립한 육영사업단체였다. 당시 김연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문(專門)이상의 기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비의 일부를 보조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1947년 부산수산대학 부교수가 되었고 다음해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 1949년 동아대학교 교수를 거쳐 1956년에는 중앙대학 교수 겸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겸직하게 되고 1959년에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장을 거쳐 초대 문리대 학장이 되었다.
1962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으로 혁명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국가정책을 자문했다. 박 대통령 주위 사람들이 고속도로 건설이 경제성이 없다면서 반대를 할 때 일송이 이를 적극 추진토록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때가 이 무렵이다. 실제로 고속도로를 건립할 때는 주위 사람들이 너무 강경하게 반대하자 박 대통령이 하루는 일송을 부른 다음 “많은 경제인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대부분 경제성이 없다고 반대하는데 왜 너만 고집을 피우느냐”고 나무라기도 했다고 한다.
포항 종합제철소 건립도 당초 정부는 우리 경제의 앞날을 예상하지 못하고 연 25만t의 공장을 지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송은 앞으로 우리경제가 활발해지면 연간 200만~400만t을 생산할 수 있는 철공장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박 대통령에게 했다.
이후 그는 1963년 인하대학교 학장을 거쳐 1967년에는 동국대학 교수로 있다가 1983년 정년퇴직 후 일산동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이 땅의 선각자로 소년 시절부터 항일 운동을 펼쳤던 그의 일생이 분단된 이 나라에서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적호소년단’에 가입해 항일 운동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유독 일본인들이 많았던 일산지역에는 일찍 항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어 왜경들은 이 지역을 ‘제2 모스크바’라 부르면서 한국인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했다. 일제강점기 성세빈, 성세륭, 김경출, 박학규, 서진문 등 울산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다.
해방이 되면 좌우익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특히 그는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울산지부 교육장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여러 번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는 건준 참여와 관련 “당시는 건준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1949년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사상문제로 처음 고통을 겪었다. 이 때 갑자기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와 그를 잡아갔다. 그는 이때 공산주의자로 몰려 무려 75일간이나 조사를 받은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한국동란이 일어난 한 달 뒤 그는 건준 울산지부교육장을 지냈다는 경력과 또 앞에서 언급된 1949년 해군 사관학교 교수로 있을 때 발생했던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오랫동안 고생했다.
필자는 그동안 울산의 좌익활동을 연구하면서 일산진 어풍대에 머물고 있는 그를 여러 번 만났다. 그는 해방 후 분단된 땅에 살면서 사상문제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했다.
그는 구순의 나이지만 기억력이 좋고 아직 컴퓨터도 잘 다루어 논설집을 이미 4권이나 발간했다. 그리고 그동안 <고등물리학>(정음사), <중학생 수학 1,2,3>(영지문화사), <해석과 기하의 첫걸음>(영지문화사), <해석>(영지문화사), <기하>(영지문화사), <미적분학>(동아출판사), <미분적분학>(동아출판사), <대수학 및 기하학>(샛별출판사), <대학미분방정식>(문운당) 등 물리학과 관련된 책을 셀 수 없이 많이 내놓아 우리나라 물리학계에 금자탑을 세웠다.
아쉬움은 그가 개인 사정으로 여생을 울산에서 보내지 못하고 2~3년 전 울산을 떠나 현재 광주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