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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제 4편 列國의 爭雄시대
제 1장 열국의 총론
列國의 연대의 正誤
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ㆍ말한ㆍ불구래 등의 참람(僭濫)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열국사(列國史)를 말하려면 전사(前史)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해야겠다.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文武王) 8년(기원 668년)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9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不及九百年).”라고 한 비기(秘記)가 유행했는데,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때(문무왕 8년)에 고구려의 연조가 8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본기(本紀)의 705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13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문에, “17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 전하였다(傳之十七世孫 廣開土平安好太王).”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세손이 아니라, 17세손이다.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그 705년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려 건국이 위우거(衛右渠)가 멸망한 지 72년만이지마는, 북사(北史) 고려전(高麗傳)에는 막래(莫來)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四郡)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縣)이라고 하였다. 막래는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모본(慕本)의 잘못인가?”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우박[雹]이라는 뜻이고, 신(神)이라는 뜻이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이름 ‘무휼(憮恤)’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慕本王)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시의 비기(秘記)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北史)가 또한 증명하니,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안순암(安順庵 : 安鼎福) 선생이 고구려 족자(族子)인 안승(安勝)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햇수 거의 8백년(年將八百年)”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들었음을 인정하였으나, 실은 8백을 9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백을 8백으로 고쳐 고구려이 향국(享國)이 705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先後)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동부여ㆍ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ㆍ백제의 부조(父祖)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ㆍ백제의 형제뻘인 가라(加羅)ㆍ옥저(沃沮)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사(前史)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ㆍ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
列國의 疆域
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북쪽의 땅을 잃고,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前代)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 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조선의 지리 전고(典故)가 말할 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이 한구암(韓久庵 : 韓百謙)ㆍ안순암 등 여러 선유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退縮)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첫째는 부여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북부여이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삼국지에 “현도의 북쪽 천 리(玄菟之北千里)”라 하였으니,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開原)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동부여는 갈사나(曷思那)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동부여를 칠때. ‘북벌(北伐)한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 지금의 훈춘(?春) 등지가 동부여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江陵)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곧 남부여다. 동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文咨王) 3년(기원 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ㆍ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그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四郡)이다. 위만(衛滿)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의 만반한(滿潘汗), 한서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문번한(汶幡汗), 곧 지금의 해성ㆍ개평 등지이니 헌우란이 옳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니,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데,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ㆍ강원ㆍ함경 등 여러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桓因) 등지에서 찾았다.
셋째는 낙랑국(樂浪國)이다. 낙랑국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과 각각 다른,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그 밖에 고구려ㆍ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ㆍ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주군(州郡)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자 한다.
제 2장 列國의 分立
東扶餘의 分立
1. 解夫婁의 東遷과 解募漱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라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冒頓)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경이요, 동ㆍ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년경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전사(前史)에 동ㆍ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와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鯤淵 : 鏡泊湖)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相) 아란불(阿蘭弗)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 하더이다.’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故都)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募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熊心山, 일명 阿斯山,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에 내려와서, 채운(彩雲)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재의 아들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 속에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故都)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틀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ㆍ해모수 두 대왕이 동ㆍ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改撰)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상가)’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相)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曷思那)’라 쓰지 않고 불경(佛經)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迦葉原)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帝王)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祭司長)이며, 당시의 장상(將相)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巫師)요, 복사(卜師)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降神術)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相加)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 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 水旱不調 五殺不登 輒歸輒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고 하였다.
천시(天時)나 인사(人事)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 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엷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수는 해부루와 동족이며 고주몽(高朱蒙)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東遷)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컫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都城)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2. 南北曷思ㆍ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曷思國)ㆍ가슬라(迦瑟羅)ㆍ가서라(迦西羅)ㆍ아서량(阿西良) 등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 ‘가섭원기(迦葉原記)’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삼국사(三國史)에 보인 것이다.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沃沮)’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濊) 곧 읍루(挹婁)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濊族)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北沃沮)요, 남가사는 곧 남옥저(南沃沮)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ㆍ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豪民)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婢妾)을 삼았다고 한다.해부루가 북 ‘가시라’ -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帶素)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某甲)과 종제(從弟) 모을(某乙)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舊都)에 웅거하여 북갈사(北曷思) 혹은 남동부여(南東夫餘)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①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ㆍ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② 옥저가 곧 갈사(曷思)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③북동ㆍ남도의 두 갈사가 곧 남ㆍ북의 두 갈사(兩加瑟羅)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ㆍ갈사ㆍ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으로 나누고, ④강릉(江陵)을 ‘가시라’ - 가슬나
(加瑟那)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가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혼란해 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曷思)ㆍ가슬(加瑟)ㆍ가섭(迦葉)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ㆍ북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南?)’는 말과, 주류왕(朱留王)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北伐).’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3. 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黃龍國)이 고구려 유류왕(儒留王)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ㅇ리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 부사량(扶斯樑)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김의 소련령(領)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屈曲)한 송(松 : 古名 아리라)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大珠)ㆍ적옥(赤玉)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ㆍ삵ㆍ원숭이ㆍ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ㆍ궁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神誌)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風月)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詩歌集)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叛)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일어남
1. 鄒牟王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鄒牟 : 혹 朱蒙)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召西奴)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降生)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立功南海 積德北山).’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東漢)의 학자 왕충(王充)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추모(鄒牟)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경 동ㆍ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만과 같은 때일 것이다.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長者)가, 유화(柳花)ㆍ훤화(萱花)ㆍ위화(葦花)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사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을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優渤水)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解金蛙)에게 바쳤다.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天神)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오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니,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鄒牟)라 하였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朱蒙)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莽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의 조서(詔書)에는 ‘중모(中牟)’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ㆍ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鄒牟)라고 한다.
금와왕이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 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월 대제(大祭)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짐승이 대소 7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오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 은밀히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부(陜父)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夫餘)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살이었다.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召西奴)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延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ㆍ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紇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라 쓰니, 중경(中京) 또는 중국(中國)이라는 뜻이었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松讓)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빠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濊族)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烏伊)ㆍ부분노(扶芬奴) 등을 보내어 태백산(太白山)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 : 지점 미상)을 토멸하여 성읍(城邑)을 삼고, 부위염(扶慰猒)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사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광개토왕비문에, “동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이에 고구려가 섰다.
전사(前史)에 왕왕 송양(松讓)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국집(李相國集)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인용한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沸流王松讓)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儒留)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추모왕을 본기(本紀)에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으나, 동명(東明)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 신수두 대제(大祭)의 이름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尊師)하므로 한몽 -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義譯)이다.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儒留王)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에 그 아들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왕위를 이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琉璃明王) 유리(類利)이니, 유류(儒留)ㆍ유리(琉璃)ㆍ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世)라는 뜻이고 명(明)이라는 뜻이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大武神王無恤)이니, 무(武)ㆍ주류(朱留)ㆍ무휼(無恤)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神)의 뜻인데, 이제 유리(琉璃)와 명(明)은 시호로 쓰고, 무휼(無恤)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琉璃)를 유류(儒留)로, 대무신(大武神)을 대주류(大朱留)로 쓴다. 은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帶素王)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都切)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解明)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怯弱)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 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흔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 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결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朱留 : 본기의 無恤)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老境)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兵馬)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馬兵)이고 고구려는 보병(步兵)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鶴盤嶺)의 골짜기에 복병 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3. 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년에 5만의 군사로 북벌(北伐)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麻盧)와 칼을 잘 쓰는 괴유(怪由)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 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서는 전군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하였다.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계제(季弟) 모갑(某甲)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南沃沮)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海頭王)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南東夫餘)이고, 종제 모을(某乙)은 고도(故都)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北東夫餘)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沃沮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도 북동부여이고, 예전(濊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는 남동부여이다.
4. 大朱留王의 낙랑
최씨(崔氏)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樂浪王)이라 일컬었음은 제3편 제4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崔理)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曷思國 : 남동부여)의 왕이 그 소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최이가 출행(出行)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崔女)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있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嫡子)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년 여름 4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曷思王 : 남동부여왕)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위 15년 여름 4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11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소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설혹 대주류왕 4년, 남갈사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소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15년에는 겨우 11살의 어린아니니, 11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滅國)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嫡母)를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 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왕(帶素王)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은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대주류왕 20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伐樂浪滅之).’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ㆍ북동부여ㆍ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