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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시인의 감수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생각에 잠긴다고 해서 그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 속에 등장한 배롱나무라는 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고 우리네 인생사에 대해서 조금 더 배우게 된다. 도종환 시인은 바쁜 와중에도 그의 시간 한 켠을 선뜻 내어주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가 내어준 시간을 덥석 받아 안았다. 그는 막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황토집 구구산방에서 올라온 길이었다. 시인과 만난 곳은 분명 서울의 한 재즈카페였는데, 그와 마주하자 이상하게도 가보지도 않은 그의 구구산방 속에 들어앉은 듯 편안함이 느껴졌다. 지방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대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의 시계바늘이 더 빠르게 시간을 세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그날 만난 사람은 ‘시인 도종환’이었다. 목적을 두고 길을 걸어가다가도 어디선가 꽃 향기가 나면 걸음을 멈추고, 향기를 보내고 있는 꽃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듣고 오는. 시인의 시계는 세상을 둘러볼 만큼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날, 어디선가 달콤한 꽃 향기가 번져오면 그 향기가 어디서 나는지 주위를 둘러보고는 향기가 나는 곳을 가 봐요. 향기가 나한테까지 오는 건 꽃이 나한테 향기를 보낸 거예요. 저는 그걸 ‘꽃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향기는 꽃의 언어라고. 우리는 음성언어를 통해서 소통하지만 모든 생명체들이 음성언어로 소통하는 건 아니잖아요. 벌은 춤을 통해서 소통을 해요. 벌이 추는 춤을 보면 벌끼리 ‘아, 4km 밖으로 꿀이 있구나’ 이야기하는 거예요. 또 개미는 페로몬을 통해서 의사전달을 하죠. 코끼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와 주파수가 달라서 코끼리끼리는 4km까지 전달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안 들려요. 우리가 쓰는 음성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언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봐요.” 꽃은 빛깔과 향기로 말을 한다. 빛깔과 향기로 누군가를 부르기도 하고 의사전달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종환 시인은 향기가 ‘오면’ 꽃이 부르는 곳으로 ‘간다’. “가서 꽃 주위를 서성이다 보면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라는 말과 만나요. 이건 꽃이 나한테 해준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불렀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베껴 적어요. 이게 제가 쓰는 시예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흙에서 돋아나는 새싹과 어느 능선을 넘어오는 구름을 일상으로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종환 시인은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거나 어떤 향기가 오면 그냥 가지 않는다. 듣고 가고, 보고 가고, 맡고 간다. 그렇게 쉬었다 간다. 그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詩)는 그렇게 그려진 것이었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한 편의 시
언어를 보면 그 나라의 정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영어 문장은 두괄식이다. 단도직입적으로 할 말부터 먼저 하고 그 뒤에 기타 이러저러한 내용이 나온다. 한국어는 미괄식이다. 이러저러한 주변 말부터 늘어놓고 제일 마지막에 가서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이를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고 했다. “상황, 장면, 대상, 사물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이는 동양의 전통입니다. 한자로는 ‘입상진의(立象盡意)’라고 해요. 형상을 통해서 뜻을 펼친다. 이게 문학이에요. 여기서 형상이라고 함은 사물이고, 예부터 동양에서는 그게 자연이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자꾸 강 이야기를 한다. 자꾸 물 이야기를 하고, 자꾸 구름 이야기, 바람 이야기를 한다. 옛 중국의 시, 우리나라의 시조를 봐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먼저 하지 않고 자꾸 나무 이야기, 자연 이야기, 산 이야기를 한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이예요. 앞에 자연경관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중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 편지 한 장을 쓰더라도 꼭 앞에다가 계절인사를 먼저 하잖아요. 비가 내리는데요, 이 이야기 한 줄 쓰고 난 다음에 안부 묻고 내 안부 말하고, 아뢰올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하고 쓰라고 가르치잖아요. 모든 글은 선경후정 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선경(先景)하기 위해서 경관을 보는 거예요.” 똑같은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앞에서 정서적 접근을 하는 것이다. 정서적 접근을 한 다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동양에서의 문장의 기본이었다. 동양이 그랬고, 우리나라가 그랬고, 도종환 시인도 그랬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습관은 아주 오래된 동양(東洋)의 버릇이었다. 그래서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을 때도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테이블 한 켠에 놓여있던 노란 꽃 몇 송이였다. 그가 시를 써온 세월은 30년이다. 그러나 21회 정지용 문학상과 올해 윤동주 문학상을 받으면서 그가 한 생각은 한 가지였다. ‘내가 정지용 시인의 ‘향수’ 같은 시를 썼나?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같은 시를 썼나?’ 도종환 시인은 한 편의 좋은 시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이런 바람은 그의 시집 앞머리에서 ‘아직도 만나지 못한 한 편의 시’라는 시인의 말로 표현된다.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22살에 썼어요. 내용과 형식이 딱 떨어지는 정말 좋은 시예요. 올해 윤동주 문학상 받으면서는 ‘내가 별 헤는 밤 같은 시를 썼나?’ 생각했어요. 별 헤는 밤, 참 좋은 시거든요. 물론 서시도 좋지만 저는 별 헤는 밤의 그 톤이 좋아요. 참 웅장하잖아요.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나가는 그 흐름. 윤동주 시인은 시집을 딱 한 권밖에 내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런 시를 남겼어요.” 그는 일주일 동안 시를 못 쓰게 되면 몸이 막 뒤틀린다고 했다. ‘아니, 시를 못 쓴 채 일주일이 지났네?’ 이렇게 되면 그 시간 동안 뭘 하고 돌아 다닌 건가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몸살이 나기 때문에 늘 꾸준히 쓴다. 한 편의 시를 만나기 위해 그는 오늘도 펜을 드는 것이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시인은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저항의 글쓰기 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문학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작가회의가 저항의 글쓰기를 하겠다고 총회에서 공식 결정을 한 이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금 지원 조건으로 ‘시위 불참 확인서’ 제출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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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죠. 어느 나라든 그 나라 작가들은 그 나라의 자존심입니다. 문화적 자존심이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모인 단체에 그러한 확인서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문화, 행정, 경제, 환경, 여성, 복지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정부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 글쓰기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는 시인이다. 원래 글 쓰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의롭지 않은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나라 선비들의 전통이고 문인들의 전통이다. 의로운 일은 함께 하며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하고, 불의를 보면 질타하고, 이(利)가 아닌 의(義)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 “심지어 과거 시험을 보고 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책문(策問)에서 왕이 “나라를 이끌어갈 방책에 대해서 답하라”라는 문제를 냈을 때,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잘못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선비였습니다. 광해군 때의 문신 임숙영의 이야기입니다.” 도종환 시인은 한때 민주화 운동을 했었다. 상처받고, 핍박받고, 억압받고, 끌려가고, 쫓겨나고, 감옥에 가고, 이런 과정 자체가 운동인 시절이었다. 그것 또한 옳게 살아야 하고, 의롭게 살아야 하고, 곧게 살아야 한다는 문학인의 정신으로 갔던 길이다. 그런데 도종환 시인을 정치로 부르는 손길들이 잦다. 얼마 전만 해도 충북교육감에 출마하라는 압박이 있었다. 충북 인사들이 그가 있는 작가회의 사무실까지 올라와서 점거농성, 단식농성을 했을 정도다. 그 또한 교육운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심정은 이해했지만, 그 동안 몸이 좋지 않아 은거하면서 지낸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현 교육현실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 있었던 것을 이유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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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향을 주는 사람
도종환 시인은 문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내 아픔, 남의 아픔, 우리 모두의 아픔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네들은 리얼리즘 문학을 한 우리와 다르게 리얼리즘도 모더니즘도 아닌 자기영역을 구축해나가려고 애를 쓰지요. 감수성과 표현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자기 세계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운 창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점에서는 너무 자기 세계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지요. 거기에서 보편성의 세계에 이르렀으면 좋겠어요. 그게 문학이 할 일 중 하나예요”
그는 달라진 문화 속에서의 소통을 위한 리더십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리더피아> 독자들에게도 말을 전했다. “직장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양가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내가 이 기업을 잘 끌어가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신입사원일 땐 윗사람하고 눈도 못 마주쳤는데 지금은… 하는 그런 마음.” 달라진 상황과 문화 이야기다. 리더라면 달라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여기서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 갈 것인지, 함께 가면서도 어떻게 존경 받는 리더가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이라는 생각은 부질 없는 것이다. 힘 있는 리더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성 리더십을 갖춘 정서적으로 똑똑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 작년 한국경제신문이 직장인 1백3만 명을 상대로 실시한 ‘내 인생의 시’라는 설문조사에서
1위에 선정된 시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였다. 그는 그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제일 좋아하는 시를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서시’가 1위였어요. 그런데 이게 바뀌었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IMF 이후부터 직장생활 하기가 너무 힘들다 보니까 성찰의 시보다는 힘과 용기와 위안을 줄 수 있는 시를 찾는 걸로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담쟁이는 함께 가는 용기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모임들의 이름 앞에 담쟁이가 붙었다. 도종환 시인은 시대가 바뀌어서라는 겸손의 말을 했지만, 그 변화한 시대에 맞춰 용기를 주고 위안을 주는 시를 쓰는 시인이 또 그다. 과연 시인으로 사는 건 어떤 걸까. 그는 ‘남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답한다. “시인으로 산다는 건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정신적인 영향을 주며 사는 사람으로 사는 거죠. 그 생각도 저는 늘 해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 남에게 권력을 가진 사람,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 비치기보다는 아름다운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사는 거다, 하는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