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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실 연못. 도시의 소음과 공해로부터 연못을 보호하겠다는 듯 수백년 된 거목들이 짙은 녹음으로 애워싸고 있다. |
떠나고는 싶은데 돈 때문에, 시간 때문에 머뭇거리십니까. 생각을 바꿔 주위를 둘러보세요. 어쩌면 내가 사는 곳에 나만 몰랐던 멋진 곳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명 경승지에 견줄 도심속 숨은 보석을 찾아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경비는 얼마나 드냐구요? 교통카드 한장만 들고 나오세요. 생수 한병과 가벼운 요기거리가 있으면 금상첨화이구요.
“아니,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보석을 찾았습니다, 보석을.”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봄 백사실(白沙室)을 찾아 터뜨린 탄성이다. 3월 국회의 탄핵의결로 직무가 정지됐던 노 대통령은 우연치 않게 백사실로 산보 나왔다가 그 절경에 감탄했고 이후 이 곳의 아늑한 정취를 못잊어 재차 찾았다고 한다.
산속의 비밀정원 백사실
백사실을 찾아 떠나는 출발지는 종로구 부암동. 광화문서 차로 불과 7,8분 거리의 청와대 바로 뒤편이다.
뒷골은 지금 앵두가 제철이다. |
유명 중식당인 ‘하림각’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렸다. 급경사진 빌라 골목길을 이마의 땀을 훔치고 허벅지를 두들기며 올라가길 10분 남짓. 소나무 숲이 반갑게 맞는다.
솔향에 취해 몇 걸음 옮기다 보니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 막는다. 누가 썼는지 ‘백석동천(白石洞天)’이란 잘 생긴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동천’이란 경치가 아주 뛰어난 곳에 붙이는 자구로 이곳이 예부터 알아주던 절경이었다는 표시다.
백석동천 바위 앞에서 물소리를 좇아 비탈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가니 마치 산중에 요술을 부린 양 ‘비밀정원’ 백사실이 나타났다.
우선 계곡 바로 옆에 놓인 반경 10m의 아담한 연못이 시선을 붙들어 맨다. 물을 가득 담은 연못에는 수초가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고 수백년된 거대한 나무들이 연못을 둘러선 채 짙은 녹음을 뿜어낸다.
'백석동천 (白石洞天)' 바위. 동천이란 말은 절경에만 붙는다. |
연못가 돌 테이블에 걸터 앉아 고개를 드니 짙푸른 나뭇잎에 가려 한 여름 땡볕도 힘을 못쓴다. 들리는 건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살갗을 간지는 바람소리 뿐이다. 연못 옆 계단을 오르니 잡초 무성한 양지에 무릎을 넘는 주춧돌이 옛 건물 터 그대로 남아 이곳이 조선시대 세도가의 별장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이 언제부터, 왜 백사실로 불려졌는지 누구도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일부 주민들은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라고 믿고 있지만 문화재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노 대통령의 추천 덕에 조만간 백사실 발굴작업이 본격화한다니까 조만간 옛 주인이 밝혀지리라.
서울 한복판의 두메산골 뒷골
백사실 옆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서울의 두메산골 뒷골이 나타난다.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에 묶이고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단절된 이 곳은 아직도 18채의 가구가 밭농사 등을 지으며 전원생활을 즐기는 마을이다.
예전에 능금나무가 많아 아직도 능금나무골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곳 능금은 임금님께 바치는 진상품으로 맛이 뛰어났다고 한다. 뒷골을 안내한 종로구 남재경 구의원은 “능금나무는 손이 참 많이 가는 나무여서 그동안 관리가 안돼 이제는 다 사라지고 산속에 2,3그루만 남았다”고 말했다.
밭 매는 할머니. 서울에서 이런 풍경은 흔하지 않다. |
대신 능금나무골은 앵두골이란 새 명찰을 달 채비다. 주민들은 그 동안 마을 곳곳에 앵두나무를 가꿔왔는데 마침 지금 앵두가 제철이라 길 주변은 온통 탐스럽게 농익은 앵두로 붉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물길은 올 4월 서울 도심서 도롱뇽 알이 발견됐다고 모든 언론이 야단법석을 떨던 바로 그 계곡이다. 하지만 이제껏 도롱뇽, 버들치, 가재와 함께 살아왔던 주민들은 “여기서 도롱뇽이 없어지면 그게 뉴스”라며 픽 웃고 만다.
뒷골 집들을 잇는 길은 손수레도 다니기 힘든 오솔길이다. 바짓가랑이로 수풀을 헤치며 걷는 이 길가에는 주민들이 심어놓은 나리꽃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돌담너머 텃밭에는 감자, 배추, 고추, 콩 등이 정성스레 심겨져 있다.
남 의원은 “여기서 재배되는 것들은 모두 무공해 채소로 일부는 효자동 시장에 내다 팔리는 데, 뒷골 채소가 나오는 날만 기다리는 고정 고객이 있을 정도로 값이 비싸다”고 말했다.
● 백사실 가는 방법
시내버스를 이용해 백사실로 가는 코스는 대략 3가지. 부암동사무소, 하림각, 세검정 등 3곳의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중 경사가 완만한 부암동사무소 코스가 가장 추천할만하다. 북악산길 입구에서 ‘능금나무길’ 이정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군초소를 지나자 마자 뒷골 마을에 도착한다. 녹색버스 0212(구기동-옥수동), 1010(정릉-광화문), 1711(국민대-공덕동), 7018(북가좌동-종로2가), 7022(갈현동-서울역)
하림각 코스는 하림각 건너편 ‘백석동길’을 따라 급경사진 골목을 10여분 올라가면 ‘백석동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버스는 부암동사무소와 같다.
세검정 코스는 개천을 끼고 홍제천길로 걷다 홍제천4길 골목으로 접어들어 현통사를 지나면 백사실이다. 파란버스 110(정릉-이태원), 170(우이동-연세대), 녹색버스 0212(구기동-옥수동)
● 부암동의 다른 볼거리
백사실 만으로 하루 나들이가 성이 차지 않다면 다른 문화 유적도 둘러보자. 부암동 일대는 북한산과 북악, 인왕산 자락이 춤추듯 어우러지고, 계곡이 굽이쳐 예부터 서울의 최고 절경으로 꼽혀왔다.
부암동사무소 뒤편의 무계정사(武溪精舍)터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봤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바로 여기라며 정자를 짓고 시문을 즐겼던 곳이다.
무계정사터 바로 아래가 빙허 현진건의 집터다. 자하문 터널 바로 옆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이 남아있고 그 중 사랑채는 세검정 삼거리의 석파랑이란 음식점으로 옮겨져 있다. 세검정초등학교에는 신라때 큰 절이었던 장의사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이밖에 자하문으로 불리는 창의문, 서울성곽, 윤응렬가, 메주가마터가 있고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도 둘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