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人신문」2023년 신춘문예 여행수필 공모전 가작 |
이상한 샹그릴라
김 범 용
점심을 먹고 여행자 숙소에 들어섰다. 오랜 비행 탓인 듯 침대에 쓰러져있는 가냘픈 여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프랑스 커플 바로 옆 침대에 누워 있다.
몽골인 부부는 아파트 두 채를 여행자 숙소로 운영하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아저씨는 별 할 일이 없이 늘 소파에 앉아서 코담배를 피우거나 가끔 전화기를 붙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주인아주머니는 영어권 나라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제법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여행객의 공통 관심사는 그 나라의 여행지 이야기다. 거실에서 루이샤 워프가 쓴 『생배노 몽골』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유일하게 런던에서 온 헬레나가 그 책을 읽어봤고,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 여인과 함께 쳉겔에 가기로 한다. 나 또한 예전부터 그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작가가 머문 곳의 풍경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신비감이 물씬 풍기는 서양 여인과 조금이라도 함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귀국 일정을 늦추었다.
홉드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무슬림 지역이라는 말에 약간의 경계심이 일어났지만, 몽골 환경에 익숙해진 터라 망설임이 없었다. 밤공기를 가르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행안내서에 나와 있는 호텔을 겨우 발견하고 서둘러 피로에 전 몸을 누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정류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개인이 운영하는 승합차를 발견하고 여비를 지불했지만, 해 질 무렵에도 기사는 출발하지 않는다. 인내심에 한계에 이른 나는 서양 여인에게 짜증을 부렸다.
손님이 가득 차자 비로소 자동차는 움직인다. 기사는 여정 중, 양파 자루를 싣기도 하고 식료품점에 잠시 멈추기도 하였다. 함께 승합차에 오른 몽골 군인은 보드카를 권한다.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권유로 한 모금 털어 넣자 목구멍이 화끈거린다. 취기가 오르자 군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덩달아 운전기사도 함께 부른다. 차 안은 축제장으로 변했다.
사방이 어두워질 때쯤 작은 식당에 도착했다. 앳된 여자아이가 준비한 따뜻한 만두와 수태차(말젖, 양젖에 찻잎을 넣고 끓이는 몽골 전통차)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양고기를 저민 고명과 얇게 반죽한 밀가루 피로 싸인 촉촉한 만두를 베어 물자, 육향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허기진 상태였다. 대부분 우리처럼 늦은 시간에 저녁을 해결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일곱 시간을 차 안에서 보냈지만 흥겨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옆 좌석의 승객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루함은 덜했다. 가끔 헬레나에게 짓궂은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포옹하는 제스처를 하는 운전기사 덕분에 일행은 한바탕 웃음바다에 빠지기도 했다.
자정이 다 되어 바양울기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낸 후 루이샤 워프가 머물렀던 마을로 가는 자동차를 수소문했지만 찾기 힘들었다. 다행히 고향에 머물던 몽골인 청년이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다음 날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는 수도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여름 휴가철이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자동차는 한참 동안 비포장길을 달렸다. 나무다리가 보이는 작은 개천에 이르자 푸른 초원 사이로 양 떼가 거니는 풍경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 실개천이 흐르는 옆에 게르(천막집)와 흙더미로 쌓아 올린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몽골 청년의 부모님이 사는 곳이다. 옆 맏아들 집에는 며느리 홀로 애들을 돌보고 있다. 아이들은 소꿉놀이하다가 낯선 일행을 보자 신기한 듯 쳐다본다. 헬레나는 금세 아이들과 친해진다. 그들을 끌어 앉고 깔깔거리는 모습이 정겹다. 붉은 석양이 저물어간다. 실개천을 따라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각종 허브와 노란 양귀비가 피어 있고 작은 물길은 여러 갈래로 퍼져 있다. 저편 게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저녁 풍경이다.
다음날 야트막한 산을 넘어가자, 작가가 일 년 동안 살았던 쳉겔에 도착했다. 기대와는 달리 풀 한 포기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만 일어나는 황량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책 속에 그려진 상상의 샹그릴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일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루이샤 워프는 무엇을 보고 이곳을 아름답게 표현했을까? 따뜻한 정을 품은 강수흐 아주머니, 수작을 부리던 동네 주정꾼들, 의료봉사를 온 능글맞은 미국인의 에피소드에 대한 내용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현대 문명에 익숙한 런던 여자가 척박한 이곳에서 일 년 동안 오롯이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1,700㎞나 떨어진 쳉겔, 나는 작가가 남긴 삶의 향기가 궁금했었다. 기대와는 달리 이곳은 샹그릴라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아마도 작가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타왕복드 설산 주변을 보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멀리까지 왔지만 정작 설산을 가보는 것에는 흥미를 못 느끼고 돌아가기로 한다.
수도로 돌아오는 여정 중 넓게 펼쳐진 밀밭이 보인다. 목축업 사이로 농업이 끼어들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안나푸르나, 일본의 북 알프스, 중국의 황산 등 세계 여러 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면 기억도 가물가물해진다. 결국 작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풍경이 아닌 인간애로 범벅이 된 척박한 그곳이 그녀만의 샹그릴라이었을 것이다.
헬레나는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 일정 때문에 나보다 하루 일찍 칭기즈칸 공항으로 나갔다. 짧으나마 함께 했던 여행 때문인지 이별이 아쉬웠다. 이제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나란톨 시장에서 사준 챙이 넓은 녹색 모자를 쓰고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여행자는 만나고 떠나는 것에 익숙해야 한다. 수많은 여행객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살아간다. 공항에서 사라져가는 서양 여인의 뒷모습과 샹그릴라는 아릿한 그림자로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