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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지혜 스크랩 가족의 희망, 대한민국의 희망 아버지
샬-롬 추천 0 조회 25 09.03.09 21: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가족의 희망, 대한민국의 희망 아버지

2009-02-03 오후 02:43

1월 어느날 오후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서울역 지하보도 안으로 밀려들었다. 침침한 지하보도엔 일찌감치 추위를 피해 온 노숙인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침낭을 뒤집어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이박스와 스티로폼, 때가 잔뜩 낀 낡은 담요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운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차가운 바람, 살을 에는 추위를 막기엔 힘겨워 보였다.

술에 취한 듯 한 노숙인이 혼자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이나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우주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누구 하나 이들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노숙인이 다시 늘고 있다. 노숙인 긴급구호센터인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가 운영하는 ‘서울역 길거리 상담소’ 관계자는 “요즘 서울역 안이나 주변을 둘러보면 전에 못 보던 얼굴들이 눈에 띈다”며 “한 20명 정도 새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시설을 찾는 노숙인은 더 늘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이수범 과장은 이곳 시설을 이용하는 노숙인이 6개월 전만 해도 하루 170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260명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공식 집계를 봐도 서울지역 노숙인 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볼 때 3060명으로 증가했다.

이 과장은 “서울시가 파악하고 있는 노숙인 외에도 한 달에 10~20만 원 하는 쪽방, 고시원, PC방, 사우나 등지에서 기거하는 반(半)노숙인은 그 몇 배에 달한다. 그들 역시 언제 거리로 밀려날지 모르는 경계에 선 사람들”이라고 우려감을 표시했다.

노숙인들은 대부분 가정이 해체된 상태라고 보면 된다. 노숙인 지원단체인 ‘살림터’ 관계자는 “가족을 이루고 있으면 정부의 기초생활 수급자 혜택을 받아 최소한 노숙은 면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노숙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해체된 가정이 늘었다는 방증이다.

서울역 광장에서 만난 노숙인 박인식(가명·49) 씨는 그곳에서 생활한 지 석 달이 넘었다고 했다. 그도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장이었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에 각종 고지서를 꼼꼼히 챙겨 제때 납부하는 게 몸에 배어 있는 등 연체나 신용불량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20년 넘게 영업 일을 해 나름대로 인맥도 있었고, 아내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5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업은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을 1년 만에 퇴직금만 날리고 접어야 했다.”

잃은 돈을 만회할 욕심에 아내 몰래 집을 담보로 1억 원 넘게 대출받아 지인과 동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수입은커녕 1년 만에 투자 전액을 사기당했다. 그 사이에 대출이자와 카드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순식간에 집이 날아가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한 박 씨는 1년 전쯤 집을 나왔다. 처음엔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근근이 살았지만 가을부터는 월 15만 원 하는 쪽방 값도 벌지 못해 거리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죽을까도 싶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더라고요. 그건 가족에게 두 번 죄를 짓는 게 되잖아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죠. 희망을 버릴 순 없잖아요.”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가족의 해체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미국의 타임지는 지난해 11월 3일자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시카고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경기침체가 이혼율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임금이 줄고, 물가가 오르면 가정의 재정난이 가중되고 이것이 스트레스로 이어져 우울증의 원인이 되면서 결국 부부관계가 파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혼율이 급격히 증가한 바 있다.

우리나라도 경제 한파로 인해 무너지는 가정들이 늘고 있지만 한편으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수록 가족이 더욱 똘똘 뭉치는 가족애도 빛을 발한다. 가족은 ‘최후의 보루’이자 불안감에 대한 방어벽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여기엔 조건 없는 베풂과 자기희생이 가족의 원천이자 힘이라는 동양적인 사고도 한몫하고 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이수범 과장은 “노숙인이 되었다는 것은 경제, 가정, 인간관계 등 모든 관계망이 완전히 깨졌다는 이야기다. 그 상태에서 재기하는 것은 어렵다.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사랑과 믿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형학(가명·34) 씨가 가족의 힘으로 재기한 사례다. 김 씨는 아내만 생각하면 고마움에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든 그는 젊은 나이에 제법 큰 가게를 운영했다. 하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데다 잘되던 가게가 경기불황으로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매출이 계속 곤두박질쳤다.

결국 모자라는 사업 자금을 충당하고 어머니 병원비와 재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까지 팔아야 했다. 10년 가까이 열심히 일해 모은 돈이 겨우 6개월 만에 모두 사라지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마지막 모든 것을 정리했을 때 손에 쥐어져 있는 돈은 단돈 500만 원. 그나마 갚지 못한 나머지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이런 큰 폭풍을 만나게 된 아내에게 미안했어요. 내 곁을 떠난다고 해도 미련없이 보내주리라 굳게 마음먹었죠. 그런데 아내는 오히려 새로 얻은 집을 보고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지만 신혼살림하기엔 좋다’며 밝은 미소를 띠더군요. 제 등을 토닥이며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했고요. 결혼식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어려울 때 함께하겠다’고 같이 선서하지 않았느냐고 할 때는 정말 눈물이 났어요.”

김 씨는 아내로 인해 새 삶을 시작할 기운을 얻었다며 ‘더 이상 이 행복이 깨지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노숙인으로 전락했던 정영춘(가명·56) 씨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재기를 꿈꾸고 있다. 재단기술자로 30년 동안 양복점을 운영하던 정 씨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유통회사 이사로 일하던 아내,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 등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하지만 연대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2억 원이 넘는 빚을 짊어진 정 씨는 마땅히 기거할 곳조차 없어 서울역 찬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막막하기만 하고 어떤 슬픔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술에 찌들어 살던 그가 재기를 결심한 것은 노숙 6개월이 지나서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있는 제 앞을 일가족 3명이 지나가는데 꼭 제 아내와 딸, 아들 녀석 같았어요. 그 순간 제가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들더군요.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엔 자립의 기회나 방법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러다 거리상담소를 통해 쉼터를 알게 됐죠.”

쉼터의 도움으로 그는 가족과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헤어져 사는 동안 가족들은 열심히 일하며 다시 모여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안 쉼터에서 대한주택공사에 의뢰해 임대주택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줘 정 씨 가족은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됐다.

정 씨의 꿈은 소박하다.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미뤄진 첫딸의 혼사를 다시 추진하는 것과 유학 중인 둘째가 복학해 학업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 자금을 모아 작게라도 양복점을 새로 여는 것이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아버지의 위기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곧 가정의 위기, 사회의 위기가 될 수 있다. 아버지의 경제적 책무를 나누어 지려는 가족의 노력과 심리적인 아버지 자리의 ‘틈’을 만들어 주려는 가족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가정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정부나 사회단체의 적절한 도움을 이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문연실(가명·52) 씨 가족은 신용회복위원회의 도움으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7년 전쯤 직장생활을 하던 남편이 갑자기 도라지 농사를 짓겠다고 했어요.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가지고 있던 전 재산과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전남 화순으로 내려갔어요. 그런데 도라지는 해마다 수확을 하는 게 아니라 몇 년 동안 재배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어요. 할 수 없이 몇 년 동안 카드빚을 돌려막기하며 생활했어요. 그런데 수확할 때가 되자 누군가가 도라지를 모두 훔쳐가 버렸어요. 우리 전 재산을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남편과 문 씨는 취직 자리를 알아봤지만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라 힘들었다. 결국 일용직으로 나섰다. 산을 오르내리며 기름을 날랐고, 가로수 가지치기, 길거리 풀 뽑기 등을 하며 하루에 3만 5000원 벌이를 하며 살았다. 비 오는 날이나 휴일이면 3만 5000원을 벌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무섭고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날품팔이로는 빚을 갚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카드빚 독촉이 시작됐다. 카드사의 협박이 무서워 아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문 씨는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흥청망청하기는커녕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왜 이 지경까지 돼버린 걸까’ 하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문 씨는 아이가 계단에서 넘어져 앞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건강보험증이 있는 사람들에게야 치료비가 큰돈이 아니지만 신용불량자에겐 너무도 큰돈이었다. 신용불량자인 자신에게 10원짜리 동전 하나 빌려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게 됐다. 살 곳이 없어지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때 아들이 신용회복위원회 홍보전단을 들고 왔다. 문 씨는 신용회복위원회의 도움으로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연체 독촉의 고통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희망이 생기니 길이 보였다. 전에는 절망감을 못 이겨 거의 술에 취해 들어오던 남편은 노동부 고용센터에서 운영하는 실직자 무료교육 과정을 통해 기술을 배워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아직 남편도 문 씨도 취업을 하진 못했지만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5일 라디오 연설에서 “힘들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은 결국 가족”이라며 “실직한 나의 남편, 우리 아버지도 따뜻한 가족의 사랑으로 격려하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과 용기”라고 강조했다.

경제위기로 실직 등 위기에 처한 가정의 가장들은 지금 갈수록 짙어가는 암흑에 절망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동쪽 하늘이 하얗게 밝아오는 새벽이 다시 올 것이라는 희망만은 움켜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글·최호열 기자














임용식(50) 씨는 잘나가는 중식전문 요리사였다. 서울 강남 번화가에 고급음식점을 운영했고, 번듯한 집도 두 채나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식당 운영이 기울기 시작했다. 가게 장소를 옮기고 규모도 줄여가며 재기를 모색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4년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인천시 영종도에 중국집을 차렸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인근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중국집으로 통하는 직선도로가 끊기는 바람에 손님이 확 줄었다. 그 사이 빚은 계속 늘었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임 씨는 취직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2006년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서울로 올라왔다. 금세 취직이 될 줄 알았지만 중국요리업계에서 제법 유명한 중국집을 운영했던 그를 직원으로 쓰는 걸 꺼렸다. 그렇다고 다시 가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쪽방이나 PC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그는 돈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에 들어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노숙을 하게 된 계기는.
“2007년 가을, 영종도 중국집이 헐리면서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지금도 나는 아내와의 재결합을 꿈꾼다. 그때도 두 딸을 내가 데리고 있으면 아이들 때문에라도 아내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싶어 두 딸을 내가 키우겠다고 했다.”

아이를 데리고 노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1년여를 아이들을 데리고 찜질방과 쪽방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이 있다보니 일자리 찾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서 입양을 보내거나 기관에 맡기려고도 했었다. 상담까지 했었는데…. 생각할수록 정말 못할 짓이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노숙인을 돕는 ‘거리의 천사들’(02-766-6336)의 도움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를 소개받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엔 너무 힘들어 아이들과 함께 죽을 결심도 여러 번 했다. 실행에 옮기기 전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줬다. 그러자 아이들이 불안해하며 ‘이제 우리 아빠랑 안 사는 거냐’ 하고 묻는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죽는다는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아이들이 아빠와 떨어지면 불안해 한다. 그래서 일이 늦어져 약속시간까지 집에 못 들어가면 자기들을 버리고 간 줄 알고 미친 듯이 전화를 해댔다. 이젠 그러지 않는다. 큰애가 가끔 ‘우리들을 버리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오히려 내가 아이들 때문에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생활은 어떻게 하나.
“정부에서 두 아이 앞으로 월 30만 원 정도 지원금이 나온다. 거기에 파지나 고물을 수거해 팔아서 월 50만~60만 원 정도 벌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일을 하는 노인과 장애인들이 늘어 쉬고 있다. 빨리 일자리를 찾고 싶다. 자리를 잡으면 아내에게 다시 같이 잘살아보자고 할 생각이다.”

글·최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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