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앙인들의 연약함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늘 구원의 확신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을까? 아니면 구원 받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의 기준이 자기가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는 구원 받은 것 같고 그렇지 못하고 좀 신앙생활을 등한시하고 신앙이 나약할 때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 같고 그래서 늘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구원에 확신을 가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꼭 고등학교 3학년이 대입시험을 치루고 합격하면 ‘만고 땡’이라는 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거룩히 살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삶을 살 것을 바라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쉬지 않고 간섭하시며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문제에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채찍도 마다하시겠습니까? 어떤 상급도 마다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 잘 믿으면 상급을 주고 잘 못 믿으면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싫다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게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지옥도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들어보셨습니까? 거기에는 분명히 아랫목이 있고 윗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아랫목이 더 고통스럽지요. 재미있는 부분은 ‘여기 죽은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와 산자를 이야기할 때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들 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라는 뜻이고 산 자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죽었다는 표현이 없고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들’ 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를 믿는 자에게는 결단코 죽음이 없습니다. 언제나 산자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등급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후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서 보면 분명히 천국에도 등급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등급은 이 세상의 물질관으로 등급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소유의 차이가 아니라 계급의 차이가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데 말하자면 영광의 차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쁨의 차이 뭐 이런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그러니까 상급이란 것을 우리는 물질적으로 이해하니까 이 상급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국에도 노숙자가 있느냐? 빈부의 차이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만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물질과 계급으로 나누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과 함께하는 곳이니까 기쁘고 죄가 없는 곳이니까 기쁘고 감사하고 영광된 삶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상급의 측면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4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상급에 관한 부분에서 상급이 없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상급 면에서 등급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 얻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등급에 관해서 설명되어지고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느냐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차원에서 이해하셔야합니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불 가운데 얻는 구원’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혹시 40-50대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화재 중에 ‘대연각호텔’과 ‘남산관광호텔’ 화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남산관광호텔 화재 시 찍은 사진 중에 모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진의 내용은 어떤 여인이 최소한의 옷을 걸치고 창문에 매달려 있는데 고가사다리를 놓고 소방대원이 그 여인을 구출해 내는 장면이 거기에 실린 것입니다. 이 예가 고린도전서 3:15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불 가운데 얻는 구원’ 다시 말하면 ‘수건하나 걸치고 천국에 온 백성’ 이런 말이지요.
여러분 상급을 꺼내놓는 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유치한 권면도 아닙니다. 상급을 걸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말씀대로, 정결하게, 그의 나라와 의의 삶을 살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기를 때 자녀들이 공부를 잘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급을 걸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하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권면과 채찍입니다. 또 하나는 상급이지요. 이것이 사실은 축복된 것이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간시키기 위해 상급이란 재도와 권면과 채찍이란 것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제시 해 놓은 상급이란 말이지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공부를 시키면서 공부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자녀들이 모르니까 자녀들이 열심을 내도록 상급을 제시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흔히 어릴수록 공부에 대한 가치보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임기나 핸드폰, 전자수첩 등이 있지요. 사실 공부에 대한 가치가 중요한데 그것을 모르니까 그 또래의 가치를 가지고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공부는 시켜야하니까 그렇습니다.
본문 5절을 봅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니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교회는 분파문제로 심각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렇게 네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바울의 지적을 보세요. 바울은 이 점을 이렇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난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은 경력과 학벌입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어느 회사를 다니는가, 직급이 무엇이며, 연봉은 얼마인가 이런저런 것들로 우리는 자신을 확인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내가 아볼로와 얼마나 친한지 아느냐 학교를 같이 나왔고 가끔씩 식사도 함께했다, 베드로는 얼마나 나를 아끼는지 아느냐 고린도에 올 때 꼭 나를 찾아와서 우리 집에만 머문다, 바울과 나는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우리 어머니를 안수해서 병을 치유해 주셨고 가끔씩 서신도 교환한다.’ 이런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기의 존재를 높이기위해서 높은 사람과 악수를 한다든지 사진을 찍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지위를 확인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9절을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 어떤 부자가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에게 무엇인가 해 주고 싶은데 그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로 좋은 집을 지어주기위해 외국에서 유명한 설계사를 초빙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멋진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집을 지어준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명한 설계사와 악수를 한 사진을 찍어서 현관에 크게 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설계한 집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방문한 손님에게 자랑을 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지요. 오히려 건축가가 감사해야 되지 않습니까? 누구 때문에 돈을 벌고 그 큰집을 짓게 되었는데요. 내가 짓는 이 집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설계사를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면 이런 설계사를 고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요.
요즘도 고액과외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는 강남출신들이 많아서 대학교 1학년인데도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과외도 없이 정말 교과서만 보고 올라온 천재들은 기가 죽어서 학교를 못 다닌답니다. 이런 강남아이들이 얼마나 엄청나게 돈을 들여서 그 유명한 교수에게 공부를 배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들이 ‘나는 유명한 교수 이름만 대도 깜짝 놀랄 교수에게 과외를 했다’ 이것이 자랑이 됩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자녀들이 교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교수가 존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가정교사를 그만두게도 하고 채용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대로입니다. 누가 더 소중한 사람이냐는 말입니다. 바울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아볼로입니까? 아니면 고린도교인들입니까? 우리의 집을 짓고 밭을 갈기 위해 끊임없이 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상급을 걸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가정교사 유명한 교수들을 채용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축복을 나열해 놓은 것은 어떻게 하면 축복을 받을 것인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시키기 위해 그 많은 상급을 열거해 놓고 한 쪽에는 무서운 사자가 부르짖고 있고 한 쪽에는 수많은 청지기들을 나열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감격 하셔야합니다. 정말 이 부분에 우리는 감사해야 되고 기대해야 됩니다. 우리를 위해 모세가 존재하고 아브라함이 존재하고 요셉이 존재하고 야곱이 존재하고 욥이 존재하고 수많은 숙달된 조교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살았을 때는 어떻게 되며 저렇게 살았을 때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것을 성경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대로 살면 그대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기록이며 누구를 위한 등장입니까?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라, 정직히 살아라, 말씀대로 행하라 그렇게 하면 이 상급을 주겠다’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얼마나 그 분이 가진 사랑과 깊은 배려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여러분들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항복하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면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사건을 통해서 위인들을 통해서 또 목사를 통해서 서적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했습니까? 그런데 듣지 않으니까 매를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오리발입니다. ‘말로 합시다. 꼭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좋을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사실 하려고 했는데 때려서 안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수없이 참고 참았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상급을 걸어놓고 우리를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축복인줄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그렇습니다. 역사도 , 정치도, 문화도, 자연도 다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소유’라는 개념에서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다 나를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게 하기 위한, 성장을 위해서 오늘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향한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좋은 학군으로 가고 싶은 마음, 공부시키는 일에 있어서 물불을 안 가립니다. 영화 중에 ‘맹부삼천지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T.V로 보았는데요. 자식 서울대학 보내려고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 왔습니다. 서울에 산다고 서울대학 못 간다 강남가야 된다 그래서 강남으로 이사까지 하면서 자식을 오직 서울대학 보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영화화했는데, 자식 앞에 어떤 방해물이 있어도 그것을 다 제거하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잘 되었든 못되었든 부모들이 가지는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참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을 향한 사랑만큼은 대단합니다. 너무 대단해서 문제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집 하나 옮기는데도 ‘맹모삼천’의 교훈을 따르게 됩니다. 주변 환경은 어떤가? 어느 학교에 보내야 내 자식이 좀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인가? 우리가 사기를 쳐서까지 좋은 학군으로 옮기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시겠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어느 것이 영광이요 축복이요 감격이겠는가? 이것에 집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신 분이 우리를 향해 이런 축복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축복을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서 상급을 걸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리에까지 순종하여 성장해 오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경이 ‘상급’리라는 이름을 걸고 요구하는 ‘성장’입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권면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받은 이 축복을 아는 자마다 이 축복된 길을 권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초를 닦아놓고 다 되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제 그곳에 집을 지어야지요. 하나님의 영광된 삶을 살아가는 집을 짓기를 원하십니다. 상급을 걸어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오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몰라도 이 축복된 상급을 타가기위해서라도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말라기에 무엇이라 되어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축복을 하나 안하나 어디 한 번 십일조를 해 보아라 실험용으로 해 보라‘ 축복을 받기위해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성경이 노골적으로 이렇게 까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축복하나 안 하나 한번 해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는 안타까움은 우리가 잘 못될까봐 가지는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축복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열심과 사랑을 이것만큼 잘 표현한 것이 없습니다.
시편 8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 부르신 이 영광과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5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 ‘천사’라는 단어의 난외주를 보면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못하게라는 표현은 원래 영어의 ‘little'이라는 뜻입니다. 이 ‘little'은 긍정문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뉴앙스가 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없다’라는 뜻이지요. 결국 ‘저를 하나님보다 못할 것이 없게 만드셨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창조의 영광을 알아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어느 자리까지 축복을 하십니까? 어느 자리까지 영광으로 초대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자꾸 간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눈물로 하소연하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축복의 초대를 외면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도, 그처럼 비극 같은 일도 없습니다. 그것을 순종하는 신자가 누리는 축복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셔야 됩니다. 그 기적만큼 살맛이 나는 인생이 없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사도바울의 기록을 읽을 때 저는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가 자랑할 것도 없고 행복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기쁨을 선언하고 있고 감사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비밀과 신비함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비밀과 신비함이 우리의 신앙 속에서 하나하나 순종하며 실천하는 과정에서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천국 간 분의 장례식에 가서 통곡하는 것만큼 꼴불견을 없습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위해 울어야합니까? 생각해 보세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위해서 우는 것이 맞습니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이 맞습니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우는 것만큼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믿지 않고 죽으면 울어야지요. 땅을 치고 울어야합니다. 하지만 믿고 죽었으면 우리 신자입장에서는 드디어 제대한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안수 집사님들의 안수식을 할 때 ‘이제 여러분은 말뚝을 박으셨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군 생활할 때 가장 큰 욕이 ‘발뚝 박아라’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발뚝 박아라’ 그러면 그것만큼 칭찬의 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직장 구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니까 육군대위로 제대해서 하사관으로 지원해서 온답니다. 장교가 복무를 연장하려면 엄청나게 까다로워서 어지간하면 제대해야 된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고 죽으면 이 세상을 재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일등병쯤 되는 젊은이들을 향해 ‘잘 있게나.’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시무룩해 져야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이런 확신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제대하면 또 다른 세계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우리는 갈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있는 사실이고 이 사실 앞에 하늘나라에서 상급은 이 땅에서 쌓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려서 진급은 군에서 하듯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하기에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한 손에는 상급을 들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빨리 항복하시고 빨리 말씀으로 돌아오시고 빨리 순종하셔야합니다. 이런 삶이 지혜의 삶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사는 것은 하늘나라를 위해 그 나라에 상급을 쌓는 일입니다.
첫댓글 점심은 드셨나요? 저 오늘도 담아갑니다~^^*